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Croatia)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서
국경을 넘어
어두운 밤 중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 국가에서
바다인 아드리아 해로 유일하게 나갈 수 있는
레움(Neum)이라는 해안도시로 왔다
크로아티아(Croatia)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서 60Km의 거리를
국경을 통과 여권심사 시간이 길어져 3시간45분만에
네움(Neum)에 도착하니
늦은 밤이라
호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아도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다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바라보니 바다가 보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에서 유일한 해안지대로
21Km의 좁은 해안선을 확보하여 내륙국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크로아티아(Croatia) 영토가 위 아래 앞의 바다길을 둘러싸고 있어
큰 배가 출입할 항구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이 주일인데
TV에서 우리나라 온누리교회 CGN방송이 나와
이 먼나라에서 너무 기쁜 마음으로
주일아침 예배를 드린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 네움(Neum)에서
하룻밤을 보낸
아드리아 해(Adriatic Sea)를 바라보고 있는
아드리아 호텔(Adria Hotel)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 네움(Neum)에서
메주고리예(Medugorje)를 향해 출발한다
네움(Neum)에서 메주고리예(Medugorje)로 가는 길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에서
크로아티아(Croatia)로 국경을 넘어 출국하여
크로아티아(Croatia) 영토를 달려
다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로 입국하여
메주고리예(Medugorje)로 가는 일정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의
네움(Neum)은
인구 4,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행정 구역상으로 헤르체고비나네레트바 주에 속하며
아드리아 해(Adriatic Sea)와 접해 있는
네움(Neum) 지역의 21Km 구간으로 인해
크로아티아(Croatia) 국가의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지역이
본토와 분리되어 있어
두브로브니크에서 크로아티아 본토로 차로 가려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가의 네움 지역 국경을 통과하는
입국, 출국 과정을 거쳐야 한다
네움(Neum)의 역사는
1699년 카를로브치(Karlovci) 조약 때 처음 등장한다고 한다
당시에 두브로브니크(Dubrovnik)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라구사(Ragusa) 공화국은
베네치아 왕국의 육상 침략 가능성을 막기위한 완충지역으로
오스만 제국에게
라구사 공화국의 북쪽 지역과 남쪽지역을 넘겨 주었는데
북쪽 지역은 네움(Neum) 지역의 클렉(Klek) 만 일대이며
남쪽 지역은 수토리나(Sutorina) 지역으로 현재의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이다
187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네움을 포함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체를 넘겨준 베를린 조약 후에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 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29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합류되었는데
199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들의 분리 독립 중에
내전(1992~1995년)의 고난을 겪으며
1995년 12월 평화 조인을 맺으면서 1878년 베를린 조약의 근거로
아드리아 해에 접한 네움(Neum)의 21Km 구간 지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토로 정하여졌다고 한다
출발한지 10여 분 지났을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가는
네움(Neum)-클렉(Klek) 국경검문소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크로아티아(Croatia)로 국경을 넘어와
국경에 있는 클렉(Klek)이라는 마을이다
클렉(Klek)은
크로아티아(Croatia) 남부의 달마티아(Dalmatia) 지역의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마을로서
인구 230명 정도 거주하는
스리브노(Slivno)의 지역에 위치한 관광지역이라고 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를 여행하고 있는데
크로아티아(Croatia) 국토 구간을 거쳐가고 있는 중
아드리아 바다 쪽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토인 클렉(Klek) 반도 끝단이 보인다
크로아티아(Croatia) 라바(Raba) 지역을 근접할 때
좌측 창가로 보이는 언덕 위에 성당이 보인다
'스베티 안테(Sveti Ante) 가톨릭 성당'이다
스베티 안테는 '성인 안토니우스(Saint Anthony:251~356년)'로서
이집트 출신의 성인으로
사막에서 금욕주의로서 수도생활을 하며
로마가톨릭, 정교회, 콥트교에 많은 영향을 준 성인이라고 한다
아드리아 해(Adriatic Sea)를 끼고 있는
발칸 반도의 국가들을 여행하며
오랫만에 크로아티아에 와서야 평야지대는 처음으로 보는 것 같다
크로아티아(Croatia)의 포드그라디나(Podgradina)이나
평야 지대 저멀리로
디나르알프스 산맥(Dinaric Alps Mountains)이 지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득히 머~얼리 평야지대가 펼쳐지고 있다
그리스에서 마케도니아로 들어와서 알바니아, 몬테네그로를 지나 오면서
대부분 계속된 산악지대만 보며 지나오다가
넓은 평야지대를 보니 축복 받은 지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레브르슈니크 산(Mt. Lebršnik:1,985m)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코니츠(Konjic)를 지나 야블라니카(Jablanica) 호까지 흐르고
그곳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모스타르(Mostar)를 지나 아드리아 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라고 한다
강의 전체길이는 218㎞이며
상류 유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험준한 협곡이라고 한다
크로아티아(Croatia)로 흐르는 네레트바 강이
아드리아 해로 흘러드는 끝단 지역인 로고틴(Rogotin) 부근으로
기차 철길이 보인다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과 아드리아 해(Adriatic Sea)가
만나는 곳에 형성된
크로아티아 플로체(Ploče) 지역의 산업단지가 보인다
플로체(Ploče) 지역에서
고속도로와 같은 도로를 타기 시작하는데
산악지대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 국경이 가까워지자
고속도로가 끝나가며 요금소가 나온다
노바 셀라(Naplatna Postaja Nova Sela) 요금소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로 넘어 가는 국경이
고도가 높은 곳에 있는 것 같다
다시
크로아티아(Croatia)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로
넘어가는
노바 세라-비야차(Nova Sela-Bijača) 국경검문소에 도착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의
비야차(Bijača)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자 쏜살 같이 속도를 낸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출국과 입국 수속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야차 국경검문소을 통과하니 고속도로이다
나플라트노 미에스토 쯔비로비치(Naplatno Mjesto zviroviči) 요금소까지
약 22Km 정도 구간의 고속도로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하여 휴게소로 들어선다
오드모르쉬테 크라비쎄 남부(Odmoršte Kravice Jug) 휴게소이다
네움(Neum)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약 70Km 거리를 오전 10시 45분인
3시간 45분 정도 걸려 '메주고리예(Međugorje)'에 도착한다
국경 통과 심사시간이 좀 길었던 탓이기도 하다
메주고리예(Međugorje)는
인구 약 4300 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자그만 시골 도시로
성모 발현지로 알려진 곳이라 그런지
오늘 주일로서
꽤 넓은 주차장에 굉장히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메주고리예(Međugorje)'는
1981년 6월 24일 이곳 크르니카 언덕(Crnica Hill)에서
여섯 아이들이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하여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된 곳이라고 한다
'메주고리예(Međugorje)' 성당 앞에 있는 공원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많이 줄지어 서 있다
'치유의 예수상(Međugorje's Risen Christ Statue)'이다
방문자들은 이 동상 무릎 아래를 만지기 위하여
줄을 서 있는 것이다
이 치유의 예수상 무릎 부위에서 성수가 흘러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
무릎 아래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병이 치유된다고 믿어
아침부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다고 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만져서 무릎 아래 부분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다
성당 건물이 있는 곳을 향하여 간다
공원에는 성경에 나오는 성화들이 그려져 있는
성화그림 부스들이 여러개 놓여져 있어
성화들이 무엇을 표현하여 놓았나를 감상하며 성당 쪽을 향해 간다
지금 미사를 드리고 있는 시간인데
성당 앞 광장에 놓여 있는 의자에
미사를 드리고 있는 신도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메주고리예(Međugorje)' 성당 옆에 세워진 커다란 모니터 화면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과
스피커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는 소리가 들려 흘러 나온다
신도들은 햇볕이 비치는 광장에 있지 않고
성당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숲
그늘 밑에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고
성당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미사 드리고 있는 장면이
모니터로 비추어지고 있었다
'메주고리예(Međugorje)'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메세지는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분께로 다시 돌아와
평화의 구원을 받으라"는 것으로
'그분의 아들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을 급히 전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메주고리예(Međugorje)'에서
1981년 6월 24일 '성모 발현이 목격되었다'는 이후로
이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고 하며
2019년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메주고리예(Međugorje)'에
순례를 공식 허용했으나
아직 '성모 발현 순례지'로 인준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메주고리예(Međugorje)에서 일정을 마치고
모스타르(Mostar)로 향한다
'메주고리예(Međugorje)'에서 '성모 발현'에 대한 논란 내용은
첫번째는
1991년 4월 10일 유고슬라비아 주교회의에서 조사한 결과
메주고리예가 초자연적발현과 계시와 무관하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성모 마리아께 건강한 신심행위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행해지고 있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오기 때문에 사목자들의 관심이 요청되고 있으며
계속해서 조사를 이어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고 한다
두번째는
2017년 2월 26일 모스타르-두브노 교구장 '라트코 페리치' 주교가
발현을 보았다는 6명을 면담한 결과
이들의 목격담은 의심의 여지가 많다고 밝히며
성모 발현은 없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유는
성모님은 먼저 말을 걸어야 말을 하였다는 점과
어떤 질문에는 이상한 웃음을 지며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점과
목격자들과 사목자들의 요청에 따라 성모님이 언덕에서 내려오기도 하였다는 점과
메주고리예에 성모님이 얼마나 더 발현할지 모르고 있다는 점과
목격자들이 베일을 밟거나옷을 만질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는 점이
'복음서에 나오는 성모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성모의 발현은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세번째는
2019년 5월12일 교황청은 메주고리예에 대한 순례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지만
성모 발현의 진위에 대해 아직 조사하고 있으며
성모발현의 진실성에 대한 인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네번째는
교황 프란치스코와 알렉산드르 아위 멜로 신부와의 대화에서
"메주고리예에는 은총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흐뭇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2019년 5월 교황은 순례는 공식 허용했으나
성모 발현 인준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주고리예(Međugorje)와 모스타르(Mostar)의 중간 정도 위치에 있는
스레트니쎄(Sretnice)라는 곳을 지나고 있는 풍경이다
멀리 높은 산도 보인다
모스타르(Mostar)는 메주고리예(Međugorje)에서
약 40Km 거리에 위치하고 도시이다
밀리코비치 모스타르(Miljkovići Mostar) 부근에서 보는
큐레(Čule) 부근이다
활주로처럼 보이는데 활주로가 아니라 인공수로이다
고개 정상에 오르니 산 아래로
모스타르(Mostar)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메주고리예에서 모스타르까지
약 40분 정도 소요되어 도착하는 것 같다
메주고리예 쪽에서 모스타르 방향으로
고개를 오를때는 그리 꼬불꼬불 한지 모르고 올랐는데
모스타르로 내려 가는 길은
많이 꼬불꼬불하며 경사가 있었다
모스타르(Mostar) 시가지로 거의 다 내려 가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공동묘지부터 보인다
그로브례 마스리네(Groblje Maslibe)라는 공동묘지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에서
1992~1995년 내전 때에 가장 치열했던 곳 중의 한 장소가
모스타르(Mostar)로서
공동묘지에 묘비에는 이 기간의 사망하였다는
내용의 묘비가 대부분으로 가장 많이 보인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에서 다섯 번째 큰 도시로서
도시 한가운데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이 흐르고 있다
'모스타르(Mostar)'라는 지명은
중세 시대에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 위에서
스타리 모스트(Stari Moct)를 지키던
'파수꾼(Mostari)'들을 지칭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에서 자치제(自治制) 도시이며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 지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시로서
헤르체고비나네레트바 주(Herzegovina-Neretva Canton)의 주도(州都)라고 한다
모스타르의 인구는 12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모스타르 평화의 종탑(Mostar Peace Bell Tower)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메주고리예(Međugorje)에서 출발한지
40분 정도 소요되어 버스에서 내린다
'모스타르 평화의 종탑(Mostar Peace Bell Tower)'은
1992~1995년 유고슬라비아 연합의 내전으로
모스타르(Mostar) 지역이 폭격 당함으로 인하여
인명 피해가 많고 건물들이 많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내전이 끝나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2000년도에 높이 107.2m로 세워졌다고 한다
종탑 옆에는
'베드로와 바울 성당(Cathedral St. Peter & Paul)'이 있고
성당 옆에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San Francesco Convent)이 함께 있다
1874년 성당과 수도원이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1992~1995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파괴된 것을
재건축 한 것이라고 한다
모스타르 평화의 종탑 쪽에서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로 가는 길목의
구시가지 입구에 있는 음식점 지하에서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한다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 식당 앞에서 서성이는데
우뚝 솟은
'모스타르 평화의 종탑(Mostar Peace Bell Tower)'이 보인다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길의
도로 바닥이 조약돌인 '오네쉬추코바(Onešćukova)'라는
골목길이다
구시가지의 올드 브리지인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가 있는 곳을 향해
'오네쉬추코바(Onešćukova)'를 걷는데
'타라 타워 모스타르(Tara Tower Mostar)'가 보인다
모스타르 구시가지의
'오네쉬추코바(Onešćukova)'를 걷는 중 보는
'하디 쿠르토바 다미야(Hadži-Kurtova džamija)'인 모스크이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에서 보는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이 흘러가고 있는 남쪽 방향이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에서 보는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이 흘러오고 있는 북쪽 방향이다
강 언덕 위로
코스키 메흐메드 파사 모스크(Koski Mehmed Pasha Mosque)가 보인다
1617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를 건너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시장 골목이 나온다
구 바자르(Old Bazaar)인
'쿠준질룩(Kujundziluk)'이라는 시장 골목이다
이 시장의 명칭은
전통적 그들이 만들어 팔았던
금장수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쿠준질룩(Kujundziluk)' 시장에서는
정통 그림과 구리 또는 청동 조각품 및 중세 묘비석인 스테차크(Stećaks) 등과
헤르체고비나의 자연의 상징인 석류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의 랜드 마크이자 상징인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위에서 한 컷을 남겨본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아래인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가 내려가기 위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보는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를 지켰던
타라 타워 모스타르(Tara Tower Mosrar)이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이다
'스타리 모스트'란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1557년 공사를 시작하여 1566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길이는 30m, 폭은 4m, 높이는 24m로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술레이만(Sultan Suleiman)의 명령에 따라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의 학생이자 견습생인
미마르 헤이루딘(Mimar Hayruddin)에 의해 설계되었다고 한다
다리 좌측으로는 타라 타워(Tara Tower)가 보이고
다리 우측으로는 할레비자 타워(Halebija Tower)가 보인다
이 양쪽의 타워들은 항상 다리를 수호하여 왔으며
오스만 제국시대에는 탄약 창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아래에서 있는 동안
다리 위 난간에서 다이빙하는 제스처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이제나 저제나 뛰어 내릴까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은 다이빙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리를 뜬다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곳을 향한다
모스타르(Mostar)의 시내에는
내전 당시의 처참함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부서진 건물들,
총탄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목격되었다
이제 모스타르(Mostar)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의 수도(首都)인
사라예보(Sarajevo)를 향하여 출발한다
사라예보(Sarajevo)로 가는 길은 북쪽 방향인데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을 건너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와
모스트 하사나 다리(Most Hasana Brkića)를 건너 북쪽으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 가는 중에
'하디 쿠르토바 다미야(Hadži-Kurtova džamija)'의 모스크 첨탑이 보인다
여기에도 공동묘지가 보인다
샤리차 하렘(Šarića Harem)이라는 공동묘지이다
1992년에서 199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의 내전 중에
전투가 굉장히 심하였던 모스타르(Mostar)에서
2000여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고 하는데
묘비 명에는 당시 내전 사망자 명단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 역사는
모스타르의 주변의 험산(Mt.Hum)과 벨레산(Mt.Velež) 사이의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에 있는 인간의 정착지에서
요새화된 성곽(Enceintes)과 공동묘지(Cemeteries)가 발견되었는데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아 왔었고
로마 점령의 증거가 현재의 마을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는
중세에까지 초기 기독교 교회(Basilicas)들이 이용되었지만
역사적 출처는 거의 보존되지 않았고
이 시기까지 대해서 별로 알려져 있는 것이 없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의 이름은
1474년부터 '다리 관리인(Mostari)'을 뜻하는 이름의 문서에서
처음 언급되었다고 하며
이것은 강변의 시장에서 대상, 군인, 여행자들이 이용하였던
네레트바 강에 나무 다리가 존재하였다고 한다
1468년 모스타르(Mostar)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 있었고
정착촌의 도시화가 시작되었으며
당시에 다리 주변으로 요새로 만들어져 있어
요새를 의미하는 '쾨프뤼히사르(Köprühisar)'라고 불렸다고 하며
그 중심에는15채의 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두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형성되어 있었는데
공예품 및 상업 중심지역과 주거 중심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는
1520년~1566년 사이에 요새화되었고 나무 다리는 돌로 재건되었는데
이 다리가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라고 한다
16세기 후반 '쾨프뤼히사르(Köprühisar: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의 군(郡:Sanjak)에 해당되는 한 곳이었다고 한다
17세기 이곳을 지나던 '에블리야 에레비(Evliya Elebi)'라는 여행자는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를 보고
"다리는 하늘까지 치솟는 무지개 아치와 같으며
한 절벽에서 다른 절벽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알라신의 가난하고 비참한 노예인 나는 16개국을 통과했지만
이렇게 높은 다리를 본 적은 없다
그것은 하늘만큼 높은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 간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그렇게 많이 높다고 생각지는 않으나
당시에는 굉장히 높은 다리였을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장악하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통치하였는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일부가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모스타르(Mostar)'가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의 비공식 수도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1834년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였던 모스타르(Mostar)에
첫 교회로 세르비아 정교회가 처음 세워졌으며
1881년에 모스타르-두브노의 로마 카톨릭 교구의 자리가 되었다고 하며
1939년에는 크로아티아의 바노비나(Banovina)의 일부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모스타르(Mostar)는
파시스트 독립 국가였던 크로아티아(Croatia)의 중요한 도시였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는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시대에
네레트바 강(Neretva)에서 수력 발전을 이용하기 위해
여러 개의 댐을 건설하였으며
플라스틱, 담배, 보크사이트, 와인, 알루미늄 등의 주요 산업 및
관광 중심지로서 경제적으로 번영하였다고 한다
1992년 4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모스타르(Mostar)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크로아티아 군(HVO)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모스타르는 JNA에 의해 포위를 당하였는데
상당한 보스니아 인들은 HVO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1992년 4월부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모스타르(Mostar)에 정기적으로 포격을 가하여 도시를 장악하며
JNA의 연합군인 세르비아군(VRS)이 도시를 장악하였는데
6월 초에 크로아티아 군(HVO)은 자칼(Jackal) 작전이라는 공격 코드로
목적은 VRS로부터 모스타르(Mostar)를 구출하고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서 JNA의 포위망을 깨는 것이라고 한다
1992년 6월말 크로아티아 군(HVO)은 세르비아 군(VRS)를
모스타르(Mostar)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고 한다
전투 중에 수 많은 종교 건물과 도시 대부분의 다리가 파괴되었는데
세르비아 군(VRS)이 도시를 떠난 후에
세르비아 정교회의 '이토미슬리(Itomisili) 수도원'과
'성 삼위일체 성당(Cathedral of the holy Trinity)'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를 세르비아 군에서 탈환 후
1992년 말 내내 크로아티아 인과 보스니아 인 사이에 긴장이 증가되어
1993년 초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로 전쟁으로 확대되어
네레트바 강을 사이에 두고
크로아티아 군(HVO)이 지배하는 서부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ARBiH) 군이 다스리는 동부로
분열된 도시가 되었다
1993년 5월 양쪽은 격렬한 포격전으로 싸움이 벌어졌으며
도시는 인종적 노선을 따라 분열되었으며
여러가지 공세로 교착상태를 초래하며 도시는 초토화되었으며
크로아티아-보스니아 분쟁은
1994년 워싱턴 협정에서 서명으로 끝을 맺었으며
1995년 데이톤(Dayton) 협정으로 내전이 종식되었다고 한다
이 내전으로 약 2000여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모스타르(Mostar)는
현재도 인종적 나뉜 도시로 정치적인 지배는 동등하게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들 사이로 분배되었다고 하며
모스타르에 세르비아 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lps Mountain Randes)에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이 흐르고 있다
네레트바 강(Lenetva River)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 Herzegovina)의
레브르슈니크 산(Mt. Lebršnik:1,985m)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코니츠(Konjic)를 지나 야블라니카(Jablanica) 호까지 흐르고
그곳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모스타르(Mostar)를 지나 크로아티아(Croatia)의 앞바다인
아드리아 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라고 하고
강의 전체길이는 218㎞이며
상류 유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험준한 협곡이라고 한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lps Mountain Randes) 안에
도냐 야블니카(Donja Jablnica) 부근의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이 흐르는 강변에 보이는
코바예비츠 음식점(Restoran Kovačević) 옆에 주차를 하고
네레트바 강에 있는 다리 위로 걸어와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코바예비츠 음식점(Restoran Kovačević)이다
엄청난 양의 돼지 바베큐를 만들어지고 있는 장면이 장관이다
물레방아 형식이지만
실제로는 전기로 가동시키고 있다고 한다
다시 사라예보(Sarajevo)를 향해 출발한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관통하고 있는 중이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lps Mountain Range)은
남유럽 발칸 반도에서 서쪽 해안 쪽으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알바니아에 이르는
7개국에 거쳐 있는 산맥이다
야블라니카 호수(Lake Jablanica)에
오스트로야크(Ostrožac) 지역의 다리가 보인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pls Mountain Range)은
발칸반도의 서쪽 아드리아 해(Adriatic Sea) 연안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645Km 정도 뻗어 있으며
디나르 알프스 산맥의 북서쪽에 위치한
율리안 알프스 산맥(Julian Apls Mountain Range)의
샤르(Sar) 산맥-코라브(Korab) 산괴 북쪽에서 남쪽으로 뻗어 있는 산맥이다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pls Mountain Range)에서
가장 높은 산은 마야예제르처봉(Maja Jezercë:2,692m)으로
알바니아(Albania) 북부와 몬테네그로 동부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사라예보(Sarajevo) 외곽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라예보(Sarajevo)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의 수도(首都)로서
인구 약 34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사라예보 대도시권까지 포함하면
약 6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사라예보(Sarajevo)는
근처에 있는 트레베비치 산(Mt.Trebević:537m)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서로 흐르는 밀랴츠카 강(Miljacka River)을 끼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사라예보(Sarajevo)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선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가장 초기의 정착 발견 중 하나는
신석기 부트미르(Butmir) 문화의 발견이다
부싯돌이 풍부하게 자라는 이 지역은 신석기 인류에게
아주 유용하여 정착지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부트미르(Butmir) 민족은
독특한 도자기와 도자기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사라예보(Sarajevo)에
거주했던 민족은 일리리아인(Illyrians)으로
밀자카 강(Miljacka River)과 사라예보 계곡(Sarajevo Valley)을
중심으로 정착촌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일리리아인 대시타테스(Daesitiates)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서기 9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에 의해 정복되기도 하였으며
로마인 이후 고트족(Goths)이 정착하였고
7세기에는 슬라브족(Slavs)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중세 시대에 사라예보(Sarajevo)는
보스니아 왕국의 중심지 근처에 있는 브르보스나(Vrhbosna)의 일부였다고 한다
브르보스나(Vrhbosna)라는 도시는 존재하였으나
사라예보(Sarajevo)의 정착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다양한 문서에 토르니크(Tornik)라는 장소를 지적하고 있다고 하는데
마리진 드보르(Marijin Dvor) 지역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토르니크(Tornik)는 비교적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시장이었다고 한다
브르보스나(Vrhbosna)는 현재의 사라예보(Sarajevo)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하며
1238년 성 바울(Saint Paul)에게 헌정된 대성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 사라예보 올드 시티의 북동쪽에
호디드제드 요새(Hodidjed Citadel)가 있었는데
1263년경부터 1429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 될 때까지 건재하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이
1450년대에 이 지역을 정복하면서 사라예보(sarajevo)가 설립되었으며
1461년이 도시의 창립 년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보스니아의 초대 주지사였던
'이사베그 이샤코비(Isa-Beg Ishaković)가 자기의 성 '사라이(Saray)'을
도시의 명에 포함하여 '사라예보(Sarajevo)'로 명명하고
모스크와 여러가지 건축물을 세움으로서 수도(首都)로 변화시켰으며
그때 모스크는 술탄 메흐메드 2세(Sultan MehmedⅡ)를 기리기 위해
'카레바 다미야(Careva Džamija=Tsar's Mosque)'로 명명되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라예보(Sarajevo)는
16세기 중반까지 100개가 넘는 대규모 시장과 수많은 모스크로 유명하였으며
당시에 사라예보는 이스탄불 다음으로 발칸 제국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오스만 제국의 도시였다고 한다
1660년도 사라예보 인구는 8만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1683년 베오그라드 인구는 10,000여 명,
1851년 말 자그레브 인구는 18,000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하니
당시에 사라예보는
굉장한 대도시였을거라는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1667년 터키와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의 군주국이였던 사보이(Savoy)의
유진 왕자(Prince Eugene)가 오스만 제국과 싸워서
사라예보(Sarajevo)를 정복하였는데
이 땅에는 당시 전염병 감염되어 있어 철저히 약탈한 후에
하루 만에 불태우고 철저히 파괴하자
소수의 가옥과 일부 모스크, 정교회만 남았는데
1807년까지 파괴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구는 6만여 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1830년 보스니아 여러 군데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봉기가 일어났으나
반란은 실패했고 수십년 동안 오스만에 통치하에 있었다
사라예보(Sarajevo)는
1878년 베를린 조약의 일환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점령이 이루어졌으며
1908년에 완전한 합병이 뒤따랐고 세르비아 인들의 화를 불러 왔다고 한다
사라예보(Sarajevo)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의해 급속한 산업화가 되었는데
비엔나에 트램이 설치되기 전에
1885년 트램웨이(Tramways)와 같은 것이 최초로 설치 개통되는
새로운 발명품의 시험장이었으며
건축은 빠르게 다양한 스타일과 건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1914년 합스부르크 왕가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 방문하였을 때에
라틴교(Latin Bridge) 앞에서 저격 사건이 발생하여 부부가 사망하며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발생하였는데
전쟁에서는 발칸의 대부분 베오그라드(Beograd) 부근에서 일어났고
사라예보에서는 피해와 파괴는 면하였다고 한다
1918년 전쟁이 끝나고 보스니아(Bosnia)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되었고
사라예보는 드리나(Drina)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독일군과 이탈리아 군에 점령 당하며
1941년 4월 사라예보(sarajevo)는 독일군의 폭격에 이어
전차 보병사단에 점령 당하여
크로아티아(Croatia)를 중심으로한 독립국가를 창설하여
사라예보(Sarajevo)를
그들의 영토로 삼아 점령 직후
세파르디(Sephardi:스페인, 포르투갈, 북아프카계) 유대인 회당인
일 칼 그란데(il Kal Grande)는 나치에게 약탈되며 불태워지며 파괴되고
세파르디와 아슈케나지(Ashkenazi:독일, 폴란드,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크로아티아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보스니아 유대인 85%가 홀로코스트(Holocaust) 기간 동안
나치와 우스타샤(Ustaše:크로아티아 파시즘) 손에 의해 사망하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사라예보(Sarajevo)는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공화국 정부는 사라예보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도시의 산업을 발전시킴과 현대 도시로 변화시켰다
사라예보(Sarajevo)의 인구는
전쟁이 끝날 무렵 이 도시는 11만5000여 명에서
1995년 12월 내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끝나갈 무렵
인구 변화는 60만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사라예보(Sarajevo)가 우리 대한민국에 알려진 것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시대에
1973년 '제32회 사라예보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리의 이에리사, 정현숙, 박미리 선수가 여자 단체전 우승을 함으로서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나서 가난하고 아주 작은 나라로
세계에서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느 대륙에 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국가로서
최초로 세계 대회를 제패하는 쾌거를 이루어
우리 국민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한 곳이다
모스타르(Mostar)에서 출발한지
75Km를 달려와 3시간 만에
사라예보 시청(Sarajevo City Hall) 옆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린다
사라예보 시청(Sarajevo City Hall) 앞으로 흐르는
밀랴츠카 강(Miljacka River)에 놓여진
셰헤르체헤야 다리(Šeherćeheja Bridge)를 건너 간다
밀랴츠카 강(Miljacka River)변에 있는
'하디즈스카 모스크(Hadžijska Mosque)'이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정착촌 중 하나인 바비차 바쉬차(Babića bašća) 지역 공동체의
이웃인 알리파코바크( Alifakovac)에 위치하는
1541년에서 1561년 사이에 지어진 모스크 라고 한다
'사라예보 시청' 건물이다
예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 대학 도서관' 이었다고 한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전(1992~1995년)이 일어났을 당시인
1992년 8월 25~26일 밤에
사라예보가 세르비아계로 공격을 받아 세르비아인들이
이 도서관에 불을 질러
200만 권이 넘는 책, 학술지, 문서들이 불속에 사라졌다고 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람들은
내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게된 많은 것들을 잊지 말자고
"Don't forget"라는 글귀를 여러 곳에 써 놓은 것을
거리를 걷다 보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밀랴츠카 강(Miljacka River)에 놓여진
셰헤르체헤야 다리(Šeherćeheja Bridge) 뒤쪽 언덕에
'쿠츠크 카티브 무히즈디노바 다미야(Kučuk Katib Muhijdinova Džamija)'인
이슬람 모스크(Mosque)가 보인다
밀랴츠카 강변(Riverside Miljacka)을 서서히 걷는데
구 건물과 연결된 신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프레지던트 호텔(Hotel President)이라고 한다
밀라츠카 강(Miljacka River)의 '라틴 다리(Latin Brdge)'와
2,3층이 적색 건물인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Muzej Sarajevo1878~1918)'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하였을 때
이 라틴교(Latin Bridge) 앞에서 저격 사건으로 부부가 사망하는
'사라예보 총성'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장소이다
'사라예보 사건의 배경'은
1850년 국력이 약화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사라예보를 행정중심지로 선정하자
1851년 유혈폭동이 발생하였는데 오스만 제국은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고 한다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오스만 제국을 축출하고
1908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공식 합병을 선언하자
믈라다보스나 저항운동이 전개되면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믈라다보스나(Mlada Bosna)'는 19~27세로 이루어진
세르비아인만의 국가건설을 위한 비밀결사단체였다
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은근히 부추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1914년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석하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황태자 부부가 탄 오픈카가
이곳을 지나가던 순간
믈라다보스나(Mlada Bosna) 단원이었던
19살의 세르비아 소년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쏜 총탄에
황태자는 관통상을 입고 즉사하였으며
임신 6개월이었던 황태자비 소피아도 그 자리에서 절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사건을 구실로 세르비아와 전쟁을 결심하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하게 되었고
1918년 사라예보 의회에서 유고슬라비아 연합에 통합을
선포하였다고 한다
가지 후스레브 베고바(Gazi Husrev-Begova) 거리로서
우측은 오스만식 모스크로서 랜드마크인
가지 후스레브 베그 모스크(Gazi Husrev Beg Mosque)가 위치하고 있으며
좌측은 타슬리한(Taslihan) 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골목길이다
'가지 후스레브 베그(Gazi Husrev Beg)'는
16세기 중반 보스니아와 사라예보를 통치하였던 투르크인 통치자이다
타슬리한(Taslihan) 유적지이다
타슬리한(Taslihan)은
여관이자 대상(隊商)들의 숙소였다고 하며
1543년 보스니아와 사라예보의 통치자였던 투르크인
'가지 후스레브 베그(Gazi Husrev Beg)'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가지 후스레브의 대상 여관'으로
타슬리한(Taslihan)은 '돌로 만든 여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타슬리한(Taslihan)의 건물은 두개의 층으로 지어졌다고 하며
1층은 물품 저장고와 70여 마리 말을 수용할 수 있으며
2층은 30개의 객실이 있었으며
각 실마다 굴뚝이 있는 개별 난방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골목 끝으로
예수 성심 대성당(Sacred Heart Cathedral)이 보인다
'동방 정교회(Orthodox Church)'로서
5개의 돔(Dom)을 가지고 있는 신 바로크 양식의 동방 정교회는
보스니아 내전(1992~1995년) 때에 파괴되었다가
1999년 재건되었다고 한다
'예수 성심 대성당(Sacred Heart Cathedral)'이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의 주교가 성당 공사를 선포하여
1884년에 시작하여 1889년에 신 로마네스크 양식과 네오고딕 양식으로 완공한
사라예보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을 모델로 지어져
사라예보의 상징으로 여기는 성당이라고 한다
당시에 가톨릭이 국교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이 보스니아를 지배하는 정신적인 상징이었다고 한다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보스니아 내전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고 하며
성당 앞에는 보스니아 내전(1992~1995년)이 끝나고
1997년 4월 방문한 교황 바오로 2세를 기념하여 세운 동상이 보인다
'예수 성심 대성당(Sacred Heart Cathedral)' 앞 광장에
사각 테두리를 만들고 빨간 페인트 자욱이 있다
'사라예보 장미'라고 한다
이것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에 떨어진 '포탄 자욱'이라고 한다
'예수 성심 대성당(Sacred Heart Cathedral)' 옆에 있는 건물이다
유럽 중세풍 건물로
1층에 약국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풍의 석조 건물들이 서있는
페르하디야(Ferhadija) 거리이다
이 거리는 사라예보 문화가 만나는 거리이다
사라예보 문화의 만남(Sarajevo Meeting of Cultures)의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페르하디야(Ferhadija) 거리'로
오스트리아-헝가리 풍의 석조건물들과
십자가들이 주로 보이며
동쪽으로는 '사라치(Sarači) 거리'로
낮은 지붕의 터키식 가옥들과
십자가 보다는 첨탑들이 많이 보이는 거리이다
오스만식 모스크로서 랜드마크인
'가지 후스레브 베그 모스크(Gazi Husrev Beg Mosque)'이다
사라예보를 대표하는 이슬람식 건축물로
당시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가지 후스레브 베그’의 지시로
1530~1531년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 거리'이다
바슈카르지아는 터키어로 '중앙 시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핸드폰 가게인데
우리 나라 2개 기업의 상표가 크게 적혀 있어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사진으로 담았다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라는
중앙 시장에 있는
'바슈카르지아 모스크(Baščaršija Mosque)'이다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의 중앙 거리에
세빌리 샘(Sebilj Pond)이 보인다
세빌리 샘(Sebilj Pond)은
1891년에 만든 구시가지의 상징이라고 하며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어 식수로도 사용한다고 한다
세빌리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
'사라예보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에서
사람들이 자그마한 터키식 테이블과 방석있는 의자에 앉아
연기를 뻐금거리며
나르길레(Nargile:물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다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 부근에서
우리 한국인 교포가 운영한다는 기념품 샵이 있다고 하여 방문하였다
사라예보(Sarajevo)에
우리 한국인 교포가 총 10명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현재 우리를 안내하는 사라예보 현지 가이드는 어렸을 때에 이민와서 살고 있다고 하며
온 가족 4명이 가이드를 하는데
부모님은 전문적으로 가이드 일을 하고 있으며
아들 2명은 대학교를 다니며 알바로 가이드 일을 하고 있다며
현재 멋지게 생긴 큰아들이 가이드를 하고 있다
다시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로 나왔다
저녁식사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노천 카페 테이블에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 앉아 있다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는
사라예보(Sarajevo)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시절부터 수 많은 터키인들이 몰려 살았다고 하며
19세기 경까지 현재보다 2배 정도 더 많은 터키인들이 살았으나
화재 발생으로 대부분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재건되어진 모습이라고 한다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는
일명 '비둘기 광장'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고 하는데
넓은 광장에
수 많은 비둘기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라예보(Sarajevo)의 바슈카르지아(Baščaršija) 지역에서
일리자(iliža) 지역에 있는
BM International Hotel로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친다
비엠 국제 호텔(BM International Hoter)에서
또 하루의 아침이 밝아 왔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크로아티아(Croatia) 스플리트(Split)를 향하여 출발한다
가는 길은 어제 지나왔던
코니츠(Konjic)와 모스타르(Mostar)를 거쳐
보스니아 헤츠체고비나 비야차(Bijača)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여
크로아티아로 넘어갈 예정이다
사라예보(Sarajevo)는
유럽의 발칸 지역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등
매우 비극적인 현대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이다
1991년 세르비아군과 민병대에 의해 3년간이나 포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기간 45만 명이었던 사라예보 인구는
내전 후 30만 명 정도만 남았을 만큼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사망자들이 묻힌 공동 묘지들이
사라예보에는 많은 곳에서 목격할 수 있으며
도시 곳곳에 "Don't forget"이라는 글귀를 새기어 놓아
이 악몽을 잊지 않으려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사라예보(Sarajevo)에는
성당과 모스크,
정교회와 유대교 회당이 가까이 공존하는
유럽의 유일한 대도시로
역사의 복잡성을 지닌 동시에 다양성을 가진 도시라고 한다
다시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lps Mountain Range)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모스타르(Mostar)를 지날 때까지
디나르 알프스 산맥의 산악인데
사라예보에서 코니츠(Konjic)까지는 산세(山勢)가 험해보이지 않고
코니츠에서 모스타르 구간은
산세가 험해 보이나 멋진 구간이기도 한 구간이다
코니츠(Konjic)를 지나가고 있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약 60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인구는 약 2만 5,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도시이다
'코니츠(Konjic)'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가장 오래된
영구 정착지 중에 한 곳이라고 한다
마을 근처 지역은 4000년전에 정착된 것으로 추정되며
2000년경에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을 따라
상류로 이동하는 일리리아 부족의 정착지가 발견되었다고
1382년 6월16일 라구사(Ragusa) 공화국의 기록에
이름으로 가장 일찍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산세(山勢)가 험하면서도
아름답기도하며 장엄하기도 하다는 구간인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lps Mountain Range)의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을 따라
코니츠(Konjic)에서 모스타르(Mostar)까지의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산(山)이 참으로 희한하게 생겼다
산꼭대기까지 층층이로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줄무늬 단층 바위산이다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을 따라
모스타르(Mostar)로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를 소개하면
면적이 51,197.0㎢로
우리 대한민국 면적(100,364㎢)의 절반보다
약간 큰 정도 국토 면적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인구는 330만여 명이 거주하는 국가로서
소위 '구성 민족'이라 불리는
크게 3대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모가 가장 큰 집단 구성은
보스니아인으로 인구의 48%이며
세르비아인 37%
크로아티아인 14%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보스니아(Bosnia)와 헤르체고비나(Hercegovina)는
민족보다는 지명을 지칭하는 것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정치적으로 국토가 분류 되는데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중심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은 국토의 남부쪽으로 국토 51%를 차지하며
세르비아인이 중심인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은
국토의 북부쪽으로 국토 48.5%를 차지하는데
자치공화국으로 사실상 국토가 갈라져 있다고 한다
양측이 모두 속하고 있는 '브르치코 행정구(Brčko District)'는
국토의 동북부으로 국토 1.5%를 차지하고 있는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 국가는
3곳으로 국토가 분류된다고 한다
언어도
공용어로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크로아티아어로서
세르비아어는 '스릅스카 공화국' 지역에서 주로 쓰이며
크로아티아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보스니아어 다음으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이들 언어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공용어였던
'세르보크로아트어(Serbo-Croatian)'로 통합되기도 하였지만
현재는정치적 상호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상호 배타적인 방향으로 급속하게 분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보스니아인은 종교적인 이유에서
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아랍 문자'를 사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종교는
보스니아인은 이슬람교,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 정교회,
크로아티아인은 로마 가톨릭을 주로 믿는다고 하는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주민의
51%는 무슬림이며
31%는 세르비아 정교회를 믿으며
15%는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다고 한다
거의 대부분의 슬라브족은 동방 정교회나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지만
보스니아인은 이슬람교를 믿는 슬라브족이라고 한다
정부와 의회형태는
다민족 국가적 성격으로
오랫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치적 특징이 있다고 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를 구성하고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합과 스릅스카 공화국은
각각 입법부와 대통령이 있다고 하며
중앙정부 의회는 양원제로서
하원 의석의 2/3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이
1/3은 스릅스카 공화국이 구성하고 있으며
상원 의석은 3개 민족이 각각 5석씩 배분하고 있으며
대통령제는
이슬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계 각각 1명씩으로 채워지는
3인 공동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고 한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의
국가GDP는 201억600만 달러(세계 113위)이며
1인당GDP는 5742 달러(세계 94위)로
유럽에서 가난한 국가에 속한다고 한다
<2019년도 한국 국가GDP:1조6295억3200만 달러(세계12위), 1인당GDP:31,430 달러(세계30위)>
디나르 알프스 산맥(Dinaric Alps Mountain Range)을 지나고
모스타르(Mostar)를 지나
마지막 산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모스타르(Mostar)를 지나 고개를 넘어가며 보는
로도크(Rodoč) 지역이다
모스타르(Mostar)에 속한 마을이다
사라예보(Sarajevo)에서 출발한지 3시간10분 정도 지나
크로아티아(Croatia)로 넘어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Bosnia Hercegovina)의
비야카(Bijaca) 국경검문소에 도착하여
여권 심사를 대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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