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중국 북경 여행

천황봉 2018. 8. 28. 10:55

이른 새벽 일찍이

중국 북경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선다

  여행을 하기 위하여 인천공항으로는 수 없이 다녔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김포공항을 향해 간다

 

새벽부터 서둘러 콜밴을 불러 김포공항으로 향하는데

소래포구의 일출이 너무도 아름답다

내가 사는 곳의 일출이 이렇게 아름다운지는

이곳에 오래동안 살아 왔으면서도 처음 느껴 보는 장관이다

 

 

중국(中國)에는 이번이 9번째로 가지만 

땅이 넓어 여러 민족과 문화유산이 있고 여러 특색의 자연유산이 있어

 가보아 할 곳이 수도 없이 많아

아직도 여러 곳의 여행지를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김포공항에서 중국(中國)의 북경 서우드 국제공항(北京首都國際空港)까지

비행거리는 926Km로 약 2시간 정도의 멀지 않은 거리로서

남북통일이 되었다면 차를 몰고 여행을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행기는 중국 북경을 여행을 위해 떠올랐다

지금까지 중국 여행은

 

* 1. 청도 - 곡부 - 태안 - 태산 - 치박 - 린치 - 청도

* 2. 상해 - 쑤저우 - 항저우 - 상해

* 3. 계림(구이린) - 후난성 랑산 - 신녕현 - 구이린 - 양삭 - 구이린

* 4. 창사 - 장가계 - 천문산 - 무릉원구 - 천자산 - 원가계 -창사

* 5. 곤명 - 석림 - 곤명

* 6. 홍콩 2회

* 7. 황산시 - 장시성 덕흥 - 삼청산 - 황산구 - 황산 - 휘주 - 황산시

* 8. 심양 - 통화 - 이도백하진 - 백두산 - 통화 - 지안 - 환인 - 심양으로

 

이번에는

* 9. 북경 - 팔달령 만리장성 - 용경협 - 북경을

돌아보고 올 예정으로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기내식을 먹고 조금 있으니

비행기는 북경(北京: 베이징)의 근교를 날며 착륙할 준비로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베이징(北京)은

1279년 원(原)나라가 수도(首都)로 삼으면서부터

900년에 가까운 중국 역사의 영욕의 세월을 함께하고 있는 도시라고 한다

1396년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된 명(明)나라가 수도를 한때 난징(南京)으로 옮겨가기도 하였으나 

명(明)나라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1402~1424 재위)가

1421년 다시 베이징(北京)을 수도(首都)로 삼은 후 청(靑)나라까지 이어졌으나

1928년 국민당 정부가 난징(南京)을 중화민국 수도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며

베이징(北京)을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식 수도(首都)로 정하였다고 한다

 

 

김포공항을 출발한지 2시간 정도되어

베이징(北京)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27Km 정도 거리에 있는

'베이징 서우드 국제공항(北京首都國際空港)'에 착륙한다

 

 

'북경 서우드 국제공항(北京首都國際空港)'은

총 3개의 터미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제1 터미널은 국내선 전용공항이며

제2, 제3 터미널은 국제선 터미널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 오는 '대한항공'은 제2 터미널을 이용하게 되어 있으며

'아시아나항공'은 제3 터미널을 이용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제3 터미널을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베이징 서우드 국제공항에서

제1 터미널과 제2 터미널은 붙어 있고 제3 터미널은 동떨어져 있어

무료셔틀 모노레일을 운행하고 있다

 

여행에 같이할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길은

제3 터미널에서 셔틀 모노레일을 탑승하고 가야하기 때문에

셔틀버스 탑승장을 물어물어 찾아 가는데

또한 제2 터미널을 지나야 하기에 중간에 내리지 말라고 당부도 해준다 

 

 

공항에서 베이징(北京) 시내 중심가를 향해 출발한다 

 

 

베이징(北京)은

허베이성(河北省)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는 2천4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면적은 서울 면적(605.02㎢)의 27배가 넘는 16,410.5㎢라고 한다

 

 

베이징(北京)은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천안문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수립을 선포하면서

현대의 중국의 중심이 되었는데

 

 

 

1966년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황궁의 벽이 무너지고 옛 주택들과 사원들이 철거되이지고

현대화와 공업화 바람으로 현대식 많은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며

옛 모습을 많이 잃어 갔다고 한다

 

 

그러한 이유로 2005년 초 중국 정부는

베이징(北京)의 무질서한 발전을 멈추게하는 법안을 승인하고

국가적 자존심을 높이기 위하여

2008년 하계 올림픽 개최하였다고 한다

 

 

베이징(北京)에 도착하여 관광을 시작하기 전에

점심식사부터 하러 간다

 

 

버스에서 내려 천안문 광장으로 걸어가는 중에

정양문(正陽門)이 눈에 들어 온다

정양문(正陽門)은

원래 천안문(天安門)으로 들어가는 내성(內城)의 정문이었다고한다

지금은 공산혁명 당시

고궁을 감싸고 있던 성벽들이 모두 허물어 지고

정양문(正陽門)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천안문(天安門)이 보이는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에 도착한다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은

명.청(明.靑)대에부터 천안문 광장 일대가 내성(內城)에 속해 있어

자금성(紫金城) 바깥의 궁정 광장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천안문 광장(天安門廣場)은

100만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중국 근.현대사의 기원을 여는 사건들이 이 곳에서 행하여졌다고 한다

1919년 신문화 운동인 5.4운동을 시작으로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선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이란 세월을 

문화대혁명이라는 구호 아래 중국을 광기로 몰아 넣었던

1966년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의 홍위병 집결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던 광장이다

 

 

 

천안문 광장의 동쪽편에 있는 '중국 국가박물관(中國國家博物館)'이다

기존에 있던 '중국 역사 박물관'과 '중국 혁명 박물관'을 합병하여

2011년 106만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새롭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상고시대' 유물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대충 둘러보는 데만도 2~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천안문 광장 중앙에 있는 '인민 영웅 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와

천안문 광장 서쪽편에 있는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 건물이다

'인민 영웅 기념비(人民英雄紀念碑)'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기까지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로서

높이 37.8m의 석조 비석으로 정면에는

'인민의 영웅은 영원하다(人民英雄永垂不朽)'라고 적혀 있다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은

'전국 인민대표회의(全國人民代表會義)'가 개최되는 중국 정치의 중심지라고 한다

 

 

천안문 광장 남쪽편에 있는 '마오쩌둥 주석 기념당(毛澤東主席紀念堂)'이다

1976년 9월 9일 사망한 '마오쩌둥(毛澤東)'을 영구 안치한 묘소로

높이 33.6m,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축물로

1977년 9월 9일 개관하였다고 한다 

 

 

천안문 광장에서 고궁인 자금성(紫金城) 안으로 입장하기 위하여

천안문으로 향해 걸어가며 보는

천안문 광장 주변으로 있는 꽃밭이다

 

 

자금성(紫金城) 안으로 들어가는 '천안문(天安門)'이다

명.청(明.靑)시대 자금성(紫金城)의 정문으로

명(明)나라 제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베이징(北京)으로 수도(首都)를 천도한 후

1417년 자금성의 정문으로 짓고 '승천문(承天門)'이라 하였으며

1651년 청(靑)나라가 성문을 재건하면서 '세상을 편안하게 다스리겠다'는 염원을 담아

'천안문(天安門)'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지금 천안문 중앙에는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가 걸려 있고

그 양옆에는 '중화 인민 공화국 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와

'세계 인민 대단결 만세(世界人民大團結萬歲)'라는 글이 적혀 있다

천안문(天安門)에는 아치문이 5개가 있는데

가운데 큰 아치문은 황제(皇帝)만 이용하는 문이나

특별히 황후가 시집올 때와

과거시험에서 1~3등으로 급제한 자가

처음으로 입궐할 때 통과할 수 있는 영예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자금성(紫金城) 안내도이다

 


천안문(天安門)을 통과하면

천안문과 자금성(紫金城)이 시작되는 오문(午門) 사이 꽤 넓은 공간에

'단문(端門)'이 나온다

'단문(端門)'은

전쟁터로 출병하는 군사들을 황제가 격려하며 배웅하던 문이라고 한다 

 

 

단문(端門)을 통과하면 ∏형으로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는 '오문(午門)'이 보인다

'오문(午門)'은

현재의 고궁(古宮)인 자금성(紫金城)의 정문이다

이 문(門)은 베이징(北京)의 남북 중심축에 해당하여

자오(子午)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어 '오문(午門)'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중앙의 누각은 높이가 37.95m라고 하는데

매년 황제는 이곳에 올라서 새로운 역법을 공표하였으며

군사 열병식도 받았다고 한다

 

 

단문(端門)과 오문(午門) 사이의 광장 서쪽편에 세워져 있는

해시계(日晷)이다

 

 

고궁 내부로 들어가는 '태화문(太和門)'이다

고궁 내부는 

황제가 정무를 보는 '외조(外朝)'와

황제가 일상 생활을 영위하던 '내정(內庭)'으로 구분하는데

태화문(太和門)은 외조(外朝)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외조(外朝) 안에는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이 있다

 

 

오문(午門)을 통과하면 태화문(太和門)이 보이는데

그 사이에 있는 넓은 광장이다

 

 

태화문(太和門)은

1420년에 지어졌지만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태화문(太和門) 앞 좌우측에 명(明)나라 때에 세운 사자상이다

사자상이 통로 양쪽에 놓여져 있는데

이 사자상은

오른쪽에 있는 여의주를 누르고 있는 수컷 사자상이다

왼쪽에는 새끼에게 젖을 주고 있는 암컷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암컷 사자상은 마치 새끼를 못살게 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옛 중국인들은

사자의 발가락에서 젖이 나온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태화문(太和門) 앞에서 바라보는

지나쳐온 오문(午門)이다

 

 

태화문을 통과하여 외조(外朝)로 들어서니

길게 늘어선 넓은 뜰 길 끝에 '태화전(太和殿)'이 웅장하게 서 있다

자금성(紫金城)의

 첫번째 공식 궁전으로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이다

태화전(太和殿)은

현존하는 중국 최대의 목조 건물로서

1420년 창건이래 여러 차례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현재의 건물은 1696년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태화전(太和殿)은

3단의 대리석 기단 위에 24개의 붉은 기둥이 이중으로된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구조이다

건물 길이가 64m, 폭이 37m, 높이가 27m라고 한다

 

 

태화전 앞의 3단 백색 기단을 올라 태화전(太和殿) 내부를 바라 본 모습이다

황제가 앉았던 황금색의 옥좌(玉座)가

위엄있고 화려하게 한가운데 놓여져 있는 것이 보인다

 

 

태화전(太和殿)과 태화문(太和門)과 사이에 있는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이다

큰 누각은 분인각(体仁閣)이고 그 좌측의 3개의 문이 있는 건물은 좌익문(左翼門)이다

광장 우측에는 우익문(右翼門)이 있다

 

 

태화전(太和殿) 건물을 돌아 

뒷편에 있는 중화전(中和殿) 쪽으로 가며 보는

태화문(太和門) 방향이다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을 감싸고 있는

3단 백색 기단의 모습이다

 

 

태화전(太和殿) 뒷편에 있는 중화전(中和殿) 앞에서 보는

3단 백색 기단이다

'중화전(中和殿)'은

태화전(太和殿)과 보화전(保和殿) 사이에 있는 건축물로

태화전(太和殿)에서 행사가 열리면

명(明)나라 때는

황제가 중화전에서 예복을 갈아입고 휴식도 취했던 장소라고 하며

청(靑)나라 때는

황제가 개인적으로 대신들을 만나거나

외국 사신을 만나기도 하엿으며

조서 작성 및 최종 과거시험도 이곳에 치러졌다고 한다

1898년 서태후(西太后)가 정무를 보던 광서제(光緖帝)를 잡아 감금하고

수렴청정하는 사건이 벌어진 곳도 중화전(中和殿)이라고 한다

 

 

보화전(保和殿)이다

크기는 약간 작으나 태화전(太和殿)처럼 건축된 건물로서

길이가 50m라고 한다

처음에는 근신전(謹身殿)이라고 하였으며

청(靑)나라 때에 보화전(保和殿)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명(明)나라 때는 황후 책봉을 하였던 곳이며

1789년 청(靑)나라 이후부터는

과거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구두 시험을 치렀던 곳이라고 한다  

 

 

보화전(保和殿) 옆에 있는 동(銅)항아리이다

화재에 대비하여 물을 보관하던 소방용수 항아리이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자금성(紫金城)의 내정(內庭)이다

'내정(內庭)'은

황제가 일상 생활을 영위하던 곳으로

황제의 침궁인 '건청군(乾淸宮)'

황후의 침궁인 '교태전(交泰殿)'

명(明)나라와 청(靑)나라 초기에 황후가 거주했던 '곤녕궁(坤寧宮)'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내정(內庭) 안에 있다

 

 

3층 백색 기단 위에 있는 보화전(保和殿) 옆에서 바라보는

높은 지붕만 보이는 '봉선전(奉先殿)'이다 

'봉선전(奉先殿)'은

청(靑)나라 황실의 조상을 모시던 사당으로 내정(內庭)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종표관(鐘表館)'으로

청나라 시대 호화 자명종(自鳴鐘)들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보화전(保和殿)에서 3단 백색  기단을 내려와 

건청문(乾淸門) 앞 뜰에서 보는 

봉선전(奉先殿)으로 들어가는 '경운문(景運門)'이다

 

 

건청궁(乾淸宮)이 있는 내정(內庭) 담

옆길을 통해서

황실 정원(庭園)인 '어화원(御花園)'으로 가는 길이다 

사진 좌측은 황제와 황후의 기거 공간인 내정(內庭)이고

우측은 담장은 비빈(妃嬪)들이 있던 동육궁(東六宮)이 있는 담장이다

 

 

어화원으로 가기 위하여 동육궁 옆길을 지나간다

어화원(御花園)을 가운데 두고

동육궁(東六宮)과 서육궁(西六宮)이 있다

동육궁과 서육궁은 비빈(妃嬪)들이 기거하던 처소라고 한다

 

 

황실 정원인 어화원(御花園)으로 들어선다

'어화원(御花園)'은

내정(內庭) 북쪽에 위치하고

동육궁(東六宮)과 서육궁(西六宮)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황제, 황후, 비빈들의 접근이 편하게 만들어 놓았다

 

 

어화원(御花園)에 있는 '용조괴(龍爪槐) 나무'이다

용(龍)은 황제를 상징하는데

이 나무는 용(龍)의 발톱을 닮았다고 하여 나무에

'용조괴(龍爪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어화원(御花園)에 나무들이 빽빽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예전에는 태화문(太和門)부터 내정(內庭) 후삼궁(後三宮) 주변까지

나무가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황궁을 근엄하게 보이게 하고

황제 암살을 위해 침입하더라도 숨을 곳이 없게 하여 

황궁 방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자금성(紫金城) 내 곳곳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어화원(御花園)에 있는 '어경정(御景亭)'이다

인공적으로 만든 산으로 퇴수산(堆綉山)이라 부르며

그 위에 궁궐 내외를 조망할 수 있는

정자인 '어경정(御景亭)'이 세워져 있다

 

 

자금성(紫金城) 밖으로 나가는 북쪽 문인 '신무문(神武門)'이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남쪽의 오문(午門) 통해 자금성으로 들어와

이 문을 통해 자금성 밖으로 나간다

명(明)나라 때는 현무문(玄武門)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청(靑)나라 때에 재건하면서

'신무문(神武門)'이라고 개명하였다고 한다

 

 

자금성(紫金城)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궁궐 밖으로 나면 북쪽으로 해발 98m의 낮으막한 산이 보인다

경산 공원(景山公園)이다

이 곳에 오르면 베이징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한다

중국어로 "징산궁위안'이라고 하는데

이 산(山)은 인공적으로 쌓은 산이라고 한다

요(遼)나라 때 인근의 북해공원(北海公園)을 별궁으로 조성하면서

북해 호수에서 파낸 흙을 쌓아 기초를 다진 산이라고 한다

명.청대에 황실정원에 속하면서

자금성(紫金城)을 둘러싼 해자(垓字)에서 파낸을 흙을 더하여

현재의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경산 공원(景山公園)'은

또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한다고 한다

산 동쪽에 '명사종순국처(明思宗殉國處)'라는 거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1644년 명(明)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반란군을 피해 자금성을 바라보다 목을 멘 장소로

숭정제(崇禎帝)는 자살하며 두루마기의 소매자락에 유언을 남겼는데

"짐은 나약하고 덕이 부족해서 하늘의 노여움을 샀다

폭도들이 수도를 점령했건만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나를 기만하였다

죽어서도 조상을 볼 낯이 없어 머리카락을 풀어 헤쳐 얼굴을 가리노라

폭도들이여 내 몸은 갈기갈기 찢어도 좋으니

선조들의 묘는 훼손하지 말고

백성들만은 그 누구도 다치게 하지마라"라고 적었다고 한다

 

 

자금성에서 신무문으로 나오면 경산대가(景山大街)라는 차도인데

동쪽 방향으로 가서

버스에 오르며 보는 거리 모습이다

 

 

북경 서커스 "천지보장(天地寶藏)'을 관람한다

외줄타기, 자전거, 우산돌리기 등

1시간 약간 넘게 관람하다가 밖으로 나온다

 

 

서커스가 끝나고

저녁식사를 위하여 왕부정거리(王府井街) 부근으로

'북경오리구이'를 먹으러 간다

 

 

식사 후 '왕부정 거리(王府井街)'에 도착하여

먹자골목으로 가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중국 베이징의 최대의 쇼핑가로 여행객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이며

우리 서울의 명동(明洞)과도 결연을 맺은 곳이라고 한다

 

 

왕부정 거리(王府井街) 먹자골목에는 저녁에만

노천에 90여 개의 포장마차 거리가 형성된다고 한다

 

 

포장마차 골목길을 걷던 중

전갈꼬치와 지네꼬치를 보고 발길을 멈추고

꼬치 몇 개를 주어든다  

중국에 왔으니 우리나라에서는 혐오 식품이라

먹어볼 수 없기 때문에 먹어 보기로 한다

 

 

 

또 취두부(臭豆腐)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취두부(臭豆腐)'는

세계 3대 악취요리 중 하나로 꼽는다는 요리로

소금에 절여 오랫동안 삭힌 두부를 튀겨낸

썩은 두부(豆腐)라고 불리는 요리이다

 

 

취두부(臭豆腐)도 먹어보기 위하여

주문하여 그릇을 받아든다

우리는 먹기 어려울거라는 요리를 직접 먹어보고 느낌을 알아보자는

욕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왕부정(王府井)'이란 명칭은

과거 명(明)나라 때에 이곳에는 왕부(王府)가 10곳이나 있었고

고위 대신들이 거주하는 저택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우물이 많이 있어

왕부(王府)에 우물(井)을 끝에 붙여 '왕부정(王府井:왕푸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왕부정 포장마차 쇼핑 중

엿장사와 한바탕 실랑이를 벌여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땅콩엿 20cm×20cm×5cm 정도 엿이 100위안으로 적혀 있어

2번이나 확인하고 포장하기 전에 돈을 주었더니 집어 넣고

갑자기 포장하지 않고

엿을 깨뜨려 1/4 정도만 포장하여 주려고 하여

실랑이를 하며 온전한 엿 하나를 주던지 돈을 돌려 달라고 실랑이를 하였던 것이다

한참을 인상을 쓰며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은 돌려받지 못하고

"에라 불쌍한 녀석아 잘먹고 잘살아라

너 같은 녀석 때문에 여기 모든 장사하는 사람들 이미지가 나빠져

여행자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나쁜 곳이라는 오명을 쓴다"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로 핑잔을 주고 발길을 돌린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중국에서는 길거리 물건 값은 절대 먼저 지불하면 안된다' 것이다

예전에 청도 여행할 때도

길거리 군고구마 장사가 10각에 고구마 3개라고 하여

잔돈이 없어 10위안을 주었더니 고구마만 주고

잔돈을 거슬러 줄 생각을 하지 않아

그때는 우리 한국에서는 1개에 군고구마가 얼마인데! 마음으로

그래도 싸다고 생각하여 미소로 주고 말았는데

지금은 한국의 몇 배 가격을 바가지 쓴 것 같아 기분이 정말 안 좋았다 

 

 

베이징(北京) 시내의 밤거리이다

굉장한 러쉬아워(Rush Hour)에 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교통량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것 같다

 

 

짧게나마 '베이징(北京)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면

베이징(北京)은

900년 가까이 중국의 수도(首都)로 지켜 오고 있는 도시인데

베이징에 비교할 수 있는 중국에서 도시는

한(漢)나라 때에 수도였던 산시성(陜西省)의 장안(長安)과

기원전 동주(東周)시대 이후 9개 왕조가 수도로 삼은

허난성(河南省)의 뤄양(洛陽) 정도라고 한다

 

 

선사시대에 베이징(北京) 주변에는 최초의 인류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50만년 전부터 살았다는 베이징 원인과

5만년 전에 생전했던 상동인(上洞人)의 화석이

베이징(北京)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팡산구(房山區)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국시대(BC475~BC221)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동생 소공석이 세운

연(燕)나라가 수도를 '베이징(北京)'에 자리하여

계(薊)라고 명명하여 최초의 수도(首都)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진(秦)나라(BC221~BC206)를 세운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베이징(北京)'은

한(漢)나라 시대(BC206~AD220)에는

광양군(廣陽群)에 속한 계현(薊縣)이라 하였으며

삼국시대(220~280)에는 연(燕)이라 하였는데

한대와 삼국시대에는 혼란했던 시국으로 '베이징(北京)'은 국경에 가까이 있어

유목민족의 잦은 침입을 받아야 하였다고 한다

이후 316년경 서진(西晉)시대부터 581년경 수(隋)나라 초기까지

유목민족의 지배를 받는 지역이었다고 한다

당(唐)나라 시대에 와서 이 지역이 한족(漢族)에 의해 수복하여

유주(幽州)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唐)나라가 멸망하고 난 후 중국 북부에 수 많은 나라가 세워졌다고 한다

그 중에 거란족이 '요(遼)나라(947~1125)' 세웠는데

그들은 만주에 있는 본거지의 수도와 구분하기 위하여

현재의 '베이징(北京)'인

유주(幽州)를 파괴하고 둘레 23Km, 높이 10m, 문 8개의 네모난 성을 짓고

이곳의 수도를 남경(南京)이라고 하였다고 하며

이것은 중국의 도시 계획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서 남하한 여진족(女眞族)이 요(遼)나라를 멸망시키고

금(金)나라(1115~1234)를 세우고

남경(南京)을 중도(中都)라고 명칭을 변경하여 수도로 삼으면서

대규모의 공사를 시행하며 궁전과 궁실을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그러나 1211~1215년 징기스칸이 중도(中都)를 빼앗는 과정에서

궁전은 불타고 파괴되었다고 한다

 

 

'더플레이스(The Place)'이다

아시아 최대 대형 LCD 스크린 광장으로 길이가 250m나 된다고 하는데

유명 브랜드가 입점한 유럽풍의 복합 쇼핑몰이 이라고 한다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1215~1294)칸이 

중국 전역을 차지하고

몽골 땅에 있는 원래 수도 카라코룸(하라호름)에서

현재의 베이징(北京)인

중도(中都)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도(大都)라고 명칭을 변경하고

원(原)나라(1271~1368)를 세웠다고 한다

이때부터 대도(大都)는 중국 전역을 포괄하는 정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농민봉기로 원(原)나라를 멸망시킨

주원장(朱元璋)이 명(明)나라(1368~1644)를 세우고

수도를 자기의 고향인 안휘성(安徽省) 금릉(金陵)으로 옮기고

난징(南京)이라고 하였으며

대도(大都)를 베이핑(北平)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넷째 아들인 연왕(燕王)에게 맡기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1398년 주원장이 사망하며 손자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자

연왕(燕王: 후에 永樂帝)이 조카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皇帝)가 되어

다시 수도를 '베이핑(北平)'으로 옮기고 

1403년 '베이징(北京)'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벽과 궁전, 사찰, 해자는

15세기 명(明)나라 시대에 대부분 지어진 것으로

원(原)대에는 곱게 간 흙으로 성벽을 만들었으나 풍화작용 막기위하여

명(明)대에 벽돌로 덧대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1644년 농민봉기를 일으킨 이자성(李自成)으로 인하여 명(明)나라는 멸망하였으며

이자성(李自成)은 베이징을 점령한지 40일 만에

1644년 청(靑)나라(1618~1924) 3대 황제인 순치제(順治帝)에게

베이징(北京) 내주면서

중국 전역은 만주족이 세운 청(靑)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 간다

1928년 청(靑)나라는 유럽 열강의 침입과

신해혁명(1911년)으로 탄생한 국민당 정권에 멸망하고

국민당 정권은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옮기고

베이징(北京)을 다시 베이핑(北平)이라 하였다고 한다

1937년 베이핑 부근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충돌한 후에 일본군에 점령되어

1945년까지 일본군의 지배하에 들어 갔으며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베이핑(北平)은 국민당 정부에 반환되었으나

1949년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정권에 패하면서 대만(臺灣)으로 쫒겨가고

'베이핑(北平)'이라 이름은 '베이징(北京)'으로 다시 변경되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수도(首都)가 되었다고 한다

 

 

베이징(北京)에서 출발하여 어제 저녁 늦게 도착하여

허베이성(河北省) 다창현(大廠縣)에 위치한

쉐라톤 랑팡 차오바이 리버 호텔(Sheraton Langfang Chaobai River Hotel)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 창밖을 내려다 본다

 

 

쉐라톤 랑팡 차오바이 리버 호텔(Sheraton Langfang Chaobai River Hotel)의

전경이다

 

 

만리장성을 보러 가면서 지나치는 차오바이 강(潮白河)이다

'차오바이 강(潮白河)'은

베이징시(北京市)와 허베이성(河北省)의 동부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강으로

길이는 90Km라고 한다

차오바이 강(潮白河)의 상류는

2갈래의 강으로 차오허 강(潮河)과 바이허강(白河)이

각각 미윈(密雲) 저수지로 흘러들어가 합류되어

여기서부터 차오바이 강(潮白河)으로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순이현(順義縣)과 퉁현(通縣)을 거쳐

대운하 중에서 베이(北) 운하로 흘러들어 간다 고 한다

'차오허 강(潮河)'은

허베이성(河北省) 펑닝현(豊寧縣)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구베이커우(古北口)를 거쳐 미윈(密雲) 저수지로 흘러들어 가고

'바이허강(白河)'은

허베이성(河北省) 구위안현(沽源縣)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미윈(密雲) 저수지로 흘러들어 간다

 

 

 

허베이성 (河北省) 다창현(大廠縣)에 있는 호텔에서 출발해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는 거용관(居庸關)을 향해 가고 있는데

시간은 약 3시간 가까이 소요된다고 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평야지대만 달리다가

산악지대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베이징(北京) 시내에서

서북쪽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거용관(居庸關)까지

거리는 약 50Km 정도로

베이징(北京)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한다

 

 

그런데 만리장성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거용관(居庸關)이 있는 곳을 버스는 그냥 지나쳐 간다

이유는 만리장성(萬里長城)에 갔다가

용경협(龍慶峽)으로 갈 예정이므로

엔칭현(延庆縣) 옌칭구(延庆區)에 있는 용경협(龍慶峽)과 가까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팔달령(八達岭)으로 간다고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거용관(居庸關)'은

북방의 이민족(異民族)이 베이징(北京)으로 쳐들어올 때에

지나야할 마지막 관문(觀門)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거용관(居庸關)' 앞을 지나 약 20Km 더 북쪽으로

팔달령(八達岭)으로 향해 간다

 

 

만리장성(萬里長城) 팔달령(八達岭) 주차장에 도착한다

베이징(北京) 중심지에서 팔달령(八達岭)까지는

약 70Km 정도 거리라고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팔달령(八達岭)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기에 탑승장으로 간다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입장하기 전에 보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팔달령(八達岭)으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를 보는 중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팔달령(八達岭)으로 오르면서 보는

주변의 모습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에 오기 전에는

성벽으로 오르는 것은 걸어서 오르는 것으로 생각하여

등산하며 땀 좀 많이 흘려할 것으로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너무 쉽게 성벽을 향해 오르고 있다

 

 

드디어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성벽이 보인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팔달령(八達岭)은

옛날에는 베이징(北京)에서 북부 지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팔달령(八達岭)'이란 지명에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팔달령(八達岭) 구간은

명(明)나라 때 축조된 장성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고 하며

1952년부터 관광지로 개발되어 새로 짓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팔달령(八達岭)은

최고 해발 1,015m 산등성이를 따라 지세(地勢)의 높낮음 변화가 뚜렷해서

장성(長城)의 위용이 선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간이라고 한다

 

 

팔달령(八達岭)의 장성(長城) 구간의

길이는 5Km이며 관광을 위해 개방된 구간은 3.7Km 로서

걸어서 왕복은 4~6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에 대하여 알아보면

중국(中國)과 그 바깥의 이민족(異民族) 세계를 분리하는 구조물로서

옛날 중국(中國)의 이민족(異民族)으로부터 방어 체계였다고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허베이성(河北省) 동쪽 보하이만(渤海灣)에 면해 있는 작은 촌락의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6300Km 떨어진

예전에 고대 실크로드에서 중원의 길목을 수호하였던

현재 간쑤성(甘肅省)의 자위관시(嘉峪關市)에 있는 자위관(嘉峪關)까지 이어진

사람들의 생사를 건 핏땀으로 건설된 성벽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한것은

길이가 6300Km로

1리(里)는 400m로 환산하면 15,750리(里)에 해당하는 10,000리(里)가 넘으므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성(長城)을 최초로 쌓기 시작한 것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BC770~BC220)가 끝나가며

진(秦)나라 중국을 통일(BC221)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220년에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북쪽 국경을 따라서 성벽과 망루를 쌓는 대토목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진(秦)나라 이후 1600년 가까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진(秦)나라 이후의 왕조들은

만리장성(萬里長城) 쌓는 것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다고 한다

1368년 명(明)나라가 들어서면서

다시 만리장성(萬里長城) 축조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유는

명(明)나라는 징기스칸이 세운 원(原)나라를 멸망시키고 건국하였기에

한족(漢族) 정권으로서 북방의 이민족들이 늘 위협적으로 느껴

장성(長城)을 더욱 견고하게 쌓았다고 하며

현재 남아 있는 장성 대부분이 명(明)나라 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산능선을 타고 길게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평일인 목요일인데도 많은 여행자들이 몰려 붐비는데

주말이었다면 발디딜 틈도 없을 것 같이 느껴진다

지난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황산 여행 때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서

4시간을 넘게 줄섯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 팔달령(八達岭)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한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만리장성 팔달령에 올랐지만

위에서 보니

걸어서 만리장성으로 오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제 엔칭현(延庆縣) 엔칭구(延庆區)의 계곡에 위치한

용경협(龍慶峽)을 향해간다

엔칭구(延庆區)은 팔달령(八達岭)에서 내려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시내이다

 

 

엔칭구(延庆區) 시내를 지나

산쪽을 향해 가다가 야저장(野猪場)이라는 간판 앞에서

버스에서 내린다

그런데 도로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궁금해 하는데

차도 변 옆의 담장이 쳐있는 곳에 조금만 쪽문이 있어

그쪽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조그만 쪽문으로 들어가니 도로가 있다

그곳에서 셔틀을 타고 용경협(龍慶峽) 입구까지 타고 들어 간다고 한다

그런데 용경협과 관계된 관리업체에서 나오는 셔틀이 아니라

용경협 앞에서 식당하는 업체에서 운영하는 셔틀이 나와서

셔틀 차량이 다 제각각이었다

 

 

용경협(龍慶峽) 입구이다

 

 

용경협 입구로 들어서니

리조트(Resort)에 들어와 있는 분위기였다

 

 

용경협(龍慶峽) 댐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면서 보는

길목의 정원 모습이다

 

 

용경협(龍慶峽) 댐으로 걸어가는 길목에

사진을 전시하여 놓았다

용경협(龍慶峽) 사계(四季) 사진뿐만 아니라

베이징(北京)의 사진 및 여러 곳의 사진도 많이 전시하여 놓았다

 

 

용경협(龍慶峽)으로 걸어가는 중에

용경협(龍慶峽)의 협곡으로 들어가는 절벽으로 된 산이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용경협(龍慶峽) 댐(Dam)이 있는 입구에 도착하니

용(龍)으로 된 구조물이 보인다

댐 위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는 구조물이라 한다

 

 

1973년 계곡을 막아 건설된 댐이라고 한다

댐(Dam) 높이가 70m로

중국과 홍콩의 합작으로 건설된 댐(Dam)이라고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오르니

암반을 뚫어 만든 터널이 길게 이어진다

 

 

1996년 댐(Dam) 위까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생기면서

북경의 16명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암반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오니

협곡을 운행하는 유람선들이 많이 대기하고 있는 선착장이다

 

 

또 선착장에서 바위산 협곡의 삼신각(三神閣)으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들이 보인다

 

 

용경협(龍慶峽) 유람을 시작하는 선착장에 유람선이

군대에서 사열하는 식으로 열 맞추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맨 끝에 있는 유람선으로 건너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협곡 건너편에 적색으로 쓰인 용경협 글씨가 보인다

1992년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방문하여 쓴 용경협(龍麠峽) 글씨로서

이 협곡이 용(龍)의 형상이라고

용경협(龍慶峽)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용경협(龍慶峽)의 유람선이 시작되자

중국인 해설사가 메가폰을 잡는데 우리 한국말로도 해설을 시작한다

 

 

절벽 위쪽으로 조그만 구멍이 보인다

손오공이 저기 박혀 있던 돌을 빼내어 생긴 구멍이라고 하며

 

 

빼내어 낸 돌을 저 바위산 위에 올려 놓았다고

믿거나 말거나 하는 설명을 늘어논다

 

 

용경협(龍慶峽)은 

작은 구이린(小桂林)이라고도 하며

작은 산샤(小山峽)라고도 한다고 한다

 

거대한 코끼리인 맘모스처럼 보이는 암봉이다

 

호수 중앙의

조그만 봉우리가 '봉관도(鳳冠島)'라고 한다

봉황이 관을 쓰고 물 위에 떠는 모습으로는 안 보이는데

주변의 모습은 아름답다

 

 

좁은 협곡사이에 끼어 있는 '부벽산(斧劈山)'이다

도끼날이 꽂혀 있는 모습이다

 

 

신필봉(神筆峰)은

하늘에서 공부하던 어린 신선이 짜증을 내며 던진 붓이

여기 와서 꽂히며 생긴 바위라고 한다 

 

 

용경협(龍慶峽)의 협곡의 길이는 7Km 정도이고

해발 수면 높이는 570m 정도라고 하며

용경협(龍慶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타산(海陀山)으로 높이가 2241m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의 산들이 보이면

용경협을 거슬러 올라가던 유람선은 뱃길을 돌린다

  

 

그곳의 위쪽에서는 '외줄타기 묘기'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외발 자전거를 타고 줄타기를 하며

밑에는 사람까지 메달고 있다

 

 

용경협(龍慶峽)을 여행지로 포함하게 된 계기는

TV에서 이 장면을 보고

북경(北京)으로 여행을 가게 된다면

저기도 필히 가 보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오게 된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천하 제일경'이라고 부르는

'계림(桂林)' 여행할 때 보았던 모습의

'소구이린(小桂林)'이라 불리울만 하다는 생각이든다 

 

 

'금강사(金剛寺) 선착장'이다

위에는 번지점프대가 설치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번지 점프를 해 볼 사람은 여기 내린다

 

 

계림(桂林)에서 아름다운 절경을 감싸고 흐르고 있는

'이강(漓江)'이 있는데

여기 용경협(龍慶峽)을 '작은 계림(小桂林)'이라고도 부르고 있어

용경협(龍慶峽) 호수의 물길을 

'작은 이강(小漓江)'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우리가 유람선을 탔던 선착장으로 회항하는데

앞에 보이는 절경이 병풍처럼 보인다

 

 

선착장에 도착하자

우리가 유람선을 탑승한 곳의 호수 건너 반대편 선착장에서 하선한다

 

 

용경협(龍慶峽)에서 나가는 출구(出口)로서

한참을 걸어 나가는 긴 동굴 터널이었다

 

 

용경협 입구로 들어올 때에 음식점에서 운영하는

셔틀을 타고 들어와서

나갈 때도 음식점에서 운영하는 스타렉스로 타고 나가는데

용경협(龍慶峽)에서

운영하는 셔틀이 앞서 나가고 있다

 

 

용경협의 셔틀은 다른 곳으로 가고 

우리는 별도로 용경협에 왔을 때 버스에서 내렸던

야저장(野猪場) 간판이 있는 곳으로 다시 와 버스에 오른다

 

 

용경협(龍慶峽)에서 베이징(北京) 시내를 향해 간다

베이징(北京) 중심가까지 거리는 약 85Km 정도라고 한다

 

 

베이징(北京) 시내 번화가로 진입하는 줄 알았는데

 

 

외곽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베이징(北京) 시내에서 일정은

저녁식사 후에 금면왕조(金面王朝) 공연을 보고

호텔로 가는 일정이다

 

 

금면왕조(金面王朝) 쇼가 공연되는

화교성 대극원(華僑城 大剧院) 앞이다

 

 

북경(北京)의 '금면왕조(金面王朝)쇼'는

중국의 거장 장예모(張藝謀) 감독의 연출작품으로

항저우(杭州)의 송성 천년의 정(宋城千古情)이라는 '송성가무(宋城歌舞)쇼'와

심천(深圳)의 '민속(民俗)쇼'와 함께

중국의 3대 쇼로 꼽힌다고 한다

 

 

 

금면왕조(金面王朝) 쇼는

한 소녀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게되는데

금면왕조의 이야기라고 한다

쇼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무대 옆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중국어, 영어 한국어로 된 자막 설명이 나와

무엇 표현하는 내용인지 감을 느끼며 볼 수 있는 쇼이다

 

 

금면왕조(金面王朝) 쇼 내용은

중국의 고대 신화를 8막으로 구성한 공연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온 남자부족의 남면왕과 여자부족의 금면여왕의 전쟁사로

금면여왕이 남면왕을 이기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전쟁 후 금면여왕은 포로가 된 남면왕과 그 부하들을 위해 잔치를 열어 주면서

남면왕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을 시기한 하늘은 홍수를 내려서 금면왕조는 멸망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데

 금면여왕은 왕조의 멸망을 막기 위하여 스스로 거대한 돌이 되어

홍수를 막아내면서 나라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남면왕과 백성들은 죽은 남면여왕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금빛 태양새로 변한 금면여왕이 나타나

금면왕조를 영원히 지켜준다는 내용으로서 

서로 사랑하지만 국가를 위하여 이루어 질 수 없는 

남녀간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한다

 

 

 

금면왕조(金面王朝) 쇼

1막은 '전쟁(戰爭)'으로서

여자들만 사는 금면왕국에 남자들의 남면왕국의 병사들이 쳐들어와

전쟁이 시작되고

여자들만 사는 금면왕국이 승리하게 되어

남면왕과 병사들은 포로가 된다

 

2막은 '상전(桑田)'으로서

전쟁 끝난 후 여자들만 사는 금면왕조는 평화가 찾아온 모습으로

뽕잎 아래 누에를 치며 아름다운 춤사위로

천신(天神)을 통하게 하는 신수(神樹)를 만들어 낸다

 

 

3막은 '단조(鍛造)'로서

금면여왕은 남면왕을 부하로 받아들이고 그 병사들을 이끌고 

공을 세워 죄를 씻을 것을 명하고

마침내 통천신수(通天神樹)를 만들어 낸다

 

 

4막은 '경전(慶典)'로서

금면여왕은 통천신수(通天神樹)를 만들어 낸 후

전쟁포로를 석방하고 성대한 축제를 연다

환락의 금빛새, 상스러운 공작새, 붉은 깃을 단 병사들의 

웅대한 축제의 장이다

 

 

5막은 월하(月下)로서

달 빛 아래 구름 속에서 꽃송이가 날아오고 은은한 바람이 불어

마음에 취한 

금면여왕과 남면왕은 마음 속 사랑에 빠진다

 

 

6막은 '홍수(洪水)'로서

돌연간 우뢰와 함께 대홍수가 발생하여 금면왕조는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어

금면여왕은 남면왕의 만류에도 남면왕에게 권한을 넘겨주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져 나라를 지키고자 한다

 

 

7막은 '제천(祭天)'으로서

금면여왕은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신수(神樹)가 이끄는대로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은 금면여왕에 대한 그리움으로 노래를 부른다

 

 

8막은 '환화(幻化)'로서

노래를 부르는 중에 아름다운 금빛 태양조(太陽鳥) 변하여

고향의 푸른 하늘을 날고 있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금면왕조을 관람한 후 극장을 나와 숙소가 있는

허베이성(河北省) 다창현(大廠縣)에 위치한 호텔로 간다 

허베이성(河北省) 다창현(大廠縣)에 위치한

쉐라톤 랑팡 차오바이 리버 호텔(Sheraton Langfang Chaobai River Hotel)에서

밤을 보내고

베이징(北京) 시내로 가면서 보는

베이징 스차하이 체육운동학교(北京市 什刹海體育運動學敎)이다

 

 

스차하이(什刹海) 옛거리에 도착하니

인력거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다

 

 

스차하이(什刹海)의 주변 골목은 

청(靑)나라 시대 고관 귀족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한다 

 

 

대문 앞에는 당시에 문관 저택인지 무관 저택인지 표시하는

표지석이 문 양쪽으로 놓여 있고

또한 크기로서 어느 정도 직급을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문 안은 실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볼 수 없었으나

중국 전통 양식의 '사합원(四合院) 구조'의 집들이라고 한다

 

 

'스차하이(什刹海)'는

시하이(西海), 허우하이(后海), 첸하이(前海)의 3개 호수와

그 주변을 통틀어 가리키는 지명이라고 하며

'10개의 사찰이 있는 호수'라 해서

'스차하이(什刹海)'라는 지명을 붙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찰이 광화쓰(广化寺) 하나만 남아 있다고 한다

 

 

스차하이(什刹海)의 '옌다이셰제(烟袋斜街)' 지역이다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한 베이징(北京)의 골목길과 다르게

스차하이(什刹海)의 길은

비스듬하게 골목이 형성되어 셰제(斜街)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실제로 골목길이 곰방대처럼 닮기도 하였다고 한다

 

 

스차하이 옛 골목길을 걷던 중에

중국의 전통 가옥인 고택(古宅)으로 들어 선다 

 

 

'사합원(四合院)' 구조의 

중국식 전통식 고택(古宅)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다

중앙부에는 사당(祠堂)을 설치하여 놓았다

 

 

베이징(北京) 서민들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후퉁(胡同)' 골목이다

처음 도읍으로 정한 원(原)나라 때부터 '후퉁(胡同)'의 역사가 시작되어

800여 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고 한다

당시 식수였던 우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도시계획과 환경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대다수의 후통이 철거할 때에 위기도 봉착한 적이 있었다고 하며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지금은 이곳을 원형의 형태로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인력거를 타고

스차하이(什刹海) 투어를 시작한다

 

 

인력거를 타고가며 보는

스차하이(什刹海)의 호수 변으로 가는 길이다

호숫가를 따라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이어진다고 하는데

이쪽 변에는 길거리가 한적하다 

 

 

 

천단공원 부근의 동인당(同仁堂) 한약방으로 가는 중이다

동인당(同仁堂)은

1669년 강희제(康熙帝) 때에 창립된 한약방으로

중국 여행 때마다 들리는 것 같다

 

 

동인당에서 나와 찻잎 쇼핑센타로 이동하여 왔다

중국은 차(茶)가 유명한데

지역에 따라 다른 유명한 차(茶)가 있어

차(茶)를 구입할 때는 원산지로 가서 구입하라고 한다

유명한 차(茶)는

그 지역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보이차(普洱茶) 세트이다

4종 1세트로서 1세트에 수 백만원의 호가이다

 

 

베이징(北京) 중심가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이화원(颐和园)'으로 간다

 

 

이화원(颐和园) 안내도이다

 

 

이화원(颐和园)에 입장하려고

동궁문(東宮門) 앞에 선다

 

 

인수전(仁壽殿)이다

동궁문을 통과하여 들어서면 보이는 건축물이다

인수전은 황제가 조례를 열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옥좌(玉座)가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일명 광서제(光緖帝)를 수렴청정한 서태후(西太后)가 

정무를 보던 곳이라고 한다

 

 

폐가석(廢家石)이다

중국에서는 명문가 마다 대문 안에 '전지석(前支石)'이라고 하는

큰 돌을 세워두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대문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하는 기능도 하며

복이 빠져 나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돌은 어느 고위 관리의 집에 있던 전지석(前支石)이었는데

당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서태후(西太后)

그 돌을 탐내어 강압으로 이화원(颐和园)으로 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돌이 너무 커서 대문으로 통과할 수 없자

담장을 헐고 안으로 들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담장을 허물면 그 집이 망한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얼마 후 서태후(西太后)가 몰락하자

그 속설이 맞아떨어진 것이라 하여 이 돌을 폐가석(廢家石)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서태후가 기거하던 침궁인 낙수당(樂寿堂) 앞에서

황실 사찰로 들어가는 배운문(排云門) 앞까지 연결된

728m의 긴 복도인 장랑(長廊)이다

장랑(長廊)은

양쪽이 트여 있는 누각식 복도로서

위쪽의 들보에는 '홍루몽(紅樓夢)' '서유기(西遊記)' 등의

고전 소설의 대표적인 장면과 동식물 등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어

천히 걸어가며 음미하는 것도 좋다

 

 

이화원의 장랑을 걸으며 보는

곤명호(昆明湖)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치세를 한

청(靑)나라 제6대 황제인 건륭제(乾隆帝:1735~1796재위)가

황태후 60세 생신을 기념하여 지워 준

황실 사찰이었던 대보은연수사(大报恩延寿寺)였는데

1860년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하였을때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1886년 서태후(西太后)가 사찰 대신 궁전으로 짓고

문무백관과 황족을 맞이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고 궁전인

'배운전(排云殿)'으로 들어 가는 '배운문(排云門)'이다

 

 

담장넘어 배운전(排云殿) 지붕 뒤쪽으로

우뚝 솟아 보이는 누각인 '불향각(佛香閣)'이 보인다

 

 

이화원의 곤명호(昆明湖)를 유람하며

남호도(南湖島)의 함허당(涵虛堂)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유람선에 오른다

 

 

곤명호(昆明湖)를 유람하며 바라보는

배운전(排云殿) 뒤로 만수산(万寿山)에 우뚝 솟아 있는

1891년에 지어진 '불향각(佛香閣)'이다

이화원(颐和园)의 중심 역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만수산(万寿山)의 불향각(佛香閣) 쪽에서

남호도(南湖島)로 건너와 보는 '곤명호(昆明湖)'이다

조그만 유람선들도 많이 보인다

 

 

남호도(南湖島)의 산석을 쌓아 위에 지어진 '함허당(涵虛堂)'이다

건륭제(乾隆帝) 때는 강서성의 등왕각(滕王閣)을 모방한 망섬각(望蟾閣)이라는

3층 건물이었다고 하며 

광서제(光緖帝)때 중수하면서 단층으로 바꾸어

서태후(西太后)와 황제(皇帝)가 

이곳 함허당(㴠虛堂)에서 배들의 훈련을 지켜 보던 곳이라고 한다

 

 

 

함허당(涵虛堂) 안에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1906~1967)'에 관한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청(靑)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는

1908년 서태후(西太后)에 의해

3살 나이로 청(靑)나라 제12대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로 등극하였다고 한다

1912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中華民國)이 들어서며 황제자리에서 퇴위하였으며

자금성 내에서만 군주로 허락되어 생활할 수 있었으며

1917년 청의 부활을 주도한 군벌들에 의해 다시 황제가 되었으나

10일 천하가 되었다고 한다

1924년 쿠데타로 베이징을 장악한 군벌 펑위상(馮玉祥)에 의해 자금성에서 쫒겨나

베이징(北京)의 일본 공사로 피신하게 된다

1934년 일본에 의해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일본으로 피신하려다

소련군에 붙잡혀 전범관리소인 하바롭스크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한다

1950년 중국 푸순 감옥으로 이감되어 평민순화 교육을 받은 후 

195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어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일하다가

1967년 사망하였는데 유언으로

만주국 황제 시 탄위링(譚玉齡)이 죽음으로 떠나 보낼 수가 없었던

장춘의 반야사에 보관하고 있던 '탄위링(譚玉齡)의 시신'을

감옥에 갇히며 더이상 보관할 수 없어

화장하여 보관하였던 탄위링( 譚玉齡) 시신을 감옥에서 나온 후 찾아서  

5번째 부인 모르게 집에서 보관까지 하며

탄위링( 譚玉齡) 사진을 지갑에 넣어 품고 다니며 사랑하였던

셋째 부인 '탄위링(譚玉齡)'과 합장하여 주기를 바랬지만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베이징(北京) 서쪽의 청서릉(淸西陵) 인근에

1995년 화룡황원(華龍皇園)의 부의 묘(溥儀 墓)가 조성되고

2006년 부의 묘(溥儀 墓)의 좌측에 탄위링( 譚玉齡) 묘가 조성되고

우측에 첫째 부인이며 황후였던 '왕룽(婉容)' 묘역인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라는 시호의 비석이 세워졌다고 한다

 

 

푸이(溥儀) 황제에게는 5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첫번째 부인으로 만주족 출신 황후였던 '왕룽(婉容:1906~1946)'이 17세에

두번째 부인 몽골족 출신 숙비였던 '원슈(文繡:1909~1953)'가 13세에

1922년 두 여인과 한날 한시에 결혼하였으나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첫째 부인 '완룽(婉容)'은 푸이 황제가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하는 것을 못마땅이 여기고

일본을 증오하다가 아편에 중독에 빠져 1946년 연길 감옥에서 죽었다고 한다

둘째 부인 '원슈(文繡)'는 완룽의 질투와 시기로 인해

1931년 이혼하고 평민으로 돌아가 편집국 직원,  사탕팔이 등으로 전전하다가

1953년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 황실에서는 최초로 이혼한 여인이라고 한다

셋째 부인 만주족 출신 '탄위링(譚玉齡:1920~1942)'은

1937년에 결혼하여 푸이(溥儀) 황제가 가장 사랑하였던 부인이라고 한다

그녀는 일본을 싫어하였는데 가벼운 병중에

일본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갑자기 죽게되어 독살설이 있다고 한다

 

 

넷째 부인 평민 출신 리위친(李玉琴:1928~2001)은 15살인

1943년에 결혼 후 무조건 복종하라는 노예취급의 조건으로 결혼하였는데

푸이(溥儀) 푸순 감옥에서 1950~1959년 옥살이 하는 동안 

6번 면회를 갔었다고 하며

1956년 창춘시 도서관원으로 취업하며

1958년 감옥에 있던 푸이(溥儀)와 이혼하고 장춘 TV방송국 기술자와 재혼하여

1980년 지린성 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이 되었으며

2001년 창춘시에서 간경화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다섯째 부인 평민의 항저우 출신 리수센(李淑賢:1924~1996)은

1962년 처녀 간호사로서 중국정부의 주선에 의해 결혼하여

알콩달콩 살면서

1967년 푸이(溥儀)가 사망할 때까지 옆을 지킨 부인이라고 한다

 

 

중국의 3대 악녀로 꼽는

'서태후(西太后:1835~1908)'는

몰락한 관리의 딸로서 어린시절 매우 가난하여 애인 영록과 이별 후

1851년 17세에 궁녀가 되었다고 한다

입궁한지 4년되던 21살에

청나라 제9대 황제 함풍제(咸豊帝:1850~1861재위)의 눈에 들고

성은을 입어 아들 재순(載淳)을 낳았는데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이후 의비(懿妃)를 거쳐 의귀비(懿貴妃)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아들이 없던

정빈(貞嬪)과 정귀비(貞貴妃)를 거쳐 황후(皇后)된 자안황후(慈安皇后)가

재순(載淳)의 모후가 되어 양육하였다고 한다

1860년 함풍제(咸豊帝)는 서구 열강의 영.프 연합군의 공격으로 피난길에 올라 병을 얻어

1861년 31세 나이로 요절함으로서

당시 의귀비(懿貴妃)의 아들인 재순(載淳)이

6살 나이로 동치제(同治帝:1861~1874) 등극하였는데

황후와 의귀비는 같이 수렴청정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동치제(東治帝)의 친모인 의귀비는 자희황태후(慈禧皇太后)가 되어

자금성 서쪽에 거주하여 '서태후(西太后)'라고 하였다고 하며

황후였던 자안황후(慈安皇后)는 글씨를 모르는 문외한으로

그리 정치에는 관심 없이 꼭 나설때만 나서는

자안황태후(慈安皇太后:1837~1881)가 되어

자금성 동쪽에 거주하여 '동태후(東太后)'라고 불렀다고 한다

동치제(同治帝)는 친모보다는 동태후를 더 따랐다고 하며

서태후(西太后)의 수렴청정이 심해지자

힘이 없던 동치제(同治帝)는 향락에 빠져 있다가 20살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서태후(西太后)는

친아들 '동치제(同治帝)'가 병이 깊어져 사망하기 전

함풍제(咸豊帝)의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과 사이에 태어난

4살의 광서제(光緖帝:1874~1908)를 황제로 옹립하고서

수렴청정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1889년 서태후(西太后)는 문무백관들을 자기의 측근들로 채워놓은 후

광서제(光緖帝)가 16살이 되던 해에 결혼시키면서 황제의 친정을 선포하고

이화원(颐和园)으로 거처를 옮겨 갔는데 보여 주기식 이었다고 한다

광서제(光緖帝)는 이화원(颐和园)으로 가서 수시 업무를 보고 지시를 받으면서

성인이 된 허수아비 광서제(光緖帝)는

서태후(西太后)의 수렴정치로 인해 기울어 가는 청(靑)나라를

청.일전쟁을 통해 좁았던 황제의 입지를 벗어나 보려고 하였으나 패전하였고

황제의 입지가 강화될까 염려되었던 서태후(西太后)는

전쟁 중에 해군의 군비를 빼내어 이화원(颐和园)을 치장하는데 썼다고 한다

 

패전 후 중국을 우습게 본 열강들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광서제(光緖帝)는 새로운 지식인층 동조하였으나

서태후(西太后) 손아귀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1898년 광서제(光緖帝)는

입헌파 캉유웨이(康有爲)에 접근하여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하여

입헌군주제를 꾀하자

서태후(西太后)는 자기 측근들의 관료들을 부추겨 무술정변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유폐시키고 신정을 100일로 종식시키고

무술변법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처형시키며 수렴청정을 다시 시작하였다고 한다

서태후(西太后)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젖이 잘 나오는 두 부녀자를 선발하여

 몸에 꼭 붙는 진홍색 옷을 입힌 후에 유두 부분만 나오게 하여 무릎 꿇고 앉으면

침상에 누운채 젖을 빨아 먹었다고 하며

선발된 부녀자들은 서태후(西太后)에게 좋은 젖을 받치기 위하여

소금기가 없는 산해진미만 먹게 하였다고 한다

옷은 3000여 상자나 되어 매일 옷을 갈아 입고 다녔으며

몸치장은 각종 보석이나 비치로 화려하게 치장하며 사치를 하였다고 한다

여기 남호도(南湖島)를 미남도(美男島)라고도 하는데

수렴청정을 하면서 베이징(北京)에 있는 미남들을 불러 성 관계를 맺고

죽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자주 바꿔 가며 남자를 취했다고 한다

1908년 74세의 몇 일간을 계속 이어 가던 생일 잔치 중에 식탐으로 설사 병에 걸려

유폐된 광서제(光緖帝)가 사망한 다음날

청(靑)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3살의 푸이(溥儀)를 황제로 지명한 뒤

서태후(西太后)도 사망하면서

청(靑)나라도 멸망해 가며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고 한다 

 

 

남호도(南湖島)에서 육지로 연결된

무지개처럼 생긴 아치형 다리인 '십칠공교(十七孔橋)'이다

 

 

'십칠공교(十七孔橋)'의

길이는 150m 정도 되며

난간에는 사자상이 544마리나 조각되어 있는데

크기나 생김새가 각각 다 다르다고 한다

 

 

이화원(颐和园)은

청(靑)나라의 여름 궁전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황가원림(皇家園林)이라고 한다

원(原)나라와 명(明)나라 때 물 저장고로 사용하면서

서호(西湖)라고 하였다고 한다

청(靑)나라 최전성기를 이룩한 건륭제((乾隆帝)에 의해

황실원림(皇室園林)인 청의원(靑漪園)을 조성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1750년 어머니 황태후의 60세 생일을 경축하기 위해서

청의원(靑漪園)을 건설하기 시작해서 1764년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화원(颐和园)이라는 이름을 갖게된 것은

영.프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원명원(圓明園)을 복구할 수 없자

1886년 서태후(西太后)가

해군의 전력증강을 위해 마련한 예산 중 거금 2400만 냥을 뺴내어

청의원(靑漪園)을 여름 궁전으로 조성하면서라고 한다

서태후(西太后)의

개인적인 탐욕에 의한 군비 남용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로

청.일전쟁에서 패배함으로서

종이 호랑이 국가가 되어 열강들이 몰려들어 내정 간섭속에

청(靑)나라는

멸망의 가는 길로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화원 관광을 마치고

옥(玉)공예품 및 보석쇼핑 센타인 중예공예 국제회사로 이동하는 중에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가림막에 쓰여진 문구를 본다

중국에 대한 나라사랑(愛國) 덕(德), 정성(誠), 믿음(信), 벗(友) 등을

새겨 놓아 국민성 고취를 높이려는 것 같았다

 

 

옥(玉)공예품 및 보석쇼핑 센타인 

중예공예 국제회사이다

 

 

백옥(白玉) 공예품

 

 

진한 회백색 옥(玉) 공예품

 

 

흑옥(黑玉) 공예품

및 

보석 제품 등으로 목걸이, 팔찌, 악세사리, 기념품 등을 

아이 쇼핑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우리 있는데로 오니 직원이 소개한다

 

 

 

이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라고 하며

고향이 인천이라고 한다

 

 

 

이화원(颐和园) 관광을 끝으로

이번 여행에서 북경(北京) 관광을 마무리하고 

오늘 저녁식사를 하고 호텔로 가서 오늘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중국(中國)을 소개하면

국토 면적은 9,572,900㎢로 우리 남북한을 합친 면적 223,248㎢의

42.9배나 크고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국토 면적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동서 길이는 5,250Km이며 

남북 길이는 5,500Km이고

국경선의 총길이는 2만Km

해안선 길이는 1만4000Km에 달한다고 한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는

남쪽으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남서쪽으로 인도, 부탄, 네팔,

서쪽으로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키르스탄, 카자흐스탄

북쪽으로 러시아, 몽골

동쪽으로는 우리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총 14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이다

 

 

 

중국의 인구는 14억3776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많은 인종(人種)과 어족(語族)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라고 한다

민족 구성으로 한족이 92%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좡족, 만주족, 회족, 묘족 등의 56개의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거주하고 있다

 

 

중국에서 종교는

불교, 도교, 라마교, 이슬람교, 로마가톨릭, 그리스도교 등이 있으나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무신론(無神論)을 표방하고 있어

신도 수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중국의 국가 GDP는 14조1401억6300만 달러 (세계2위)

1인당 GDP는 1만99달러 (세계67위)이다

<2019년 대한민국 국가GDP: 1조8295억3200만 달러(세계12위), 1인당GDP 31,431달러(세계28위)>

 

 

이번 중국 북경여행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 식당이다

 

 

술을 파는 주류센터로 보이는데

안에는 식당도 있으며

여러가지 쇼핑센터도 있었다

 

 

어제 저녁에

허베이성(河北省) 다창현(大廠縣)에 위치한

쉐라톤 랑팡 차오바이 리버 호텔(Sheraton Langfang Chaobai River Hotel)으로

돌아와 이번 여행 마지막을 보내고

 

아침 일찍 서둘러

'베이징 서우드 국제공항(北京首都國際空港)'으로 와서

 

'베이징 서우드 국제공항(北京首都國際空港)'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출국장에서 대기하다가

 

 

북경시간 오전 11시 20분에 이륙하여

한국시간 14시 10분인

비행시간 1시간 50분을 날라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시차는 우리 대한민국이 1시간 빠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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