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 접어 들었다
EU국가들은 국경을 지날 때 대부분 차를 세우지 않고
그냥 통과하기에 어디가 국경인지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국경 통과시간은 13:10
폴란드(폴스카:Polska)는 평평하다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폴란드는 슬로바키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타트라 산맥을 제외하고
사각형 모형의 대부분의 국토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면적은 31만2683㎢로 우리나라(한반도면적 22만3348㎢) 보다 1.4배 정도 크고
인구는 약3,900만명 정도이며, 수도는 바르샤바이며
내각책임제를 가미한 대통령 중심제(양원제)의 정부형태로서
폴란드어를 사용한다.
폴란드는 넓은 비옥한 평야지대가 있는 농업국가로
예부터 식량을 노리는 동쪽의 몽고, 타타르, 러시아와 북쪽에서는 스웨덴
서쪽의 프랑스, 독일, 남쪽으로 부터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제국 등
역사적으로 끝없는 외세의 침략을 당하고
두차례 세계대전의 희생양이 된 나라로
대부분의 도시들이 철저히 파괴되는 수난의 역사를 지닌 나라다
그래서 이런 비극의 역사 통한은 그들이 부르는 국가에도
'우리들이 살아 있는 한 폴란드는 망하지 않는다
남들이 빼앗아 간 것을 우리는 칼로서 되찾으리'
한 맺힌 구절을 담아
잊지 않으려 다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은 이러한 난관을 이겨내고
옛 도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오시비엥침에 거의 도착 한 것 같은데
정체되어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편도 1차선 도로에서 무슨 사고가 났나 했더니
공사중으로 도로를 번갈아 가며 한쪽을 막고 교행 시키고 있었다
체코 프라하에서 6시간을 달려
폴란드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현재 학살 현장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치독일과 파쇼 이탈리아,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제2차 세계대전...
지구의 역사상 치러졌던 세계의 어느 전쟁보다도 더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던 하나의 역사적 현장에 온 것이다.
수용소에 입장하기 전에 헤드폰 수신기를
각자에게 나누어 준다
많은 영령들이 이유 없이 죽어 간 곳에서 최대한 엄숙을 요하며
설명을 듣도록 하기 위한 조치라 한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1940년 4월 나치의 친위대장이자 게슈타포의 장관이었던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유대인 및 짚시들을 전멸시킬 목적으로서
이 곳에 수용소를 세웠는데
그 해 6월 독일에 항거하는 폴란드의 정치범들부터 수용하였다고 한다
수용소 입구에 쓰여진 'APBEIT MACHTFREI' 문구의 뜻은
'일하면 자유로워 진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언제 가스실에 들어가 죽을지 모르는 운명 앞에...
일하면서 죽음에 대하여 잊으라는 뜻일까?
참 입구에서부터 정말 잔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수용소로 수송되어 끌려와 기차에서 내리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바로 분류하여
임산부, 노약자, 환자들은 가스실로 바로 보내 졌다고 한다.
오시비엥침에 강제수용소가 세워지게 된 것은
유럽 어느 곳에서든 수송해 오기 쉬운 중간 위치라 한다.
또한 유대인은 유럽에 1100만 명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유대인을 미워하여 배척하는 정책을 펼쳐으나
폴란드는 유대인을 수용하는 정책을 펼쳤기에
폴란드에만 330만명 정도의 많은 유대인이 거주했기 때문이라 한다
오시비엥침에는 제1수용소인 아우슈비츠 뿐만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이 곳에서 3Km 쯤 떨어진 폴란드군 기마병 말 훈련장 이었던 곳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보다 20배 정도 규모가 큰
제2 비르케나우(브제진카) 강제수용소와 제3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대량 학살을 자행하였다고 하는데
규모는 작지만 첫번째 만들어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대량 학살을 상징했던 곳으로 전세계에 알려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보다
20배나 규모가 컷던 제2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모형이라 하는데
제1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가스실에는
1회 750명 정도 학살하고, 하루 390명 정도 화장 할 수 있는 규모인데
제2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는 현재는 시설이 많이 파괴되어 있지만
최고의 살육 현장으로서 1회 2천명을 대량 학살 할 수 있는 가스실과
화장시설을 갖추고 있어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독일군 나치들은 수용소로 데리고 가기 전
손으로 들 수 있는 가방 하나만 챙기도록 하였다는데
이 조그만 가방에 우선적으로 집어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귀중품, 재산상 서류 등...
그림은 이 가방들을 강제 압류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그때 압류된 가방들이 지금 이곳에 엄청나게 쌓여 전시되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아우슈비츠 하면 유대인들만 잡아들여 학살한 현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 학살된 약 400만 명 중에 유대인이 약 150만 명 정도이며
약 250만 명은 타민족들로서
짚시도 제거해야 민족의 하나로 정해져 이들도 150만 명 정도가 학살되었으며
폴란드인도 많은 학살을 당하였으며,
신부들도 1000명이 넘게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위 사진은 이 곳에 수용 된 사람들의 가슴에 다는 표식으로
인종별, 정치범 등 분류하는 표식으로
유대인(별 표식) 뿐만 아니라 많은 인종이 학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1945년 1월에 소련군에 의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폐쇄 되었는데
이 당시 생존자가 약 7,50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위에 사진이 생존자들을 발견하였을 때 모습으로서
이 곳의 수용생활이 얼마나 참담했나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곳의 수용자들의 하루의 식단이라고 하는데
커피습, 야채죽, 빵치즈라고 한다.
어린 아이들은 생체실험의 대상으로서
생체실험에 약 232,000명 어린아이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참담함에 경악을...
이 사진을 보며 설명을 들는 중
우리 한국인과 중국인에게 악랄한 생체실험의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의 731부대가 떠올랐다
일본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마루타로 만들어 생체실험을 행하였던 부대가
많이 알려진 731부대(하얼빈) 뿐만 아니라
장춘의 100부대, 베이징의 1855부대, 난징의1644부대, 광저우의 8604부대로서
이처럼 여러 곳에서 세균, 독가스, 동상 등으로 생체실험 만행을 저질렀는데도
왜? 이 엄첨나고 악랄했던 일본 그들의 만행을
여기에서 처럼 공개하여 세계에 알리지 않고 않을까?
그러기에 일본은 지금도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머리를 꽂꽂이 세우고 세상을 비웃는 듯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수용된 사람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전기 울타리를 설치한 것이
흉칙하고 싸하게만 보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적벽돌로 지어진 건물들로
28개동이 있는데
어떻게 이 수용소를 짧은 시간에 빠르게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있었는데
원래는 폴란드 군부대로 사용하던 시설을 수용소로 개조하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및 이곳 제2, 3 수용소에서
약 400만 명의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는데
그 중의 약150만 명이 유대인이고, 약250만 명이 다른 민족들 이었다
우리는 유대인들만 학살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왜? 타 민족들의 학살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쉰들러 리스트' '안네의 일기' '인생은 아름다워' 등
유대인들에 관한 학살 영화만 있는 탓 일까?
이 교수대는 나치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의 공개 처형 교수대로 사용하였는데
이 교수대는 당시 이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를 마지막 처형으로 중지되었다고 한다.
인간 도살장..... 인간 학살의 방....
누군가 꽃과 촛불을 피워 놓았다.
얼마나 많은 고귀한 생명들이 이 안에서
분사되는 독가스에 공포와 비명속에 뒹굴며 벽에 부디치며
괴로워하며 죽음을 맞이 했을까?
상상만 해도 끔직하고 치가 떨린다
........
하루에 수백명, 아니 수천명의 무고한 생명이 이유없이 도살되고 있을 때
이 곳의 수용소장 방에서는 매일 모짜르트 음악이
흘러 나왔다고하니....
또한 이 살인마 나치들은 시체들을...
인육은 착유하여 빨래비누를 만들고, 인피는 전등 갓으로 활용하고
시체들을 화장 후 인골은 블럭을 만들고
머리카락은 로프도 만들고, 카펫을 만들어 팔았다고 하니
정말 악마가 사는 세상보다 더 지독한 악마들이 아니었나 한다
인간 도살장 가스실 옆에는 화장터가 있다
화장터는 불이 꺼지질 않았다고 하는데...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당시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신발, 안경, 머리카락 등이 엄청 많이 쌓여 전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나치의 엄청난 만행이 자행되고 있을 때
연합군 쪽에서는 이 만행을 몰랐을까?
연합군 전투기가 이 곳 상공을 엄청나게 날아 지나가면서도
폭격 한번이 없었다하고
독일이 패망하던 1945년 1월에서야
소련군이 이 곳을 점령하고 폐쇄하면서 인간 학살이 끝이 났다는데...
그런데 ... 알고 있으면서... 왜?
연합군들은 엄청난 대학살에서 이들을 먼저 구해 주려 하지 않았을까?
왜? 왜?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모세5경에 의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고
육체적 노동보다는 금융관계로 부를 쌓는 유대인들은
유럽인들과 종교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항상 갈등관계와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이 수용소에는 독일인, 유대인, 한국인 순으로 많이 방문한다고 하며
이날도 하얀윗도리를 단체로 입고 온 유대인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유대인들은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독일인은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서 방문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러나 731부대 생체실험, 관동대지진 조선인대학살, 난징대학살, 위안부 등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지 않는
일본인들은 폴란드 이 부근까지는 관광을 많이들 오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방문은 극히 소수 인원만 방문하는 정도라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크라포프로 향한다
여기에서 약 60Km 정도의 거리이며
인구 80만명 정도가 거주하는 폴란드의 제3의 도시라 한다.
고속도로를 달려 크라코프 시내로 진입한다
크라코프는 폴란드의 옛 수도로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폴란드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왕도의 지위에 있었으며
제1,2차 세계대전 때도 전쟁의 참화를 받지 않아서
'영원한 도시'라 부르기도 한다
크라코프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12대 유적지로서
비엔나, 프라하처럼 중세시대의 건축문화를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크라코프에 진입하자
제일 먼저 바벨성이 보였는데 지나치며 카메라에 담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구시가지 광장쪽 골목길로 가기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사진이 걸려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에서 대학교 다니셨으며
크라코프에서 추기경으로 재직하셨다고 한다.
아키엘로 대학의 앞 골목길을 통해 잠시 걷다보니
넓은 광장이 나온다
크라코프 구시가지 중앙광장으로서
먼저 우측의 높은 시계탑이 눈에 들어 왔는데
17세기 초에 시청사가 화재로 완전 소실되고 남은 크라코프 구시청사 시계탑이다.
앞쪽으로는 직물회관이 보이고 중앙광장의 우측으로는
성마리아 성당이 보인다
구시가지 중앙광장은 총 4만㎡의 규모로
중세 유럽 광장 규모로는 베니스에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가장 크다
이 광장은 중세 유럽부터 사교장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장소로서
주위는 귀족들의 저택이 줄지어져 있고
지금도 주류 및 음료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줄지어져 있어
관광객들과 많은 폴란드인들은 이 곳을 찾아 즐기고 있다.
광장에 도착하여
성모 마리아 성당에 들어 갔다가 사진촬영제한 구역이라 나와
성당 앞에서 중앙광장 및 직물회관 배경으로...
아담 미키에비츠(1798~1855년)는 폴란드의 민족시인이자 애국시인으로서
친구인 쇼팽에게 음악적 영감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동상 받침대 4면에는 평화의 여신상들이 자리잡고 있다.
크라코프 성마리아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1222년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2개의 첨탑이 서있는데
이 두 탑에 관한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천재 조각가 형제가 있었는데
형이 먼저 작은 탑을 만들고 해외에 나가 있다가 돌아와 보니
동생이 더 높고 아름다운 탑을 만들어 동생이 더 유명해져 있었다.
질투심에 눈이 먼 형은 동생을 이 첨탑으로 유인하여
떨어뜨려 죽게 만들었는데
그 후 형도 죄책감에 시달리다 첨탑에 올라가 투신하였다고 하는
전설이 내려져 온다고 한다.
갑자기 성모마리아 성당에서 '헤이나우'곡 나팔소리가 들려온다.
위 사진에서 높은쪽 첨탑의 창문 하나가 열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적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그 곳에서 나팔를 불었다고 한다.
그 시기에는 나팔수가 밖에 나팔이 보이도록 내밀고 불었는데
13세기 타타르족이 침입했을 때 이를 알리고자
나팔수가 나팔을 부는데 이들이 쏜 화살에 목을 맞아 죽게 되었다.
이때부터 창문만 열고 나팔을 불게 되었고
이를 기리기 위해 나팔수가 죽기 전에 불었던 부분까지만
매시간 정시에 동서남북 각 방향 돌아가며 나팔을 불고 창문을 닫는다고 한다.
직물회관은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어 14세기경 지어진 건물로서
건물 길이가 100m에 이르며 건물 지붕엔 작은 돔으로 장식되어 있다.
14세기 당시에는 의복이나 섬유 교역소로 사용되어 직물회관이라고 하였는데
현재 1층은 토산물 센터로 민속인형, 호박쥬얼리, 레이스, 목제품 등의 상점과
2층은 18~19세기의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 여자분들은 저렴한 호박 쥬얼리에 관심을 많은 모양이다.
그러나 상점 안에서 주인들은 손님들엔 별로 관심을 주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하거나, 쳐다만 보고 있다.
아직도 옛시골 처녀의 순박함 같은 국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나...
우리나라 같으면 호객 행위부터 시작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상술행위를 할텐데...
중세시대를 재현한 마차가 관광객을 태우고
중앙광장 주변을 활보 하고 있다.
구시가지 중앙광장에서 즈비에르지니엑카 거리로 내려와
오늘도 우리가 묵을 호텔로 이동한다.
폴란드 크라코프의 아침이다.
오늘의 일정은 이 곳의 소금 광산이 있는 비엘리츠카를 관광하고
타트라 산맥을 넘어
슬로바키아에서 점심을 먹고 지나쳐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가서 시내 야경을 하는 여정이다.
비엘리츠카는 크라코프에서 남동쪽으로 13Km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소금광산들은 예전에 왕국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서
지금은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는 곳이다.
버스가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소금광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인솔자에 의하면 늦게 가면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일찍 서둘렀는데
벌써 입구에는 많은 인파가 대기하고 있었다.
입장 방법은 관광하고 나온 인원 수 만큼만 입장한다고 한다.
유럽은 우리나라처럼 천일염을 생산하는 곳이 없기에
대부분이 암반 소금을 생산하여 소비하기에
소금광산은 굉장히 중요한 자원으로서
이 부근에는 지금도 소금을 캐내고 있는 광산이 여러 곳 있다고 한다.
소금광산을 관광하는 시간은 약 2시간이상 소요되며
건물 가운데 문을 통과하면 지하로 계단이 나온다.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은 역사와 소금을 파내는 전시실로
소금으로 만들어진 수 많은 조각품과 예배당이 있으며
내부는 너무나 크고, 미로처럼 복잡하면서,
갱도를 모두 연결하면 총 300Km 나 되어서
항상 가이드와 동행하도록 하고 있었다
입장하자 마자 수백 계단을 걸어
지하 깊숙한 곳 135m에 까지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계단을 계속하여 돌다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
지하에 도달하고 보니 각 코스들 마다 문들이 있다
가이드는 앞 팀이 다 갈 때까지 문을 닫고 기다리게 한다.
그런데 문을 열면 바람이 굉장히 세게 분다.
폴란드가 낳은 코페르니쿠스의 소금 동상이다
오른손을 치켜 들고 '지구는 둥글다'의 '지동설'을 역설하는 모습이다
이 광산의 버팀목으로 쓰였던 목재들이 쌓여 있는 곳에서...
이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의 전설을 조각해 놓은 것으로 내용은
헝가리의 킹가 공주가 폴란드의
볼레스와프보스틸라 왕자(브로츠와프왕)와 결혼할 때
아버지인 헝가리왕 벨라4세로부터 결혼 혼수품으로
헝가리의 마로마로쉬 광산의 일부를 하사 받았다.
공주가 헝가리로부터 폴란드로 떠날 무렵 자기 받은 소금광산에 들러
무슨생각인지 약혼반지를 수직갱도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킹가 공주가 크라코프로 가던 길에 이 곳 비엘리츠카에 잠시 멈추게 되었는데
이상한 웅덩이가 있어 파보게 했더니
커다란 소금덩이가 나왔고 부수어보니
놀랍게도 던져버렸던 약혼반지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 후 킹가 공주는 이 소금광산에 수호신이 되고
폴란드 경제에도 크게 기여 했다고 한다.
지금도 킹가 공주 이름으로 거래되는 소금은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소금을 채취할 때 나오는 메탄가스를 제거하는 방법을 묘사해 놓았다.
메탄가스는 공기보다 가볍고 폭발 가능성 있으므로
조금씩 메탄가스를 모아 불로서 제거를 하였다.
천정이 끄시린 흔적으로 검다
갱도에서 캐어낸 암염 소금은 인력으로 한계가 있어
이 지하에서도 마차를 이용했다는 조각해 놓았다
폴란드의 세종대왕격인 카지미에르 대왕의 소금조각 동상으로
광부들을 위하여 소금광산에 대한 최초의 법률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전설 속에 일하는 난장이 조각상
킹가 성당으로 가는 갱도 길목에 있는
유일한 나무 조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상으로
화재가 난 적있는데 다른 나무들은 다 탓으나
이 조각상은 타지를 않았다고 한다.
앞에 놓인 소금 조각상은 사람들의 왕래로 인하여 녹고 있어
14℃ 정도를 유지시키는데 녹고 있어 안타깝다
킹가 성당으로 가는 갱도 길에 있는 성모 마리아 상으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상 나무조각상 앞에 있다.
30년이나 걸려 만들어진 '킹가 성당'으로
길이가 55m, 높이 12m, 폭 18m로
이 안은 벽, 천정, 바닥, 상들리에, 제단 등
모든것이 소금으로 조각되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곳에서는 콘서트도 열린다고 한다.
킹가 성당의 소금조각 벽화 '마지막 만찬'
킹가 성당에 있는 에수 그리스도와 그의 돌 무덤을 표현한 소금 조각상
킹가 성당에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소금조각상
킹가 성당에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소금조각상
킹가 성당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병이어의 소금조각 상
킹가 성당에 있는 성모 마리아 상 등
소금 암반으로 만든 걸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비엘리츠카 소금광산의 암염 소금의 조각상 대부분이
유명한 조각가들이 조각한 것이 아니라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의해 걸작품이 완성되어
지금 이처럼 전시되어 세계 곳곳에서 찾아 오고 있다는 것이다.
킹가 성당을 나와 걷던 중
또 커다란 연회장이 나온다
음식 냄세도 구수하게 풍겨 오고
기념품점들이 있는데
내가 지하 깊은 광산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지하상가 단지에 있는 기분이 든다.
소금광산 관광 끝 무렵 갱도에 있는 성 안토니우스 성당이다.
이 곳을 소금 광산 관광 마지막 지점으로서
이 곳 부터 가이드를 따라 갱도를 약 15분정도 걷다보면
위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에 다다른다.
우리가 있는 현위치는 지하 130m 정도의 깊이다
위로 올라가는 시간은 약 15초 정도 소요 된다
소금광산을 나오니
마을의 중심부에 와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다시 걸어 소금광산 입구 쪽에 있는
버스 주차장으로 가야 하는데
골목길을 가르키며 똑바로 쭉 가란다.
약 10분 정도 걷다보니 소금광산 입구쪽 주차자이 보인다.
버스에 오르니
또 비가 쏟아 진다.
폴란드의 관광 일정도 끝이 났다
우리는 이젠 타트라 산맥을 넘고
슬로바키아를 경유하여
헝가리 부다페스트을 향하여 출발한다
타트라 산맥을 지나며 도로가
우리나라의 산맥을 지나는 것처럼
꼬불꼬불하고 높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 줄 알았는데
타트라 산맥을 넘으며 보이는 풍광은
그냥 평온하게 보인다
차창 밖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
드디어 국경이다.
여기 폴란드에서 저 곳을 지나치면
슬로바키아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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