어젯밤 그리스 아테네에서 날아와
터키 이스탄불 숙소인 그랜드 안카호텔에서 일행들과
작은 파티를 하고 늦게 잠들었는데
터키의 첫날 새벽 깜짝 놀래 잠에서 깨어 났다
후덥지근 날씨에 창문을 열고 잠을 자는데
새벽 5시...
가까이에 있는 이슬람 사원에서
경전을 읽는 스피커 소리가 너무 컷던 탓일까.....
터키에서 여행 첫 일정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는 일정으로 선착장에 도착하니
비가 제법 내린다
보스포러스 해협은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아시아와 유럽을 나는 경계선으로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에 영토를 가진 나라이다
유람선을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 관광을 시작하였는데
2011년 터키에 방문하여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람선에서 보았던
돌마바흐체 사원의 배경이 많이 변해 있는 모습이다
돌마바흐체 사원 뒤로
2011년 방문 당시에는 없던 건물들이 세워져 있어
5년 동안에 이스탄불의 모습이 많이 변했구나를 느끼며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터키 관광을 시작한다
돌마바흐체 사원 옆으로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습이 보인다
궁전의 소개는 보스포러스 해협 유람선 관광을 마치고
궁전에 방문할 예정으로 그때에 소개하려고 한다
흑해에 접한 나라들이 지중해로 나가려면 이해협을 통과해야 하는데
터키는 이로인해
많은 전쟁을 예부터 치뤘다고 한다
현재 이 보스포러스해협은
우리나라 서울 한가운데를 흐르는 한강처럼
터키의 이스탄불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데도
터키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며
세계 어느나라 배도 자유롭게 지날 수 있다고 한다
보스포러스 해협에는
아시아쪽 이스탄불과 유럽쪽 이스탄불을 잇는
현수교인 다리가 2개 있는데
1973년 건설된 이 1560m의 보스포러스(Bosporus) 대교와
1988년 일본 기술진에 의해 건설되어진
파티 술탄 메흐메트(Fatih Sultan Mehmet) 대교가 있다
19세기 술탄 압둘아지의 거처였던 시라간 궁전(Ciragan Palace)의 모습이다
지금은 오스만 투르크 왕궁 스타일의 5성급 호텔인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 호텔(Ciragan Palace Kempinski Hotel)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보스포러스 대교 밑으로
오르타콰이 사원이 위치하고 있다
이 사원의 이름은 오르타콰이 부두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856년에 아르메니아 출신의 건축가 발얀 부자에 의해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어진 사원이라고 한다
터키(Turkey)는
터키의 영토가 90%는 아시아권에 있고
10%는 유럽쪽에 있지만
EU에 가입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터키의 모든 차의 번호 판에서부터 흔적을 찾을수 있다고 한다
EU차량 번호판은 한쪽에
청색바탕에 별이 원형으로 EU에 가입된 국가 차량표시가 그려져 있는데
터키 차량에는 청색바탕 표시는 해 놓고 별만 없는데
EU에 가입한다면 별만 그려 넣으면 된다고 한다
또한, 터키(Turkey)는
1400년대부터 1923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
아프리카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이슬람권의 종주국이자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였으며
7500만 인구중 97%의 인구가 이슬람을 믿고 있는 국가이지만
국교가 이슬람에서
이제는 국제사회에 이슬람 국가임을 표방하지 못하도록
법까지 고쳤다고 한다
보스포러스 해협의 '키즈 쿠레시(Kiz Kulesi) 등대'가 보인다
키즈 쿠레시는 우리말로 하면 '처녀의 탑'이라고 한다
인공섬에 세워진 것으로서
1110년 비잔틴시대에 해양 감시탑으로 알렉시우스콤네누스 황제 세웠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시계탑으로 사용하였으며
1763년 때에 바로크 양식의 등대로 재건하여 보스포러스 해협을 지나가는
배들로부터 통행세를 받는 세관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탑꼭대기는 카페로 1층은 레스토랑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키즈 쿠레시(Kiz Kulesi)인 '처녀의 탑'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옛날 옛적에 이 곳을 다스리던 왕에게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인 공주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날 그 공주가 16세가 되기 전 독사에게 물려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어
왕은 많은 고민과 숙고 끝에 여기 바다 위에 탑을 세우고
공주를 숨겨 보호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왕은 공주가 16세가 되던 생일에 축하 과일 바구니를 보냈는데
과일 바구니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 있던 뱀이 나와
예언대로 공주를 물어 죽였다는 슬픈 전설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키즈 쿠레시 부근에서 배를 돌려
톱카프 궁전이 있는 언덕을 바라보며 유람선에 승선했던
선착장을 향해 돌아 간다
선착장에서
돌마바흐체 궁전(Domabahce Palace)으로 간다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은
조금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며 보았듯이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의
유럽 쪽 해안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궁전으로서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키는 오스만 투르크 함대의 정박지로서
원래 목조 건물이 있었으나
1814년 대화제 때에 소실되어 없어지고
오스만 제국의 제31대 술탄 압둘 마지드 1세(Sutan Abdulmejid I)가
톱카프 궁전(Topkapi Saray)이 너무 비좁고 시대에 뒤쳐진다고
새로 지을 것을 명하여
1843년 착공하여 1859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Versailles Palace)를 모델로
지어진 건축물로서
오스만 제국 후기시대 술탄(Sultan) 6명이 이 궁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궁전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하고 있어
궁전 내부의 화려함은 사진으로 담지 못하였는데
유럽 각 국에서 보내 온 수 많은 물건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의 규모는
술탄의 접견실인 홀은 56개의 기둥과 750개의 전등이 달린 4.5톤의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이 보내 주었다는 화려한 샹들리에로 장식되어 있으며
홀이 43개, 방이 285개, 발코니가 6개, 목욕탕이 6개나 있다고 한다
내부의 인테리어는 유럽에서 보내온 명화들과 화려한 크리스털로 장식되어 있어
매우 화려하다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은
제1차 세계대전 패배로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터키의 건국의 아버지로 존경받고 있는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바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1881~1938년)가
이 곳을 관저로 사용하다가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집무실에서 사망하여
그가 사용하던 집무실과 침실에 있는 시계는
9시 5분에 멈추어져 있다
골든혼은
보스포러스해협과 아르마라해협이 만나는 곳으로
이스탄불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경계에 있는 만이다.
이 아름다운 골든혼을 보기 위하여는
케이블카를 타고 피에르롯티 찻집이 있는
피욜르또 언덕 위로 올라야 한다
피에르롯티 사연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아름다운 골든혼과 적막한 공동묘지는
비가 내려 축축해진 이곳에....
한없이 그리운 연인 아지아데를 추억하는
피에르롯티 모습이 선하게 그려지는듯 하다
피에르롯티 찻집 에 대한 사연은
프랑스 해군 장교로서 이스탄불에 파견된 피에르롯티는
어느날 아지아데라는 여인을 알게 되었는데
이 여인은 이미 누군가와 결혼한 세 번째 부인 이었다
그러나 둘은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이 공동묘지에서 만나 데이트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피에르롯티는 이스탄불 파견 임기가 끝나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아지아데를 잊을수가 없어 프랑스에서 모든것을 정리하고
이스탄불로 다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는 아지아데는 이 세상에 없었다고 한다
피에르롯티가 프랑스로 간 후
그를 못잊어 하는 것을 가족들이 알게 되어
명예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 후 피에르롯티는 그녀와 데이트를 즐겼던
이 곳에 찻집을 내고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 사연인데
비가 내리는 분위기에서 들으니 가슴이 더 시려오는 듯 하다
피에르롯티 찻집에서 나와 포장마차 골목을 조금만 오르면
전원주택 마을이 나온다.
공동묘지가 있는 곳에서 또 하나의 삶의 터랄까?
케이블카를 타고 피욜르또 언덕을 올라와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 간다
케이블카가 다니는 길 밑은 공동묘지이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라는 지하궁전 입구 앞에 선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는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1: 재위 306~337년)가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옮겨 온 후 만들었는데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1: 재위 527~565년)가 증축하였다고 한다
특히 이 건축물이 유명한 것은
기둥에 다양한 문양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여러 곳의 신전에서 가져온 돌들을 사용하여
당시의 건축술로 최단 기간인 2년 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입구를 들어서 지하로 계단을 내려서면
코린트식 기둥이 336개가 지하 공간에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 모습이 굉장히 웅장하여
지하 궁전이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이스탄불 최대 규모의 지하 저수지로서 8만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다고 하며
이곳에서 19Km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 초원에서
발렌스 수도교를 거쳐 물을 끌어 온다고 한다
이 저수 시설은 일반 생활 용수로도 사용하였지만
전시 포위 공격에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 지하의 가장 안쪽에 있는
두 눈을 부릅뜬 '메두사의 머리'이다
'메두사의 머리'가 거꾸로 있고 옆으로 드러누워 있는 이유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빠른 공사기간에 여기저기서 가져온 부조물들을 사용하다 보니
기둥 높이가 맞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세웠다고 한다
메두사의 눈과 눈빛이 마주치면 돌이 된다는 전설이 있는데
'메두사의 머리'가 있는 기둥 앞에서 인증샷을 하고
밖으로 나온다
예레바탄 사라이(Yerebatan Sarayi)에서 나와
바라보는
성 소피아 성당이다
아야소피아의 성소피아 사원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교회는 역사상 매우 의미있는 교회 건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이곳을 방문하고 싶어한다
기독교가 부흥되었던 비잔틴 시대에는 국가의 중심교회로 사용되었고,
비잔틴이 무너질 때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역사상 가장 화려한 교회였던 성 소피아교회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한 지정학적인 운명으로 하여,
한 건물에 공유할 수 없는 두 종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천정에는 기독교의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이슬람의 칼리그라피가 걸려 있다.
성소피아의 원래 이름은 하기아 소피아(Hagia Sofia)이다.
터키사람들은 아야 소피아(Aya Sofia)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의미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이다.
성 소피아 교회는 두 번이나 붕괴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성스러운 곳으로 인식되어 왔던 고대 사람들의 사고를 고려할 때,
교회의 파괴는 천연재해가 아니라면 분명 정치적 대혼란이 있었음을 설명해 준다
첫 번째 세운 건물은 AD 390년에 지어졌다.
지붕이 목조로 된 바실리카(Basilica)양식의 이 건물이었던
이 교회는 4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두 번째 교회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역시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유스티니안 황제 때, 532년에 히포드롬에서 마차 경기 도중 일어난
니카 반란에 의해 파괴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같은 해에 성 소피아의 재건축을 시작했다.
현재 건물은 세 번째 지은 건물이다.
이 건축에 동원된 기술자는 100여명, 노동자는 만 명이 넘는다.
이 교회는 5년 10개월 간의 공사 끝에 537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가장 최고의 교회를 짓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건축 자재를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운반해왔다.
녹색 대리석 기둥은 고대의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베소의 아데미 성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앙 본관에 반암 기둥은 바알벡에서 가져왔다
교회의 개장식은 대단히 화려했으며, 황제가 내부의 화려함을 보았을 때
“오, 솔로몬이여! 내가 당신을 이겼소”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 당시 성 소피아는
황제 대관식, 또는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등의 중요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범죄자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많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성화 파괴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많은 모자이크와 프래스코들이 손실되었다.
또한 1204년에 일어난 제4차 십자군 전쟁때는 십자군들의 약탈의 대상이 된다.
그 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파티 술탄 마흐멧에 의해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정복하기 전까지
그리스 정교회가 916년동안 사용했다.
회교사원으로 바꾸어진 후 벽화들과 모자이크들은 회색 회칠이 더해졌다.
다행스럽게도 터키인들이 모자이크를 파내지 않고,
두께 5cm이상의 횟가루도 덮어버렸기 때문에
1934년에 케말 아타투루크(터키 초대 대통령)에 의해
박물관으로 바뀌고 나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자이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입구를 통해서 바깥복도를 지나 안 복도로 들어서면
중앙에 황제의 문이라 불리는 커다란 문이 보인다.
전설에 의하면
원래의 문은 노아의 방주에서 가져온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성 소피아 교회 중앙 홀로 들어서게 되면,
왜 세계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세계 4대 교회 건물에 들어가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이 말끔히 가시게 된다
본당 좌우에는 두개의 커다란 항아리가 있는데 버가모로 부터 가져온 것이다.
등잔으로 보이는 이 항아리에 밑에는 수도꼭지가 달려있다.
교회의 앞부분에 서서 천정을 쳐다보면 성모 마리아와
그 품에 앉고 있는 아기예수와 오른쪽으로 가브리엘 천사가 보일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진 모자이크이다
미랍을 보면 정 중앙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미랍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를 향하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모든 회교사원은 메카 방향을 향해서 지어져 있다.
그리고 왼쪽에 정자 같은 건축물이 있는데
이것은 왕이 예배를 보는 장소로 술탄 압둘 메지트가 지었다
2층 갤러리에 도착하게 되면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문이 있다.
그 문을 통과하여 오른쪽으로 커다란 모자이크를 만날 수 있다.
중앙에 예수님, 왼쪽에 성모 마리아, 오른 쪽에는 세례요한이다
이 모자이크의 맞은편에는 제4차 십자군 전쟁때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라틴 십자군의 사령관 단돌로의 무덤이 있다.
북쪽 방향의 본당 벽을 보면 요한 크리소스톰과 익나티우스 등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프래스코를 볼 수 있다
성 소피아 성당 앞에서 보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블루 모스크)이다
술탄아흐멧 사원은
1603~1617년까지 통치했던
오토만의 14번째 술탄인 아흐멧 1세에 의해 세워진 술탄아흐멧 사원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사원이다.
이 사원의 건축은 1609년 위대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였던
메흐멧 아아에 의해 시작되어 1616년에 완성되었다
현재의 사원이 있는 곳은 비잔틴 제국 시대부터 도시의 중심지였던
고대 히포드럼 자리이며, 현재는 아트 메이다느(말의 광장)으로 불리고 있다.
사원 복합 단지의 거대한 건물을 짓기 위해
초기의 비잔틴과 오토만 건축물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이들 중에는 비잔틴 왕궁, 히포드럼의 관중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곳이 특별히 사원 자리로 선택된 것은 톱카프 궁전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바깥 정원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모두 5개가 있는데 가장 중앙 문에는 체인이 걸려 있다.
체인이 걸려 있는 이유는
말을 타고 사원에 들어오는 술탄이
다른 사람들처럼 경건하게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 오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원이 ′블루모스크′로서 전세계에 알려진 이유는
사원 내부의 벽과 돔에 사용된 타일과 그림의 색들이
거의 푸른색과 녹색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술탄아흐멧 사원을 터키에서 6개의 첨탑이 있는 유일한 사원이다.
사원의 네 코너와 정원의 두 코너에 세워진 첨탑들은
모두 16개의 발코니를 가지고 있다
사원 첨탑에 관한 야사에 의하면
술탄 아흐멧 1세는 건축가 메흐멧 아아에게 첨탑을 황금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금의 터키어 발음(altin;알튼)은 숫자 여섯의 발음(alti;알트)과
비슷하기 때문에 메흐멧 아아는 이것을 잘 못 이해했고,
그래서 금 대신에 비용이 훨씬 적게 드는 6개의 첨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야소피아 성당을 관광후 가이드가 보잰다.....
오늘 점심시간 식당에서 술을 드시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유는 진실한 이슬람 식당이며 술마시는 것 걸리면 식당이 영업정지.....
식당에 들어서자 김치 No!를 종업원이 외친다.
현지식 식사로 빈대떡 같은것을 야채와 소스를 찍어 먹고 있는데
나이드신 일행이 소주를 꺼내 컵에 따른다.
종업원이 오더니 컵을 들어 냄세를 맡더니
"알콜 No!" 라고 못마시게 한다
오스만투르크의 톱카프궁전
톱카프 궁전(오스만 터키어: طوپقپو سرايى, 터키어: Topkapı Sarayı)은
15세기 중순부터 19세기 중순까지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군주가 거주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있는 반도,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 해, 금각만이 합류하는 지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 중이다.
총 면적은 70만 평이며, 벽 길이만도 5km나 된다.
톱카프 궁전은 유럽의 다른 궁전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전체 규모는 원래 크기보다 상당히 축소된 상태이다.
본래의 규모는 오늘날의 시르이곳의 케지 철도역과 귈하네 공원을 포함하면서
마르마라 해 방향의 아래쪽까지 분포했다
비록 구조적으로는 메흐메트 2세 때의 기본 설계를 간직하고 있지만
불규칙적으로 넓게 퍼져 있는 건축물의 집합한 형태라서
특별한 건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새롭게 술탄이 될 때마다 모두 필요에 의해서 궁전에 공을 들였고
대화재(大火災) 사건이 네 번이나 일어나면서
당시에는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건축적인 조화를 거의 보존하지 못했다
톱카프 궁전 단지는 비룬(외정)과 엔데룬(내정) 그리고 하렘 세 곳으로 나뉘어 있다.
제각각 안마당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는데
이 안마당을 연결하여 많은 문을 만들어 복잡하게 조성된 미로가 갖춰져 있다
궁전 입구 양쪽에 대포가 배치된 데 연유하여 톱카프 궁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톱’은 대포라는 뜻이고‘카프’는 문이라는 뜻이다.
톱카프 궁전은 19세기 마흐무트 2세 때까지
약 380여 년간 오스만 제국 군주의 정궁이었다.
1475~1478년에 지어진 톱카프 궁전은
1850년대까지 계속 증축되기도 하고 보수되기도 하였다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에서 보는
보스포루스 해협(Bosphorus Straits)이다
고대 원형경기장 히포드롬
전형적인 히포드롬은 언덕을 파헤쳐서 만들어졌으며
굴착된 흙은 반대측의 관중석을 지탱하기 위한 둑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관중석은 입구를 제외하고 U자형 경기장을 따라 계단식으로 층층이 되어 있었으며
트인 입구 한가운데에는 단순한 모양의 담장이 설치되어
경기장을 2부분으로 나누게 되어 있었다.
한번에 10대의 전차가 경주를 했기 때문에
경주로의 너비는 곳에 따라 122m에 이르렀고 그 길이는 약 183~213m가량이었다.
가장 큰 고대 히포드롬 경기장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것으로
이곳은 전차경기장으로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지시로 착공되어
330년에 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려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확장 완공시켰다.
10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니 상당히 큰 광장이었음에 분명하며
황제가 참관한 가운데
시민들은 전차경기와 검투사 경기 등을 관람하던 곳이라고 한다.
중앙분리대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기념비와 델피 신전에 있는 청동뱀 제단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에는 4개의 청동말 장식도 있었으나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원정 당시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현재 베네치아에 있는 산마르코 성당의 정면을 장식되어 있다
히포드롬 한 가운데 서 있는 오벨리스크 기념비 건축물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집트의 카르나크 아몬신전에서
이집트 투트모스 3세가 메소포타미아 전투(시리아 원정)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세운 오벨리스크(태양신 호로스를 섬기기 위한 표식)를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있는 이 기념비는 전체 26m인데 기단의 높이가 6m이고
기념비 자체의 높이는 19.8m정도인데. 원래 높이는 60m였고
총무게도 800톤정도라 운송이 어려워 윗부분(1/3 정도)만 가져와
세운 것이라고 했다.
실제 오벨리스크의 아래부분의 받침대에는
경마를 관전하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모습이 부조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또 하나의 오벨리스크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32m의 기념비이로, 예전엔 콘스탄티누스 7세가 보수하여
청동찬으로 덮여 아름다웠다는데
4차 십자군에 의해 파괴되어 지금은 이런 모양이 되었다.
여튼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에는 큰 뱀이 서로 엉켜있는 청동 기둥이 있는데..
이는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 중 하나라고 한다.
이 뱀기둥은
BC479년 그리스가 페르시아제국과 살라미스해전 및 플라미전투의 승전기념으로
전쟁때 압수한 페르시아군의 무기를 녹여서
그리스에 있는 델피의 아폴로신전에 바치기 위해 만든 것인데..
기둥을 감고 있는 세마리의 뱀은 단결을 의미한다고 했다.
원래 높이는 8m였고, 뱀기둥의 머리 위에는
직경 2m정도의 거대한 황금 트로피(황금 꽃병, 황금솥.. 확실한 것은 모름)가
있었는데 트로피는 이스탄불로 오기 전에 분실되었고
뱀 머리는 오스만 제국때 돌에 맞아 부서졌는데
성소피아 성당보수 공사때 발견되어
하나는 이스탄불 박물관에 또 하나는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하나는 행방불명 되었다고 한다
이 기둥의 아랫부분에는 전쟁에 참여한 31개 도시국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31개 도시국가의 단합내지는 동맹관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의 전차도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차와 같이 도로를 달리며
신호를 지키는 모습이 내눈에는 새롭게 보였다.
지하철로 하지않는 이유는 지진이 많은 나라라 그렇다고 한다
고대 원형경기장 히포드롬 광장(Hippodrome Square)에서 걸어서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를 향해 간다
그랜드 바자르(Grand Bazaar: 카팔르차르쉬)
외국인들이 이스탄불에 오면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이며
외국 수반의 국빈 방문시 영부인들도 어김없이 방문 과정을 거치는 곳이
5000여개의 상점이 몰려 있는‘그랜드바자르’이다.
‘카팔르차르쉬(Kapali Çarşi)’는 그랜드바자르의 터키어로 '지붕이 덮인 시장'이라는 뜻으로
동양 및 다른나라의 지붕이 있는 시장의 원조가 되었다.
중국에서 시작되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이기도한
이 곳은 오랫동안 동서양의 문물을 교환하는 장소가 되었다.
원래의 건물은 비잔틴 제국때 지어져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데
1461년에 크게 확장한 이후로 시장의 규모는 날로 커져 갔다.
바자르로 들어가는 입구는 18개가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누르오스마니에 게이트와 베야즈트 게이트이다.
누르오스마니에 게이트의 박공머리에는 의장용 무기와 책, 깃발이 새겨져 있고
카팔르차르쉬 1461년 이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다
그랜드바자르는 지금까지 12번의 강한 지진과 9번의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재난 때마다 복구되었는데 1894년 지진과 대화재 이후 가장크게 복구되었다.
이 바자르의 전체 면적은 30ha(약 93,000평 정도)의 넓이이며
80개 시장거리에 약 5,000여개 상점이 있고 15,000여명의 상인이 장사를 하고 있다.
시장 안에는
7개의 분수와 하나의 우물 그리고 커다란 사원 하나와 12개의 작은 사원이 있고
학교와 목욕탕도 있었는데 1894년 복구에서 철폐되었다.
오스만 제국때부터 이 시장은 환전소와 은행등 각종 경제 활동이 행해지던 곳이다.
오스만 제국에는 각종 향료나 섬유, 나무등을 파는 전문거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시장의 역할도 하였다.
19세기 초에는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도망나오는 사람들이 가지고 온
각종 골동품 등 왕실의 보물들을 이 시장에서 팔곤 했다.
또 유럽에서 들어온 각종 레이스 품목 및 고급천, 침대, 커버 등도
이 곳에서 거래가 이루어 졌다
그랜드바자르의 메인스트리트에는 즐비한 보석상이 제일 많이 눈에 뜨이는데
이는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금 장신구에 돈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도시 여인들은 보석이 박힌 금팔찌나 금반지를 선호하며
시골 여인들은 순금으로 된 귀걸이, 팔찌를 많이 착용한다.
터키 남자의 부의 척도는 그의 아내가 착용한 금팔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유있을 때 마다 금팔찌를 사모은다.
질 좋기로 유명한 터키 카펫은 가장 오래된 생산지가 콘야인데
13세기에 이미 카펫 제작소가 있었다.
요즘은 이스탄불 인근에 카펫공장이 많이 들어서
손으로 짠 수공예카펫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다.
카펫은 면, 양모, 실크등으로 만드는데 양모로 된 카펫을 선호하며
60년 이상된 수공예 카펫을 국외로 반출하는 것은 범죄행위이기 때문에
제작년도가 확실치 않을 때는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여야 한다.
비싸지도 않고 대중적인 카펫은 길게 짜두었다가
손님이 원하는 대로 잘라서 팔기도 한다.
문양의 나라 터키 접시에는 저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져 있다
터키인들의 대표적 기념품 나자르 본주(Nazar Boneugu)는
파란색 바탕으로 된 유리에 까만 눈이 그려진 일종의 부적인데
열쇠고리, 키홀더, 목걸이, 팔찌등 갖가지 형태로 다있다.
영어로는 데블 아이(Devil eye: 악마의 눈)라고도 하는데
가장 강력한 악마의 눈을 가두어 놓았기 때문에
주위의 악마들을 도망가게 하며 타인의 질투나 질시를 빨아들여
주위의 재난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모든 집의 들어가는 입구나 상점의 문 옆에는
어김없이 이것이 걸려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로 기념품 가게는
외국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기 때문에
바자르나 다른 어느곳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이라면
흥정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터키 상인은 가격을 말할 때는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고
깎아 달라고 하면 얼마에 사기를 원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나서 상인과 손님이 원하는 중간의 적정 가격이 형성되는데
손님이 너무 낮은 가격을 부르면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자르 안에는 점포도 많지만 여러가지 편의 시설들도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인터넷도 쓸수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카페도 군데군데 있으며 전화만 하면 차를 배달도 해주는데 남성이 배달을 한다
왜냐하면 식당이든 카페든 모든 서비스업 종사자는 다 남성이 하며
여성은 대부분 전문직 종사자다
간이 찻집에는 물담배를 피울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곳곳에 간이 음식점과 쇼핑하다 지친다리를 쉬어 갈 수 있는
의자들도 군데군데 마련되어 있다.
외국인이 많이 오는 곳이기 때문에 환전소도 군데군데 있느데 카드도 받는다.
그러나 상점마다 카드 단말기가 없는 경우가 많아
카드를 들고 점원 뒤를 따라 좁은 골목길 사이로 들어 가야할 경우도 있어
점원이 빨리 걷기 때문에 놓칠 염려도 있다
이 시장에서 무엇보다도 빼놓을수 없는 것은 흥정인데
터키의 상인들의 상술은 아주 특별하다.
그들은 터키식 차 한잔으로 장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모든 거래는 차로 시작하여 차로 끝나게 된다.
손님이 들어오면 일단 차부터 권하고 거래가 이루어 지면 또 차를 권한다.
들어와서 차 한잔하고 가라는 말로 손님을 부르는데
차를 얻어 먹고 물건을 사지 않고 나온다고 욕먹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랜드바자르 관광후 저녁식사를
한국인이 운영하는 서울정이라는 식당으로 걸어 이동하였는데
먼저온 관광객들의 식사로 식당안이 꽉차 있었다.
식사를 기다리며 길거리에서 리어커로 케밥을 파는 50대정도로 보이는 부부옆에 앉아 케밥을 1개를 주문했다.
가격을 물으니 남자는 손가락 5개를 펼친다.
터키어를 알아 들을수 없어 5 EURO를 보이니 아니라고 손을 흔든다.
그래서 동전으로 EURO와 터키Lirasi를 보이니 손에서 5리라를 가져간다.
EURO로는 2.5 EURO인데 부인은 계속 미소만 짓고 있었다
오늘은 트로이 관광 일정으로 이스탄불에서 버스로 5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기에 호텔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였다
유럽쪽에서 아시아 쪽으로 보스포러스해협의 다리를 건너
버스로만 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리를 건너지 않고
유럽쪽 대륙 남부에 있는 겔리블루항에서 배에 버스를 싫고
보스포러스해협(흑해쪽)과 연결된 다르다넬스해협(에게해쪽)에서
아시아쪽 랍세끼항으로 건너서 자낙칼레를 경유하여 트로이로 간다고 한다
버스가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차창 밖의
이스탄불 변두리 지역과 보스포러스해협으로
생각되는 지역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전봇대만 없었어도....
버스는 계속하여 터키의 유럽쪽 대륙 남쪽을 향해 달린다......
이곳 지명은 모르겠으나 그냥 멋있다는 생각만 든다
저멀리 바다가 보이는 동네 옆에도 유채꽃 밭.....
계속 이어지는 노오란 유채꽃 밭.....
한참을 달려도 유채꽃 밭이 계속된다
유채꽃 밭은
차안에서 여행의 피곤한 분위기를 산뜻하게 전환시키는 것 같다
교차로에서 방향을 튼다.. 이제는 바다가 안보이려나.....
푸른 초원 언덕에 서 있는 사원이 배경과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할까.....
무슨 밭인지 모르겠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다.....
산일까? 언덕일까?
유채꽃 밭이 낮은 구릉 위로 듬성듬성 보일 때쯤에
2시간 넘개 달렸을까? 어느휴게소에 버스가 잠시 정차하였다.
화장실을 가는데 2인이 1달러 라고 한다.
휴게소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출발할 생각을 안하여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버스가 고장나 고치는 중이라고....
지루함을 달래러 휴게소 파라솔에 앉아 홍차로 보이는것을 주문하니
터키티(Turkey Tea)라고 하면 갖다 준다고 한다. 가격은 한잔에 3리라
파라솔에 앉아 2시간 정도를 떠들다 보니 신차 버스가 왔다.
남아 있은 여행일정을 고려하니 고장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휴게소에서 출발하자
이제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시골 모습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금 향하고 있는 목적지는 '트로이 목마'로 유명한
신화가 있는 땅 '트로이(Troy)'를 향해 가는데
이스탄불(Istanbul)에서 가는 길은 육로로만 가는 길과
육로로 가다가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너 가는 길로 2개의 코스가 있다
이스탄불(Istanbul)에서 트로이(Troy)로 가는
육로 길은 돌아서 한참을 가기 때문에
단거리인 육로로 가다가 해협을 건너 가는 택하여 간다고 한다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s) 건너
아시아 대륙이 보인다
어쩜 저리 동화처럼 아름다운지......
저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신화가 많은 나라이므로 천사들.....?
휴게소에서 2시간 가까이 길을 달려 유럽쪽 항구인
겔리볼루항(Gelibolu Port)에 도착하여
항구 바로 옆 식당에서 늦은 점심부터 해결하러 간다
유럽 대륙에 있는 겔리볼루 항(Gelibolu Port)에서
다르다넬스해협(Dardanelles Straits)을 건너
아시아 대륙 쪽에 있는 항구인 랍세끼 항(Lapseki Port)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겔리볼루(Gelibolu)는
인구가 약 30,000명 정도 거주하는 도시로 터키 국토의 유럽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엄청난 피로 물들어진 전쟁터였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연합국은 이 해협을 통해 러시아가 있는 흑해로 물자 수송을 하려고 하였지만
오스만 제국이었던 터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동맹군 측에 합류하여
다르다넬스 해협(Dardanelles Straits)을 봉쇄함으로서
1915년 4월 25일 영연방의 연합군을 이끄는 처칠이 겔리볼루 상륙작전을 시작하였는데
8개월을 끌어오던 전투가
1916년 1월 훗날의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아나튀르크 장군이 이끄는 터키군에 패하여
40만 병력 중 25만 명의 병력을 잃고
대영제국 전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 기록을 남기고 철수하여
엄청난 붉은 피로 물들였던 현장이었다고 한다
저기 보이는 항구가 아시아쪽 항구 랍세끼항으로
드디어 아시아 땅에 입성.....
이스탐불에서 버스로 4시간을 달려
유럽쪽 항구 겔리블루항에서 점심식사을 하고
배로 아시아쪽 항구인 랍새끼항까지 40분정도 이동하여
다시 버스로 1시간 정도를 자낙칼레를 경유 트로이에 도착하였다
트로이(Troy)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 문화유산 이였지만
영화로 트로이 전쟁에서 본 웅장한 성곽을 연상하였는데
그것과는 다른 아주 조그마한 곳이어서 좀 실망하며 관광을 시작한다
트로이(Troy)는
이곳이 유명한 것은 기원전 3000년부터 로마시대 400년대까지
이곳에 9기에 걸쳐 지진, 화재, 전쟁등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사람이 거주하며 성벽을 쌓아온 반복된 흔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시대는 BC1240년경의 6기에 속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어드 오딧세이에 기술되어 있는 시대로 보는것 같다
19세기까지 트로이 역사는 실재가 아닌 전설속의 도시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세상 밖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독일의 사업가인 하인리히 슐리만에 의해 알려 졌다
그는 어릴때 아버지에게 들은 일리아드를
전설이 아닌 사실로 믿었던 인물이었다
무역으로 돈을 모은 그는 49세인 1871년에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에 나서
1873년 드디어 히사클록(지금의 트로이 유적자리) 언덕 아래서
황금목걸아, 항아리, 잔등을 발견해 실제로 도시임을 입증하였는데
고고학자가 아닌 그는 마구잡이 발굴로 트로이 유적을 붕괴시켰다는 평도 받는다
또한 발굴된 유적 9,000여점을 독일로 다 가져가 도굴꾼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반대적인 측면으로는 선사 고고학의 시조라고도 할수있다
'트로이 전쟁(Trojan War)의 전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와 제우스의 부인으로 최고의 여신인 헤라와
아름다움을 경쟁하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였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날
불화의 여신 에리스를 제외한 모든 신들이 초대받았다
에리스는 이에 화가 치밀어 하객들이 앉은 자리에 황금사과를 하나 던졌는데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씌여 있었다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는 제각기 그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우스는 이런 미묘한 문제에 판결을 내리기 원치 않아
여신들을 이네 산으로 보냈다
그곳에는 양치기 청년 파리스가 제우스의 양떼를 돌보고 있었는데
그에게 심판이 맡겨졌다
여신들은 각각 파리스 앞에 나타나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헤라는 그에게 권력과 부를,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영광과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얻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결국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편을 들어 그녀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
그래서 다른 두 여신은 그와 적이 되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보호 아래 그리스로 항해하여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메넬라오스 왕의 아내인 헬레네가
아프로디테가 파리스의 아내로 예정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헬레네 그녀에겐 결혼전 수많은 청혼자가 있어었다
그리고 그녀의 결단이 알려지기까지
그녀의 청혼자 중 하나인 오디세우스의 권유에 따라 청혼자들은
그녀를 박해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수호하고
필요한 경우엔 그녀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공약에 서약들을 하였었다
그녀가 메넬라오스를 선택하여 그와 함께 행복하게 살 무렵 파리스가 온 것으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설득하여 트로이로 데리고 가자
이로 인해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
메넬라오스는 그리스의 족장들에게 서약한 공약을 이행하여
자기의 처를 되찾아오는데 협력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 대부분은 이에 응해 출정을 약속했으나,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잘 지내고 있었으므로 이를 귀찮아했다
그래서 주저할 때 팔라메데스가 이타케에 도착하자 오디세우스는 미친 척했다
그러나 팔라메데스의 시험으로 들통나고 말았는데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니란 것이 증명되어, 그는 약속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에 참가하게 되자, 참전을 거부하는 다른 족장들
특히 아킬레우스를 참가시키는데 힘썼다
아킬레우스는 사건의 발단이 된 결혼식때
에리스의 사과가 떨어진 자리에 있던 여신 중 테티스의 아들이었다
바다의 님프인 테티스는 신의 위치에 있었다
아들이 전쟁에 참가하면 트로이 전방에서 죽을 운명이란 걸 안
테티스는 아들의 참전을 막으려 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킬레우스를 리코메데스 왕의 궁정으로 보내
여장시키고 왕의 딸들 사이에 몸을 숨겼다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가 은신해 있다는 말을 듣고
상인으로 변장해 궁정으로 가서는, 여자들의 장신구와
아킬레우스를 꾀기 위한 무기들을 내놓았는데
예상대로 왕의 딸들은 장신구에 열중했지만, 아킬레우스는 무기를 만졌다
그래서 그의 정체가 발각되었고
아킬레우스는 오디세우스의 끈질긴 설득에
어머니의 만류에도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헬레네를 유혹한 양치기 파리스는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이었다
파리스가 장차 국가의 화근이 되리라는 불길한 예언 때문에
남몰래 양육되었는데 이 예언이 마침내 실현되었다
왜냐면 그리스군은 전에 없었던 대규모의 군비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미케네 왕이며 피해를 입은 메넬라오스의 형인 아가멤논이
총지휘자로 선출되었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군 중 가장 유명한 무장이었으며
그 다음은 아이아스였는데, 그는 몸집이 크고 용감했으나 지혜가 모자랐고
디오메데스는 영웅다운 기질에서 아킬레우스 다음이었다
오디세우스는 지혜로운 용사
네스토르는 그리스군의 지휘자 중 최연장자로서 고문격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트로이도 결코 허술하지는 않았다
국왕 프리아모스는 늙었으나,
젊었을 때는 현명한 군주로서 안으로는 선정을 베풀고
밖으로는 이웃 여러 나라와 동맹을 맺어 국력을 증강시켰다
왕위를 이을 아들 헥토르 역시 고대 이교도 중 가장 고귀한 인물 중 하나였으며
헥토르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조국의 멸망을 예감했으나,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아모스 왕은 조국의 운명을 이처럼 위태롭게 한 아들
파리스의 부정행위를 정당시하지도 않았다
안드로마케와 결혼한 그는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도 훌륭했다
헥토르 이외 트로이 군의 중요 지휘자는
아이네이아스, 데이포보스, 글라우코스, 사르페돈 등이었다
2년에 걸쳐 전쟁준비를 갖춘 그리스군은
함대를 이끌고 보이오티아의 아울리스항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아가멤논의 실수로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숫사슴을 죽였는데
화가 난 여신은 복수로 군대 안에 악질을 퍼뜨리고
배를 항구에서 떠나지 못하게 바람을 잠재웠다
그러자 예언자 칼라스가 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숫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그 중 죄를 지은 자의 딸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어쩔 수 없이 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는 구실로 불러왔다
그런데 그녀가 희생되려는 순간 여신의 마음이 풀려
그 자리에 암사슴을 남겨놓고 그녀를 납치해갔으며
그리고 구름으로 몸을 가리고 타우리스로 데려가 자기 신전의 사제가 되게 하였다
이윽고 순풍이 불어 함대는 출범하였으며
그리고 군대를 트로이 해안으로 옮겨놓았는데
트로이군은
그리스 군대의 상륙을 막기 위해 일제히 진격했다
최초의 전투에서 프로테실라오스가 헥토르의 손에 전사하고 말았는데
프로테실라오스에겐 라오다메이아라는 매우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는
오직 세 시간 동안만 남편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신들에게 탄원하였으며
이것이 허용되어
헤르메스는 프로테실라오스를 이승으로 데려왔는데
그가 두 번째로 죽을 때 라오다메이아도 그와 더불어 죽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님프들이 그의 묘지 주위에 느릅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다고 하며
이 나무들은 트로이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자란 후 말라죽었는데
뿌리로부터 새로운 가지가 다시 나왔다고 한다
아가멤논(Agamemnon)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하여
10년동안 도시를 포위하였으며
그리스군의 아킬레스(Achilles)와 아약스(Ajax)
그리고 트로이 측의 헥토르(Hector) 와 패리스를 비롯하여
많은 영웅들이 전사한 후
그 도시는 트로이의 목마(Trojan Horse)'라는 오디세우스의 책략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일부 여자들과 아이들을 노예로 삼았으며
그 밖의 트로이인들을 학살하였고 신전을 훼손하였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금 그들은 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간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으며
흩어진 많은 그리스인들은 먼곳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훗날 로마인들은 그들의 조상으로 아이네아스(Aeneas)를 꼽았는데
그는 트로이 전쟁의 참전용사들 중 한명이며 살아 남은 그리스인들을 이끌고
오늘날의 이탈리아로 이주해 왔다고 한다
트로이 목마(Trojan Horse)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치기 위해 그리스 원정대를 이끌고 간다
전쟁은 10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트로이 성이 난공불락이서 성문을 뚫고 함락할 수가 없어
그리스군이 불시에 습격할 군사들이 들어 갈 수 있는
나무로 만든 커다란 목마를 만들어
밤중에 성 밖에 남겨놓고 철수하는척 위장하였다
트로이 사람들이 아침에 성밖을 쳐다보니 아무도 없는데
커다란 목마가 서 있어
트로이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놓자
그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쏟아져 나와 트로이 성문을 열어주어
그리스 군대는
트로이를 약탈하고 남자들을 학살하고 여자들을 데려갔다고 한다
이 설은 BC12세기~BC13세기 실제 일어난 전쟁으로
수세기 후에 기록되었고
어디 까지가 실제 역사적 사건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트로이 목마를 뒤로 하고
아이발릭(Ayvalik)를 향하여 출발한다
아이발릭(Ayvalik)에서는 관광일정이 없이
오늘의 숙소가
아이발릭에 정해져 있어서 가는 중이다
아이발릭(Ayvalik)은
에게해(Aegean Sea)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로서
인구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작은 도시라고 한다
아이발릭(Ayvalik)은
고대부터 비잔틴 시대까지는 그리스 영향력에 있다가
13세기 이후에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1923년 터키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리스인들을 추방하였는데
이곳에서 서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에게해(Aegean Sea)에는
그리스의 영토인 레스보스(Lesbos) 섬이 위치하고 있다
트로이를 관광후 3시간을 달려 아이발릭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하다.
오늘밤 묵을 호텔방을 배정받아 입실......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데 다른 방에 배정된 동행자들이 웅성 거리며 항의를 한다.
오늘 방안에 있는 가구에 페인트 칠을 하여 냄세가 심하다는 것이다.
한참을 항의한 후 다른 호텔을 수배하여 옮기게 되었는데
옮긴 호텔은 바로전의 호텔과 비교하여 수준급 호텔로 환타스틱......
아침 7시에
아이발릭(Ayvalik)의 그랜드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2시간 가까이 되어
이즈미르(Izmir) 시내 지나치고 있다
아이발릭(Ayvalik)을 출발한지 거의 3시간 만에 셀축(Selcuk)에 도착하자
에페소(Ephesus) 유적지로 가는 버스 창 밖으로
아야술룩 언덕(Ayasuluk Hill) 위에 셀축 성 모습이 위용있게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12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요한 교회 터가 보인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승천 후
이스라엘에서 박해를 피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와
여기 아야술룩 언덕(Ayasuluk Hill)에서 살면서
에페소스(Ephesos)에 복음을 전하고 마리아를 모시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Justinianus)가
이 곳을 기념하여 사도 요한 교회로 세웠으나
현재는 벽과 기둥만 교회 터에 남아 있다
사도 요한의 행적에 대하여 알아보면
44년 헤로데스 아그리파 1세의 박해를 피해 소아시아로 피신했으며,
그 곳의 일곱 교회, 즉 에페소, 스미르나, 베르가모,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및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지도했다.
95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요한은 군병들에게 붙잡혀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저술하다가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사면받아 에페소스로 귀환하여
요한 복음서와 요한 서신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그 때 그는 너무 노쇠하여 제대로 설교를 할 수 없어
항상 신도들에게 부축을 받았다고 한다.
요한은 항상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매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에 대해 신도들이 불평을 하자
요한은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게 된 것이라고 한다
서기 100년경에 90살의 나이에 사도들 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에페소스(Ephesos)
- 성경에 에베소로 알려진 에페소스(Ephesos)는
터키 서쪽 끝자락에 있는 고대 로마의 도시이다.
에게해는 물론 터키 전역을 통틀어 양과 규모에서 비할데 없는 최고의 유적지이다.
BC 200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발견 되었으며
고대로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에게해의 중심도시였다
BC 11세기경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을 점령한 이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기원전 7-6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다.
BC 5세기에는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부하장수인 리시마쿠스가
차례로 에페소스 주인이 되었다.
이처럼 에페소스는 주변 도시 혹은 국가, 스파르타, 페르시아, 페르가몬, 로마 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식민지화 되는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에페소스가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 황제(초대:BC27 ~ AD14) 때
소아시아(현 터키)에서 가장 중요한 무역항이 되었고
당시 500여개에 달하던 로마 소아시아 속주의 수도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전성기에는 인구가 25만명 이었다고 하니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도시였다
또한 에페소스(Ephesos)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바울이 전도와 사목을 한 교회중 하나가 에페소 교회였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개의 교회 중 하나가
에페소교회일 정도로 1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비중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아르테미스는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에페소인들에게 풍요와 생명의 여신으로 숭배받던 대상이어서
루가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할 때
은으로 만든 신전모형을 팔던 상인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사도 바울이 우상을 숭배하지 말자고 설교하여
사람들이 신전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리우스 목욕탕(Barius Bath)
에페소에 도착하여 남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유적으로서
귀족들의 전용구역에 있는 목욕탕이다
지금은 뼈대만 보이지만
당시에 냉탕, 온탕, 열탕, 사우나와 화장실까지 갖추었던 시설로
지하에서 증기를 순환시키는 방식의 최첨단 시설이었다고 한다
귀족들의 아고라(Upper Agora)라고한다
바리우스 목욕탕 앞에 있는 공터로서
정치적 모임이나 종교 행사가 열리던 장소였으며
1세기에 조성된 가로 160m, 폭 73m에 이르는 규모라고 한다
에페소(Ephesus)는
그칠줄 모르고 번영을 구가하였던 에페소스가 몰락을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자연이었다
7세기 무렵 강에서 유입되는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항구도시의 기능을 잃게 되자
도시는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야술룩 언덕(현 셀축:Selcuk)으로 도시가 옮겨지며
1000년에 달하는 고대도시의 영화가 막을 내렸다
유적지로서는 아르카디안 거리, 고대원형 대극장, 셀수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신전, 스콜라스티카 목욕탕, 도미티아누스 신전,
니케의 부조, 오데온 소극장등이 있다
오데온(Odeon) 소극장
- 2세기 귀족 베다우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부인 플라비아 파파아나가가 세운
1400명 정도를 수용할수 있는 소극장으로서
이곳에서 음악회와 시낭송회등이 개최되었으며
정치적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모든 시민이 참가하는 대규모 의회는
대극장에서 열렸고
이곳은 오데온 소극장에서는
비교적 소규모의 공연과 대표자 회의 가 치러졌다
에페소의 시청사(Town Hall) 있던 지역으로 수 많은 기둥들이 늘어서 있다
도시의 행정과 업무를 관할하던 지역이었으며
로마제국의 상징으로 숭배되던 '영원히 타오르는 불'과
수호신 아르테미스(Artemis)의 조각상을 모시던 신성한 장소로서
에페소의 심장부였다고 한다
여기의 양귀비 꽃 안에는 십자가가 있다고 하여
확인차 꽃을 뒤집어 보니....
도미티아누스 신전(Domitianus Temple)
- 제2의 네로라고도 불리는 도미티아누스 황제(11대:AD51~96년)에 바친 신전으로
황제는 철권을 휘두르며 기독교를 박해한 인물로 유명하며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 한명인 요한을 밧모섬으로 귀향을 보낸 황제이기도 한다.
가로50m, 세로100m 규모를 자랑 했으며 입구에는 7m 높이의 황제 동상이 있었는데
그 일부가 에페소스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후일 가신들에 의해 피살 당하였다
멤미우스 기념관(Memmius Monument)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때
로마의 종신 독재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이
소아시아를 평정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술라의 손자 멤미우스(Memmius)가 세웠다고 한다
폴리오 분수(Pollio Fountain)
에페소의 귀족 폴리오가 기원후 97년경 조성한 시설이라고 한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옆에 있으며
아치의 일부만 남아 있는 곳으로
상수도로 연결되어 신전과 병원 등에 물을 공급하던 곳이라 한다
니케의 부조(Statue of Nike)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인 니케는
로마 신화에 빅토리아에 해당하 며 영어로 나이키라고 읽는다.
승리의 여신 니케, 날개가 달렸으며 왼손에는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
오른손 에는 밀다발을 들고 있다.
니케는 올림픽에서 승리를 안겨주는 축복의 여신으 로 섬겨 졌다.
‘승리의 여신이 미소 짓는다’는 바로 그 여신으로
유명한 스 포츠 브랜드인 나이키(Nike)의 어원이기도 하다.
티탄 신족의 하나인 팔라스와
저승에 흐르는 강의 여신 스틱스(Styx)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질투 또는 경쟁심을 뜻하는 젤로스와 힘을 뜻하는 크라스트와 폭력을 뜻하는
비아와의 남매이다.
파르테논 신전에서는 아테나가 팔에 니케를 올려 놓은 모습을 볼수 있다.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에서
제우스 편에 선 탓에 종종 제우스 옆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크레테스 거리(Street of Curetes)이다
귀족의 전용구역과 신분에 상관없이 이용하는 공동 구역이 있는 거리이다
헤라클라스 문을 중심으로
위쪽 바리우스 목욕탕과 오데온 소극장이 있는 방향으로 귀족의 전용구역이고
셀수스 도서관이 있는 방향 쪽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물건을 사고팔기도 하며
사교를 즐기던 공동구역이라고 한다
한 마리의 뱀이 지팡이를 휘어 감는 모습의 아스클레피우스 지팡이로서
병원이라는 표시이다
당시에 이곳이 에페소의 병원이 있었던 자리인 것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 의술과 치료를 주관하는 신은
아폴론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로서
아스클레피우스 지팡이 조각상은
의학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스클레피우스를 상징한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미국공군의료기관(AFMS)등에서
아스클레피우스 지팡이를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스클레피루스 지팡이 조각상 길 맞은편에 있는 조각상으로
약품 조제기구 등을 조각해 놓아
약국이 있던 자리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헤라클레스 문(Gate of Heracles)은
귀족들의 전용구역과 공동구역을 가르는 경계로서
아무나 귀족들의 전용구역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표시로서
장사로 알려진 헤라클레스(Heracles)가 입구를 지킨다는 의미로
헤라클레스 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트라야누스 분수(Fountain of Trajanus)로서
트라야누스 황제가 통치하던 기원 후 102~104년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높이 12m에 2층으로 설계되었고
하수구와 연결되어 물이 흐르고 있던 시설로 추정된다고 한다
스콜라스티카 목욕탕(Scholastika Bath)
- 3층으로 된 목욕탕은 2세기 처음 지어졌으며
4세기에 스콜라스티카라는 여인 이 수백명을 수용할수 있는 규모로 증축했다.
중앙 난방과 냉.온탕 시설을 갖추 고 있었으며 개인탕도 있어 원하며
며칠동안 묵을수도 있으며 1층은 물을 끓이 던 보일러실이 있다
옛 상점가이며 주거지라고 한다
안쪽이 그리 깊지 않은 아치 집으로 그 시절 주거지이며 상가이다
당시에 상점들이 각각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Hadrianus Temple)
-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바친 것으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코린 트식 기둥과 아치 조각이 인상적이다.
정면 아치 위에는 행운의 여신 티게가
내부 아치에는 양팔을 벌린 메두사가 조각되어 있으며
벽에는 에페소스의 기 원 전설이 새겨져 있다.
전설은 안드로클로스가 신탁을 받았는데
내용은 물고기와 멧돼지가 있는 곳에 새로운 도시가 생겨 난다는것 이었다.
안드로크로스 가 에페소스에 도착해 식사를 하려고 물고기를 굽고 있을때
숲속에서 느닷없이 멧돼지가 나타나 신탁에 따라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에페소스의 기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셀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
- 에페소스의 상징이기도한 이 아름다운 건물은
2세기 중반 로마의 아시아 주 총독이었던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아들이 지은 건물이다.
정면에는 4명의 여인 석상이 있는데 이는 각각 지혜, 덕성, 학문, 지식을 상징 한다.
아쉽게도 석상은 모두 모조품이며 진품은 오스트리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당시 이곳에는 약 1만2천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고대원형극장으로 가는 길이다
고대원형 대극장(Theatre)
원래 BC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지은 것인데
1세기 로마시대에 증축되었다.
산의 경사면을 이용해 지어 졌으며 지름 154m, 높이 39m의 반원형 구조에
최대수용인원 2만4천명을 자랑하는 거대한 규모이다
이곳에서 연극과 문화예술이 공연되었는데
로마시대 말기에는 검투사와 맹수의 싸움도 벌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1년에 한번 특별 공연이 개최된다
아르카디안 거리(Arcadian Way)
- 이 거리는 고대항구로 연결시켜 주는 길이였는데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항구는 저절로 사라지고 이 길은 더 이상 쓸모없게 된것이다
항구에서 대극장까지 폭11m, 길이 500m의 큰길이 조성 되었는데
해상무역이 도시 존재의 기반이었 음을 말해준다.
전성기에는 이 거리에 가로등을 밝히기도 했는데
당시 가로등 시설이 있는 도 시는 알렉산드리아와 에페소스 단 두곳뿐 이었다.
도로 이름은 아르카디우스 황제(동로마1대: 377년~408년)의 이름에서 딴것이다
고대 원형 대극장에서 나와 아르카디안 거리를 걷는데
언덕에서 음악과 함께 로마시대 복장으로 사람들이 내려오더니 대기한다
무슨일 인가? 가까이 갔더니
로마군복장, 로마의원들 복장, 시녀들이 있는 곳에서
나팔수들이 나팔을 분다
뭔 말인지? 모르겠으나...
집정관인지 황제인지로 보이는 사람이 연설을 한다
언덕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춤을 추며
이곳에 다다른다..
언덕에서 내려 온 사람들 중 우두머리 격인 사람은 앞에 나가서 서고
나머지는 춤추듯이 돈다
시녀복장으로 춤을 추던 여자들이 가장자리로 모두 비켜선다..
그러더니 나팔수 앞 병사들 옆에 서있던 건장한 사람들이 나와
서로 칼을 겨루며 싸운다.
글래디에이터 재연극 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관람객들이 많이 몰려들어 사진을 찍기 좋은 위치로 옮겼는데
결투가 끝이 났다....
셀축(Selcuk)의 에페소 지명은
에페소스(Ephesus), 에페소스(Ephesos), 에페소(Efeso), 에페스(Efes) 등으로
자료에
여러 가지로 표기하고 있어 잠시 혼동하였다
에페소스의 쉬린제(Sirince) 마을은 와인으로 매우 유명한 마을인데
그곳에 가는데는
좁은 산길인 고개 길로 한참을 구불구불 올른다
쉬린제(Sirince) 마을로 구불구불 오르며 보는
에페스(Efes)가 있는 셀축(Selcuk)이다
쉬린제(Sirince) 마을의
이곳 주민들은 그리스인들이라 하며
그리스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터키인을 피해
이곳에 모여 살게된 곳이라고 한다
쉬린제(Sirince) 마을은 와인(Wine)이 유명한 것 같았다
예전 방문시에도 와인 시음 및 판매 매장이 휴식 장소였는데
같은 장소에서
시음 시간을 가진 후 자유시간이 주어졌으며
또한 쉬린제(Sirince) 마을은 외국 관광객들과 함께
터키 사람들도 승용차로 많이 오고 가는 복잡한 곳이었다
쉬린제(Sirince) 마을에서 와인 1세트인 3병을 구입하여
파묵칼레(Pamukkale)를 향해 출발한다
터키에서는 지금까지 주류를 파는 곳이 없어
터키 여행을 하며 동료들이 저녁에 모여 본 적이 없기에
여행 기간이 몇 일 더 남아있어 예비적으로 준비해 놓은 것이다
파묵칼레에는 양꼬치에 맥주 파는 곳이 있다고 하여
부푼 마음으로 가는 중이다
에페소(Ephesus)에서 파묵칼레(Pamukkale)로 가는 길에 있는
양가죽 자켓 패션 매장이다
이번이 두번째 들리는 매장으로 양가죽 자켓이 매우 저렴하게 팔리는 매장이다
패션 쇼도 하는데 즉석 모델로 참여하는 중이다
터키를 여행하면서 술한잔 할수 있는 음식점을 가이드에게
이스탄불에서부터 알려 달라고 했더니
이스탄불에서는 1시간이상 차를 타고 가야된다....
아이발락에서는 없다....
참! 술 한잔하기 어려운 나라다
파묵깔레에 가면 양꼬치집에서 술을 마실수 있다고하여
도착하자마자 호텔에서 저녁도 안먹고 찾아 나섰다.
이 지역에서 양꼬치와 술을 마실수 있는 음식점이 2곳이 있다고 하는데.....
걷다 보니 Y형 도로 가운데 코너에 있는 아스란(ASLAN)이라는 음식점.....
이 음식점 입구에 한글로 양꼬치라고 적혀 있어 주문이 쉬웠다.
맥주는 비라(Bira), 양꼬치는 피르쫄라(Pirzola)라 한다
양꼬치 집앞 삼거리에 있는 카라하이트(Karahayit) 이다
우리가 하루를 묵었던 호텔인데
터키에서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은 이 정도는 훌륭하다고...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란
도시의 이름은 신전 또는 성소란 뜻의 그리스어 히에라(Hiera)와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Polis)의 복합어로‘신성한 도시’란 뜻을 내포하고 있지만
페르가몬 왕조의 시조인 텔레포스의 부인 이름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도시가 세워질때부터 온천이 있었고
뜨거운 증기와 가스가 땅속에서 스며 나오기에 성스러운 곳으로 여겨져
도시의 이름을‘히에라폴리스’라 지었다는 설과
헬레니즘 시대엔 도시의 이름을 지을 때
왕의 이름이나 가족들의 이름을 따서 짓는 전통이 있었기에
페르가몬의 왕 에우메네스 2세(EumenesⅡ)가 이 도시를 세우고
페르가몬 왕조 시조 부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설 두가지가 있다
또한 예수님의 12제자중 한 분인 빌립이 전도하던 중
이 곳(성경에는 히에라볼리로 번역)에서
AD 80년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팔매를 당해 순교하였는데
AD 5세기경 그가 죽은 자리에 거대한 순교한 교회 유적이 히에라폴리스 언덕에 있다
지진대에 속한 터키는 아프리카 암판과 아라비아 암판이 북쪽으로 밀면서
유라시아 암판과 충돌할 때 마다 터키의 동서를 가로 지르는 단층대를 따라
큰 지각운동이 일어나면서 강도 높은 지진이 빈번히 발생하는 곳이다.
가장 근래의 예로
1999년 8월에 이스탄불에서 가까운 이즈미트에 진도 7.6의 강진이 일어나
1만7천여명이 사망하고 44,0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히에라폴리스 역시 지각이 불안정한 단층대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를 살펴 볼 때
이 지역에 모두 4번의 큰 지진이 있었다.
특히 황제 티베리우스의 집권 기간이었던 AD 17년과
네로 황제의 집권 기간이었던 AD 60년에 강진이 발생하여 도시가 크게 파괴 되었다.
네로 황제는 히에라폴리스의 재건을 후원하였는데
오늘날 볼수있는 히에라폴리스의 로마시대 유적들은 모두 이 당시에 세워진 것들이다
이 시대 그리스 문화가 들어오면서
프리지아(Phrygia) 아들의 토착신이었던
태양의 신 라이르베누스(Lairbenus)는 그리스의 태양의 신 아폴론 신으로,
아나톨리아의 모시(母神)인 키벨레(Cybele)는 아폴론의 어머니 레토로 바뀌었다.
히에라폴리스엔 아폴론 신전의 폐허가 남아 있는데
아폴론 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의 신이자 궁술, 예언 및 음악과 시를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지만
또한 의술을 주관하는 신이기도 하기에
히에라폴리스 온천의 병치료 효과는 의술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아폴론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서는 의술과 치료를 주관하는 신은
아폴론의 아들인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이다.
의학의 신으로 추앙받는 아스클레피우스의 상징은
한 마리의 뱀이 지팡이를 휘어 감는 모습으로 이를 아스클레피우스 지팡이라 하며
세계보건기구(WHO)나 미국공군의료기관(AFMS)등에선
아스클레피우스 지팡이를 상징으로 사용하지만
대한의사협회나 미육군 군의관을 비롯하여 상당히 많은 의학계나 의료 단체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 신이 들고 나오는
카두세우스 지팡이를 사용하고 있다.
카두세우스 지팡이는 두 마리 뱀이 지팡이에 감겨 있고
지팡이 꼭대기에 두날개가 있는 모습이다.
이는 대한의사협회에서 많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아스클레피우스에 관련된 또 한가지 여담은
그의 딸 히기에이아(Hygieia)에 대한 것으로
아버지를 보조하여 간호원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가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신인데 반해
히기에이아는 병의 예방, 보건의 중요성을 강조한 여신으로서
오늘날 위생을 뜻하는 하이진(Hygiene)의 어원이 되었다
파묵깔레의 목화의 성은
물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가 방출되면서 온천수에 녹아 있던 탄산칼슘이 침전되어
형성된 석회암을 Travertine이라고 하는데
석회화된 암석이 층층이 계단 모양으로 형성된 지형을 Travertine terrace,
즉 석회화 단구라고 부른다
이곳은 수천, 수만년에 걸쳐 형성된
석회화 단구가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다
2011년도에 방문하였을 때는
하얗고 깨끗한 석회화 단구에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연한 푸르스름한 코발트 색으로 보여
환상적으로 보였는데
석회화 단구에는 물은 다 말라 있고
먼지만 지저분하게 쌓여있어
2011년도 비교하여 많이 실망하게 하였다
파묵칼레에서 지난 여행과 같이 온천수가 흐르는 곳에서
발을 담구고 잠시 피로를 푸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따뜻한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히에라폴리스는
고대로부터 온천을 이용한 병의 치료와 휴양지로 알려지면서
헬레니즘 시대의 페르가몬 왕조를 거쳐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게 번성하였다고 한다
히에라폴리스의 유적지 한가운데엔
쏟아져 나오는 온천물을 이용한 야외 수영장이 있어
관광객들이 온천욕을 하며 휴식을 취할수 있는데
수영장 바닥엔 무너진 건물의 기둥이 흩어져 있다
이 수영장 옆에 아폴론 신전이 위치하고 있어 신전 일부의 잔해로 추측된다
온천수 성분을 적어 놓은 표지판을 보면
pH6.67의 약산성, 수온은 섭씨 35.2도, 칼슘,마그네슘, 황산염, 탄산수소염이 많고
라돈도 약간 포함되어 있어
심장질환이나 고혈압, 변비, 만성 기관지염, 신경통 치료등에 효염이 있다고
설명되어 있다
히에라폴리스엔 병치료를 목적으로 노약자, 병자들이 많이 몰려 왔으니
그만큼 죽어 나가는 숫자도 많았다.
그래서 히에라폴리스 옆에는 네크로폴리스가 자리잡고 있다
네크로(Necro)가 죽은 사람이란 뜻이니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 하면 죽은 자의 도시,
즉 공동묘지란 뜻이다
로마 유적지 중에서 제일 큰 Necropolis가
터키 파묵칼레의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것이라 하며
2Km에 달하는 거리에
지진과 도굴로 많이 파손되었지만
1,200여개의 석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우리 조상 묘처럼 생긴것도 있는데
이런 형태 무덤을 투무루스(Tumulus)라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대에 지어진 무덤이다
네크로폴리스에서 히에라폴리스로 다시 걸어가며
먼 산의 눈 쌓인 설산을 바라 본다
다음 행선지인 안탈리아(Antalya)로 가려면
저 설산이 보이는 산맥을 넘어가야 한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은
AD 2세기 중반에 지어진 반원형 극장이 있으며
도시 곳곳에 수로를 만들어 물을 공급한 흔적이 남아 있다
파묵깔레 히에라폴리스 관광을 마치고
안탈라로 출발하기 전 들린 곳이
히에라폴리스 바로 밑에 있는 의류, 수건, 침구류등을 파는 면세점인데
상호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수 있는 이브자리(Evezary)라 한다
의류가 싸고 디자인이 좋은 몇 점이 눈에 띠었다
파묵깔레 관광 후
눈 녹지 않은 산이 보이는 산맥을 넘어
안탈리아(Antalya)로
5시간 정도 이동을 시작한다
터키(Turkey)에 대하여 알아보면
국토 면적은 785,347㎢로
우리 남북한을 합친 국토 면적의 3.5배가 넘는 국토를 가진 국가이다
인구는
8300만 정도가 거주하고 있고
민족 구성으로는 터키인 80%, 쿠르드인 20% 정도가 혼재되어 살고 있다고 하며
언어는
터키어를 90%, 쿠르드어를 7%, 아랍어를 1% 정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종교는 터키 인구의 98% 정도가
이슬람교를 믿고 있는데 수니파에 속한다
터키(Turkey)의
국가 GDP는 7,437억 800만 달러(세계 19위)이며
1인당 GDP는 8,958달러(세계 72위)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가GDP 1조6295억 달러(세계12위), 1인당 GDP 31,431달러(세계28위) 2019년>
안탈라로 가던 낮 1시경 식사를 하는 음식점에 들어 갔는데
의자에 앉기도 전부터
주인 인듯한 여자가 김치 No!를 외치고 다닌다.....
식사는 현지 부페식 !!!
이 산을 넘어 내려가는 길,
버스 앞쪽에 앉은 사람들의 엄청난 비명소리에 졸다가 놀라 눈을 뜬다.
동시에 차의 한쪽 바퀴가 아스팔트에서 비포장을 달리며 버스가 흔들리며 떤다.
길은 상당한 내리막 길이며 한쪽은 엄청난 낭떨어지 였는데...
운전기사는 순간적으로 핸들을 바로 잡아 정상적인 도로로 들어온다.
그때야 차안은 안도의 웅성거림으로.....
운전기사가 졸음 운전 한것으로 알고 '쉬었다 가자'고 차를 세우게 했는데
졸음운전이 아니라
앞질러 가던 승용차에서 돌맹이가 날라와 피한다는게 그만.....
새차인데....
버스 오른쪽 전조등이 돌맹이에 맞아 금이가 깨져있다
안탈리아는
터키남쪽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휴양도시이며 항구도시로서
BC 2세기경 페르가문 왕국시대에 건설되어 안탈리아라 불렀으며
그뒤 로마에 항복하여 135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지방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후 비잔틴, 몽골, 베네치아, 제노바등에 지배 당했으며
15세기에 투르크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안탈라는 지중해로 나가는 출구를 확보하기 위한 요충지로서
한때 해적들의 천국으로 오랬동안 지속되기도 하였다
안탈라에 도착하면 처음 만나는 건축물이 안탈라의 상징 이블리미나렛이다
유람선을 타는 부둣가로 내려 가기전 이블리미나렛이 잘보이는 곳에서
그 배경으로 먼저....
저기 보이는 카페에서
저녁때 호텔을 나와 맥주를 곁들어
지중해의 밤을 즐기기도 했다
시계탑이 있는 줌후리예트 거리에서는
이블리모스크(Yivli Mospue)의 이블리미나렛(Yivli Minaret)이라고 하는
모스크 옆에 세워진 기둥이 보이는데 실제로는 가까이 가면
그 높이가 너무 높아 밑둥의 둥근 기둥만 보이게 된다.
안탈라에서 가장 오래된 셀주크왕조의 유적으로
38m에 이르는 높이 때문에 시내 어디에서도 볼수 있는 안탈라의 랜드마크이다.
밑 기둥은 사각형태이지만 위로 올라 갈수록 둥근 홈을 만들고 굴곡을 주어
미적인 측면으로도 뛰어나다.
건물의 북쪽에는 미나렛으로 오르는 90개의 계단이 있다.
미나렛의 앞 쪽으로는 향신료와 기념품 등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모여 있는 건물이 있고
뒤쪽으로는 이블리모스크(Yivil Mospue)가 자리하고 있다
지중해의 안탈리아 해안에서
유람선을 타기 위하여 선착장으로 내려 온다
유람선 관광은 옵션으로서 1인 30EURO로
10명 이상이어야 한다고 한다
유람선을 타고 출발하자
언덕 위로 카라알리오을루 공원(Karaalioglu Park)에 있는
흐드를륵 탑(Hidrilik Tower)이 눈에 들어 온다
안탈리아(Antalya)는
BC 2세기에 페르가몬(Pergamon)의 아탈로스 2세(Attalos 2)가
세운 항구에서 비롯되었으며
아탈로스 3세(Attalos 3)가 로마(Roma) 제국에 넘겨주었다고 한다
안탈리아(Antalya)는
또한 사도 바울(Paul)이 첫 번째 선교 여행 때에 바나바(Barnabas)와 함께
현재 터키의 중부에 위치한
안디옥(Antioch of Pisidia)으로 가기 위해서
구브로(Cyprus)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거쳐간 곳이라고 한다
안탈리아(Antalya)는
중세 시대에는 비잔틴 제국의 요새로서
십자군 원정 때 이스라엘로 출발하는 십자군의 주요 승선지 였다고 하며
1207년 셀주크 투르크(Seljuk Trukish)의 통치자
카이 쿠스라프에게 점령되어
가장 중요한 도시 겸 항구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폭포수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토르스 산맥(Toros Daglari)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길이 12Km의 짧은 듀덴 강(Dyuden River)을 흐르다
세차게 쏟아지는 높이 20m의 듀덴 폭포(Dyuden Waterfalls)이다
유람선은 이 듀덴폭포까지 와서 회항한다
듀덴 폭포(Dyuden Waterfalls)에서 회항한 유람선은
우리가 유람선에 탑승하였던 선착장으로 되돌아 온다
안탈리아(Antalya)의
카라알리오울루 공원(Karaalioglu Park)에서 보는 지중해이다
이 공원의 길옆으로 파라솔이 많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맥주 한잔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도....
카라알리오울루 공원(Karaalioglu Park)은
지중해가 내려다보이고
안탈리아(Antalya)를 감싸고 있는 멋진 산을 전망하기 좋은
멋진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1세기에 만들어져 등대로 사용되었던
흐드를륵 탑(Hidrilik Tower)가 있으며
옆에는 대포도 놓여져 있다
안탈리아(Antalya)의 구시가지인 칼레이치(Kaleici)이다
이 좁은 골목골목에는
카페, 레스토랑, 기념품, 의류 등 많은 상점들이 있으며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AD 129년에 로마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가
이곳 방문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하드리안 개선문이다.
3개의 아치와 4개의 고린도양식의 기둥으로 세워졌는데
높이가 약 13m로 3개의 출입구가 있었는 데 지금은 2개만 복원되었다
이 호텔 앞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면서
에페소 쉬린지마을서 사온 와인이 박스 손잡이가 찌져지며
산산조각....
카파도키아까지는 콘야를 거쳐 9시간정도를 간다고 하여
호텔에서 아침 6시에 출발.
안탈라에서 콘야까지 5시간 30분,
콘야에서 카파도키아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지중해쪽에서 눈 녹지 않은 산맥을 넘어 내륙지방으로.....
농촌 마을이 척박해 보인다.
저곳 사람들은 주로 무얼하여 생활을 할까?
이곳의 고도가 높긴 높은것 같다.
눈 녹지 않은 산 위에는 나무들도 살지 못하는....
현재 달리고 있는 이 길은
타우러스 산맥(Taurus Mountains)라고도 하는
토로스 산맥(터키어 Toros Daglari)을 넘어 가고 있는 길이다
토로스 산맥(Mountains Toros)은
터키 남부에 있는 에그리디르 호(Egirdir Lake)에서 시작해서
지중해와 평행을 이루며
동쪽으로 뻗어나가 유프라테스 강(Euphrates River) 상류 유역까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다고 한다
나무가 자라지 않은 산 위쪽은 아직도 눈이 녹지 않은 모습으로
높이가 3000m에서 3700m 산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타우르스 산맥(Taurus Mountains)에서 가장 높은 산은
카이세리(Kayseri)주 카마르디(Camardi) 지역에 있는
데미르카즈크 산(MT. Demirkazik: 3756m)이라고 한다
몇 시간을 달려 왔을까?
산악 지형의 어느 휴게소 잠시 정차하였는데
도로가 한산하다
타우러스 산맥(Taurus Mountains)의
타우러스(Taurus)의 뜻은 '황소 자리'라는 뜻으로서
이쪽 서부 타우러스 산맥에서 최고봉은
안탈리아(Antalya) 서쪽에 있는
키즐라시브리시 산(Mt. Kizlar Sivrisi: 3086m)라고 한다
산맥을 다 넘어온것 같다.
평온하게 보이는 시골마을의 이곳의 고도가 약1500m정도라 한다
이곳부터 카파도키아까지 이 정도 높이의 평지를 계속하여 달린것 같다
한참을 달려가도 멀리 눈 쌓인 토로스 산맥(Toros Mountains)이 보이며
마을 풍경과 어우러지니 아름다운 그림처럼 보인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코니아(Konya) 부근이 아닌가 한다.
이 식당 앞에는 이슬람 의식인 세마춤 동상 있다
코니아(Konya)는
아나톨리아 고원(Anatolia Plateau)의 해발고도 1,027m 위치에 있는 도시로
인구 약 110만 정도가 거주하는
터키에서 7번째 인구가 많은 큰 도시라고 하며
코니아 주의 주도로서
룸 술탄국(Sultanate of Rum:1078~1308) 시대에 수도 였다고 한다
당시에 룸 술탄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으며
처음의 수도는 이스탄불 근처에 있는 니케아(Nicaea, 현 니즈니크 Iznik)였는데
1097년 제1차 십자군 전쟁 때 함락 당하여
룸 술탄국 수도를 이곳 코니아(Konya)로 옮겨 왔다고 한다
또한 코니아(Konya)는
이슬람 종파 중
신비주의 종파로 유명한 메블라나(Mevlana) 종파의 중심지라고 한다
메블라나 종파는
메블라나 젤랄렛딘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가 창시하였는데
1207년 아프가니스탄 벨크에서 태어나서
코니아로 이주해 와 시인이자 철학자로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는 메블라나 종파를 창시하여
이슬람 의식을 토착적인 음악과 노래와 춤을 통해
우주와 일체를 이루는 명상 춤인 '세마(Sema)'를 처음 만들어 전파하였다
세마 춤을 추는 사람을 세마젠(Semazen)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춤을 출 때에 고개를 23.5도의 지구 자전축만큼 옆으로 기울이고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땅을 향하게 하고서
지구 회전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해서 회전하며 기도하는 것으로서
알라 신과의 영적 교류 의식이라고 한다
점심을 먹고 카파도키아로 가던 중 조그마한 기념품점 앞에 차를 세웠다.
기념품점은 각종 기념이 될 만한 액서서리 및 음료를 파는데
위에 보이는 사진은 기념품점 앞에 있는 이름 모를 성이다
기념품점을 나와 카파도키아로 달려 가던 중 눈 덮인 설산이 나온다.
가이드는 3500m의 핫산산 이라 한다
카파도키아에 거의 도착해 가며 카파도키아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다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는 터키 중앙의 고원지대를 말한다.
기원전 6세기께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때에 생긴 작은 왕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말을 키우던 '말의 땅'이란 뜻을 갖고 있다.
카파도키아의 유명세는 경이로운 자연에서 나온다.
버섯 모양의 바위기둥 계곡과 거대한 지하도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위기둥은 원추형이다. 위로 갈수록 적당하게 가늘어진다.
바위기둥 머리에 삿갓 모양의 현무암 덩어리가 얹혀져 있다.
잘 생긴 버섯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이곳에서는 바위기둥을 '요정의 굴뚝'이라고 부른다.
과연 만화영화 '개구쟁이 스머프'에 나오는 집 모양과 똑같다.
바위기둥 지형은 화산과 빗물 바람에 의해 형성됐다고 한다.
카파도키아 일대는 화산지대였다.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제일 높은 에르지예스산과 핫산산이
폭발해 화산재가 쌓였다.
화산재는 응회암으로 굳었고,그 위에 용암이 흘렀다.
다음은 빗물과 바람 차례.스며든 빗물에 바위층의 부드러운 부분이 씻겨 내려갔다.
바람은 흙부스러기를 날려보내며 마무리 작업을 했다
카파도키아는 단순한 자연관광지는 아니다.
성지순례 코스의 주요 목적지이기도 하다.
괴뢰메 야외박물관에 암굴교회가 있다.
카파도키아에는 200여개의 암굴교회가 있는데 이 중 10개가 괴뢰메에 있다.
로마시대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기독교인들의 신앙공간이라고 한다.
여러 암굴교회의 벽과 천장에 성화가 그려져 있다.
예수의 행적이나 성경의 내용을 옮긴 것들이다.
토칼르교회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비잔틴시대 벽화를 제외하면 많이 훼손됐다
지중해의 휴양도시 안탈라에서
아침6시부터 하루종일 달려 오후4시경 터키 내륙지방 한가운데인
카파도키아지역 데린구유에 힘들게 도착하였다.
오늘 일정은 데린구유 관광이 끝이란다
지하도시 데린구유로 들어 가는 입구 옆에 있는 성당이다
카파도키아는 거대한 지하도시 데린구유로도 주목받는다.
파도키아 일대에는 여러개의 지하도시가 있다.
데린구유의 지하도시가 잘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작은 구멍으로 사라진 닭을 찾으려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누가 살았는지? 무슨 용도로 쓰였는지?를 알수 있는 기록은 전무하다.
고대 전쟁 때의 피란처,초기 기독교도들의 은신처 정도로 알려져 있다
데린구유 지하도시는 20층 규모다.
관광객은 지하 55m인 8층까지만 내려갈 수 있다.
지하도시 내부는 개미집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통로는 좁고 낮다.
겨우 한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다.
층마다 방 부엌 창고 가축우리로 쓰였을 공간이 따로 있다.
예배당으로 보이는 십자 형태의 공간도 있다.
방과 방을 잇는 통로 끝에는 연자방아 모양의 커다란 돌이 세워져 있다.
적이 침입했을때 더이상의 진입을 막기 위한 장치다.
돌을 옆으로 굴리면 통로가 꽉 막힌다고 한다
방과 방 사이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의사 소통을 위한 것이다.
고기를 굽는 연기는 흔적 없이 빠져나가고 신선한 공기는 빨아들이는 통풍구도 있다
식수를 위해 우물도 파두었다.
긴급 시 다른 지하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비밀통로도 9㎞나 이어져 있다고 한다.
완벽한 지하도시다.
요즘 기술로 똑같이 만들 수 있을까.
공기조절장치 등 첨단 기술을 빌리지 않는다면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층을 내려갈수록 짙어진다
밤 9시에 옵션관광으로 60EURO인 밸리댄스 공연장에 갔다.
춤 공연을 보면서 맥주와 음료수는 무한리필.....
세마춤을 출때는 엄숙하게....
세마춤을 출때는 후레쉬 터트리는 사진촬영은 금지...
빙글빙글 회전하며 신과 소통하는 춤으로
정신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라 한다
중간 중간 공연자와 관광객이 같이 춤을 즐기는 시간도 갖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계속 되었다
수많은 비둘기집 골짜기 우치히사르
카파도키아에서 가장 높다는 우치히사르(Uchisar)는
해발 1,300m에 있는 세 개의 요새로
비둘기가 많아‘비둘기요새’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우치히사르(Uchisar)라는 뜻은‘뾰쪽한 바위’라는 뜻이며
한 개의 바위로 된 바위산이 중심을 이루며
구멍이 숭숭 뚫린 기암괴석은 그 자체로도 멋있지만
이곳이 진짜 유명한 이유는 바위산 내부로 올라가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괴뢰메 마을의 파노라마절경을 볼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아래까지만 간다고 한다..
이 바위 표면에서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비둘기 집을 볼수 있다.
비둘기는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이나 기독교 인들에게는 귀한 손님이었다.
비둘기 알은 성화를 그리는 재료인 염료로 사용하여
석굴 예배당의 성화를 채색하였으며,
비둘기 똥을 모아 화산성으로 메말라 있는 토지의 포도밭 비료로 사용하였다.
최근에는 성채에서 지하 100m 이르는 곳에 위치한 비밀터널이 발견되었는데
이 곳은 전시에 대비하여 물을 공급 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치히사르 맞은편 계곡이다
피라밋 형태 집과 교회의 괴뢰메 계곡
터키 카파도키아(베드로전서 1:1~2)의 괴뢰메 계곡!
괴뢰메는 자그마한 마을이다.
마을 외곽 2km에 있는 괴뢰메 계곡에 괴뢰메 야외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석굴교회들이 있다.
괴뢰메는 역사적으로 동굴거주지와 더불어 동굴교회
그리고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로는 수도원들로 유명한 곳이며
고고학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 수도원들이 만들어진 것은
주후 4세기경 가이사랴의 대주교였던 "바실"에 의한 것으로
아덴(아테네)이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도시보다 자연에 묻힌 이런 곳
특히 괴뢰메 같은곳이 좋다고 여겨 처음 이곳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그 후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육체적, 영적 도움을 구하고자 하는
순례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바클 교회(Tokali Kilise, Buckle Church), 신발 교회(Carikli Kilise, Shoe Church),
성 바바라 교회(Saint Barbara Church)등 다양한 이름의 교회들이 있다.
그 중 카란르코 성당(Karanlik Kilise, Dark Church)은
11세기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벽화가 있고,
비잔틴 양식에 천정은 돔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바클 교회(Tokali Kilise, Buckle Church)는 괴뢰메에 있는 교회들 중
가장 풍부한 내부장식과 뛰어난 보존상태로 가장 사랑받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는 박물관 안쪽이 아닌 바깥쪽 도로변에 있다.
괴뢰메 야외박물관은 한줄로 입장하기 때문에 성수기때는 무척 붐빈다.
따라서 오전 일찍 입장하거나 비수기때 방문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곳에는 많은 동굴 수도원이 있다.
이슬람교도의 탄압을 피해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이다.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곳에 동굴을 파 수도생활을 한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벽화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 뱀교회, 사과교회, 샌달교회, 바클교회 등으로 불린다
10세기경에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수도사들이 이 지역에 살면서 365개의 교회를 세워 매일 한교회씩 돌아가며
1년내내 중단없이 예배를 드렸다 한다
우치히사르를 지나
괴뢰메 계곡이 보이는 휴계소 카페에서 바라다 보는데
지나치며 멀어져 가는 우치히사르를 바라보니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든다
여행계획을 짤 때는 저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괴레메 계곡을 봐야지 하는 계획도 있었는데...
세쌍둥이 모양의 파사바 계곡
파샤바는 터어키어로 "파샤"는 장군의 뜻이고
"바"는 포도밭으로써 "장군의 포도밭"이라는 뜻이다.
장군의 포도밭 파샤바를 둘러보려고 버스에서 내리자
잘생긴 송이버섯 바위가 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송이버섯 모양의 바위 세개가 서로 사랑이라도 하듯이 꼭 붙어있는 바위를
삼위일체 바위라고 부른단다.
삼위일체 신학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셨던
그레고리오 주교님의 공로를 기념하기라도 하는것 같다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낳음도 나중에 낳음도 아닌
천지창조 이전부터 함께 계셨던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하느님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여기 저기 삼위일체 바위가 곳곳에 서 있었다
터키에는 신이 내려주신 두가지의 나무가 있다고한다.
하나는 올리브 나무요 다른 하나는 포도나무란다.
그중에 파사바계곡에는
포도나무를 재배하는 포도밭이 여기 저기 있었다
이 척박한 땅에 기름진 포도밭을 일궈내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렸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파사바계곡 포도밭에서 얻어지는 포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달고 맛있는 포도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사바계곡에는 크고 잘 생긴 개들이
관광객들을 반갑게 맞이 하듯이 꼬리를 살살 흔든다.
그런데 이런 개들을 정부에서
정기적으로 예방주사도 주고 ,사료도 주고, 집도 지어주면서
철저히 관리한다고 한다.
그래서 물거나 전염병을 옮기지 않는 건강한 개들이라고 가이드가 설명을 하였다.
정말 사람들에게 공격성은 없는것 같다
거대한 무덤과 앞에 있는 상석처럼 보인다
낙타 머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머리 위에 곰 두마리가 올라가 있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쌍봉 낙타처럼 보이는 바위이다
성모 마리아처럼 보이는 바위이다
이 처럼 파샤바 계곡(Pasabag)에는 다양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이 보인다
데브렌트 계곡(Devrent Valley)라고 부르는 계곡으로
이 계곡에는 낙타 바위 형상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 바위 형상 등
여러 모형의 바위가 있는데
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도 보인다고 하여
'상상력의 계곡'이라고 하는 데브렌트(Devrent)라고 한다고 한다
이렇게 생긴 카파도키아 땅굴집에서 터키의 마지막 점심을.....
테이블 4인 자리에 케밥이라고 각각 접시에다 갖다 주는데 케밥인지 잘모르겠다....
케밥의 종류가 많다고 하는데....
2번째 터키를 방문하여 카파도키아(kapadokya)를 여행할 때에
괴레메(Göreme)에서
지프 사파리 투어를 신청하여 투어에 들어 간다
괴레메(Göreme) 야외 박물관 앞을 지나치고 있다
4세기부터 13세기까지 천연의 바위를 활용해 만들어진
교회들이 몰려 있는 골짜기이다
지프(Jeep)는 높은 지대로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독특한 바위 지형들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지프에서 내려 잠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위로 오르니 구멍 뚫린 아치(Arch)형 바위가 있다
이곳이 뷰 포인트(View Point)라고 한다
카파도키아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멀리 지평선으로 우뚝 우치히사르(Uchisar)가 보인다
오르타히사르(Ortahisar) 지역이다
솟아 있는 바위산이 괴레메(Göreme)와 위르귀프(Ürgüp) 사이에 지역의
기암 괴석들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르타(Orta : 중간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솟아 있는 바위산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다고 하는데
예전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다고 하며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오르타히사르(Ortahisar)에서
지프를 타고
다시 기암괴석들이 있는 골짜기 위로 올라 왔다
지프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이곳에도 사람이 거주했던 석굴들이 많이 보인다
카파도키아 지역을 지프를 타고
기암괴석 군의 골짝기와 능선을 왔다갔다 하니
방향감각과 위치감각이 없어 어느 곳에 와 있는지 모르겠으나
기암괴석들이 있는 산 능선에 있는 암굴 교회로
프레스코화가 많이 지워져 있다
이슬람 시대에 많은 수도사들이 탄압를 피해 많이 숨어들었다고 하는데
이 카파도키아 지역에 365개나 되는 암굴교회가 있다고 한다
골짜기 아래에 외진 곳에 있는 기암괴석에도
계단과 암굴이 보인다
계곡으로 기암괴석 군이 펼쳐진다
이곳에도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나 서서히 살펴보니
발아래로 보인다
괴기스러운 암반들로 형성되어 지역이다
자연적으로 보이는 암굴들이 많이 눈에 들어 온다
이곳에서 지프에서 내려 알려 준대로
잠시 계곡으로 산책을 갖다가 오니
지프 기사들이 샴페인을 터트리며 자그만 파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샴페인 파티로 카파도키아에서 지프 사파리 투어를 마치고
다음 목적인 파샤바(Paşabağ)로 향한다
파샤바(Paşabağ)는 괴레메(Göreme)에서 북쪽으로
카부신(Çavuşin) 마을에 위치하고
지프(Jeep)는 괴레메 시가를 거치지 않고 투어지에서 바로 가고 있는 중이다
카부신(Çavuşin) 마을의
도자기 기념품을 파는 카부신 세라미크(Çavuşin Seramik) 앞에 관광 버스가 서있다
뒷쪽으로 암벽에는 암굴들이 보이는데
좌측에는 카부신 교회(Çavuşin Church)라고 하며
우측에는 성 후안 바우티스타 교회(Iglesia san Juan Bautista)라고 한다
새벽부터 열기구를 타러 나와
순서를 대기하고 있다
열기구 탑승은 날씨 조건이 맞아야지 탈 수 있는 것으로서
하늘이 내리는 복으로 운 때가 있어야 한다
열기구 타고 오른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어제 가서 보았던 버섯 모양의 바위들이 몰려있는 군락지인
파샤바(Paşabağ)가 보인다
열기구 탑승은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바라는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중의 하나로 꼽고 있는데
오늘 그 중의 하나를 이루는 중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나와
기다리다가 많은 열기구들과 함께 하늘을 날고 있다
열기구에는
열기구 기관사를 포함하여 17명이 탑승하는데
하늘에 떠 있는 열기구를 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늘에 떠올라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카파도키아(Kappadokya)의 독특한 지형이
하늘에서 보는데도
기암계곡 골짜기들이 끝없이 펼쳐져 보인다
터키 국기가 그려져 있는 열기구가
능선을 넘어 가고 있다
카파도키아(Kappadokya)의 독특한 지형의 형성은
약 300만 년전 에르지예스 산(Erciyes Mountain: 3916m)의 화산이 폭발하여
거대한 용암층이 쌓여서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끊임없는 비바람과 홍수로 깎이고 닳아져
각 종 모양을 만들며 형성되어진 지형이라고 한다
인생에 열기구를 처음으로 타보는데
하늘에서 내려 오기 전 하늘에서 인증샷을 해 놓는다
열기구가 하늘에서 1시간 정도를 날아 다니다가
각자의 자기의 착륙 지점을 찾아 서서히 내려 앉는다
우리가 탔던 열기구이다
세계 유산(World Heritage)이라고 쓰여 있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중에 하나를 이루고 사진으로 담는다
카파도키아 땅굴 레스토랑에서
항아리 케밥으로 점심을 마치고 앙카라로 향한다
약 4시간30분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소금호수를 경유하여
앙카라 시내에 있는 한국전쟁 터키참전 기념탑 공원을 들려
앙카라 공항에 오후6시까지 도착한다고.....
카타르 도하행 비행기 탑승시간은 20:00
카파도키아를 괴레메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다시 하산산(Hasan Daği)이 보인다
언덕 넘어로 하산산을 그려 놓은듯....
하늘이 참 평화롭게 느껴진다
저 까마득한 지평선 위로 하산산....
하산산(Hasan Daği)은
빅 하산다기(3,253m)와 스몰 하산다기(3,069m) 두 개의 정상이 있다
하산산(Hasan Daği)은
타우르스 산맥(Taurus Mountains)과 폰틱 산맥(Pontic Mountains) 사이의
아나톨리아(Anatolia) 고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괴레메(Göreme)에서 잉카라(Ankara)로 가는 분기점인
악사라이(Aksaray)까지 가는 몇 시간 동안
눈 쌓인 설산의 동화 속 풍경처럼 아름다운 실루엣으로 보여 준다
끝이 없는 지평선....
이곳이 소금호수 아닌가 하는데.... 마이크 잡은 가이드는 말이 없다
첫 여행 때에는 소금 호수를 그냥 말없이 지나쳐 갔는데
이번 두 번째 여행에서는
소금 호수에 잠시 정차하여 진짜 짠물인지 확인시켜 준다
아나톨리아 중부에 있는 소금호수는
서울 면적의 2배 정도의 크기라서 한창을 달려도 소금 호수가 보인다
지난 여행에서 가보지 않은 사프란볼루(Safranbolu)를
이번 두번째 여행에서 방문을 한다
사프란볼루(Safranbolu)는
도시명에 '사프란'이라는 꽃명이 들어가는데 실제로 사프란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프란(Saffron) 꽃은 붓꽃과에 속하는 다년생 식물로
음식에 색을 내는 염료, 향신료, 약재료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사프란볼루(Safranbolu)는
터키의 동서무역이 활발하던 시대에
실크로드를 왕래하던 대상들의 경유지로서
경유지로서 번성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사프란볼루(Safranbolu)는
터키 수도인 앙카라(Ankara)에서 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흑해 연안으로부터는 남쪽으로 약 100Km 거리에 있는
카라뷔크(Karabük) 주에 위치한 인구 약 47,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자그마한 도시이다
사프란볼루(Safranbolu)는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1994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사프란볼루의 아름다운 시장 골목인
사프란볼루 아라스타 바자르(Safranbolu Arasta Bazaar)라고 부르는 시장이다
사프란볼루에서 관광은
이 시장을 위주로 하여 뒷 골목의 전통 가옥을 탐방하는 것이었다
아라스타 바자르(Arasta Bazaar) 주변 뒷골목에는
원래 구두 작업장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 없어지고
지금은 맞춤 구두를 몇 시간만에 만들어 주는 곳이 몇 군데 남아 있다고 한다
시장 골목을 헤메고 다니다가
상점 앞에 여행자들이 몰려 있어 다가 가본다
목걸이나 팔찌를 불로 녹이거나 두드리기도 해서
주문자의 요구대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우리 타고 왔던 버스에서 내렸던 광장으로 다시 나왔다
차도 건너편에는
1994년 12월 17일 세계유산 도시(World Heritage City)라고 표시해 놓았다
사프란볼루(Safranbolu)를 떠나기 위하여 버스를 기다린다
광장의
좌측으로 목욕탕인 타리히 진지 하맘(Tarihi Cinci Hamam)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이슬람 사원인 카즈다기 모스크(Kazdagi Mosque)가 보인다
'타리히 진지 하맘(Tarihi Cinci Hamam)'은
터키 목욕탕으로 으로서
1640~1648년 진지 호카(Cinci Hoca)에 의해 지어진 하맘(Hamam)이라고 하며
터키에는 하맘(Hamam)이 많이 있지만
17세기에 만들어진 하맘(Hamam)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국전쟁 터키참전 기념탑 공원의 석가탑... 비가 너무 쏟아져 촬영이 좀....
터키 두번째 여행에서
지난 첫번째 여행 때 비로 인하여 제대로 찍지 못한 것
이번에는 어둡지만은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이 비문 앞에 서니 숙연해지면서 묵념......
터키 앙카라에서 20:00에 출발.
카타르 도하공항에 도착하니 23:40....
카타르 도하공항에서 01:55 출발.
인천공항 16:45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