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인사동에서 경복궁까지

천황봉 2019. 5. 19. 22:57

오랜만에 서울 시내를 구경하기 위하여

집사람과 버스를 타고 안국동에 내려 인사동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점심을 먹지 않은 상태인 오후3시경인데 

입구에서부터 군밤 냄세로 배고픔을 일깨우는데....

거리가 추석명절 전날이라 그런지 많이 한산해 보인다.

집사람이 배고프다고 식사하고 가잰다.

인사동 분위기 나는 식사할 곳을 찾아 골목을 기웃거렸다.

골목안의 한옥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젊은 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2, 3명씩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고 있었으며

순두부 찌개를 시켜 놓고  식당의 벽에 걸린 사진에 시선을 집중하였다.

우리 역사적인 사진들.... 

식사를 마치고 나와 다시 인사동 길을 걷는다.

그러나 아무 목적도 없이 그냥 기웃 기웃하며 걷는다

인사동에서도 유명한 쌈지길!

2004년경 오픈한 공예전문 쇼핑몰로 특히 여성들이 좋아하여  많이 몰리는 장소라고 하며

야경이 운치있게 멋있다고 한다.

 

 

 

인사동은 골동품이 많이 거래되는 시장으로 유명하여

나도 한번 좋은 것이 없나 찾아 본다..

 

태극기로 화분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이색적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카페에 올리기 몇일전 TV에 강제 철거하는 모습이 나왔다

가게 앞에 포장마차가 못오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이 가게 앞에 중국 관광객인듯한 사람들과 서양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 있다.

인사동 골목에서 이런 가게를 총 3개 보았는데  모두 사람들이 몰려있다

이 가게에는 종업원들이 3사람정도 있어 보였는데

1사람이 큰소리로 '이라사이 마세'    '아리가도 고자이 마스'라고 외치면 

다른 종업원들이 큰소리로 따라 한다. 중국말. 영어등등으로...

꿀타래가 뭔가하여 보았더니

엿 같은 것을 짜장면 만드는 것 갈이 실타래 처럼 가늘게 만들어 파는 것 같다.

 

인사동에서 광화문 광장으로 걷던 중 무교동 길에서 종로대로를 달리는 꽃마차를 발견 했다.

관광용 꽃마차라고 한다.  서울에서도 저런 모습이....

 

(기념비전(記念碑殿)

광화문로 교보문고 앞에 있는 기념비전은 1902년(광무6년, 단기4235년, 사적171호) 세워졌으며 기념비가 있는 이곳을 기념비각(記念碑閣)이라 하지 않고 기념비전(記念碑殿)으로 한 것은 왕이 머무는 곳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것이 세워진 배경은 고종황제가 즉위 40년이 되고 나이 51세가 되던 해에 기로소(耆老所)에 가서 등재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돌거북 위에 비석이 서 있다.

참고로 기로소(耆老所)는 정2품 고위 관원으로서 나이 일흔이 넘으면 경노의 예우를 갖추기 위해 설치된 관청으로서 왕은 51세가 되면 직접 기로소에 방문하여 등재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돌거북 위에는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썼다는 “대한제국대황제보령망육순어극40년칭경기념비”(大韓帝國大皇帝寶齡望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碑)라고 쓰여 있으며 비문 내용에는 고종황제가 즉위한지 40년 된 것과 나이51세가 되던 해 기로소에 입소한 것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칭호를 사용하는 것과 광무연호를 처음 사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 세워진 것은 당시 지명이 조선시대 가장 큰 거리인 운종가(雲從街: 구름처런 많은 사람이 다니는 거리)로서 지금의 서대문에서 광화문을 거쳐 동대문까지의 중앙 지점이다.

또한 이곳에서부터 전국의 도로 거리 원표가 있던 지점이다.


 

 

 

 

 

 

해시계는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구 모양으로서

바늘의 그림자 끝만 따라가면 시각과 절기를 동시에 알수 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경복궁을 향해 가던중 세종이야기 전시관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지하도 처럼 세종문화회관으로 연결되는 곳이었는데

 많은 서예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으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는 설명과 함께 가야금과 퉁소를 연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현재의 국가 종합청사와 조선시대 왕궁인 경복궁을 한폭에 사진으로 남겨 보았다.

해태는 불을 잠재우고 선악과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내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광화문은 경복궁 안 왕이 정사를 관장하는 곳으로 들어가는 제1문이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가 새롭게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 위하여 건립한

조선 왕조를 대표하는 제일의 궁궐이다

흥례문은 경복궁 안 왕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들어가는 제2문이다

근정문은 경복궁 안 왕이 정사를 보는 곳으로 들어가는 제3문이다

 

 

 

 

 

 

 건청궁(乾淸宮)

건청궁은 고종황제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하고자 함과 사가의 느낌을 얻기 위해 지었다고 하나 1873년 조선 역대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는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거처로 사용했다

 건청궁은 비운의 역사인 명성황후 시해장소로써 잘 알려져 있는데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1909년 훼손·철거돼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으며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되었으며 최근 2006년에 새로이 재건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일본세력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친 러시아를 택한 명성황후를 시해하려고  일본인들은‘여우사냥’이라는 작전을 세웠다.

 이때 무인출신 미우라 고도는 조선 파견 총독 부임시 낭인들을 데리고 들어와 2달간 훈련시킨 뒤 조선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임오군란처럼 위장하여 관군들을 죽이고 그들이 준비한 관복으로 갈아입고서 궁을 침입 하였다.

 궁궐 밖에서부터 궁궐안 후미쪽에 있는 건청궁까지 제일 빨리 들어 올수 있는 길이 수로였는데 이곳을 따라 들어와 1895년 10월 8일 새벽 건청궁 곤영각에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려 했다.

 이때 변을 피하기 위해 명성황후는 나인의 복장으로 건청궁내의 옥로루에서 궁녀들 틈에 피신하고 있었는데 궁녀들 중에 기품이 있어 보이는 변장한 황후를 찾아내어 칼로 이마와 가슴을 찌르고 무참히 시해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45세 였다.

그리고 비슷하게 생긴 궁녀들을 모두 죽이고 명성황후의 시체를 거적에 말아 건청궁 동쪽에 있는 녹산에서 석유를 뿌리고 시신을 태우는 비운의 역사적인 국치적인 장소가 되었다.


 또한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깃불이 밝혀졌던 기념비적인 장소로도 유명한데, 1879년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만든지 8년만에 조선 궁궐의 요청을 받고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전등 시설을 하였는데 꺼졌다 켜졌다를 잘하여‘건달불’이라고도 하였고 향원정의 물을 먹고 켜진다고‘물불’이라고도 하였다.


 

 

경복궁  중건 당시 고종황제는  신무문 북쪽에 샘물과 정자,

 누각을 갖춘 후원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의 청와대가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때 일본 낭인들이 변복을 하고 이 수로를  따라 들어 왔다고 한다.

 

경회루는 왕이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큰 연회를 열때 이용한 곳이며

연못안에 섬을 만들고 큰 누각을 지은 것으로

주역 사상에 바탕을 둔 우주의 원리를 건축에 담은 곳이다.

또한 수양대군(세조)이 어린 조카 단종에게서 강압적으로 옥새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