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이집트 여행

천황봉 2020. 1. 31. 09:11

참으로 가보고 싶었던 나라...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나라...

4대 문명 발상지이며 많은 신화와 불가사의한 피라미드가 있는 나라

성경에서 애굽으로 나오는 나라

이집트(Egypt)로 간다

이집트 카이로 공항까지 비행시간이 12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하여

아침 8시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티켓팅을 먼저한 후 카운터로 가서

비지니석으로 업그레드하려고 문의하였더니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전세기라 공항 티켓팅 카운터에서는

업그레드가 안된다고 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짐가방을 부치고 검색대와 출국심사대를 통과하여

탑승게이트로 가서 대기하며 휴식을 잠시 취한다

 

 

인천공항에서

이집트(Egypt) 카이로 국제공항(Cairo International Airport)까지

비행거리가 8441Km라고 화면에 뜬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기내식을 먹은 후

영화를 볼까하다가

숙면에 들어가 한참을 자다가 떴으나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거의 7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 카자흐스탄 영공을 날고 있었다 

 

 

또 눈을 감고 있다가 잠이 들어

다시 깨보니

비행기는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11시간이 다되어 가고

터키 상공을 지나 지중해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집트(Egypt) 땅으로 접어든 것 같아

창밖을 내려다 보니

끝도 없는 사막만 보인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도시는

건물들 사이로 골프 코스들이 조성되어 있는 카이로의 신도시

마디나티(Madinaty) 지역이다 

 

 

카이로 국제공항의 주변의 모습이다

 

 

비행기는 바로 착륙을 하지 않고

공항 주위를 한번더 선회하더니 서서히 기수를 낮추는 것 같았다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거의 12시간 30분이 소요되어 

카이로 국제 공항에 착륙을 한다 

 

 

입국 심사대로 향해 가는데

각 여행사 현지인 가이드들이 피켓을 들고 안내하고 있었다

의아시 되는 것은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여행 가이드들이

입국 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세관검사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면 거기서 각 여행사 피켓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데

여기는 입국심사장 전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현지 여행 가이드가 

이집트 입국비자 딱지를 나누어 여권에 붙여주며

입국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현지인 여행 가이드는

입국심사와 세관심사 후 공항 밖에까지만 안내한 후

한국 교민 가이드에게 여행객들을 인계하고 간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어두운 저녁이 되었다

오늘의 첫일정은 관광은 없고

호텔로 가서 쉬고 내일부터 관광 일정이 시작이다

 

 

호텔에서 방을 배정받고 나눠준 방에서 먹는 도시락으로

이집트에서 먹는 첫 식사이자 저녁식사이다

도시락이 의외로 맛이 있었는데

가져간 끊인 물에 넣어 풀어 먹는 따뜻한 된장국과 같이 먹으니

더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새벽 5시에 기상이다

한국보다 이집트는 시차가 7시간 늦으므로

한국으로 하면 낮 12시에 기상하기에

시차 적응이 않되어 밤 1시에 깼다가 또 3시에 깨서

말도 알아 듣지도 못하는 TV를 보다가 씻고

미리 식당이 있는 로비로 나온다

 

 

이집트에서 일정이다

오늘을 지중해를 끼고 있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이며

내일은 카이로 박물관과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Giza) 지구에 갔다가

기차를 타고

13시간을 이동하여 아스완(Aswan)으로 가는 일정이며

다음은 아스완(Aswam)에서

수단 국경과 가까운 아부심벨(Abu Simbel)에 갔다가

아스완으로 다시 오는 일정이며

아스완에서 나인강 크루즈(Cruise) 3일 밤낮을 타고

콤옴보(Kom Ombo), 에드푸(Edfu), 룩소르(Luxor)를 관광하는 일정이며

룩소르(Luxor)에서 버스를 타고

홍해 바닷가의 휴양지 후르가다(Hurghada)에 갔다가

카이로(Cairo)로 돌아와 저녁에 이집트를 출국하는 일정이다

 

 

첫 날을 보낸

힐튼 카이로 헬리오폴리스 호텔(Hilton Cairo Heliopolis Hotel)이다

카이로 국제 공항(Cairo International Airport)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호텔이다

 

 

아침 7시부터 이집트에서 첫 일정으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갔다 오기 위하여

서둘러 버스에 올라 출발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183Km 지점인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버스로는 3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 이다

 

 

도시에 많은 건물들이 짓다가 중단한 것처럼

건물을 지지하는 기둥에 나와있는 철근들이 보인다

밑에 층에는 사람들이 사는 것으로 보이는데...

세금 문제 때문이라 한다

완공된 건물은 세금을 부과하는데

준공이 안된 건물은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 때문에

저렇게 완공시키지 않고 놓아둔다고 한다

 

 

건물들에도 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층들이 많이 보이고

10층들이 넘는 빌딩에 적벽돌로 쌓아 벽면을 마감처리한 것이

건물들이 무언가 부실해 보이는 같았다

 

 

다리 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출근 차량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다리 위에서 정차할 수가 없는데...

아래의 물줄기는 운하이다

카이로에 흐르는 나일강(Nile River)에서 수에즈 운하(Suez Canal)가 있는

이스마일리아 시(Ismailia City)의 팀사 호수(Timsah Lake)까지

연결된 운하(Canal)이다

 

 

고가도로 위에도 출근 차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위 사진의 강은 이집트(Egypt)의 수도인 카이로(Cairo) 시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나일강(Nile River)이다

나일강(Nile River)은

길이가 6690Km로 세계에서 제일 긴 강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의 국가 에디오피아에서 흐르는 청나일강과 

적도 아래의 국가 르완다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백나일강이 합쳐져

사하라 사막을 통과하여 이집트로 흐르는 강으로서

 

 

나일강은 해마다 홍수가 나서 물이넘쳐 흐르지만

나일강의 하류에 있는 카이로에서 이어지는 나일강 삼각주에는

홍수로 인하여 기름진 흙이 쌓이므로

고대부터 농업이 발달하여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다

 

 

이집트(Egypt)는

국토 면적이 996,603㎢로 우리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면적 223,348㎢의

약 4.5배 큰 국가로서

 

 

남북으로 길이는 1055Km, 동서로 길이는 1250Km라고 하며

나일강이 흐르는 주변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북부 사하라 사막 지대에 속한다

 

 

이집트(Egypt)의 인구는

약 1억200만 명이 넘는 인구로서

민족구성은 이집트인이 대부분인 98%이며 

그 밖의 소수민족 베르베르인, 누비아인이 거주하고 있다 

 

 

종교로는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이 약 90% 정도 살고 있으며

콥트교를 믿는 사람들이 9% 정도 산다고 한다

 

 

버스는

힐튼 카이로 헬리오폴리스 호텔(Hilton Cairo Heliopolis Hotel)에서

출발한지 1시간 45분 정도 지나서

휴게소인 마스터 레스트 하우스(Master Rest House)에 들러

잠시 쉬었다가 간다

 

 

이집트(Egypt)의 정치제도는

대통령제인 공화제와 국회는 단원제로서

6년 임기의 대통령은 국회에서 지명으로 국민투표로 선출되며

부통령, 총리, 장관은 단원제 국회인

인민의회 의원 454명 가운데 10명을 임명한다고 한다

이러한 제도 속에 정치제도는

강력한 행정부에 의해 이집트 사회가 좌우된다고 한다

 

 

국회의원은 5년 임기로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되고

제한된 복수정당제도를 운영하는데

이집트의 집권당인 국민민주당은 충성스러운 야당의 존립은 장려하지만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정당을 결성하여

정권 경쟁에 나서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가이드는

군부나 경찰이 모든 것에 개입되어 있어

이집트에서 사업을 하려면

이들을 끼고 하지 않으면 사업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국가 GDP는 약 3,022억500만 달러(세계 41위)이고

1인당 GDP는 3,047 달러(세계 129위)로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대한민국: 국가GDP 1조6295억 달러(세계12위), 1인당 GDP 32,046달러(세계28위) 2019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거의 접근하자

나일강 삼각주의 하류라 그런지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 위에 넓은 호수가 눈에 들어 온다

 

  

나일강 삼각주는

이집트 북쪽 나일강 하류에 형성된 삼각주로

세계에서 가장 큰 삼각주 지형 중 하나로

지중해와 접한 길이는

동쪽의 수에즈 운하가 있는 포트사이드(Port Said)부터 시작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서쪽 끝단까지 약 240Km이고

나일강에서 삼각주가 시작되는 남쪽에서 북쪽 길이는 약 160Km라고 한다

 

 

호수에서 어부 부부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일강 삼각주 지역은 비옥한 토양을 이루기 때문에

이집트 인구 대부분이 몰려 살고 있는 밀집지역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시내로 접어들기 시작하며

놀이 공원으로 보이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시에 진입하며 보이는 첫 모습이

어찌 폐허가 된 모습으로 보인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인구 약 500만 명이 거주하고 있어

이집트(Egypt) 국가에서

수도인 카이로(Cairo)에 이어 2번째로 큰 도시이자

항구 도시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도시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356~BC323년)이

BC 336년 약관 20세가 되던 해 

아버지인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PhilippⅡ)가 죽은 후 

왕위에 올라

페르시아 제국의 원정 길에 영토를 확장하여 가면서

이집트 지역을 포함한 북 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BC 331년경 이 곳에 머물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시 동방 원정을 떠나면서

그리스의 유명한 건축가 디노크레테스(Dinokletes)에게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게 명하여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동방 원정 길에 현재의 파키스탄 땅까지 점령하고 인도를 공격 준비 중에 있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힌두쿠시 산맥을 넘으며 원정의 피로함에 지친 부하들의 반발로 원정을 포기하고

회군하여 바빌론에 머물며 수도(首都)로서 건설하던 중

갑자기 열병이 발생한지 10일만인 젊은 33세 나이로 사망하였으므로

정작 본인은 도시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의 사망시 후계자가 없어

부하들의 후계자 질문에 유언이 "가장 강한 자"라고 하고 죽으므로 인해

그가 세웠던 그 큰 광활한 제국은

부하들로 인해 여러 개의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죽었으나

그의 부하였던 클레오메네스(Cleomenes)가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도시 건설을 계속하였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계승자들 중의 하나였던

프롤레마이오스(Ptolemaeos)가

알렉산드리아에 프롤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Dynasty)를 창건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우리나라 스타렉스 같은 승합차 크기의 차들이

우리의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으로 이용되고 있었고

매우 낡아보이는 차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가 탄 버스는 버스가 다니기에 좀 불편한

골목길 쪽으로 들어가 서서히 조심조심 서행하며 가는데

지나치는 좁은 골목에 보인는 모습은

부서진 차들이 많이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재래시장으로 보인다

 

 

버스는 좁은 골목길을 서행하며 

콤 엘 슈카파의 카타콤베(The Catacomb of kom El Shoqafa)

정문 앞에 도착한다

 

 

카타콤베(Catacomb)란

로마시대 때 기독교가 공인받기 전에

그리스도 교도들이 로마 군인들로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지내던

지하 교회나 무덤을 카타콤베라고 하는데

이탈리아 로마 부근과 터키의 카파도키아 카타콤베가 있는 것으로 알았으나

알렉산드리아에도 카타콤베가 있음을 알게되는 순간이다

 

 

여기의 카타콤베(Catacomb)는

1~2세기 경 암반을 깍아 수직 동굴로 만든

그 당시의 귀족들 묘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4세기 경 이집트에 있던 그리스도 교도들이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로부터 피해 은신처로 숨어들어

사용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깊이 30m 정도의 아래로 내려가니

내부 벽에는

고대의 이집트, 그리스, 로마 풍의 조각 벽화로

혼재되어 장식되어 있었다

 

 

당시의 고대 신화의 장면과

시민들의 생활 방식이나 신앙 생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이다

여기 카타콤베 내에는 시신을 300구 정도를 안치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카타콤베 안 한쪽 구석에는

그리스식 남, 여 조각상이 서 있는데 

무덤 내부에 있어서 그런지 좀 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느낌이 들었다

 

 

카타콤베(Catacomb)에서 밖으로 나오니

광장에는 석관들이 놓여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카타콤베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이 지역은 당시의 공동묘지 지역이 아니였던가 생각이 든다

 

 

카타콤베(Catacomb)에서 밖으로 나오기 위하여

입구 쪽으로 향하다가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하토르 여신 조각상 옆에서 포즈를 취한다

하토르(Hathour) 여신은

태양신 라(Ra)의 딸로서 오시리스(Osiris)와 이시스(Isis)의 아들인

호루스(Horus)의 부인으로서

'사랑과 미'의 여신이나

아버지 태양신 라(Ra)의 명령으로 인간에게 벌을 행할 때는

사자 머리를 한 파괴의 여신 세크메트(Sekhmet)로 변한다고 한다

위의 조각상은 세크메트의 모습으로

또한 하토르 여신은 '서부의 여신'으로 죽은 자들이 기거하는 지역을

지켜주는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밖으로 나오며 뒤돌아 본 모습이다

석관들과 그리스식 석주들을 보관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커타콤베 주차장으로 나와 다시 버스에 오른다

알렉산드리아 중심 해변에서

동쪽으로 17Km 정도 거리에 있는 몬타자 궁전으로 이동한다고 한다

 

 

카타콤베에서 지중해가 보이는 해안도로 쪽으로 향해

빠져 나가면서 보는 시장 길이다

 

 

알렉산드리아를 관광하며 트램를 전혀 보지는 못하였으나

트램이 다니는 길과 전선이 보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골목골목에 폐차나 폐차된 차량 부품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를 여행하며 보지 못하던 장면이다

 

 

알렉산드리아 종합운동장(Alexandria Stadium) 앞을 지나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역사에 대해 연결해 더 알아보면

프롤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Dynasty:BC305~BC30년)가 창건된 이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침략 정책으로 인해 비롯된

헬레니즘(Hellenism)의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는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하며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의 등대(알렉산드리아 등대)"를

세우기도 하였으며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가 창건된 이 후

알렉산드리아는그리스계의 자유도시로 존재했었으나

BC 80년  프롤레마이오스 10세 때

로마 공화정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 갔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 내전에 개입하였으며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옥타비아누스에게 반기를 든 이후

BC 30년 프롤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중해가 보이는 해안도로로 나와 동쪽으로 버스는 달려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로서

로마의 장군과 로맨스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여왕'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공식적인 명칭은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Ⅶ)로서

왕국을 30년을 넘게 지배했던 프롤레마이오스 12세(PtolemaeosⅩⅡ)의 딸로 태어나

BC 52년 맏아들 프롤레마이오스 13세(BC47년 사망)와 왕위에 올라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야심을 품는다

당시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장군의 친구였으나

아프리카에서 대왕 칭호를 받으며 정적이 된 폼페이우스(Pompeius)가

파르살루스 평원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여 이집트로 피신하자

이들을 추격하여 왔던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살해 당였다는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BC 47년 이 때에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와 관계를 개선할 기회를 삼고자

카이사르와 나일강을 유람하며 즐겼다고 한다

 

 

이집트에서는 우리나라 차들이 눈에 많이 띠어 기분이 좋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로 되돌아 갈 때에

클레오파트라는 임신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아이를 낳은 후  카이사리온(Caesarion:작은 카이사르)라고 이름을 짓고

아이를 데리고 로마로 찾아갔으나 카이사르는 암살을 당한 후라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로마 장군들의 파벌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로마는 당시 BC 44년부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있던 옥타비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우스 3인의 군사 정권인

삼두정치(三頭政治)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BC 41년 중립에서 벗어나 클레오파트라는 타르수스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를 찾아가 그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 후 BC 34년

클레오파트라는 죽은 카이사르의 명망과 인기를 이용하고자

아들 카이사리온을 왕위에 올려 공동 통치자로서 과시하려고 하였지만

로마 대중들은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밤마다 퇴폐적이고 소란스러운 연회를 베풀어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밤새 잠못이루고 피곤하게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고 한다

BC 31년 9월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 해군과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이집트 해군이

맞붙어 해전을 벌였으나 이집트 해군이 전세가 약하므로 퇴각하여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옥타비아누스가 뒤쫒아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였을때

BC 30년 8월 안토니우스는 칼 위에 쓰러져 죽었고

클레오파트라가 독사에 물려 자살하므로서

이집트의 파라오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어 AD 4세기까지 계속 지배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Gaius Julius Caesar Augustus:재위 BC 27년~AD14년)가 되었다 

 

  

버스는 해안 도로를 달려

몬타자 궁전(Montazah Palace) 입구로 들어 왔다

버스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가이드는

입장권을 발급 받아온다

 

 

몬타자 궁전(Montazah Palace)으로 입장하자

넓은 정원이 펼쳐 진다

궁전의 넓이는 1.4㎢라고 하며

야자수 나무가 많이 보이는데

야자수 중에 비싼 야자수인 로얄 팜트리라고 한다

 

 

몬타자 궁전(Montazah Palace)는

1892년 오스만 터키의 총독이자 무함마드 알리의 후손인 

압바스 2세(AbbasⅡ)의 지시로 지어진

술탄의 여름별장이라고 한다

 

 

보이는 건물은 알-하라믈렉(Al-Haramlek) 건물인데

이태리의 피렌체 시청사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지어졌으며

이 궁전 안에는 현재 건물이 두채가 있다

또 하나의 건물은 보이는 저 건물 뒷 편 바닷가 쪽에 위치하여

현재 일반 호텔로 개조해서 사용하는 살람렉(Salamlek) 건물이 있다

 

 

현재 호텔로 사용하는 살람렉(Salamlek) 건물은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야전병원으로 사용하였으며

1922년 푸아드(Fuad) 보수하였으나

1952년 군부내 자유장교단이라는 비밀결사대를 이끄는 나세르(Naser)의

쿠데타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면서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몬타자 궁전(Montazah Palace)의

몬타자(Montazah)는 '소풍가는 곳 ' '쉬는 곳'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몬타자 궁전의 저 보이는 건물 알 하라믈렉(Al-Haramlek)은

예전에는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대통령의 별장과

국빈들의 숙소로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몬타자 궁전을 나와 콰이트베이를 향해

지중해를 바라보며 해안 도로 달려 가는데

해안가에서는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많이 보인다

 

 

알렉산드리아의 역사를 앞에서 이어서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죽은 이 후에 로마 제국의 직접 지배를 받으며

1세기 경에는 세계 최대의 디아스포라(Diapora)를 맞아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사이에 학문적 교류가 활발히 일어 났으며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기도 하였다고 한다

 

 

디아스포라(Diaspora)란

유배되어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공동체를 총칭하는 말로서

최초의 디아스포라는 BC 586년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포로들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BC 3세기에 히브리어인 구약성서를

그리스어(헬라어)로 최초로 번역한 '셉투아진타(Septuaginta)' 성서본이

여기에서  발간되었으며

신약시대 초기에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거점이 되어

그리스도 교리와 신학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부르며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더불어

초기 그리스도교 연구에 중심축이었다고 한다

또한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에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과 함께

로마 제국의 총주교좌(總主敎座)가 설치되어

다섯 총대주교좌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근처에 있는 지중해 해변을 지나는데

이 곳에는 바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콰이트베이 성채(The Citadel of Quitbey)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이 곳 부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성채로 향한다

 

 

콰이트베이 성채(The Citadel of Quitbey)

BC 280년 경에 세워져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선정되었던 

파로스 등대(Pharos Lighthouse)가 1303년 지진과 파도에 부서진 자리에

1477년 맘루크 왕조 술탄이었던 콰이트베이(Quitbey)에 의해

터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세운 성이라고 한다

 

 

콰이트베이 성채는

1882년 영국의 폭격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1894년 무하메드 알리 장군이 복원하여

현재는 해군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으나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

외관만 쳐다보고 발길을 돌렸다

 

 

콰이트베이 성채(The Citadel of Quitbey)가 관광지인 이유는

파로스 등대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로스 등대(Pharos Lighthouse)

현재는 부서지고 흔적도 없어 정확하게 형태는 알 수 없지만

 

 

<파로스의 등대 : 저자 Johann Bernhard Fischer Erlach :1656~1723년>

그림과 같이 웅장하였을 것으로 추론하고 상상하고 있다

BC 280년 경에 파로섬에 세워진 이 등대는

높이가 120m~140m 정도 였을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

파로스(Pharos)는 원래 섬이었으나 등대를 공사 할 때에는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파로스 등대 건설은

BC 29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1세(PtolemaeosⅠ)가

크니도스(Cnidos)의 건축가 소스트라토스(Sostratos)에게 지시하여

BC 280~BC279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aeosⅡ) 때 완공하였다고 한다

여러가지 자료에 의하면

등대는 3단으로 이루어졌으며 밑단은 4각 모양, 중간 단은 8각 모양

맨 윗단은 원통 모양으로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라고 한다

또한 꼭대기 위에는 거대한 여신상이 있었다고 하며

꼭대기에서 불을 지펴 반사경으로 비추이는 불빛이 40여 Km 떨어진

지중해 바다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이 거대한 파로스 등대를 세우게된 배경에는

당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이집트를 통치하기 시작한 그리스인들이

이집트인들에게 자신들의 지배를 상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거대한 건축물의 필요성에서 였다고 한다 

 

 

콰이트베이 성채로 가는 입구 주차장에 있는 건물 벽이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식당 앞 주차장이기도 하다

 

 

콰이트베이 성채 옆에는 공사 현장으로

많은 덤프 트럭들이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다

2006년 이집트 정부에서 유럽연합(EU)의 지원을 받아

파로스 등대를

원래 있던 성채 옆에 다시 건설하겠다고 발표하였다는데

혹시 그 공사가 아닌지 모르겠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정 중 마지막 방문지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향한다

 

 

알렉산드리아의 영업용 택시들이다

노란색에 검은색으로

대부분의 영업용 택시들이 좀 오래된 차량들로 보인다

 

 

사드 자그로울(Saad Zaghloul) 동상이 보이는 광장을 지나쳐 간다

사드 자그로울(Saad Zaghloul:1859~1927년)은

이집트 총리를 지낸

민족주의 혁명가이자 정치가라고 한다

 

 

이슬람 모스크가 보인다

알 콰에드 이브라힘 바사 사원(Al Qaaed Ibrahim Mosque)이다

알렉산드리아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죽은 후

로마의 속주가 되어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는데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그리스의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옮김으로

로마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이란 도시 명으로 바꾸고

 세로 시작된 비잔틴 제국이 긴 역사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오랫동안 지위를 누려왔던

전통적 지위는 무너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집트인들 대다수가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7세기 중엽에 이슬람 군대가 거의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비잔틴 제국의 지배는 끝이 나고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이슬람을 믿는 제도권에 있는 국가가 되었다

 

 

목적지인 도서관 앞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이다

알렉산드리아 대학교(Alexandria University)는

1938년 현 카이로 대학교로서 당시에는 푸아드(Fuad) 대학교의 분교로서

파루크 대학교(Farouk University)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42년 독자적인 학교가 되었으며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현재의 알렉산드리아 대학교가 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와 길 건너 편으로 마주하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Alexandria Library)이다

현재의 이 도서관은 2002년도에 옛 도서관이 있던 근처에 개관한

도서관이라고 한다

 

 

원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Alexandria Library)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으로

기원전 프톨레마이오스 2세(BC283~BC246) 때에 설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도서관은 최초로 국경에 상관없이 그 당시의 모든 서적들을 취합하여

복사하고 원서는 보관하고 복사본은 다시 돌려 주며

엄청난 양의 서고를 채웠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여러번의 파괴를 당하여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첫번째 파괴는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왔을 때

그들이 바다를 통한 연락 능력을 막으려고

자신의 배를 불 태우는 과정에서 실수로 부두를 태우고

도서관까지 번져 불탔다고 하며

두번째는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반란을 억압하려던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재위270~275년)가 도시를 점령하였을때

전투가 근처에서 발생하여 도서관이 많은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번째는 391년 콥트 주교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포고령을 내려

로마의 새로운 국교가 된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이교라 칭하고

불법으로 간주하여 폐쇄하고 파괴할 때에 피해를 많이 입었다

네번째는 642년 이후 무슬림의 알렉산드리아 점령 때에

존 그라마티쿠스가 아무르(Amur)에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와 달라고 요청하였을때

아무르는 바그다드의 카리프 오마르(Omar)에게 어떻게 해줄것인지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오마르는

"만약 그 책들이 코란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우리 그 책들이 필요가 없고

만약 그 책들이 코란에 어긋난다면 모두 없애버려라"라고 답하여

소실되고 파괴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Alexandria Library)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장소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히브리어로 유대인들에게 읽혀지던 모세 5경이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인 헬라어로 최초로 번역되어진 장소로서

현재 우리 구약 성서의 근간이 되고 있는 '70인의 번역 그리스어 성서'라는

"셉투아진트(Septuagint)"가 발간된 장소이다

이후 모세 5경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의 예언서 및 성문서가 번역되고

오늘날 외경으로 불리는 마케베오 등도 번역되면서

BC 132년경에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구약성서가 모두 번역되었다고 한다

 

구약 성서가 번역되어지는 계기는

BC 20세기 전부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BC 6세기 바빌론의 침공으로 유대인들이 끌려가고 흩어지며

아람어가 일상어인 구어가 되었으며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타인 지방을 점령하면서

그리스어가 공용어인 구어가 되면서 팔레스타인을 떠나 흩어진 유대인들은

자기 고유언어인 히브리어를 잃게되는 후손세대 현상에서

유대인 공동체인 디아스포라(Diaspora) 형성의 필요성에서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Alexandria Library)의 건물 벽면에

우리의 한글이 음각화로 새겨져 있는것이 보인다

고대 상형 문자부터 세계 각국의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중에

한글이 여러 곳에 큰 글씨로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뿌듯함이 느껴졌다 

 

 

길 건너 편의 알렉산드리아 대학교(Alexandria University)에 들어가

학교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었으나

학교로 들어 가려면 신분증 및 소지품 검사를 받으며

외부인은 출입을 통제를 받는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관광을 마치고

카이로(Cairo)로 향하며 시내를 거의 벗어 나는 중에

넓은 주차장에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알렉산드리아 쇼핑몰 광장(City Centre Alexandria)이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를 벗어나기 시작하며 호수가 보인다

호수가 보이니 삼각주에 대해서 더 알아보며

 

나일강 삼각주라고 부르는 이유는

고대 그리스의 헤로도투스(Herodotus)가 나일강의 지류들이

운반하는 물질들로 인해 하류가 확장되어 가는 것을 관찰하면서

그 모습을 보고 '델타(Delta)'라고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델타(Delta)는 그리스어로 삼각형을 의미한다고 한다

삼각주 형태로는 4가지 형태가 있는데

좁은 제방 사이를 흘러 여러 분류가 새의 발가락처럼 생긴 '조족상 삼각주'로

미국의 미시시피 강의 삼각주,

하구 부분이 뾰촉하게 바다로 돌출한 '첨상 삼각주로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의 삼각주,

만조시에는 물속에 간조시에는 수면 위로 드러나는 '만입상 삼가주'로

캐나다의 맥켄지 강의 삼각주

중심을 둔 원호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원호상 삼각주'로

여기 대표적인 나일강 삼각주이다

 

 

호수 건너편에 산업단지가 보이고

굴뚝에서 유전인지  불꽃이 피어져 나오는 모습도 보인다

 

 

이슬람 사원이 보인다

이집트의 국민 90%가 이슬람을 믿고 있지만 종교의 자유가 있는 국가이다

아랍권의 이슬람 세력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뉘어져

국가간 전쟁 및 국가내의 내전이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집트는 수니파에 속하는 국가이다

 

 

현대의 이슬람 국가에서 대부분의 국가들 90%가 수니파이지만

시아파 국가로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레바론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반군 등 이라고  할 수 있다

 

 

수니파(Sunni派)와 시아파(Shiah派)의 차이는

수니파(Sunni派)

'쿠란'과 '순나'를 따르는 자들을 뜻하는 것으로

순나는 마호메트의 모범을 의미하며

마호메트에 의해 건립된 신정국가를 종교차원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체제로 받아 들였다

이슬람의 지도권도 당대의 정치현실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역사적으로 메카의 지배 가문을 인정하였으며

이슬람의 종교적 관행을 보장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면

어떠한 칼리프의 통치도 용인하고, 외국인 칼리프의 지배까지도 용인하였다고 한다

시아파(Shiah派)는 

수니파와 가장 큰 차이는 종교 지도자인 '이맘'이다

수니파에서는 이맘을 누구든 될 수 있는 예배 인도자로 보는 반면

시아파에서는 마호메트에게서 신성을 이어받은 자로

영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를 모두 지닌 지도자 뜻하며

시아파 '이맘'은 선임자 유언에 의해 선출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냐면

마호메트가 600년대 초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딸 6명을 두었으나 1명의 딸 파띠마를 제외한 딸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마호메트가 사후에

그의 추종자들은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며

계승권을 선거에 의하여 최고 지도자를 뽑자고 주장하는 세력(수니파)과

반면 마호메트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만 전통적인 승계자이며

칼리프의 자격이 있다고

마호메드 혈통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시아파)으로 나누어지고

반대파에게 칼리프 알리가 암살 당하고

그의 아들 후세인은 메디나를 떠나 피신하며 이동하던 중에

카르발라 전투에서 죽게되었는데 이 일로 인하여

무슬림은 현재까지도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리되어 싸우는 중이라고 한다 

 

 

화물칸에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가는 노동자들로 보인다

소형 화물차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는데

기댈 수 없는 화물차량 난간에

많은 사람들이 걸터 앉아 가는 모습이 너무 불안해 보인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한가지 더 이야기 해보자

기독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셉투아진트(Septuagint)'로

셉투아진트(Septuagint)에 얽힌 탈무드 전승에 대해서 알아보면

기원전 3세기 중엽 프톨레마이오스 2세(PtolemaeosⅡ:재위BC285~246)가

유대인 장로 학자  72인을 아무 언질 없이 소집하고

그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72개 방에 각각 들여보낸 뒤에

이들에게 유대인의 히브리의 모세 5경(Pentateuch)을

각자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72일만에 번역을 완료하였는데

놀랍게도 72인이 각자 번역한 모세 5경이 모두 동일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셉투아진트(Septuagint)'란

그리스어로 '70'이라는 숫자로서 '70인의 번역 성서'를 가르킨다고 한다 

 

 

카이로(Cairo)에 거의 다달아가니

땅거미가 거의 온세상을 덮어가고 있다

 

 

카이로(Cairo)에 접어들기 시작하니

어둠 속에 멀리 피라미드가 눈에 들어 온다

 

 

아침에 시내를 지나쳐 갈 때에는

거리가 활력이 넘친다는 생각이 별로 안들었는데

밤의 거리를 보니

상가 간판의 불빛과 상가의 불빛으로 활력이 있는 거리로

변화되는 듯 하였다

 

 

거리도 차들로 복잡하다

오늘 저녁식사는 한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김치찌게 및 불고기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한식이라고 한다 

 

 

이집트 인구 중 9% 정도가 믿고 있는 '콥트교회(Coptic Church)'이다

(약 1억 인구 중 약 900만 명의 성도)

콥트 교회(Coptic Church)는

초기 기독교의 이집트에 뿌리를 둔 오리엔트 정교회의 한 교파로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신성과 인성에 대한 견해 차이로 로마 교회에서 분리 되었다고 한다

 

 

AD 4, 5세기에 이집트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451년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Cuncil of Chalcedon: 현 터키 카디코이)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나누이지도 섞이지도 않으면서 공유한다 "고 결의 하였는데

콥트인들은 이것을 거부하면서 멜키트파와 결별하였다

콥트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단일 위격 안에서

육신화를 통해 하나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여기 힐튼 호텔(Ramses Hiton)은 고층빌딩이다

같은 힐튼 호텔이지만

우리가 이틀간 묵은 힐튼 호텔(Hilton Cairo Heliopolis)

카이로 공항 근처라서 낮은 빌딩이다

 

 

오늘의 첫 방문지인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으로 왔다

여기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은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19세기에 세웠다고 한다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

1858년 이집트에 있던 오스만 제국의 왕을 설득해

카이로 근처의 불라크에 이집트 박물관을 지었으며 기자로 잠시 옮겼다가

1897~1902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박물관으로 입장에는

모든 짐 검사 및 검색대까지 통과한다

 

 

이 박물관은 이집트 문명의 전역사와

특히 파라오 시대와 그리스·로마 시대의 고대 유물까지도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박물관에는 약 10만 점이 넘는 유물들이 있으며 

그 중에 투탕카멘의 머리를 덮고 있던 순금제 가면이 전시되어 있고

 파라오의 무덤에서 출토된

약 1,700점이 넘는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Ⅲ: BC1855~1808) 무덤인 

계단식 피라미드의 정상부에 놓여져 있던

검은 현무암의 '피라미디온(The Pyramidion)'이다

피라미디온에는 날개 달린 태양을 코프라 2마리가 감싸고 있고

그 밑은 두 개의 눈이 그려져 있다

태양이 들어가 있는 면은 동쪽을 향하는데

태양 레(Re)가 빛을 비추는 방향을 의미하였고

두 눈은 태양신의 눈을 의미한다고 한다

좌우 타원형 안에는

파라오 이름과 힘께 '레의 아들' '상하 이집트의 왕'이라는 글귀가 있고

또한 그들의 영원한 생명을 기원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왕실 바닥을 장식하고 있던 것을

갖다 놓은 것이라고 한다

 

 

아멘호테프 3세(BC 1387~1350)와 왕비 티이(Tyie)의 거상

높이 7m로 원래 서 테베 지역의 아멘호테프 3세 신전에 있던 것으로

메렌프타(BC 1234~1220)가 자신의 신전을 짓기 위해 허물어뜨려

처음 발굴할 때 여러 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던 것을

조립해서 복원한 것이라 한다

왕비 티이(Tyie)는 평민 출신이지만 명석하고 능력 있는 여성으로

 뒷날 개혁군주가 된 아케나톤을 낳았다

 

 

1층 로비에 다양한 파라오와 신들 조각상이

전시되어 놓여져 있는 모습이다

 

 

'태양의 배(Solar Boat)'로서 다쉬르(Dahshur) 부근

세누스레트 3세(SenusretⅢ:BC1878~1839)의 피라미드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일명 '태양의 배'는

보통 파라오의 시신을 나일강 건너 서쪽으로 옮길 때도 사용하지만

고대 이집트의 사후 세계에 대한 그들의 신앙인

태양신 숭배 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태양신 라(Ra)는 파라오의 조상으로 파라오가 죽으면

이 '태양의 배'를 타고

낮에는 하늘을

밤에는 지하의 강을 라(Ra) 신을 따라 여행한다고 믿어

무덤 옆에 같이 묻었다고 한다

 

 

나르메르(BC 3100년경) 파라오 부조 석판으로

3단 구성의 상단에는 하토르(Hathour) 여신을 상징하는

뿔달린 암소가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는 목이 잘린채 늘어선 적군 옆으로

승리한 파라오와 군사들 모습이고

하단은 맹수들을 길들이는 장면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뒷면에는 상이집트 왕인 나메르가

델타지역의 하이집트 왕의 머리를 잡고 내려치려는 모습의

하이집트를 정복하였다는 것을 새겨놓았다

 

 

멘카우레(Menkaure: BC 2494~2472)의 삼신상으로

왼쪽은 하토르(Hathor) 여신이고

중앙은 멘카우레(Menkaure)

오른쪽은 바트(Bat) 여신이라고 한다

기자(Giza) 멘카우레 사원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나무로 된 이 동상은

이집트 고대 제국 시대의 것으로

4600년 이상 지난 조각상 임에도 보존 상태가 잘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추정해 보는데

도움이이 되는 것이라고 한다

 

 

석회암으로 조각하여 색을 입힌

고대 이집트 제 4 왕조 시대(BC 2600년경)에

헬리오폴리스 태양신전의 신관이며

왕자인 라 -호텝(Ra-Hotep)과 부인 노프레트(Nofret)로

이집트 고왕국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부부 좌상 중의 하나라고 한다

1871년 메이둠의 라호텝 마스타바에서 출토되었다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BC1479~1464:재위) 두상이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투트모스 2세(Thutmosis)의 첫째 부인이기도 하지만

투트모스 1세를 한 아버지로 둔 이복 남매라고 한다

투트모스 2세가 일찍 죽은 후

어린 아들이 투트모스 3세로 왕위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섭정에 만족하지 않고 파라오가 되기 위하여 명분을 쌓는다

그녀의 아버지인 투트모스 1세가 아들 투트모스 2세와 함께

딸인 자신에게도 파라오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고 주장을 펴고

또한 자신이 '아문(Amun) 신의 딸'이라고 소문을 퍼트리고

당당하게 파라오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그 후 통치기간 동안 이집트는 활발한 무역정책을 펼쳐

부강한 국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룩소르(Luxor) 왕가의 계곡

아케나텐(Akhenaten: BC 1352~1336) 무덤(KV55)의 옆방에서

출토된 카노푸스 단지(Canopic Jars)로

미아라를 만들때 내장을 담는 단지로서 

아케나켄의 2번째 부인인 키야(Kiya)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단지 덮개는 처음에는 아마르나 왕가에서 채택한 군사 헤어스타일이었으나

누비아 가발의 공주 또는 여왕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아톤신(태양신)에게

아케나텐(Akhenaten: BC 1352~1336) 파라오가 

네페르티티 왕비(Nefertiti)와 함께

찬양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한다

 

 

아케나텐(Akhenaten: BC 1352~1336)이라고 불리는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Ⅳ)'이다

 아멘호테프 4세는

화려한 신전을 짓지도 않았으며 묘지도 검소하게 만들고

정벌 전쟁도 피하고, 동맹국에 전쟁 발생시 군사 원조도 거부하였던 왕으로

그 동안 조상들이 섬겨오던 아문신(Amun) 대신

아텐신(Aten)을 유일신으로 섬기도록 명령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도 아텐신을 섬기는 자란 의미에서

'아케나텐(Akhenaten)'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아케나켄은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신관,신료들에 의해

파라오 자리에서 밀려 났으며

당시에 이집트 최고의 미녀라는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Nefertiti)도

신전에 유폐되어 불행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아케나켄과 네페르티티 사이에서 여섯 딸 중 세번째 공주인

안케세나문(아낙수나문:Ankhesenamun)이 투탕카멘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라오 석상들을  만들때

실제보다 젊은 시절 잘생기고 훤칠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아케나켄은 자신의 이미지를 그대로 제작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얼굴은 길고 엉덩이는 크고 펑퍼짐하여 불균형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다

이 조각성으로 인해 당시에 파라오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며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근친 결혼에서 오는 유전 변이적 결과로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적을 물리친

람세스 2세(RamessⅡ: 생애 BC1303~1213)로

람세스 2세가

흑인, 백인, 황인 머리채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이것은 세계를 평정하였다라는 의미의 조각품이라고 한다

 

 

람세스 2세(RamessⅡ: 생애 BC1303~1213)의 어린시절 모습으로

뒤에 호루스(Horus) 신이 보호하고 있는 장면이다

어린 람세스 2세 머리에는 왕족의 상징인 코프라 뱀머리의

우라에우스(Uraeus)가 있고

그 위로는 태양신(Ra)을 상징한 원형이 조각되어 있고

받침대에는 람세스 2세라는 상형 문자가 표시되어 있다

 

 

 

좌측 호루스(Horus) 신과 우측 세트(Set) 신의 축복을 받는

람세스 3세(RamessesⅢ:BC1186~1156)이다

호루스는 왕과 하늘의 신이고

세트는 혼돈과 무질서로 폭풍과 사막을 상징하는 신으로

호루스의 아버지 오시리스를 죽인 신이다

또 호루스는 검은 지역(푸른땅)을 지배하는 신이며

세트는 붉은 지역(사막)을 지배하는 신으로

서로 균형을 이룬다고 한다

 

 

이 부조 석판은 자료를 찾을 수 없고

상형문자도 읽을 수 없어 추정해서 글을 써본다 

상단에는 코브라 두마리의 우라에우스(Uraeus)가 있고

그 아래로

좌측부터 호루스(Horus)신, 하토르(Hathour)신, 민(Min)신이 있고

그 옆(오른쪽)으로 봉헌을 하고 있는 사람이 서 있다

호루스는 복수의 신이며, 하늘의 신이며, 수호의 신이고

하토르는 태양신 라(Ra)의 딸이자 호루스의 부인으로 사랑과 미의 여신이고

민은 다산을 상징하는 신으로

나일강의 기름진 흙을 상징하는 검은색 피부를 가진 신이라 한다 

이 장면으로만 유추해 보면

고대 나일강변의 농경 사회에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비석이 아닌가 한다 

 

 

나무관 안에 잘 보관되어 있는 미이라이다

유야(Yuya)의 미이라라고 한다

 왕의 계곡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며 

유야는 고위 관료중 한명이었으며 그의 딸이 파라오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축소 모형 '태양의 배'들이다

고대 이집트 종교 우주관에서 태양신 라(Ra)

은하수와 사후세계인 두아트(Duat)

를 여행할 때 타고 다니는 배이다 

태양의 돛단배에 탄 라(Ra)는 태양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낮 동안에는 동쪽 하늘에서 떠올라서

하늘의 여신 누트(Nut)의 몸을 따라 서쪽 하늘을 통하여

사후세계인 두아트(Duat)로 들어간다고 믿어졌다

 이집트사람들은 누트(Nut)의 몸에 '천상의 나일강' 즉 은하수가 있어

 태양의 돛단배는 이 강을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였다.

밤이 되어 사후세계로 내려간 라는 암두아트(Amduat)에 서술된 것처럼

 열두시간 동안 각각 다른 신들과 적을 만난다고 한다 

특히 절대 악을 상징하는 아펩(Apep)을 무찌르고

다음날 동쪽 하늘에서 다시 떠오른다고 한다

 

 

<투탄카문 전시관은 촬영을 금지하고 있어 퍼 온 사진이다>

투탄카문(Tutankhamun:BC1336~1327)의 황금마스크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영국의 이집트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1922년에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되었다고 한다 

투탕카멘은 아케나텐과 스멘크카레가 죽은 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18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발굴 당시에

왕의 미라는 작은 묘실 속에 안치된 3중 관 속에 누워 있었고

가장 안에 있는 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밖에 있는 2개의 관은 나무틀에 금을 망치로 두드려 박아넣었다고 한다 

왕의 머리에는 찬란한 황금 가면이 씌워져 있고

 수많은 보석과 부적이 미라 위와 그 미라를 휘감은 싸개 속에 놓여 있었고

 관과 관석은 글을 가득 적은 나무판에

금박을 입힌 4개의 제단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1층과 2층을 대충 돌아보고

밖으로 나오기 전에 기념샷이다

 

 

카스넬 나일 다리(Kasr el Nile Bridge) 건너

게지라(Gezirah) 섬의 카이로 타워(Cairo Tower)가 보인다

'카이로 타워(Cairo Tower)'는 카이로의 상징인

높이 187m의 원통 모양의 기념건축물로

맨 꼭대기의 전망대에서 카이로 시가지 전경, 나일강 전경,

멀리는 피라미드 볼 수 있다고 한다

 

 

게지라 섬의 원형 건축물이 보인다

소피텔 카이로 나일 엘 게지라 호텔(Sofitel Cairo Nile Gezirah Hotel)이다

게지라(Gezirah) 섬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기 모세와 관련이 있는 땅으로

파라오가 아기를 박해하던 시대에

박해를 피해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 갈대 숲에 숨겨놓은 아기 모세를

파라오의 딸 공주가 발견하여 건졌다는 '성서의 땅이라고 한다

게지라(Gezirah)는 아랍어로 '섬'이라는 뜻이다

 

 

성서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이야기를 한다

카이로에는 올드 카이로 지역이 있다

이번 여행은 성지 순례가 아니기에 그 쪽에는 가지 않지만

올드 카이로(Old Cairo) 지역은 고대 도시로

아기 예수가 헤롯의 박해를 피해 피신하여 와 잠시 머문 자리에 지은

Cavern Church(동굴교회,Abu Serga Church)가 있으며

BC 6세기경 전후에 활동하였던 구약성서의 예레미야 선지자의 석관이 있는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 벤 에즈라(Synagogue Ben Ezra)가 있는 등

성지 순례로 여러 곳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하여 나일강변의

선상식당 안드레아(Andrea)로 이동하였다

 

 

기자(Giza) 지구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 가까워지자

피라미드가 보인다

 

 

피드미드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 있을 때는

저 아래에서 차량통행을 막기 때문에 한참 걸어서 매표소까지 올라와야 하나

운 좋게도 매표소까지 차를 타고 올라 왔다고 한다

 

 

매표소 검색대를 통과하여 사막 언덕을 오르는데

거대한 피라미드 2개가 보인다

여기에는 쿠푸왕, 쿠푸의 아들 카프레왕, 카프레의 아들 멘카우레 왕의

거대한 피라미드 3개가 있는 곳이다

 

 

가이드는 이 곳에서 필히 주의할 점을 공지한다

관광하기 위하여 마차를 탈 경우에는 먼저 필히 가격을 흥정하고

미리 주지 말고 끝마치고 줄 것이며

요구할 때마다 가격 변동 바가지를 씌우니 주의할 것과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멋있게 찍어 주겠다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한다

찍어주고 1, 2유로도 아닌

10유로, 20유로를 요구한다고 한다

그들은 접근할 때 친절한 척 그냥 찍어주겠다고 한다

우리가 찍을때도 '여기서 그렇게 찍으면 멋없다' '찍어주겠다'며

여러번 접근하였었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옆에 있는

태양의 배 발굴지이다

이 곳에서 1954년 발굴된 나무로 제작된 태양의 배가 5척이 발견되었는데

1척은 발굴하여 복원하여여 전시하고 있으며

4척은 아직 땅에 묻혀 있다고 한다

 

 

4600여 년전에 제작된 '태양의 배'이다

목재는 솔로몬 왕궁을 지을때 사용했다는 레바논의 삼나무이고 

길이는 43m, 폭 6m, 높이 7.9m에 무게 45t 이라고 한다

그 오랜 세월 땅속 해체된 채로 묻혀 있었다는데 썩지도 않고 발굴된 것은

석회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밀봉하여 묻었기 때문이라 한다

'태양의 배'가 피라미드 옆에 묻힌 것은

죽은 자가 재생.부활하여 영생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나일강을 하는데 내세에서 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고대 이집트인들은 

무덤 속이나 그 근처에 나무나 돌로 모형 배를 만들어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태양의 배'도 쿠푸왕 피라미드 옆에 묻혀있는 것이라 한다

이 '태양의 배'는 쿠푸왕이 죽은 후 이 배를 이용하여

그의 시신을 멤피스에서 이 곳 기자까지 운반해 오는데에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기자(Giza)의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제4왕조 2번째 왕 쿠푸(Khufu:BC2589~2566년) 피라미드로

대(大)피라미드(Pyramid)라고도 한다

밑변 길이가 평균 230.4m, 높이가 147m라고 하는데

꼭대기의 일부가 허물어져 138m라고 한다

이 피라미드를 건설하는데 20년이나 걸렸고 10만명의 노동력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쿠푸왕 피라미드(Khufu Pyramid)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원래는 보이는 위쪽이 입구였으나 막혀 있고

아래쪽의 조그만 구멍을 입구로 사용되고 있는데

조그만 구멍은 피라미드 도굴꾼들이 뚫어 놓은 것이라 한다

대피라미드 내부에는 '지하 방' '왕비 방' '왕의 방' '중량경감의 방'과

큰 복도, 통로, 환기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데

왕의 방에만 들어 갈 수 있어 그 곳에 들어 가보기로 한다 

 

 

처음에 입구를 들어서면 자연동굴에 들어서는듯한 느낌을 주는데

조금만 들어가면 기어가는 구간이 나온다

오늘 아침을 먹을 때 이 곳에 다녀간 여자들 일행을 만났는데

피라미드 내부가 기어가는 구간이 한참 길고

매우 힘들었으며 땀 많이 흘렸다고 너무 엄포를 놓아

허리 숙이고 걷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나는

돈주고 실컷 고생만 하는 것이 아닌가 포기 생각도 하였지만

그래도 이 먼 이집트까지 와서 피라미드 속에 안들어 가 보면 후회할 것 같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비좁은 통로를 기어서 20m 정도 갔을까

커다란 올라가는 통로가 나온다

나도  모르게 "이게 뭐야?" 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왔는데 너무 수월해 허망한 느낌이 든다

그 여자들 엄포에 괜히 포기하였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통로는 폭 2m, 높이 8m로서

이 통로로 계단 40m 정도 올라가면

대 피라미드 중앙에 있는 '왕의 방'으로 연결된다

'왕의 방'은

지상에서 42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왕의 방'에 다달으니 넓은 평평한 방이 나온다

벽에 벽화가 있으려니 했는데

벽화는 보이지 않고 화강암 돌로 쌓여진 평평한 벽이다

 

 

방 한 쪽에는 쿠푸(Khufu)왕 시신이 안치되었던

석관이 뚜껑이 없이 놓여져 있었다

천정의 돌들은 50t의 화강암 판자로 9매가 덮여져 있고

그 위가 '중량경감의 방'이라고 한다

 

 

도굴할 때 뚫어 놓은 통로이다

도굴은

9세기 이슬람 압바스 왕조(Abbasids:750~1258년) 시대의

칼리프 알-마문(Al-Ma:786~833년)이

대 피라미드를 도굴하기 위하여 뚫은 것이라고 한다

 

 

대 피라미드에서 나와 바라보는 기자(Giza) 지구이다

기자 지구는 카이로(Cairo)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나일강(Nile River)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대 피라미드에서 옆으로

'메르디앙 피라미드 호텔(Le Meridien Pyramid Hotel)'이 보인다

우리 대한민국과 관계가 깊은 

'카이로 회담Cairo conferences)'이 열렸던 장소로

제1차 회담(1943. 11. 22~26)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인 영국 윈스턴 처칠과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논의했으며

 또한 중국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했던 모든 영토를 빼앗고

한국의 독립보장을 선언한 최초의 회담의 장소라고 한다

 이 선언은 11월 27일 발표되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국이 일본 영토문제에 관하여 내린

최초의 공식성명이었다고 한다

그 주요 내용은

      1. 미국·영국·중국 3국은 일본에 대해 가차없는 압력을 가한다.

      2. 3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응징하나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다.

      3.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얻은 태평양제도의 박탈, 만주·타이완 등의

중국에 대한 반환, 일체의 점령지역으로부터 일본의 철수 등이다.

또한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을 넣어

"한국민이 노예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명시해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국제적인 보장을 받은 회담이었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들은

1945년 7월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된 포츠담 선언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기자(Giza)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 있는

피라미드를 전체 조망할 수 있는 장소(Panoramic View oe Pyramids)로

이동하였다

 

 

버스가 보이는 좌측의 피라미드부터 제4왕조 시대(BC2613~2494년)의 

2번째 왕 쿠푸(Khufu:BC2589~2566년) 피라미드,

쿠푸의 손자로 4번째 왕 카프라(Khafra:BC2558~2532년) 피라미드,

카프라의 아들 5번째 왕 멘카우라(Menkaura:BC2532~2503년) 피라미드이다

 

 

쿠푸왕 피라미드와 카프라왕 피라미드이다

카프라왕 피라미드(Khafra Pyramid)는

쿠푸왕 피라미드(높이 147m) 보다

높이가 조금 낮은 143m이고 밑 한변의 길이는216m라고 한다

카프라(Khafra)는 고대 이집트어로

"태양신 라(Ra)의 영광 속에 태어난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집트 제4왕조 시대 4번째 왕인 카프라는 쿠푸(Khufu)왕의 손자로

카프라의 아버지인 3번째 왕 라제데프(Redjedef) 피라미드는

이 곳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잔

아부 라와시(Abu Rawash)의 천연 언덕에 미완성 상태로 있다고 한다

 

 

카프라왕 피라미드 아래 쪽에서 동쪽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스핑크스(Sphinx)가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스핑크스(Sphinx)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하여

 이 곳의 문이 닫히기 전에 부지런히 걸어와 입장하는데

입장하려는 관광객로 너무 많이 붐빈다

 

 

스핑크스(Sphinx)는 몸은 엎드려 있는 사자의 모습이고

머리는 파라오의 모습이다

스핑크스의 얼굴 모습이 많이 손상되어 있는데

원래는 이마 부분에 왕권을 상징하는 코브라가 조각되어 있었으나 없고

코 부분과 턱 수염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없다

세월의 흔적도 있겠지만 설에 의하며

코가 없으면 부활할 수 없다는 고대 이집트 전설을 들은

이슬람 군이 부셨다는 설과

원정 온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가 포를 쏘아서 부셔졌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스핑크스(Sphinx)의 얼굴을

파라오인 카프라(Khafra) 자신의 얼굴로 제작하였다고 하며

몸 길이73m, 높이 22m, 얼굴 폭 4m로

사막의 석회암 언덕을 깍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스핑크스(Sphinx)는 피라미드(Pyramid)를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하는데

스핑크스가 피라미드 보다 먼저 만들어 졌기에

수호신이라는 말은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좌측으로 멘카우라(Menkaura:BC2532~2503년) 피라미드가 보인다

멘카우라(Menkaura)는 쿠푸의 증손자이며 카프라의 아들로서

기자(Giza)의 세 피라미드 중 남서쪽에 있는

높이 65m, 밑변 길이 103m로 가장 작은 피라미드이다

 

 멘카우라 피라미드(Menkaura Pyramid)에는

"이집트의 신데렐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옛날 이집트 어느 마을에 금발의 장미 빛 얼굴의 아름다운 소녀가 살았다고 한다

어느 봄날 이 소녀는 나일강변의 갈대 숲에서 목욕을 하며

강변에 옷과 신을 벗어 놓았는데

그 때 독수리가 나타나 그녀의 빨간 예쁜 신발 한쪽을 물고 날아 갔는데

멤피스 부근을 날아가던 독수리가 그만 지쳐 신발을 놓쳐다고 한다

때 마침 산책 중이던 파라오 앞으로 신발이 떨어져

파라오가 깜짝 놀라기는 하였으나 신발이 너무 예뻤기에

주인을 찾아 올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주인을 찾아 헤메다가 그 소녀를 결국 찾아 파라오 앞으로 데리고 왔는데

파라오는 그 소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해 결혼하여 왕비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왕비는 얼마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말았는데

슬픔에 잠긴 파라오는 왕비를  작고 아담한 석조기념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멘카우라 피라미드(Menkaura Pyramid)의 전설이다

 

 

스핑크스 뒤로 카프라 피라미드가 웅장한 모습으로 보인다

카프라 피라미드(Khafra Pyramid)의

정상부에는 평탄한 모습이나

아래 부위로 내려오면서 울퉁불퉁한 모습이다 

원래 화강암으로 쌓아 만든 피라미드 겉 표면은

석회암으로 된 화장석으로 평탄하게 덮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4세기에 피라미드를 덮고 있던 대부분의 화장석을 뜯어내어

카이로의 술탄 하산 모스크를 짓는데 사용하였기 때문으로

아래부위는 계단처럼 화강암만 남아 있고

윗 부분만 당시의 모습으로 석회암 화장석이 덮여 남아 있다고 한다

 

 

기자 스핑크스 피라미드 매표소 쪽을 빠져 나오는데

건물 옥상 쪽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피라미드를 배경으로 석양을 찍으려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다 

 

 

스핑크스(SphinX)는 동물의 왕인 사자를 숭배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고대 이집트에서

적을 무찌르는 힘이 있어 파라오의 수호자로서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고 한다

스핑크스(Sphinx)에 얽힌 전설은 이집트에서와 그리스에서 전설이 있다

이집트에서 전설은

제18왕조 시대 투트모스 4세(TuthmoseⅣ:BC1397~1388)에 대한 전설로

그가 왕자시절 사막에 사냥을 나갔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별안간 스핑크스가 나타나 "모래 속에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니

나를 꺼내주면 파라오가 되도록 해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라오라는 말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파라오의 욕심에 주변의 흙을 파보니 스핑크스가 나왔다고 한다

그 후 파라오의 서열이 안되는데도 투트모스 4세로 파라오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대 스핑크스는

 "지평선의 호루스(Horus)신" 하르마키스(Harmakhis)가 되었으며

스핑크스 옆에 신전을 만들어 매년 성대하게 축제를 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투트모스 4세의 '꿈의 전설'을 화강암 비석에 새겨

스핑크스 앞에 세워서 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스 전설은 기차를 타고 가며 이야기 하자

 

 

오늘 카이로에서 피라미드 관광을 마지막으로 마치고

기자 기차역(Giza Station)으로 간다

카이로(Cairo)에서 이집트 남쪽으로 980Km 거리에 있는

아스완(Aswan)으로 13시간을 이동하기 위해서 이다

 

 

기차는 2인실 침대 칸으로

칸 안에 세면과 양치질 정도는 할 수 있는 수도 시설이 있고

저녁 식사는 열차식이라 상을 펴고 식사 배송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어제 저녁 열차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캄캄한 밤 기차 창밖도 보이지 않아  무료함에 바로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 보니 출발한지 10시간 정도 지난 아침이다

지금 어디쯤 가고 있나 확인 하였더니

룩소르(Luxor)를 지나 투드(Tud) 부근을 지나고 있었다

아직도 아스완(Aswan)까지는 3시간 넘게 가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Sphinx)는 여자 괴물이라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스핑크스(Sphinx)'

 여신 가이아(Gaia)가 분노하여 탄생시킨 사상 최대의 무서운 거인으로

목이 백개나 되고 눈과 입에서는 불을 뿜으며 까만 혀를 지녔으며

소나 사자 혹은 개의 소리를 내기도 하고 신

들의 흉내도 내는가 하면 팔과 다리의 끝은 뱀의 형태를 하여

신들도 떨게한 무시무시한 괴물 듀폰(Typhon)과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인이고 하반신은 징그러운 뱀인 괴물 에키드나(Echidna)와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이라고 한다

스핑크스는 제우스의 부인 헤라(Hera)의 명령으로

테바이(Thebes)에 있는 바위산에 살게 하였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침에는 네 다리, 낮에는 두 다리,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은 무엇이냐?"고

수수께끼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풀지 못한 사람은 바로 잡아 먹었다고 하며

테바이의 왕도 이 문제에 도전하였가 풀지 못하여 잡아 먹혔다고 한다

스핑크스는 계속 사람들을 괴롭히며 잡아 먹었는데

그런데 어느날 젊고 용감한 오이디푸스(Oidipus)가 나타나

"그것은 사람이다"라고 수수께끼를 풀자

자신의 수수께끼를 아무도 풀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던 스핑크스는

굴욕감에 그만 화가 나서 물속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2인실 침대칸 기차에서

아침식사 열차식이 오기 전에 편히 쉬고 있는 중이다

 

 

나일 강변의 주변은 기름진 땅이라고 한다

라일 강변에서 조금만 떨어져도 사막지대가 펼쳐져

사람들은 거의 나일강변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나가아 사라 나스르(Nagaa Salah Nasr) 부근을 지나치는데

기차 창 밖으로 공동묘지가 눈에 들어온다

 

 

나일강변 뒤로 바로 사막지대가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스완(Aswan) 역이다

카이로 기자(Giza) 역에서 출발한지 980Km 거리를 달려와

약 13시간만에 기차에서 짐을 챙겨 내린다

 

 

아스완(Aswan)은

상(上)이집트 지방에 있는 주도(州都)로서

시(市)에 약 34만5000여 명이 거주하는 무역도시이며 국경도시라고 한다

아스완에서 남쪽의 수단 국경까지 거리는 300Km가 넘지만

농경지도 마을도 마을도 없는 황량한 사막지대가 펼쳐 지기에

아스완이 국경도시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아스완과 수단의 국경도시인 와디할파에서

나일 강(Nile River)은

화강암층을 뚫고 흐르며 오랜 세월 암층을 서서히 침식하면서

강 가운데에 폭포로 불리는 많은 급류와 섬들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것들은 수상교통에 장애가 되어 배가 다닐 수 없어 

그 결과 이집트의 파라오 시대에

아스완을 국경도시로 정하게 된 이유라고 한다

 

 

아스완에 도착하여

먼저 나일강변에 정박되어 있는

크루즈(Cruise)로 가서 배안에 방을 배정 받아 짐을 두고 나와

아스완 남쪽 변두리의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있는 화강암 채석장으로 간다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보이는 곳으로 채석장을 올라가면서

고대 이집트 시대에 거대한 화강암을

어떻게 매끄럽게 잘라내어 채취하였는지 알려주는 흔적이 이라고

바위에 일정하게 홈을 파낸 흔적을 가르킨다

일정하게 파낸 홈에 나무 쐐기를 박은 다음에 물을 부으면

나무 쐐기가 물에 불어나며 바위가 자연스럽게 갈라진다고 한다

 

 

미완성 오벨리스크(Unfinished Obelisk)이다

길이 42m, 바닥면적 4㎡로

하트셉수트(Hatshepsut:BC1479~1464년) 여왕이

카르낙 대신전 안에  

아들인 투트모스 3세(ThutmosisⅢ:BC1479~1425년) 신전을 만들며

신전 앞에 세우려 했던 것인데 결함으로 그만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완성되었다면 이집트에서 가장 큰 오벨리스크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화강암 언덕에서 내려 가는 방향 표시가 안되어 있어 헤메다가

현지인에게 물어보고 길을 찾아 아래쪽으로 내려 간다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있는 곳에서 나와

남쪽의 아스완 로우댐(Aswan Low Dam) 호수로 향한다

 

 

아스완 로우댐(Aswan Low Dam) 호수의 

필레 신전 선착장(Marina Philae Temple)이다

아스완 로우댐 호수 안에 있는 아질키아(Agilkia) 섬에 있는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으로 오가는 배 선착장이다

 

 

호수로 배를 타러 내려가는 길목에는

이집트와 필레신전에 대한 기념품 잡상인 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선착장에서는 아질키아(Agilkia) 섬의 필레신전으로 오가는

관광객들로 많이 붐비고 있었다

 

 

선착장 주변에는 호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숙박시설들도 있어

우리 일행 중에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1902년 건설된 아스완 로우 댐(Aswan Low Dam)은

아스완 댐(Aswan Dam)이라고 지칭되는데

아스완 댐에서 약 7Km 상류에

 1971년 준공된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과 구분하기 때문이다

 

 

아스완 로우 댐과 아스완 하이 댐 사이에 형성된 호수는

우리가 배를 타고 아질키아 섬의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으로 가고 있는 

아스완 로우 댐 호수로서 아름다운 호수이다

 

 

'아스완 로우 댐 호수(Lake of Aswan Low Dam)'는

아스완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1902년 영국인들이 화강암으로 나일강을 약 2.4Km 구간을 높이 45m로

'아스완 댐(Aswan Dam)을 건설함으로서

형성된 호수라고 한다

 

 

아스완 댐(Aswan Dam)은

건설 당시에는 담수량이 10억㎡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이었지만 갈수록 그 정도 담수로는 

이집트의 농업 용수를 대기는 부족하여짐으로  

상류 쪽에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하게 됨으로서 효용성이 낮아졌다고 한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출발한지 약 10분 정도되어서

아질키아(Agilkia) 섬의 필레 신전이 보인다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이 한눈에 들어온다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은

이시스(Isis)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아질키아 섬의 필레 포구(Port de Philae)에서 배에서 내려

필레 신전 광장으로 올라선다

좌측으로 제30왕조 넥타네보 1세(NectaneboⅠ:BC380~362년)의 정자가 보이고

열주 기둥들이 이어진다

 

 

필레의  열주기둥들이 양쪽으로 이어지고

이시스 신전(Temple of Isis)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은

이시스(Isis)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으로서

 원래 아질키아(Agilkia) 섬에 있던 신전이 아니라

수몰되어진 필레 섬에 있던 신전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필레 섬은 아질키아 섬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던 섬으로서

1902년 아스완 로우 댐 공사로 인하여 

바닥까지 물이 차 있을 때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1년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 되면서 완전 수몰 위기에 처했는데

1972년~1980년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아질키아 섬에 필레 섬과 동일한 지형을 만들어

신전 유적을 덩어리로 분해하여 옮겨 재조립한 신전이라고 한다

 

 

이시스(Isis) 여신의 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이고

신전 벽에는 이시스(Isis) 여신이 뒤에서 

아들 호루스(Horus)가 인간에게 봉헌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레(Re)를 품고 있는 숫양의 뿔을 쓰고 있는 오시리스(Osiris)와

레(Re)를 품은 하토르의 뿔을 쓰고 있는 오시리스의 인 이시스(Isis) 여신이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신을 의미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또한 주위의 벽에는

신들에게 공물을 받치는 장면들과

어린 호루스(Horus) 신에게 젖을 먹이는 이시스 여신 등의

신의 탄생에 관련된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1798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 병사들과

1923년 이 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남긴 낙서라고 한다

 

 

오시리스(Osiris)가 앉아 있고 부인 이시스(Isis) 여신이 뒤에 서 있으며

파라오로부터 경배를 뱓는 모습이다

'이시스(Isis) 여신'은

이집트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여신으로 알려져 있는 신으로

그리스와 로마로 전파되어

제우스의 여동생이자 배우자로서 곡물의 신인 데메테르(Demeter)와

로마에서는 식용식물을 관장하는 케레스(Ceres)로 지칭되어

고대 지중해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신이었다고 한다

 

 

'이시스(Isis) 여신'은

원래 하 이집트 나일강 하류의 델타 삼각주에서 태어난 신으로

세월이 흐르며 상 이집트 신으로 더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대지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여신 누트(Nut) 사이에서

다산의 신이자 죽은 파라오의 화신 오시리스(Osiris)

사막과 이방의 신이자 난폭과 어둠의 신인 세트(Set)

죽은 자를 살리고 치유와 보호의 여신 이시스(Isis)

화합과 모임, 힘의 상징, 죽음의 비탄의 여신 네프티스(Nephtees)가

태어났다고 한다

오시리스(Osiris)는 여동생 이시스(Isis) 부부가 되어

호루스(Horus)를 낳았으며

세트(Set)는 막내 여동생 네프티스(Nephtees)와 결혼하였으나

가정에 충실하지 않아

네프티스는 큰 오빠를 사랑하여

오시리스(Osiris)와 사이에서 아누비스(Anubis)를 낳았다고 한다

세트는 예쁜 부인을 둔 형 오시리스를 시기하고 있었는데

자기 부인까지 큰오빠인 오시리스를 사랑하자 오시리스를 증오하였다고 한다

 

 

어느날 세트(Set)가 오시리스(Osiris)와 같은 크기의 상자를 만들어

그 상자를 채우는 자에게 그 상자를 선물을 주겠다고 하자

오시리스가 그 상자 안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그러자 세트는 그 상자를 막고 나일강에 버려 죽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누이동생이지만 형 오시리스의 부인인 이시스(Isis)가

이 상자를 찾아내어 하이집트에 숨겼다

이 사실을 안 세트(Set)는 그 상자를 찾아내어

오시리스(Osiris) 시신을 14 조각으로 찢어 온 천하에 뿌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시스(Isis)는 온 세상을 다니며 시신을 다 찾아내어

아누비스(Anubis)에게 장사를 지내게 한 다음

자신이 스스로 새로 변해 날개짓과 생명의 입김으로

오시리스에게 불어 넣어 소생시켰다고 한다

이 때부터 오시리스(Osiris)는 죽음의 신이자 부활의 신이 되었고

새가 된 이시스(Isis) 여신은 오시리스와 사랑을 나누며 호루스를 낳았고

호루스(Horus)는

세트(Set)를 죽임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고 한다

 

 

콥트 교회(Coptic Church)의 표식이다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은

이집트에서 제30대 마지막 파라오 왕조로

프롤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Dynasty:BC305~BC30년)를 세운

넥타네보 1세(NectaneboⅠ:BC380~362년)에 의해

이시스(Isis)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AD 4세기 경까지 계속 이시스 여신에게 제사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스에서 고대 올림픽 경기도 금지시켰던

로마 황제인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I:346~395년) 치하에서

그리스도교 외에는 어떠한 이교적 경배를 금하기 위해

모든 신전을 폐쇄하였다고 하며

이후 기독교인 콥트교인들은 신전을 교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콥트교에 대하여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다시 한번 이야기 하면

콥트교회(Coptic Church)

AD 4, 5세기에 이집트 콥트인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로마인들인 멜키트파(황제의 사람들) 사이에

451년 단성론을 배격한

칼케돈 공의회(Cuncil of Chalcedon: 현 터키 카디코이)를

둘러싸고 신학 논쟁이 벌어졌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서

나누이지도 섞이지도 않으면서 공유한다 "고 결의 하였는데

콥트인들은 이것을 거부하면서 멜키트파와 결별하였다

콥트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의 단일 위격 안에서

육신화를 통해 하나로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좌측에 이시스(Isis) 여신의 며느리이자 아들 호루스(Horus)의 부인인

'하토르(Hathour) 여신'의 작은 신전이 보이고

우측에는 로마제국 13대 황제로 로마제국 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고 칭송받는

 트리야누스(Marcus Ulpius Trajanus:53~117년) 정자가 보인다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은

2300여 년 전에 이집트 말기왕조시대인

제30왕조 넥타네보 1세(NectaneboⅠ:BC380~362년)가 세워

이시스(Isis) 여신에게 바쳐진

이집트에서 마지막으로 건립된 신전이라고 한다

 

 

기원전 394년에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비석이라고 한다

 

 

 

신전의 첫째 탑문이 보인다

필레 신전의 넥타네보 1세(NectaneboⅠ:BC380~362년)가 건립한

첫째 탑문 앞에 원래는 높이 18m, 폭 5m의

오벨리스크(Obelisk)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는다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을 한바퀴 돌아서

우리가 타고 온 배가 대기하고 있는

아질키아 섬의 필레 포구(Port de Philae)로 걸어 나온다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을

댐 공사로 인해 수몰되는 필레섬에서 아질키아섬으로 옮겨올 때

신전을 약 4만 개의 블록으로 잘라서

1972년부터 1980년까지 8년의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아질키아 섬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져

수몰 된 필레섬(Philae Island)에서 

필레 신전이 있던 위치를 표시해 놓은 기둥이라고 한다

 

 

수몰 된 필레섬(Philae Island)에서

아질키아섬(Agilkia Island)의 필레 신전(Temple of Philae)을 바라 본 사진이다

 

 

2300여 년 전에 이집트 말기왕조시대인

제30왕조 넥타네보 1세(NectaneboⅠ:BC380~362년)가

필레섬(Philae Island)에 이시스(Isis) 여신의 신전을 지은 이유는

 남편 오시리스(Osiris)가 시동생 세트(Set)에게 살해되자

이시스(Isis) 여신이 남편 오시리스(Osiris)의 시신을 숨겨논 땅이 옆에 있는

비게섬(Bigeh Island)이기 때문으로서

열흘에 한 번씩 비게 섬에 찾아가서

남편의 무덤에 우유 공양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동생 세트(Set)가 형 오시리스(Osiris)의 시신을 찾아 토막내어

온 세상에 뿌렸다고 한다

 

 

다시 아스완 로우댐(Aswan Low Dam)

필레 신전 선착장(Marina Philae Temple)으로 돌아와 광장에 서니

호수로 배를 타러 갈때는 서둘러 지나치며 눈에 띠지 않던 것들이

타고 나와 여유가 생기니

주변의 많은 기념품 샵과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스완(Aswan) 시내로 돌아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들의 생명의 젖줄인 나일강의 수원이

아스완에 있는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수백 Km의 거리의 수단과 국경까지

나일강은 화강암 지대와 사막지대였기에

고대 이집트인들은

아스완의 동굴 속에 나일강의 신 하피(Hapi)가 살면서

강물을 솟아나게 하고 홍수를 일으키고 강물을 조절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스완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스완 시내의 나일강변에 정박되어 있는 크루즈(Cruise)로 돌아와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다가

 

 

펠루카(Felucca)를 타고

나일강(Nile River) 유람 길에 오른다

 

 

펠루카(Felucca)는 돛단배로서

무동력선의 돛대에 바람으로 움직이는 작은 배이다

 

 

나일강 건너 편으로 보이는 것은

아스완 섬의 뫼벤피크 리조트(Mővenpick Resort Aswan) 건물이 보이고

나일강에는 펠루카(Felucca)가 떠 있다

 

 

펠루카(Felucca)를 타고 유람을 출발하자

나일강변으로 우리의 숙소이자

3일간 타고 나일강을 이동할 크루즈(Cruise)가 눈에 들어온다

 

 

이집트 나일강 아스완에서의

펠루카 유람을 추억하는 샷이다

 

 

나일강에서 펠루카 유람을 마치고

누비아 원주민 마을을 찾아

나일강 상류쪽으로 향해 뱃길을 헤쳐 올라간다

 

 

나일 강변에는 서서히 어둠이 몰려오고 있고

가로등도 하나 둘씩 켜지기 시작한다

 

 

뒤로 펠루카가 보이고

우측으로 아스완 시내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아스완 섬이다

아스완 섬은 예전에는 엘레판티네 섬(Elephantine Island)이라고 하였으며

나일강 원천을 지켜 주는 수호신

크놈 신전(Temple of Khnum)이 있는 곳이다

 

 

나일강에서 보는 하늘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며

노을이 시작되어 간다

 

 

나일강의 섬들 하늘 위로

붉은 노을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스완의 나일강에서

해질무렵 저녁노을로 붉게 물든 강물에서

한가로이 여유롭게 유람은

세계적인 피한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내가 여기에서 그것을 즐기며 만끽하는 중이다

 

 

언덕 위에 원형의 건물인 

아스완 사라 호텔(Sara Hotel Aswan)이 보인다

 

 

나일강의 세헤일 섬(Seheil Island)에 있는

사루가 세헬 섬 숙박업소(bb Saluga Sehel island)에

어둠을 밝히는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나일강 하늘에 노을이 끝나가며

마을에서 밝히는 불빛이 강물로 빠져들며

아름다움이 하늘에서 강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누비아(Nubia) 원주민 마을에 다다르며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아직 완전히 어둠이 깔리지 않은 하늘에 뜬

상현달을 바라다 본다

 

  

누비아(Nubia) 원주민 마을 선착장에서 내려

아나카토 와디 키키 누비안 집(Anakato wadi Kiki Nubian Houses)이라는 옆

원주민 집으로 들어 간다

 

 

누비아 원주민이 숙박업을 하면서

전통음료인 차를 파는 곳 이었다

 

 

이 누비아 원주민 집에서

밤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쏟아지는 별밤을 보려고 대기하였지만

달 빛이 밝아서인지 무수한 별들은 보지 못하고

멀리 홀로 밝게 빛나는 금성만 보고 원주민 재래시장으로 간다

 

 

누비안(Nubian) 원주민 야시장 투어를 하는데

거리는 한산하였으며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기념품 상가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야시장을 투어 하다 보면

호객 행위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보는데

여기 시장은 한산한 가운데서도

조용하기만 한 순박한 시장으로 보였다

 

 

그러다보니 지나치며 아이쇼핑(Eye Shopping)만 할뿐

물건에 관심을 가지고

상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없었다

 

 

누비안(Nubian) 원주민 야시장의 길이는

약 600~700m 정도의 거리가 되는 것 같았다

 

 

누비안(Nubian) 원주민 야시장에서

다시 나일강으로 내려와 배를 잠시 타고 이동하여

저녁 식사 장소인 타진요리 식당으로 간다

타진(Tajine)요리 란 찜요리 계통으로

이슬람 문화권의 대표적인 먹거리에 속한다고 한다

양고기 또는 소고기 또는 닭고기 등과 양파, 당근 등의 야채와

토마토, 병아리 콩을 담아 후추와 샤프란 등 향신료를 넣고

물이 고이도록 푹 익혀 먹는 찜요리로서

아랍인들이 즐겨 먹는 요리라고 한다

 

 

타진(Tajine)요리 식당에서 나와서 주변을 바라보니

나일강에 화강암 바위섬들이 많이 보이고

건너편 섬에는 유적지로 보이는 곳에 불빛이 환하다

 

 

아스완 나일강변에 정박되어 있는 크루즈(Cruise)에서

새벽 3시부터 일어나

새벽 4시에 아스완(Aswan)에서 남쪽으로 약 280Km 떨어져 있는

아부심벨(Abu Simbel)을 향해 사막 길을 달린다

 

 

아스완(Aswan)에서 아부심벨(Abu Simbel)을 향해

사막 도로를 2시간 정도 달리다 보니

땅거미가 물러가고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한다

 

 

이 사막은 사하라 사막의 동북부쪽의 사막으로

이집트에서 누비아 사막이라고 부른다

 

 

사막의 동쪽 하늘은

아직 일출이 시작되기 전이라

일출의 붉은 기운이 지평선에 조금씩 더해 가고 있는 중이다

 

 

아부심벨(Abu Simbel)을 향해 달려가는 버스에서

2019년도 마지막 날의

그것도 사하라 사막에서의 일출을 보게되는 순간이다

 

 

사막 동쪽 지평선에 태양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하라 사막을 달려가는 버스에서의

붉은빛 일출이 시작한 것이다

 

 

일출을 보는 것은

유럽 바다에서, 히말라야 산맥에서, 동해 바다에서

제주 성산 일출봉에서, 하늘을 나는 비행기 등에서 많은 일출을 보았는데

사하라 사막에서 일출은 또 다른 설레임으로 다가온다

 

 

일출을 보며 집중하고 있는데 버스가 정차한다

사막 서비스 스테이션(Estacion de servicio desierto)라는 휴게소이다

 

 

버스에서 빠르게 내려

사막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선다

 

 

휴게소에서 화장실 이용은 3명에 1달러로 볼 일을 마치고

다시 사막길을 달려간다

 

 

한참을 달려가는 중에 차창 밖으로

돌담을 한참을 길게 쌓아 놓은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사막에 토쉬카(Toshka)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다고 한다

 

 

조금 더 가다 보니 커다란 호수가 보인다

누비아 호수(Lake Lubia)로

이 호수가 있어 사막에 신도시 건설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사하라 사막의 여기 누비아 사막 지역은

누비아인(Nubian)들이 살았던 지역으로서

누비아인들은

아스완 나일강 제1폭포 부근(아스완 로우 댐)에서

동쪽으로 홍해바다, 남쪽으로 하르툼(지금의 수단), 서쪽으로 리비아까지

사막에 걸쳐 살았다고 한다

 

 

누비아 지역이 이집트에 속하게 된 시기는

이집트 제18왕조(BC 1550~1295년)인

아멘호테프 1세(AmenhotepⅠ:BC1525~1504년) 때에

이집트에 식민지가 되었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제1폭포(아스완 로우 댐 지역)에서

나일강 제2폭포(현 수단의 와디할파 지역의 남쪽) 지역을

쿠시 지역이라고 불렀는데

금 생산량이 엄청난 지역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11세기초 아몬신의 최고 사제로서 왕권을 찬탈하고

상이집트의 장악한 헤리호르(Herihor) 때

누비아는 테베인들과 전쟁을 치르며 큰 희생 결과 독립하였다고 한다

 

 

이후 누비아는 이집트로부터 단절되자

BC 45년 쿠시 왕국(수단)의

아마니샤케토(Amanishaketo) 여왕이 즉위할 때까지

점차 아프리카 화 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 후 652년 이집트의 이슬람군대가 점령하여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16세기 이후 이슬람 왕국 센나르(수단)의 푼지 왕조에 점령 당하였고

1882년 영국이 이집트를 점령하며 수단까지 식민지화 하였는데

1922년 이집트가 영국으로 독립하면서 쿠시 지역까지 영토화 하였다고 한다

 이집트가 독립하며 수단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통치령으로 있다가

1956년 수단이 독립국가가 되면서

누비아인들이 거주하는 쿠시 지역의 영토 갈등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누비아 호수(Lake Nubia)가 보인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이 있는 곳에

거의 도착하여 간다

 

 

아스완(Aswan)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하여

아부심벨(Abu Simbel)에 4시간이 지난 아침 8시가 지나

버스에서 내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 입구에 선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 매표소 입구를 통과하자

거대한 모래 언덕으로 보이는 능선이 보인다

아부심벨 신전 뒷 모습이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은

기원전 1257년경 이집트 제19왕조 시대인 람세스 2세(RamessesⅡ)에 의해

태양신 아몬 라(Amon-Ra)와 하토르 여신(Hathour)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은

신성문자가 사라지는 4세기 경부터 나일강변의 모래 속에 파묻혀 있다가

1813년 스위스의 탐험가 부르크하르트(J.L.Burckhardt:1784~1817년)가

아스완에서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발견한 후

 4년이 지난 이태리의 벨조니(Belzoni:1778~1823년)가

입구를 발굴하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또한 현재 이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은

원래 여기에 있던 신전이 아니라

1960년 아스완 하이 댐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을

유네스코가 들고 일어나 세계에 모금활동을 벌여

1963년부터 신전을 해체하여 여기에 옮기는 작업을

10년에 걸쳐 완공하였다고 한다

 

 

누비아 호수가를 걸어가다 보니

야산처럼 보이는 2개의 볼룩한 커다란 언덕이 보이는데

앞에 보이는 것이 아부심벨 대신전이고

멀리 보이는 것이 아부심벨 소신전이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의

태양신 아몬 라(Amon-Ra)에게 바쳐진 람세스 2세(RamessesⅡ) 대신전이다

신전 앞에 좌상들은 모두 람세스 2세(RamessesⅡ)의

젊은 때부터 시대별 좌상이라고 한다

 

 

신전 안으로 들어서니 양면으로 석상이 서 있다

람세스 2세가 자신의 모습을 본 뜨게하여 만들어 세운 

오시리스(Osiris) 석상들이라고 한다

 

 

지성소 안에 석상이다

람세스 2세가 태양신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과시를 하기 위하여

석상이라고 한다

석상 오른쪽부터 태양신 '아몬(Amon)',

복수와 수호의 신이며 하늘의 신으로

지평선 위에 호루스(Horus)인 '하르마키스(Harmakhis)',

태양신과 같은 반열에 오른 '람세스 2세(RamessesⅡ)',

암흑의 신 '푸타(Ptah)'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 지성소까지 1년 딱 두번 3월21일(춘분), 10월21일(추분)에

태양 빛이 들어 온다고 하는데

어둠의 신인 푸타(Ptah)는 빛이 비추지 않는다고 한다

태양빛이 들어오는 시차는 하루 정도는 있다고 하는데

3300여 년전의 설계된 건축물로는 대단한 것이라 놀라울 따름이다

 

 

신전 벽에 민(Min) 신이 봉헌을 받고 있는 모습의 벽화가 보인다

민(Min) 신은 다산을 상징하는 신으로

나일강의 기름진 진흙을 상징하는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신과 남자를 만든 신"이라고 한다

 

 

람세스 2세(RamessesⅡ)가 전투에 나가는 벽화이다

 람세스 2세(RamessesⅡ:BC1279~1213년)는

기원전 1303년에 태어나 90년을 살다가 기원전 1213년 사망하였으며

재위 기간은 아버지 세티 1세(SetiⅠ:BC1294~1279년)에게서

24살에 왕위를 물려받은 후 66년을 이집트를 통치한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력했던 파라오라고 한다

 

 

람세스 2세(RamessesⅡ)가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여

백인, 황인, 흑인, 유색인들의 머리카락을 잡고 단죄하는 있는 벽화이다

람세스 2세(RamessesⅡ)가 파라오로 등극할 시기에

북쪽에서는 히타이트(Hittite) 제국이 세력을 확장하며 이집트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해상에서는 바다 민족이라고 불리는 종족들이

지중해 동부에서 나일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람세스 2세는 먼저 바다 민족 토벌을 시작하여

한차례의 기습 작전으로 완전 소탕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벽화와 다르게

히타이트와의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BC 1274년)에서

히타이트가 카데시를 포기했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서 성급하게 진격했다가

숨어 있던 매복 전차병에 당해 이집트 2개 사단이 궤멸하고

람세스 2세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이집트로 되돌아와야 했으며

이후 12년간 2차례 원정에도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 점령에 실패하였다고 한다

결국 재위 21년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평화협정 맺게되는데

역사적 최초로 대등한 관계에서 평화조약으로서

이 카데시 조약문은 현재 복제본으로 국제연합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 대신전에서 밖으로 나와

정면에서 람세스 2세 좌석상들을 바라다 본다

이 거대한 석상들이 1400여 년을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대단한 사막의 모래 폭풍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의 소신전으로 향한다

람세스 2세가 부인 네페르타리(Nefertari)를 위하여

하토르 여신(Hathour) 바쳐진 신전으로

아부심벨 대신전 보다 먼저 지어진 신전이라고 한다

 

 

아부심벨 소신전 전면에 6개의 석상은 약 10m 높이로

람세스 2세의 4개의 석상들과 하토르 여신 모습을 한 2개의

네페르타리 석상이라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 석상을 만들때는 왕의 석상은 크게하고

왕비의 석상은 작게 만드는 것이 일반화인데

여기에서는 비슷한 크기로 람세스 2세와 동등한 부부였으며

왕비 또한 자신과 같이 신격화 한 것이라고 한다

 

  

소신전 안으로 들어서니

기둥면에 하토르 여신의 두상을 조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으며

벽에는 네페르타리 왕비에 관련된 벽화가 장식되어 있다

 

 

람세스 2세가 부인 네페르타리 왕비를 위하여

하토르 여신에게 봉헌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한다

신은 신에게 봉헌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자기 부인을 위하여 본인도 신이라 칭하는 람세스 2세가

봉헌하는 장면으로

람세스 2세가 네페르타리 왕비를 얼마큼  사랑하였는지

짐작이 가는 작품이다

 

 

하토르 여신과 이시스 여신이

람세스 2세에게 관을 씌어 주는 장면이라고 한다

이 소신전 안에는

람세스 2세가 그의 왕비와 함께 죽어서도

아몬신과 하토르 여신이 되어 부활한다는 믿음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아부심벨 신전의 대신전과 소신전을 건축한 람세스 2세가

이 신전에서 보여주려 한 결론은  

자신의 부부가 신의 반열에 올라 신으로서

위엄을 보여 주려고 웅장하게 지어진 건축물로 보였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은

1952년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건설 계획으로 수몰될 위기에 처했는데

학자들이 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동참을 요청하였고

이집트와 수단이 유네스코에 지원을 요청하여

1960년 3월 전체 가맹국에 유적을 구제하여 달라고 호소하여

50여 국가들이 유적 보존 작업에 지원 동참하겠다고 표명하여 옴에 따라

이전되어 보존된 유적이라고 한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 뒷 모습이다

아스완 하이 댐 건설 공사 당시

아부심벨 신전 보존 방법은 여러가지 방안이 논의 되었으나

최종 결론은 65m 상류의 고지대로 이전하여

원래 신전이 있던 모습과 같이 조성하여 이전 작업하기로 결정하고

1963년부터 아부심벨 신전 이전 공사를 착수하였다고 한다

 

 

아부심벨 신전 이전작업은

절벽을 깍아 세워진 신전 해체 공사로 신전에 모두 1만7,000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33톤에 달하는 송진 덩어리를 넣어 바위 돌을 단단하게 한 후

거대한 쇠줄 톱을 가지고 

신전을 1036개의 블록으로 잘랐다고 한다

또 신전 주변의 바위들도 1,112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블록 하나의 무게가 30톤이나 되었다고 한다

신전을 옮길 절벽 위쪽의 바위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돔 2개를 만들어 덮어 단단한 인공 산을 만들었는데

잘려진 신전 블록들을 이 곳으로 옮겨와 재조립 작업을 시작하여

 

 

1969년 2월 마침내 아스완 하이 댐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서 벗어나

안전지대로 옮겨지면서

오늘날 이 누비아 호수(Lake Nubia) 속에 있지 않아

이 처럼 방문하여

3300여 년전에 세워진 웅장한 신전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의 이전 공사가

얼마나 정교하게 이루어 졌는지는

대신전의 지성소까지 1년에 딱 2번 태양 빛이 들어 오는데

3300여 년전에 세워질 때와 같이

정확하게 어둠의 신인 푸타(Ptah) 조각상만 비추지 않도록

이전 공사가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아스완 하이 댐 공사로 많은 유적들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였는데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에서 세계 각국에 지원 요청을 호소하면서

수몰되어 사라질 위기에서 이전공사로 구하여졌는데

우리 대한 민국에서도 50여 만 달러를 지원하였다고 한다

 

 

아부심벨에서 아스완을 향하여 새벽에 왔던 길을 되돌아

버스는 사막길을 세차게 달려간다 

 

 

멀리 사막에 세워지고 있는 신도시 건물들이 보인다

토쉬카 뉴 시티(Tosha New City)라는

사막의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는 현장이다

이 처럼 척박한 땅에 들어와 무엇을 해먹고 살려는지?

과연 사람들이 와서 입주들 할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이 사막은

사하라 사막(The Sahara)의 북동부에 있는 사막의 일부분으로

누비아 사막(Nubia Desert)이라고 한다

 

 

버스는 2시간 정도  달렸을까?

사막의 휴계소에 정차한다

커피 이집트(Coffee Egypt)라는 휴게소이다

 

 

커피 이집트(Coffee Egypt) 휴게소에서

사막에서의 목마름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잠시 자리를 잡았다

아스완에서 아부심벨까지 약 280Km의 버스로 4시간 거리에 있는 휴게소는

오늘 아침 동틀녁에 들렸던

 '사막 서비스 스테이션(Estacion de servicio desierto) 휴게소'와

현재 와 있는 '커피 이집트(Coffee Egypt) 휴게소'로

이 막막한 사막에서 2군데 뿐이라고 한다

 

 

아부심벨에서 달려 온 사막 길이다

 

 

도로 한가운데서 보는 사막 도로로

지평선 넘어로 끝 없이 이어지는 직선의 도로 모습이다

 

 

달리는 버스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 신기루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 나왔다

말로만 듣던 '신기루'를

처음으로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신기루는 지평선 사이에 있지도 않는 호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허상으로서

오늘 사막을 몇 시간동안 달리면서도 볼 수가 없었는데 보인 것이다

빛의 굴절 현상이라 사진에는 잘 안찍힐줄 알았는데

사진에도 잘 나왔다

 

 

아스완에 거의 도착하였다

사막 도로가 끝나가며 아스완으로 진입하는

검문소 입구이다

 

 

아스완 시내로 가기 전에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을 관광을 하기 위하여

나세르 호수(Lake Nasser)로 간다

 

 

나세르 호수(Lake Nasser)의 댐 쪽으로 진입하자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준공 기념탑이 보인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은

구 소련의 협조를 받아

1960년에 시작해 11년 후인 1971년에 완공된

다목적 댐이라고 한다

 

 

댐 길이는 3.83Km이며

댐 높이는 111m 라고 하며

이 댐의 저수지인 나세르 호(Lake Naser)의

총 용적은 1,690억㎡에 이른다고 한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을 건설함으로서

해마다 발생하는 나일강(Nile River) 홍수를 사상 처음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며

이 댐은 홍수 때 물을 저장으로

적절하게 관계 농지의 효용성을 높이고

210만kW라는 엄청난 양의 전기를 생산해 냄으로서

이집트에 엄청난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건설 계획을 세우게 된 계기는

이집트 전체 국토 면적이 우리 남북을 합친 한반도 면적의 4.5배나 큰

100만㎢에 달하는 이집트 국토이지만 대부분이 사막으로

농경을 할 수 땅은 5만㎢ 지나지 않아

인구 증가로 식량 위기가 도래하면서 새로운 해결책 모색으로

댐을 건설하여 농경지를 늘리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건설은

1950년대 초부터 설계가 시작되고 자금 확보에 나섰지만

국제 사회에서 지원이 여으치 않게 되자

1956년 7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를 선언하여

수에즈 운하 위기 사건을 초래하였는데

서방 국가들 대신에 구 소련이 자금을 제공하여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건설로

전체 저수량 중의 2/3정도는 이집트가 사용하고

1/3정도는 수단이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90,000명 정도 이집트과 수단인의 이재민이 발생하여

5만 명 정도의 이집트 이재민은 아스완 북쪽 50Km 카움 움부 계곡으로

이주하여 누바리아라는 새로운 농경지구를  형성하였다고 하며

수단 이재민은 대부분 수단의 카슴 알키바 근처에 다시 정착하였다고 한다

또한 나일강(Nile River) 홍수로 인한

풍부하고 비옥한 침적토가 이제는 쌓이지 않아

해마다 약 100만톤의 인공비료를 사용하고 있지만

홍수가 공급해 주던 약 4000만톤의 침적토는 대체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에서 관광을 마치고 되돌아 나오던 중에

'아스완 대학교(Aswan University)'라는 푯말이 보인다

이 아스완 대학교에는

2016년부터 한국어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고 한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에서

6Km 정도 아래에 위치한

1902년 건설된 '아스완 로우 댐(Aswan Low Dam)'을 지나고 있다

이 댐은 나일강 홍수가 끝날 무렵인 늦가을에

약 493억㎥ 물을 저장한다고 한다

 

 

아스완(Aswan) 시내가 보인다

 

 

새벽 4시에 아스완(Aswan)에서 280Km 남쪽에 있는

아부심벨(Abu Simbel)로 출발하여

10시간만인 오후 2시에 다시 아스완(Aswan)으로 돌아왔다

 

 

아스완(Aswan)에 도착하자

나일강변 선착장에 정박되어 있는 크루즈(Cruise)로 가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침실로 가서 휴식을 한다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크루즈(Cruise)가 이동하는 것 같아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연다

 

 

드디어 나일강 크루즈 관광이 시작되었다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초원지대에서는 말과 소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고

초원지대 뒤쪽으로는 사막지대가 보인다

 

 

유람선이 나일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고

우리가 탄 크루즈 선은 나일강을 거슬러 내려가며

콤옴보(Kom Ombo)로 향하고 있다

 

 

크루즈 선의 내부 침실이다

여행 전에 크루즈 침실과 화장실이 열악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였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우려와 다르게

침실과 화장실이 깨끗하게 잘 관리되어 있어

사진으로 남겨 보았다

 

 

크루즈(Cruis)에서 보는 하늘이라 그런지

아름답고 더욱 멋있게만 보인다

 

 

아스완(Aswan)에서 우리가 탄 크루즈와 함께 정박되어 있던 크루즈들이

앞서서 콤옴보(Kom Ombo)를 향해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서쪽 하늘엔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고

그 모습을 신비롭게 가리우는 털구름(卷雲)과

나일강물에 비추이는 뒷모습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Nile River)을 다스리는 신이

3가지 신이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첫번째 '하피(Hapi)' 신이 있다

하피(Hapi)는 남성 신으로 나일강 일대에 비옥한 토양을 가져다 주는

신으로 숭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우기에 나일강의 홍수로 인해 강물이 넘쳐 범람하면 퇴적작용이 일어나

농사 짓기에 기름진 비옥한 토지로 변한다고 한다

이 시기 강의 범람을 '하피(Hapi)'의 현현이라고 하여

제사의식을 지내고 제물을 받친다고 한다

 

 

2019년도 나일강의 마지막 일몰이

서서히 서쪽 하늘을 붉은 노을로 물들여 가고 있다 

 

두번째 이시스(Isis) 여신이 있다

나일강 주변의 생물들과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치유와 다산과 풍요를 내려 주는 여신으로 숭배받고 있다고 한다

 

 

세번째 크놈(Khnum) 신이 있다

나일강의 원천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숭배하였는데

당시에 나일강의 원천을 지금의 아스완 로우 댐의 근처의 화강암 지대에 있던

나일강 제1 폭포 부근을 나일강의 원천으로 믿어

지금의 아스완 시내 앞에 있는 나일강의 엘레판티네 섬(Elephntine Island)에

크롬 신전(Temple of Khnum)을 건축하여 숭배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애굽(이집트) 사람들은 세가지 신을 숭배하였는데

파라오는 그 신들에게 이집트의 번영과 축복을 비는 것이

왕의 중요한 직무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서쪽 하늘엔 해는 넘어가고

아름답게 붉게 물든 노을만  남아 있을 때

 

 

콤옴보(Kom Ombo)에 다다르기 시작한다

아스완(Aswan)에서 출발한지 2시간 30분쯤 경과되어서 이다

 

 

콤옴보(Kom Ombo)는 카움움부(Kawm Umbu)라고도 하며

인구 약 10만명 정도 거주하는 도시로서

아스완(Aswan)에서 북쪽으로 약 48Km 거리에 있는 도시이다

 

 

콤옴보(Kom Ombo)에 도착하여 크루즈에서 잠시 쉬다가

어두워진 후에 '콤옴보 신전(Temple of Kom Ombo)' 관광에 나선다

 

 

콤옴보 신전(Temple of Kom Ombo)은

호루스(Horus:태양)신과 소벡(Sobek:물)신을

한 전각 안에 2 신을 모시는 특이한 신전이다

그래서 출입문이 2개라고 한다

탑문 한가운데 나 있어야 할 출입문이 양쪽으로 나 있는 구조이다

그렇다고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도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되어 있는 구조이다

 

 

호루스(Horus)신과 소벡(Sobek)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는 파라오 모습으로 보인다

 

 

석주 위의 천장에는 하늘의 여신인 누트(Nut) 신이 조각되어 있다

  하늘의 여신인 누트(Nut)는 이집트 종교의 우주관에서

그의 남편이자 대지의 신인 게브(Geb) 위에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태양신 라(Ra)가 태양의 돛단배를 타고 누트를 따라 여정을 한다고 한다

태양은 매일 동쪽 하늘에 나타나 공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사라지는데

밤에 태양이 없어지는 것은

태양이 천공의 신, 즉 누트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서쪽으로 사라진 태양은 누트의 입에 들어가서

밤 동안에 몸 속을 지난 다음

아침이 되면 여신의 무릎에서 다시 솟아난다고 믿었다고 한다

 

 

콤옴보 신전(Temple of Kom Ombo)은

이집트 제18 왕조 시대의

투트모세 3세(ThutmsisⅢ:BC1479~BC1425년)가 지었던 것을

이집트 마지막 왕조 시대인

프톨레마이오스(Ptolemios) 왕조 BC332~로마 시대 AD395년 사이에

허물고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콤옴보 신전(Temple of Kom Ombo)은

사람 눈에 잘 띄는 나일강변 높은 곳에 있었지만

1893년까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기에

그때까지 사람들은 신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콤옴보 신전 벽에

한쪽 팔이 없고 얼굴이 뭉게진 조각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전쟁 포로들로서 또 다시 도발하지 못하도록 한쪽 팔을 잘랐다고 하며

얼굴은 전쟁으로 희생자 가족들이 적개심에 뭉겠다고 하기도 하고

또는 코를 베어 버리면 부활하지 못하고

영원한 죽음으로 묻힌다는 종교관 때문에 뭉게진 것이라고 한다

 

 

윗 부분이 잘려나가고 없는 곳에

사람들로 많이 붐빈다

당시의 의술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는 벽화 앞이다

임신부 출산전과 출산 후의 모습과 의료도구들이 그려져 있어

그 옛날 고대 시대에

참으로 대단하다는 느낌이 드는 장소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기원전 3000년 전에 365일의 태양력을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벽에 당시의 달력을 표시해 둔 것으로

1년을 3계절로 나누어

나일강 범람기, 파종기, 수확기로 표시하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콤옴보 신전(Temple of Kom Ombo)에서는

출입문도 둘이고 복도도 둘이고 지성소도 둘이고

예배의 양식도 두가지라고 한다

파라오가 대관식을 할 때에도 두 신의 방에서

따로따로 대관식을 치렀다고 한다

태양신인 호루스(Horus)와 대등하게 물의 신인 소벡(Sobek)을 격상시켜

소벡(Sobek:악어)을 숭상하는 테베 지방 사람들에 대한

통치자인 파라오의 배려였을 것이라 한다

 

 

콤옴보 신전을 나와

신전에서 조금 아래에 있는

소벡(Sobek) 신으로 숭배했던 악어 박물관(The Crocodile Museum)으로 간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유리관 속에 악어 박제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스텔라(Stela:장식석)로서 소벡(Sobek) 신에게 종종 봉헌 제물로 주어졌으며

성전이나 성악기가 묻힌 묘지에 세워졌다고 한다

 스텔레(Stelae)에는 신과 헌신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기도 하며

신자의 이름과 신에게 비는 짧은 기도문이 새겨진 비석이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

 

 

 

악어를 미이라로 만들어 놓았다

고대 이집트 시대에

악어에 대한 신앙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보여진다

 

 

 

소벡과 왕(Sobek and The King)이라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악어가 먹이를 낚아채고 삼키는 능력의 힘을

존중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파라오의 권력과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소벡(Sobek)은

파라오가 도움이 필요로 할 때 힘과 강인함을 주어

육체적, 마법적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믿었다고 한다

또한 소벡은 동생 세트(Seth) 신에게 살해 당하여 나일강에 버려진

오시리스(Osiris) 신의 시신을 나일강변에 안전하게 운반한 신화와 연관되어

신성한 통치자의 보호자로 믿었다고 한다

투트모세 3세의 아들 아멘호테프 2세(AmenhotepⅡ:BC1427~BC1400년)는

소벡-레(Sobek-Re)와 특별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어

소벡-레 신과 함께 묘사되는 것을 원하였다고 한다

 

 

 

룩소르 근처에 있는

다함샤 소벡 사원(Temple of Sobek in Dahamsha)에

리헤브네프(Ly-Hebnef)가 세운 스텔라(Stela:장식석)라고 한다

스텔라 상단에는

신성한 이마 나무 아래에 소벡과 여신이 앉아 있고

소벡 앞에 제물이 놓인 테이블이 있고 그 앞으로

신들을 향하여 리헤브네프의 아버지 피아(Pia)와 그 뒤로 리헤브네프가 서 있다

피아(Pia)는 다함샤 소벡 사원의 최고의 사제였다고 한다

 스텔라 중단에는

소벡에게 봉헌하는 피아의 가족들로 피아, 리헤브네프, 피아의 어머니 리아(Lya),

피아의 부인 티넷네부(Tinet-nebu)의 행렬을 보여주고 있다

스텔라 하단에는

소벡에게 그를 숭배하며 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리헤브네프(Ly-Hebnef)의 기도문이 적힌 것이라고 한다

 

 

 

네브네페르(Nebnefer) 사제가 소벡에게 봉헌한 것으로

사면에 조각되어 있고

위에 악어 한쌍이 장식되어 있다

소벡-레(Sobek-Re)를 숭배하는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Ⅲ:BC1390~BC1352년)의 통치에 찬성하는

스텔라(Stela)로서 하토르(Hathour) 여신과도 함께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아래의 상형문자도

왕좌의 이름인 네브마아트레(Nebmaatre)를 상징한 것이라고 하는데

네브마아트레은 '진실의 제왕은 레(Re)'라는 의미라고 한다

(The Load of truth is Re)

 

 

 

악어 박물관(The Crocodile Museum)을 나와

숙소인 크루즈로 향해 가는데

건물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며 그 앞에서는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이슬람이 대다수인 이집트 국가에서

이런 모습은 새롭게 느껴진다

 

 

크루즈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중

웨이터들과 식당 셰프(Chef)들이 커다란 케익을 들고

우리 좌석으로 와서 나의 아내를 일으켜 세운다

순간 팡파레가 터지며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생일 축하 노래 합창이 시작되고

아내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미소로 답내할 뿐이었다

낮에 가이드와 아내 몰래 준비한 회갑 이벤트였다

 

 

 

이어서 송구영신 파티로 이어졌다

 

 

나일강(Nile River) 크루즈(Cruise)에서

2019년도 마지막 날을 보내며

즐거운 파티로 2020년도 희망의 새날을 이집트에서 맞이 한다

 

  

파티를 끝내고 한숨 자고나니

크루즈(Cruise)는 어느새 에드푸(Edfu)에 와 있었다

2020년 새해 첫날 새벽이다

 

 

크루즈(Cruise)에서 하선하여 강둑 언덕 위의 도로에 올라서니

우리를 태우고 갈 마차가 줄지어 서 있다

 

 

새해 첫날 새벽 5시30분부터 나와

날이 밝아 오기도 전에

캄캄한 에두푸(Edfu) 시내를 마차를 타고 달리고 있다

 

 

에드푸(Edfu)는 인구 6만여 명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는 이집트 제5 왕조 시대(BC2494~BC2345) 이전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제5 왕조 시대 때 이후의 마스타바(Mastaba)가 발굴되어

기원전 2500여 년 경부터 도시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마스타바(Mastaba): 벽돌과 돌로 이루어진 고대 왕과 귀족들의 직사각형 분묘

 

 

에드푸(Edfu)는

고대에는 베데티(Behdety)로 알려져 있으며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제국 시대에는

아폴로노폴리스 마그나(Apollonopolis Magna)라고 하였다고 한다

매의 머리를 한 호루스(Horus) 신은 아버지 오시리스(Osiris) 신을 살해한

아버지의 동생이며 삼촌인 세트(Seth) 신을 죽이고

호루스 베데티(Horus Behdety)가 되었다고 한다

태양신으로 날개 달린 태양원반으로 상징되어 표시하고 있는데

에드푸는 호루스 신의 영역으로 태양신의 도시의 의미가 있는 지역이다

 

 

태양신 영역으로 알려진 에드푸(Edfu)에서

2020년도 새해 첫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호루스(Horus) 신에게 봉헌하였다는

에드푸 신전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었다

 

 

신년 해를 보기 위하여 태양이 떠 오르는 방향을 바라보고

광장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니

한기가 몰려와 그냥 에드푸 신전으로 발길을 향한다

 

 

에드푸 신전이

2020년 신년 첫 아침 일출의 태양 빛을 받아들여

붉은 빛을 내려 밝아지기 시작한다

 

 

신전으로 들어가는 담장이다

벽돌로 쌓아 올렸다

기원전에 벽돌을 만들어 정교하게 건축하였다는 것을 들음은

예전 성서의 모세가 살던 시대에

애굽왕이 유대민족을 탄압하기 위하여

지푸라기를  섞어 벽돌을 만들었던 것을 탄압 수단 원인을 만들기 위해

지푸라기를 제공해 주지 않고 진흙으로만 만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레코·로만(Greco-Roman)시대의 신전 기둥이라고 한다

한기둥에 여러 모양의 기둥이 섞여 있는 복합기둥 양식을 이루고 있으며

돋새김을 매우 화려하고 정교하게 새겨 놓은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에드푸 신전은 호루스 신에게 받쳐진

호루스 대신전(Great Temple of Horus)으로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Ptolemaeos Dynasty: BC305~BC30) 시대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인 기원전 237년에 착공하여 180년 동안 여러 왕들을 거치며

기원전 57년 되던 해인 프톨레마이오스 12세 때에

동서 길이가 79m, 남북 길이는 137m 크기로 완공하였다고 한다

 

 

호루스 신전의 벽화이다

파라오가 조각되어 있는데 파라오 이름 칸이 비워져 있다

추후에 파라오들이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도록 배려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태양의 돛단배이다

태양신 라(Ra)가 은하수와 사후세계인 두아트를 여행할 때에 타고 다니는 배로서 

이집트 종교 우주관에서

아침에 동쪽에서 떠올라서 낮 동안 하늘의 여신 누트(Nut)의 몸을 따라 움직이다가

저녁에 서쪽의 사후세계인 두아트(Duat)로 들어 간다고 믿었다고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누트(Nut)의 몸에 '천상의 나일강' 즉 은하수가 있어

태양의 돛단배는 이 강을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으며

밤이되어 사후세계로 내려간 라(Ra)는 각각 다른 신들과 적들을 만나는데

그 중에 절대 악을 상징하는 아펩(Apep)을 무찌르고

다음날 아침에 동쪽 하늘로 다시 떠오른다고 믿었다고 한다

여기 에드푸( Edfu)에 있는 호루스 대신전(Great Temple of Horus)은

태양신이 된 호루스(Horus) 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에드푸(Edfu) 지역은

그리스어를 사용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BC305~BC30년)에는

아폴로노폴리스 마그나(Apollinopolis Magna)라고 하였는데

이집트의 호루스(Horus) 신은 그리스의 아폴로(Apollo)에 해당하는 신이었기에

 이집트와 마찬가기로 다신교를 믿었던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은 아폴로노폴리스 마그나라고 하였다고 한다

 

 

호루스 대신전은 보존이 잘되어진 신전 중의 하나로 꼽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지어진 신전들은 이 처럼 대체로 보존상태가 좋은데

주변의 룩소르에 있는 신전들이나 다른 지역에 있는 신전들 보다

약 1천년 정도 이상 늦게 지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호루스 신전의 지성소 안이다

태양의 배가 놓여져 있는데 모조품이라고 한다

진품은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신전 내부 열주 위의 천장에 그을음이 잔득 붙어 있다

로마 황제인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I:346~395년) 치하에서

그리스도교 외에는 어떠한 이교적 경배를 금하기 위해

모든 신전을 폐쇄한 이후부터

7세기 경 이슬람 세력의 지배하에 들어갈 때까지

콥트교인들이 여기에서 살며 부엌으로 사용한 흔적이라고 한다

 

 

 

현관으로 나오니 관광객들로 붐빈다

호루스 신전의 현관은 

동서 길이가 42.6m, 남북으로 길이가 49m라고 한다

 

 

신전 현관에는 대열주 회랑 있는데

모두 32개의 열주들이 세워져 현관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에드푸에 있는 호루스 신전(Temple of Horus)은

이집트에 있는 신전들 중에 보존이 잘되어진 신전이라고 하는데

탑문 밖으로 나오니 부서지고 무너저 흐트러진 유적 잔해들이 보인다

 

 

신전이 오랜 세월 동안 모래 속에 묻혀 있다가

1860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오귀스트 마리에뜨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탑문의 높이가 36m나 되는데 모래가 얼마나 많이 쌓였으면...

 

 

호루스(Horus) 신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지는데

하르포크라테스(Harpokrates) '어린아이 호루스'

하르시에시스(Harsiesis) '이시스의 아들 호루스'

하라크티(Harakhti) '두개의 지평선의 호루스'

하르마키스(Harmakhis) '지평선의 호루스' 등으로 불리어 졌다고 한다

 

 

호루스에 대해서 더 알아보면

호루스는 하늘의  신으로서 우주를 다스리는 신이며

그의 오른쪽 눈은 태양이고 왼쪽 눈은 달이라고 한다

자기 아버지 오시리스(Osiris) 신을  살해한 세트(Set) 신과 싸우면서

호루스는 왼쪽 눈을 다쳤는데 토트(Thoth) 신이 치료하여 고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회복된 호루스 눈은

고대 이집트에서 '건전하다'는  뜻으로 '웨자트(Wedjat)'라고 불렀으며

완전한 것의 상징으로서 부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에드푸 시내의 중심부이다

우리가 에드푸의 호루스 신전을 관광하는 동안

우리가 탓던 크루즈는 룩소르로 출발하여 그곳에 대기하고 있다고 하며

지금부터 우리는 버스를 타고 룩소르로 향한다

 

 

룩소르로 가는 길은 나일강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향한다

나일강을 끼고 있는 이집트 도시들은

대부분 나일강에서 동쪽으로 위치하고 있는데  

에드푸 시내 중심가는 나일강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에드푸 시내에서 나일강을 건너는 에드푸 다리(Edfu Bridge)를 지나

조금 가다보니 에드푸 역(Edfu Station)이 보인다

 

 

이집트에서 도시들은 대부분 나일강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철길이 나일강 동쪽편으로 설치되어 기차가 운행하고 있다

이는 이집트 신화에서 기인하는

나일강 서쪽을 사후세계로 보기 때문에 그런것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당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는데

이쪽 지역은 예로부터 당나귀 많이 타고 다닌 것 같다

성경의 마태복음 21장 7절에서도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생각이 났다

 

 

하얀 벽돌로 건축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얀 벽돌로 공사한 건축물을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고기를 파는 정육점 모습이다

고기를 차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거리에 메달아 놓고 파는 모습이

위쪽의 나귀타는 사진에도 있듯이

이같은 모습이 차창 밖으로 종종 눈에 들어 온다

 

 

에드푸(Edfu)에서 룩소르(Luxor)까지 거리는 약 55Km 정도 되는데

무슨 농작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나치는 차창 밖으로 이러한 농작물이 많이 보여진다

 

 

특히 위의 2개 사진의 농작물이 많이 보여지는데

무슨 작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집트에서는

사탕수수, 토마토, 면화, 수박, 오렌지, 감자 등의 수확량이 가장 많으며

식량작물로는 옥수수, 쌀, 밀, 기장, 호박 등이 있으며

대추가 많이 재배된다고 한다

 

 

상점에 음료수용 냉장고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무질서하게 전시되어 판매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멤논의 거상(Colossi of Memnon)이다

룩소르(Luxor) 지역에

왕과 왕비의 계곡으로 가는 사막과 경작지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석영암으로 만든 이 2개의 거대한 상은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 3 :BC1390~BC1352)로서

자신의 장례 신전 입구에 세워진 무게가 720t이나 나가는 거상이다

거상 양 옆으로는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어머니인 무테무이아(Mutemwia)와 부인인 티위(Tiy)라고 한다

거상 받침대에는 나일강신인 하피(Hapi)가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와 상이집트의 상징인 연꽃을 교차해서 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상하 이집트의 통일을 뜻한다고 한다

아멘호테프 3세 장례신전은 그가 죽고 난 뒤에

그 후의 파라오들이 자신들의 신전을 짓기 위하여 조금씩 뜯어가며 파괴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2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

 

 

옛 기록에 의한 멤논의 거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고 한다

이 소리는 춥고 습한 밤과 덥고 건조한 낮의 기온차이로 나는 소리였지만

옛 그리스 인들은 이 현상을 들으면서

트로이의 전쟁영웅인 멤논이 살아서 돌아왔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리스인들은 물론이고 로마인들까지 순례를 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AD146~211) 황제가

이 거상을 보수 한 후부터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았다고 한다 

 

 

 

멤논의 거상에서 사막지역의 계곡 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테베(Thebes) 지역의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사진에 원주민 복장을 한 사람들로 붐비는데 대부분 잡상인들이다

 

 

왕비의 계곡 매표소를 통과한 후 무덤군이 있는 곳까지는

나무 그늘이 없는 황량한 길을 태양빛 을 맞으며 걸어들어 가야 한다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에서 개방된 곳은 4곳으로

네페르타리 왕비. 티티왕비, 카엠웨세 왕자, 아몬헤르콥세프 왕자 무덤이다

무덤 안으로 들어 가서는 침묵을 해줄 것과

사진 촬영시 후레쉬를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3200년이 넘는 오래된 귀중한 벽화들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에서

44번(QV44) 카엠웨세 왕자 무덤(Tomb of Prince Khaemwese)으로 들어 간다

벽화들이 많이 부식되고 흐려진 상태이다

 

 

카엠웨세 왕자(Prince Khaemwese)는

람세스 3세(Ramesses 3:BC1184~BC1153)의 아들이라고 한다

 

 

 

카엠웨세 왕자의 무덤(Tomb of Prince Khaemwese)이

람세스 3세의 아들들의 무덤 중에서 가장 큰 무덤이라 하며

신에게 조공 장면이 생동감 있게 그려 놓았다고 한다

 

 

 

다음은 람세스 4세의 부인인

티티 왕비의 무덤(Tomb of Queen Titi)으로 들어 갔으나

그곳은 전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촬영하지 못하고 나와서 기념샷을 한다

 

 

 

 

QV55번 아몬헤르콥세프 왕자의 무덤(Tomb of Prince Amon-her-Khopsef)이다

원래 람세스 2세의 아들이자 네페르타리 왕비의 어린 아들의 무덤이었으나

나중에 람세스 3세의 아들인

아몬헤르콥세프(Amon-her-Khopsef) 왕자의 유해를 담긴 무덤이 되었다고 한다

벽화 내용은 파라오가 죽은 어린 아들을

미라로 만들어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아누비스(Anubis) 신에게 부탁하는 장면이다 

 

 

 

 

아몬헤르콥세프 왕자 무덤(Tomb of Prince Amon-her-Khopsef) 안에는

유리관에 갓난 아기의 유골이 전시되고 있는데

태어난지 6개월 정도의 왕자로 추정 되는 유골이라고 한다

 

 

 

아몬헤르콥세프 왕자 무덤에는

람세스 3세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하여 

망자를 미라 형태로 만들어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신 아누비스(Anubis)에게

부탁하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청탁인가? 부탁인가? 로비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3000년 전인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식들 문제라면

세계적으로 어디나 어떠한 청탁도 하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아몬헤르콥세프(Amon-her-Khopsef) 왕자 무덤에서 나와

왕비의 계곡 주변을 바라다 본다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이라 그런지 황량하기 그지없다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에서 하이라이트(Highlight)로서

3200년전의 벽화들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람세스 2세의 부인인 네페르타리 왕비 무덤(Tomb of Queen Nefertari)으로 왔다

이 곳은 입장하는데도 한참을 기다려야 하며

무덤 안을 둘러보는 시간도 10분 이내로 둘러보도록 정해져 있었다

 

 

 

 

네페르타리 무덤으로 들어서 내려가는 계단 벽에는

네페르타리를 보호하기 위해 지하 세계에서 선택하여 보내진 여신들인

하토르(Hathour), 이시스(Isis), 마테(Maate) 여신들이

오른손에  힘의 상징인 와셋(Wasset)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생명의 상징인 앙크(Ankh)를 들고 있다

 

 

 

 

네페르타리 왕비 묘실 앞에 있는 기둥으로서

좌측 면의 벽화는

당시의 가장 높은 종교적 제사장이자 죽은 왕의 형이었던 하르나기테프(Harnagiteff)이라고 하며

우측 면의 벽화는

이시스(Isis) 여신이 네페르타리 왕비에게 생명의 상징인 앙크(Ankh)를 코에 불어넣는 장면이라고 한다

 

 

 

네페르타리 왕비 묘실 앞 옆면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서

죽은 자의 신이며 서쪽 묘지들을 지키는 신들로

죽은 자들을 다스리는 제왕인 오시리스(Osiris)가 앉아 있고

그 뒤로 죽은 자를 보호하는 여신 하토르(Hathour)가 앉아 있고

그 뒤로 죽은 자를 미라 상태로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아누비스(Anubis)가 앉아 있다

 

 

 

 

또 네페르타리 왕비 묘실 앞 옆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서

묘실을 지키는 수비대로서

숫양 머리의 크눔(Khoum) 신과 암사자 머리의 세크메트(Sekhmet) 신은 단검을 들고 있고

인간의 모습은 생명을 상징하는 앙크(Ankh)를 들고 있다

단검을 들고 있는 것은 악령이 무덤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한다

 

 

 

 

하얀 드레스를 입은 네페르타리 왕비 벽화로서

오시리스(Osiris) 신이 다스리는 파라다이스(Paradise)로 가는 길에는

그 곳을 지날 수 있는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한다

그 곳을 지키는 수호신들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망자를 미라 상태로 만들어 사후 세계로 인도하는 아누비스(Anubis) 신이다

발 사이에 미라를 만드는 스레더를 끼고 있고

목에는 미라화 과정에 사용된 밴드가 메여져 있다

 

 

 

네페르타리 왕비가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람세스 2세에게

고기와 과일을 받치며

오른손에 안정의 상징을 들고 기원하는 장면이라고 한다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에서 개방된 4곳을 돌아보고

왕비의 계곡에서 나오며 뒤돌아본 모습이다

4곳 중 3곳은 벽화의 색상이 많이 변한듯 색상이 흐릿한 모습이었으나

네페르타리 왕비 무덤의 벽화는 약 3200년이 지난 벽화임에도

최근에 그려진 듯이 선명하고 진한 색상을 지니고 있어

놀라움에 감탄을 하며 걸어 나오는 중 이었다

 

 

 

왕비의 계곡을  나와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 장제전으로 이동하며

옛 테베(Thebes) 지역의 서안 지역을 지나는 풍광이다

이 서안 지역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네크로포폴리스(Necropolis)로 불렀는데

 여기에 왕들의 장제전을 비롯해 왕과 왕비들의 무덤, 귀족들의 장제전들이 많이 있던 곳으로 

당시에 이 지역에서 그 일에 종사하던 성직자, 군인, 공예가,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다고 한다

 

 

 

룩소르(Luxor)는

고대 이집트 시대에 테베(Thebes) 지역 안의 남부지역에 붙여졌던 지명이나

현재 테베(Thebes)는

룩소르 지역의 나일강(Nile River) 서쪽 편의

왕과 왕비들의 무덤과 장제전, 유적지들이 있는 지역을 말한다고 한다

 

 

 

 

테베(Thebes)는 이집트 제4왕조 시대(BC2613~BC2494) 때부터 존재하였다고 하며

당시에는 와세(Wase) 또는 워세(Wo'se)로 불리었다고 한다

테베(Thebes)가 고대 이집트 왕국의  수도로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이 지방 총독들이  이집트를 통일하여 지배하기 시작한

이집트 제11왕조 시대(BC2125~BC1985) 때부터라고 한다

이 시기의 지배자들은 이 지역에서 최고 신으로 모셨던 아몬(Amon) 신을 믿고 있어

이 도시를

'아몬의 도시'라고 경배하는 뜻에서 노웨(Nowe) 또는 누웨(Nuwe)라고 불렀다고 한다

테베(Thebes)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고대 이집트식 지명인 타오페(Taofe)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룩소르(Luxor)의  서안지역인 이 곳  테베의  사막지역에서는

지금도 당시의 유적들의 흔적들이

버스로 지나치면서도 차창 밖으로 많이 눈에 보였으며

발굴작업하는 현장도 눈에 들어 왔다

 

 

 

 

하트셉수트(Hatshepsut) 장제전에 도착한다

다이르 알바흐리(Deir el-Bahri) 계곡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장제전(Mortuary Temple)이란

죽은 왕들을 예배하고 죽은 왕들에게 받칠 물건과 음식물을 저장하는 곳이라 한다

하트셉수트 장제전으로 가는 길목에

우측 편에 스핑크스가 자리 잡고 있으나 좌측편으로는 터만 보인다

하트셉수트 여왕 장제전을 건축한 사람은

여왕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이자 총리를 지낸 세네무트(Senemut)라고 한다

 

 

 

 

비탈길를 올라가면 3층 테라스의

장제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22개의 조각상들이 서 있는데

모두 하트셉수트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이시스(Isis) 조각상들이라고 한다

조각상들은 모두 앞가슴으로 팔들을 꼬고 있는 조각상으로

죽은 자를 의미하는 조각상이라고 한다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BC1508~BC1458)은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5번째 파라오로서

하트셉수트란 이름은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트셉수트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22개의 이시스(Isis) 조각상이 있는 테라스를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바위산 절벽과 연결하여 깍아 만든 테라스의 지성소 입구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성소 위쪽에 검게 그을린 른적들이 보인다

이 하트셉수트 장제전도 7세기 무렵부터 콥트교의 수도원으로 사용되었으며

15~16세기 무렵에는 교회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그 흔적이라고 한다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 BC1508~BC1458) 장제전

바로 옆으로는

고대 이집트 제11왕조 멘투호테프 2세(Mentuhotep 2: BC2055~BC2004)의 장제전 터 잔해와 

그 뒤로

하트셉수트 여왕 장제전과 가까이 하트셉수트 여왕이 왕권을 찬탈했다고 불만을 품고

여왕이 사후 여왕의 업적들을 파괴하였다는

투트모세 3세(Thutmosis 3 :재위 BC1479~BC1425)의 장제전 터 잔해들이 자리 잡고 있다

 

 

 

하트셉수트(Hatshepsut)는

투트모세 1세(Thutmosis 1: 재위BC1504~BC1492)가 정비(正妃)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자식으로

이복동생인 투트모세 2세(재위 BC1492~BC1479)와 결혼하였다

병약했던 투트모세 2세가 요절한 후

의붓 아들이자 배다른 조카인 투트모세 3세(재위 BC1479~BC1425)가 7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다가 남장을 하고 가짜 수염까지 붙이고 스스로 공동 왕위에 올라

BC1479년부터 BC1458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고 한다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은 파라오가 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많은 기념 건축물을 세웠다고 하며

광산 확보와 교역 확장을 위해 영토를 시나이 반도와 수단(당시 Punt)까지 넓혀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투트모세 3세(Thutmosis 3)가 장성한 후에도

왕위 전권을 물려 주지를 않고 통치를 행함으로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이 죽은 후에 투트모세 3세는 여왕이 세운 기념물들을 파괴해 버리고

모든 기념물들에서 하트셉수트 여왕의 이름을 삭제하여 버렸다고 한다

 

 

 

 

매표소 입구에서부터 하트셉수트 장제전 입구까지 관광객을 태우고 왕복하는 열차이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나

덥고 따가운 사막 날씨에 걷지 않고 이 열차타고 왕복하는 것은

관광의 편안함을 주고 있었다

 

 

 

 

장제전이 있는 뒷 산을 버스로 돌아서 뒤 편 쪽으로 오니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으로 들어가는 매표소가 나온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은

지금은 도로가 나있어 편하게 차로 오지만

예전에는 바위가 많은 깊은 계곡 사이에 고립된 좁은 계곡처럼 형성되어 있어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한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에는

기원전 1550년에서 기원전 1075년까지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이였던

제18왕조, 제19왕조, 제20왕조의 왕들이 묻혀있는 고분군으로

모두 64기의 무덤이 동서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24기가 파라오 무덤으로서

이 계곡의 바위 암굴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매표소 입구를 통과하니

왕가의 계곡을 운행하는 여러명이 탑승할 수 있는 카트가 대기하고 있다

 

 

 

 

카트를 타고

왕가의 계곡으로 들어 가는 초입에 위치한

람세스 4세(Rameses 4 : 재위 BC1153~BC1147) 무덤 앞에서 내린다

 

 

 

 

암굴 무덤으로 들어 가는 입구 옆에서 대기하다가 순서가 되어

람세스 4세(Rameses 4) 무덤 안으로 입장한다

 

 

 

 

무덤 안으로 들어서니 벽화들이

왕비의 계곡(Valley of the Queens)에서 보았던 신들과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벽화들과 다르게

 상형문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으므로 느낌은 별로 없이 벽화 색깔만 보며 지나쳐 안 쪽으로 들어간다

안쪽 끝의 현실(玄室)에는 람세스 4세(Rameses 4)의 석관이 보인다

 

 

 

 

람세스 4세(Rameses 4)의 천정에는

나일강을 항해하던 태양의 배들을 뒤따르던 별 모양의 행렬과

하늘색의 두 반구 모양으로 그려 놓았다

 

 

 

 

람세스 4세(Rameses 4)의 무덤 안의 석관이 있는 현실(玄室)의 벽화로서

태양의 배가 그려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람세스 4세(Rameses 4)의 장례식을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고데 이집트 제20왕조 시대의

3번째 파라오인 람세스 4세(Rameses 4: 재위 BC1153~BC1147)는

파라오에 즉위할 무렵에는 이미 중년의 나이였으므로

6년이라는 짧은 기간 통치로 사망하였다고 한다

통치기간에는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부패하여 많은 범죄를 저질러도 통제가 잘 안되었고

아몬 신을 모시는 최고 사제는

중요 성직에 자신의 인척들을 앉히고 유례 없는 권한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람세스 4세는  방대한 건축 계획에만 전념하여 국내 사정이 어렵던 시기였다고 한다 

 

 

 

 

람세스 4세 무덤 앞에서 람세스 11세 무덤이 있는 골짜기를 바라 본 모습이다

왕들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은

타-세케아아트(Ta-Sekheaat)라고 고대 이집트인들은 불렀다고 한다

이 의미는 '서쪽의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랍어로는

비벤 엘-무루크(Biban el Muluk)라고 하여 "파라오들의 문" 의미로 불렸다고 한다

 

 

 

 

투탕카문(Tutankhamun)과

람세스 2세(Rameses 2)와 람세스 9세(Rameses 9) 무덤이 있는

골짜기로 향하여 오른다

 

 

 

 

람세스 9세(Rameses 9) 무덤 앞에 멈추어 선다

왕들의 계곡에 있는 64기의 무덤 가운데 개방하여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약 10기 정도의 무덤만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왕들의 계곡에서 우리는 오늘 3곳 정도만 관람 할 예정으로

람세스 9세(Rameses 9) 무덤 안으로 들어 간다

 

 

 

 

람세스 9세(Rameses 9 :재위 BC 1126~1108)는

고대 이집트 제20 왕조시대(BC 1186~1069)의 8번째 왕으로서

19년 재위 기간 동안 심각한 사회 혼란 문제를 겪은 왕이라고 한다

아몬의 신의 사제 아멘호테프가 테베에서 종교적 강력한 힘을 휘둘렀고

리비아 부족이 침입하여 테베 서부지역의 교통을 마비시켰으며

서부 공동묘지 관리인들에게 오랜기간 식량을 공급하지 않아

굶주린 노동자들이 왕들의 묘지와 귀족들의 묘지를 도굴하는 약탈이 계속되는

혼란한 시기의 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누비아 지역을 다스린 왕이라고 한다

 

 

 

 

람세스 9세의 무덤 입구에서 암굴 계단을 내려와

양 옆면과 천장에 모두 벽화로 장식한 직선으로 된 지하통로를 따라 걷다보면

끝단에 있는 현실(玄室)이다

관은 치워지고 있던 흔적만 남아 있다

 

 

 

태양의 돛단배 안에 쇠똥구리가 붉은 원반을 들고 있고

양 옆에는 와제트(Wadiet)의 눈이 그려져 있으며

배 아래로는 긴 뱀이 그려져 있다

쇠똥구리는 케프리(Khepri)라고 하는 아침의 태양을 관장하는 신으로

태양신 라(Ra)의 현신으로 어린 라(Ra)를 케프리(Khepri)라고 불렀다고 하며

재생과 부활의 상징이라 한다

와제트(Wadiet)는 왕권을 상징하며 파라오를 수호하는 코브라 뱀 여신으로

태양신 라(Ra)의 딸이자 '라(Ra)의 눈'으로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와제트는 잔인하고 사나운 여신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동시에 온화한 면도 있는 여신으로

호루스(Horus)를 간호해 주고 수호해 주는 신으로 '와제트의 눈'은 호루스의 왼쪽 눈을 상징하며

이시스(Isis) 여신을 도와 세트(Set) 신에게 살해된 오시리스(Osiris) 시신을

델타 습지에 숨길 수 있도록 도와 준 여신이며

이집트 왕들의 수호신이며 출산 중인 모든 산모들을 보호하는 여신이라고 한다 

긴 뱀은 어둠, 혼돈을 상징하는 악의 신인 아펩(Apep)으로

사후세계인 두아트(Duat)로 들어가는 계곡에 사는 죽음의 신이라고 한다

이 그림에서 질서와 빛, 정의를 상징하는 태양신 라(Ra)가

태양의 돛단배를 타고 아침에 동쪽에서 나와서

부인이며 하늘의 여신인 누트(Nut)의 몸을 따라 서쪽 들어가

어둠의 혼돈에 지배자인 절대 악의 신 아펩(Apep)과 싸움에서 승리하고

아침에 다시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왕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기를 바라는 그림으로 생각된다

 

 

 

죽은 자들은 검은 색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지하세계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공격하여 부활을 막고

영원한 어둠의 죽음으로 인도하는 악의 신 뱀들의 공격을 막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검은 뱀들의 머리에 날카로운 지팡이로 꽂은 모습이 보인다

 

 

 

 

 

람세스 9세(Rameses 9 :재위 BC 1126~1108) 무덤은 많이 손실되었지만

무덤의 안의 벽화는 '태양의 연도'와 '두와트에 대한 그림'과 '죽음에 대한 그림' 등을

 회화적으로 이야기하는 장면들이 흥미를 끄는 무덤이라고 한다

 

 

 

 

람세스 9세(Rameses 9) 무덤 앞 길 맞은 편에 위치한

투탄카멘(Tutankhamen: 재위 BC1333년~ BC1323년) 무덤으로 간다

투탄카멘 무덤의 입구는 열려 있어 들어갈 수 있으나

무덤 입구의 암굴 계단를 조금 내려서면 작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 곳까지만 볼 수 있으며

시신이 있던 현실로 가는 통로는 개방을 하지 않고 있었다

 

 

 

 

투탄카멘(Tutankhamen: 재위 BC1336년~ BC1327년)은

고대 이집트 제18 왕조시대(BC1550년~BC1295년)의 제12대 왕으로

9살 나이로 왕위에 올라 18살 나이의 짧은 단명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투탄카멘(Tutankhamen)은 바로 전에 왕이었던

스멘카라(Smenkhara: 재위 BC1338년~BC1336년)의 동생이었으며

스멘카라(Smenkhara)는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4)인 아케나켄(Akhenaken: 재위 BC1352년~BC1336년)의 사위로서

아케나켄의 재위 말년에 왕위에 올라 2년간 왕위를 장인과 같이 누린 사위였다고 한다

 

 

 

 

투탄카멘(Tutankhamen: 재위 BC1336년~ BC1327년) 왕이

어린 단명에도 불구하고 유명해진 것은

1922년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무덥이 발굴됨으로 이라고 한다

왕들의 무덤이 오랜 세월 동안 파헤쳐지고 도굴되어 지는 동안

투탄카멘의 무덤이 온전히 3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보전되어진 것은

제20 왕조시대 람세스 6세(Rameses6: 재위 BC1143년~BC1136년) 무덤이

투탄카멘 무덤 바로 위에 세워지면서

무덤이 있는 자리로 흙들이 흘러내리며 두꺼운 층으로 덮어버렸기 때문에

그 장소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한다

발견될 때에 왕의 미라는 작은 묘실 속에 안치된 3중 관 속에 누워 있었으며

가장 안쪽의 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밖에 있는 2개의 관은 나무틀에 금을 망치로 두드려 박아넣은 것이라고 한다

왕의 머리에는 찬란한 빛나는 황금 가면이 쓰워져 있었고

수많은 황금 보석이 미라 위와 미라를 싸고 있었고

관과 관석에는 글이 가득 적힌 나무판에 금박을 입힌 4개의 제단으로 둘러 싸여 있었는데

이 처럼 당시의 자료를 온전히 알 수 있어 투탄카멘이 유명하여 졌다고 한다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투탄카멘(Tutankhamen)의 무덤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도굴당하지 않고 완벽하게 발굴 되었을 당시에

관 위에는 '나의 사후의 잠을 방해하는 자는 엄청난 저주를 내리리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발굴작업에 관여했던

카나번 경부터해서 20여명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기물림이나 사고로 죽어 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람세스 2세(Rameses2: 재위 BC1279년~BC1213년) 무덤 입구가 보인다

람세스 2세 무덤은 아직 개방이 안되고 있다고 하며

개방이 되면 많은 학자들과 관광객들이 몰려 올 것이라고 한다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 제19 왕조시대(BC1295년~BC1186년)의 제 3대 왕으로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로서

20대에 왕위에 올라 60년 이상을 파라오로서 통치하며 제 19왕조의 황금기를 가져왔으며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람세스 2세에 대한 업적은

이전의 아부심벨 신전(Temple of Abu Simbel) 방문에서 논하였으므로 생략한다

 

 

 

 

왕가의 계곡(Valley of Kings)이 있는 사막지역에서 빠져나와

룩소르(Luxor) 서안에 위치한 사막 지역의 주택단지 지역을 지나친다

이 곳은 옛 테베(Thebes) 지역의 장제전들과 죽은자의 도시(Necropolis)에서

종사하던 사람들이 몰려살던 지역이다

 

 

 

 

길거리에 오토바이들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며 몰려있다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한 오토바이 택시기사들이라 한다

왕가의 계곡이나 왕비의 계곡 또는 장제전이 있는 곳을 관광하려면

셔틀버스가 없는 사막 지역이라

개인적인 관광객들은 이들을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멤논의 거상(Colossi of Memnon)의 뒷모습이 보인다

멤논의 거상이 서 있는 주위로 넓은 공마당이 펼쳐지고 있는데

원래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3:재위 BC1390~BC1352)의 장제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아멘호테프 3세 장제전은

테베(Thebes)에 있는 장제전 중에 가장 큰 장제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아멘호테프 3세 장제전이 파괴되고 터만 전해지는 이유는

후세의 파라오들이

여기에 있는 건물의 돌들을 조금씩 가져다가 자기들의 장제전을 짓는데 사용하였으며

또한 지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지금은 농경지 한가운데 장제전의 탑문이었던 멤논의 거상만 통로 양쪽에 지키고 서 있다고 한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악어 식당(Crocodile Restaurant)이다

혹시 악어 고기가 나와 맛을 보나 생각하였으나

악어와는 상관 없는 현지식 식단으로 식사를 마치고 나온다

 

 

 

 

나일강(Nile River) 서쪽 편에서 보는 강 건너 동쪽 편의

룩소르(Luxor) 시내이다

동쪽 편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가야 한다

차편으로 건너 가려면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

시내 외곽에 위치한

룩소르 대교(Luxor Bridge)를 건너 돌아서 오는데 거리가 20Km 정도 된다고 한다

 

 

 

 

 룩소르(Luxor)에서 나일강을 사이에 두고 조금 전에 둘러 보았던

서쪽 편은 죽은 파라오들의 집인 영원한 안식처들이었다면

우리가 건너가고 있는 동쪽 편은

고대 이집트의 천년 왕도로서 '황금이 넘치고 백 개의 문이 있는 왕도'라고 불리였던 

지금의 룩소르(Luxor)라 하는 테베(Thebes) 지역이다

 

 

 

나일강 동쪽 편에 있는 룩소르(Luxor) 선착장으로 향해 가던 중

우리의 숙소인 나일강 유람선이 정박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 밤이 3일차로 마지막 밤을 보낼 유람선 숙소이다

 

 

 

 

나일강을 건너 룩소르(Luxor) 동쪽으로 건너 선착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점심 식사 시간에 먼저 건너와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라

이집트 신전 중에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다는

카르나크 신전(Great Temple of Karnak)으로 간다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은

고대 이집트 중왕국 시대인 제12 왕조(BC1985~BC1795) 때에

처음으로 축조가 시작되어

이후 약 2000년에 걸쳐 역대 파라오들의 왕권 강화와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하여

신전을 증축과 개축을 하였다고 한다

 

 

 

 

대표적인 파라오들이

제18 왕조(BC1550~BC1295) 시대의

투트모세 3세(Thutmosis3: BC1479~BC1425),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BC1479~BC1464),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3: BC1390~BC1352)와

제19 왕조(BC1295~BC1186) 시대의 람세스 2세(Rameses2: BC1279~BC1213)와

제20 왕조(BC1186~BC1069) 시대의 람세스 3세(Rameses3: BC1184~BC1153)와

제30 왕조(BC380~BC332) 시대의 넥타네보 2세(Nectanebo2: BC343~BC332)가

증 개축을 한 때표적인 파라오들이며

알렉산더 대왕 사후에 부하 장수였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 제32대 왕조(BC305~BC30)를 펼친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 시대에 이르러

오늘날 같은 규모의 웅장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은

북쪽에는 종종 매머리를 하고 태양의 원반과 2개 깃털을 쓰고있는 전쟁의 신인

몬투 신전(Temple of Montu)이 있고

중앙에는 고대 이집트 신들 중에 가장 강력한 신이며 혼돈으로부터 우주를 창조한 신 중에 하나이며

스스로 창조된 신으로 '숨겨진 자'라는 의미의 아멘(Amen), 아문(Amun, Amoon)으로도 표기하는

아몬 신전(Temple of Amon)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하늘의 여신이자 대모신으로 아몬 신의 아내인 무트 신전(Temple of Mut) 등으로

크게 3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의

벽돌담으로 쌓여 있는 신전 벽 전체 길이는 2.4Km나 된다고 하며 모두 8개 문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전의 길이는 동서로 540m, 남북으로 600m의 광대한 규모라고 한다

카르나크 신전이 절정기에는 약 8만여 명의 노예와 약 24만여 마리의 가축과

100여 척의 배를 소유한 신전이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제 1 탑문 뒤쪽에 당시에 높은 벽을 쌓은 후에 미처 치우지 못한 흙벽이 보인다

당시의 공사 공법에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카르나크 대신전(Great Temple of Karnak)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몬 대신전(Great Temple of Amon)은 그 구조가 복잡하다고 한다

스핑크스 참배 길, 열개의 탑문, 두개의 안마당, 두개의 기둥 홀, 세개의 오벨리스크,

한개의 성스러운 연못과 성소 그리고 몇 개의 사당이 있다고 한다

위 사진은 아몬 대신전 안마당으로

제25 왕조시대(BC747~BC656) 누비아 출신의 파라오 타하르코(Taharqo: BC690~BC664)가 세운

파피루스(Papyrus) 기둥과

제21 왕조시대(BC1069~BC945) 때에 아멘 신의 신관이었던

피네드엠(Pinedjem)의 석상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파피루스(Papyrus) 기둥은 지금은 한 개만 보이지만 원래는 10개가 서 있는 기둥 복도였다고 하며

피네드엠(Pinedjem) 석상은 원래는 람세스 2세(Rameses2: 재위BC1279~BC1213) 석상이었는데

피네드엠이 자기 이름을 새겨 놓아 피네드엠 석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카르나크 대신전(Great Temple of Karnak)의 아몬 대신전(Temple of Amon)의 둘째 탑문이다

고대 이집트 제18 왕조시대(BC1550~BC1295)의

마지막 파라오 호렘헤브(Horemheb: 재위BC1323~BC1295) 때 착공하여

제19 왕조시대(BC1295~BC1186) 때인

람세스 2세(Rameses2: 재위BC1279~BC1213) 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둘째 탑문을 지나면 열주실이 시작되는데

고대 이집트 기념건축물의 걸작들 중에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 제18 왕조시대의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3: BC1388~1351) 때 착공하여

제19 왕조시대 때인 람세스 2세 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열주실은 가로 102m, 세로 53m 넓이에 134개의 거대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신전 벽에 조각된 그림의 좌측에는 아몬(Amon) 신이 앉아 있고

그 앞에는 그의 부인으로 보이는 무트(Mut) 여신과

그녀 뒤로 태양 신이 된 호루스(Horus) 신과

제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아몬(Amon) 신이 이들로부터 경배를 받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134개의 거대한 기둥 가운데

제18 왕조시대(BC1550~BC1295) 때의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3: BC1390~BC1352)가 세운 파피루스 기둥이

홀의 중앙에 2열로 6개씩 12개가 서 있다 높이

21m, 직경 3.6m로서 기둥머리의 둘레는 15m나 된다고 한다

 

 

 

 

나머지 기둥 122개는

제19 왕조시대(BC1295~BC1186) 때의

람세스 2세(Rameses2: BC1279~1213)가 세운 기둥으로 높이가 13m, 직경이 2m라고 하며

기둥 위 머리는 꽃봉우리 모양의 파피루스의 장식이라고 한다

기둥 홀은 지붕으로 덮여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기둥이 서 있는 열주실 전체는

파피루스(Papyrus)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원초의 바다"에 태양빛이 비쳐

천지가 창조되는 창조신화의 세계를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기둥에 조각이 새겨져 있는 모습이 굉장히 깊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람세스 2세(Rameses2)의 상형문자로

후대의 파라오들이 지우고 자기 이름을 새겨 넣지 못하록 하기 위하여

깊게 새겼다고 한다 

 

 

 

 

제관들이 신상을 태우고 태양의 배를 옮기는 장면이라고 한다

람세스 2세(Rameses2)가 원정을 나가

전쟁에서 모두 승전하였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2개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보인다

앞에 보이는 오벨리스크가 제3탑문 옆에 있는 오벨리스크로

투트모세 1세(Thutmose1: 재위 BC1504~BC1492)가 세운 오벨리스크로

높이가 21.8m이고 무게가 130t이라고 하는데

모든 오벨리스크(Obelisk)는 2개가 1쌍으로 세워져 있어야 하나 1개뿐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1개는 이탈리아 로마의 산 조반니 광장(Piazza di San Giovanni)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뒤로 보이는 오벨리스크는 제4탑문 옆에 있는 오벨리스크로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재위 BC1479~BC1464)이 세운 오벨리스크로

높이가 30m이며 무게가 380t이라고 한다

그것 또한 1개 뿐이 안보이는데

1개는 바로 옆에 있는 광장에 부러진 조각품으로 드러누워 있다

 

 

 

 

부러져 드러누어 있는 오벨리스크(Obelisk)로서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이 세운 2개 중에 하나이다 

이 오벨리스크(Obelisk)에는

하트셉수트 여왕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히에로글리프(Egyptian Hieroglyphs)인 신성문자로 적혀 있다고 한다

 

 

 

 

부러진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가 있는 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사크레드 호수(Sacred Lake) 방향 쪽으로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3: 재위 BC1390~BC1352)의 신성갑충 기둥(Scarab of Amenhotep3)이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것은 보았으나 사전 지식이 없어서 사진으로 담지를 못하였다

화강암 기둥 위에 신성갑충(神聖甲蟲)인 풍뎅이가 올라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기둥을 1번 돌면 행운이 찾아오고

3번을 돌면 결혼을 하게 되며

7번을 돌면 아이를 갖게된다고 하여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라고 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투트모세 1세가 세운 오벨리스크와

담장 뒤로 보이는 하트셉수트 여왕이 세운 오벨리스크가 한쌍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쌍이 아닌 각각 짝 잃은 오벨리스크로서

태양 빛이 서쪽으로 져가며 빛추이는 그림자와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어 있는 신전의 주변의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는 허망함이 몰려드는 것 같았다

 

 

 

 

왔던 발걸음을 되돌려 들어 왔던 방향인 제3탑문을 지나

다시 대다주실(大多柱室)을 지난다 

 

 

 

 

134개의 거대한 기둥이 있는 대다주실(大多柱室)은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에서

백미에 해당하는 곳으로

거대한 기둥들이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의 제1탑문이 있는 광장으로 오니

들어갈 때에 무관심으로 보았던

높은 담장 옆으로 작은 문들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세티 2세 신전(Temple of Seti2: 재위 BC1200~BC1194)이라고 한다

 

 

 

 

제1 탑문 앞에 있는 스핑크스의 길(Avenue of Sphinxes)의 길이다

원래 이 길은 나일강과 연결된 운하가 있던 곳으로

한쪽으로 20개씩으로 양쪽으로 40개의 스핑크스(Sphinxes)가 남아 있는데

이 스핑크스는 아몬(Amon) 신을 상징하는 산양의 머리에 사자의 몸을 하고 있으며

앞 다리 사이에는 람세스 2세(Rameses2)의 작은 조각상이 놓여져 있었다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을 돌아 본 후

다시 제1 탑문을 거쳐 밖으로 나오는 길인 '스핑크스의 길(Avenue of Sphinxes)'인 '참배의 길'은

당시에는 왕이 멤피스(Memphis) 왕궁에서 배를 타고

카르나크 선착장에 내려 계단을 올라가 '참배의 길'을 통해 신전으로 입장하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몬 라(Amon-Ra)'의 신전을 지키며 도열하여 있던 스핑크스들은

머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이 부서져 있는 모습이

찬란했던 이집트 문명의 역사가 세월이 흐르며 아픈 과거와 함께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을 떠나며 뒤돌아보니

해는 기우러 가고

태양 빛은 카르나크 신전 제1탑문의 중간부 위를 흐릿하게 비추이고 있다

 

 

 

 

 

카르나크 신전의 유적지 밖으로 나와

다음의 일정인

룩소르(Luxor)의 마차투어를 위해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 간다

 

 

 

 

 

마차에 올라 셀카봉부터  내민다

이럴때는 누가 멋있게 찍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마부는 출발준비를 하고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룩소르(Luxor) 시내에

땅거미가 서서히 몰려오고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며 마차는

룩소르의 재래시장으로 출발하며

룩소르의 야경 마차투어를 시작한다

 

 

 

 

 

룩소르(Luxor)는

이집트 나일강 동쪽에 있는 상업 도시로서

고대 이집트 도시인 테베(Thebes)의 남부 지역에 붙여진 이름에서 비롯되었으며

룩소르의 동안에는 거대한 신전들이

서안에는 죽은 파라오의 장제전들과 영원한 안식처로 장식한 암굴 무덤들이 있어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이 '성서학자들의 파라다이스'라면

이집트의 룩소르는 '고고학자들의 파라다이스'라고 불리우는 곳이라고 한다

 

 

 

 

또한 룩소르(Luxor)는 인구 45만여 명이 거주하는 도시로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존재해 왔으며

고대 이집트의 중왕국, 신왕국 시대의 천년 왕도로서 번성하였던 곳이었기 때문에

현재에 전세계의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라고 한다 

 

 

 

 

룩소르(Luxor) 시내의 재래 시장 골목길로 마차가 접어 들기 시작하였으나

시장은 그리 많은 사람들이 붐비지는 않아

마차가 지나다니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면

장보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 매우 복잡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집트(Egypt)를 여행하며 관광객 여성들을 제외하고

현지 여성들의 대부분의 복장은 검은 차도르(Chador)를 입은 여성들만 보게 되는데

 

 

 

 

의류 상가에 전시되어 있는 여성 옷들은

다양한 색상에 디자인과 화려한 문양으로 수 놓아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여성 의류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슬람의 성인 여성들은 겉 옷을 대부분이 검은 차도르(Chador)를 입지만

속 옷은 자기만의 취향을 살린 최대한 아름답게 입는다고 한다

 

 

 

 

교회가 보인다

성탄절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트리로 밝게 장식하여 놓았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지역이라 교회를 보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현재 룩소르에는 많은 교회가 생겨나

그리스도를 믿는 신도들 수가

룩소르(Luxor)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신도들 수와 비슷하다고 한다

 

 

 

 

마차는 시장 골목을 빠져 나와 달린다

거리가 어두침침하다 

 

 

 

 

룩소르 기차역(Luxor Railway Station)이다

마차는 이 곳에서 유턴하여 룩소르 신전 방향으로 향한다

 

 

 

 

룩소르 시내의 대중교통으로 이용하는 미니 버스이다

우리 나라의 스타렉스 정도인데

대부분 승객 탑승문을 열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 앞 광장 앞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린다

룩소르 신전 야간 관광이 있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통과하여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 안으로 들어선다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은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보다

비교가 안되게 작은 신전이라고 한다

이유는 카르나크 신전의 부속 건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카르나크 신전은 거창하고 장엄하지만

룩소르 신전은 완성도가 높은 건물로 우아하게 건축된 신전이라고 한다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의 '스핑크스 참배 길(Sphinx Allee)'이다

이 길은 북쪽으로 3Km정도 떨어져 있는

카르나크 신전(Temple of Karnak)과 연결되는 길이라고 한다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의 제1 탑문이다

탑문에서 좌측으로 1개의 오벨리스크(Obelisk)가 보이고

람세스 2세(Rameses2)의 2개의 가운데 쪽의 좌상과 그 옆으로 4개의 입상이 보인다

람세스 2세가 제1 탑문과 안뜰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야간이라 사진에 보이진 않지만

왼쪽 벽의 부조에는 이집트 군대와 지휘본부를

오른쪽 벽면에는 카데쉬 전투(Battle of Kadesh)로 람세스 2세가 원정하여

전차를 타고 히타이트(Hittite) 군을 무찌르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오벨리스크(Obelisk)는 2개가 세워져 있어야 하지만 1개만 세워져 있는데

1개는 1831년 프랑스 파리롤 옮겨가 콩코드 광장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프랑스에서 약탈해 간 것이 아니라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769~1849)가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립(Louis Philippe: 1773~1850)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알아챈 영국이 가로채려고 알렉산드리아에서 협상에 들어갔는데

프랑스에서 이를 알고 이집트 왕이 보내준다는 약속을 기다릴 여유없이

1831년 프랑스 건축 기술자를 급파하여 빠르게 해체하여 지중해를 건너

1833년 말에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다고 하며

1836년10월 말에 콩코드 광장에 프랑스 시민 2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막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오벨리스크 1개를 마져가지고 와야하는데

첫번째 것을 가져오면서 엄청난 비용과 4년 이상의 시간의 수고가 필요로 하여

1980년 공식적으로 2번째 오벨리스크(Obelisk)를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2개가 한쌍으로 세워져 있어야 하는

오벨리스크(Obelisk)가 짝을 잃고 홀로 세워져 있다고 한다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의 제1 탑문(1st Pylon)을 통과하여

람세스 2세 광장(Court of Rameses2)으로 향해 간다

들어가는 제1 탑문 양 옆으로 거대한 람세스 2세의 좌상이 놓여져 있다 

 

 

 

 

 

룩소르 신전 제1 탑문을 통과하여 람세스 2세 광장으로 들어서니

신전 위쪽으로 이슬람 모스크가 보인다

신전의 일부를 파괴하고 사원을 건축한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라고 한다

몇 세기인지는 모르겠으나

룩소르 신전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하며 

먼저 로마시대 때에 이 자리에 콥트교회 수도원으로 세워졌었는데

13세기에 '아부엘 학가그(Abu el Haggag)'라는 이슬람 학자가 룩소르에 와서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모스크의 이름은 '아부엘 학가그 모스크(Abu el Haggag Mosque)'로서

1264년 아부엘 학가그가 사망한 후 성자로 추앙 받고 있으며

'아부엘 학가그(Abu el Haggag)'의 뜻은 '순례객의 아버지'라고 한다

 

 

 

 

람세스 2세의 안뜰(Court of Rameses2)을 둘러 싸고 있는 열주들 사이에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Court of Amenhotep3)로 들어가는

제2 탑문의 높은 열주가 보이고

그 열주 양 옆으로 아멘호테프 3세(Amenhotep3: BC1390~BC1352)의 앉아 있는 석상이 보이고

그 옆에 람세스 2세(Rameses2: BC1279~BC1213) 석상이 서 있고 

그 주위로 오시리스(Osiris) 석상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 제2 탑문을 지나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Court of Amenhotep3)로 향한다

세 면은 두 줄의 돌기둥 60개가 세워져 있고

사진 정면으로 보이는

한쪽 면은 기둥실로 기둥 8줄에 4열로 32개의 기둥이 촘촘히 서 있는 것이 보인다

1989년 1월에 이집트의 고고학자들이 여기 아멘호테프 3세 안뜰의 지층을 조사하였는데

파라오의 석상과 신상 26점을 발굴하였다고 한다 

그중에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 티에의 입상과

당시의 여신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상 하나가 거의 흠 없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Court of Amenhotep3)에서

제1 탑문쪽을 바라 본 장면이다

제2 탑문에서 여기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으로 들어오는

통로 양편으로 늘어선 기둥들이 한쪽 편에 7개씩 14개의 기둥으로

위용을 자랑하며 도열하여 서 있는 모습이

어두운 밤의 화려하지 않은 은은한 조명 빛으로 인해 더욱 더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Court of Amenhotep3)을 둘러싸고 있는

3면의 60개의 기둥과 기둥실의 32개의 기둥들은

파피루스 봉우리형 기둥들로

시공장 아멘호테프가 가장 좋은 크기와 두께로 다듬어서 건물 전체에 배치시키는 수법으로 

그것을 아무도 만든 적이 없는 독창적인 기둥으로 재탄생 시킨 것이라고 한다

 

 

 

 

룩소르 신전의 아멘호테프 3세의 안뜰(Court of Amenhotep3) 한쪽에 있는

투탕카멘(Tutankhamen:BC1336~BC1327)과

그의 부인 안케세나멘(Ankhesenamun:아낙수나문)의 좌상이다

투탕카멘과 안케세나멘은 부부이자 이복남매였다고 하며

안케세나멘(Ankhesnamun)은

아크나톤(Akhnaton: BC1352~1336) 왕과 네페르티티(Nefertiti) 왕비 사이에서 세째 딸로 태어나  

그의 아버지 아크나톤(Akhnaton) 왕의 왕비가 되었다가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아크나톤 왕이 죽은 후

이복동생인 투탕카멘(Tutankhamen)이 왕위에 오르자 또 그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람세스 2세 안뜰(Court of Rameses2)로 나온다

람세스 2세 석상과 람세스 2세가 오시리스(Osiris) 신이 된 석상을 바라보며

사후에도 막강한 권력을 추구하고 싶었던

당시의 파라오들의 집착된 갈망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룩소르 신전(Temple of Luxor)을 나와

나일강변(Riverside of Nile)에 정박해 있는 크루즈(Cruise)로 돌아가

나일강 크루즈 유람선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날이 밝아 오기 전인 새벽부터 일어나 크루즈에서 나와

나일강을 건너는 작은 배를 타고 룩소르 서안으로 건너간다

배안에서는 날씨가 쌀쌀한 관계로

따끈따끈한 홍차를 한잔씩 탑승객들에게 준비해서 따라준다

 

 

 

 

날이 밝아 오기전

룩소르(Luxor) 서안 나일강(Nile River) 변에서 바라보는

룩소르 시내 야경이다

 

 

 

 

고대 이집트 왕조의 옛 수도인 테베(Thebes) 지역을

열기구를 타고 둘러보며

나일강 건너 룩소르(Luxor)의 사막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일출을 감상하기 위하여

날이 새기전 새벽부터 서둘러 나온 것이다

열기구는 하늘이 도와 주어야 탈 수 있다고 하는데

오늘 날씨는 열기구를 타는데 아주 좋다고 한다

 

 

 

 

열기구들이 하나둘씩 하늘로 떠어르기 시작한다

 

 

 

 

열기구 탑승은

터키(Turkey)를 여행할 때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탑승해 보고

이번이 2번째 탑승이다

 

 

 

 

날씨가 쌀쌀한 가운데 열기구 탑승 준비 세팅을 기다리다가

날이 밝아 오기 시작하며 

드디어 탑승하여 하늘로 서서히 떠오른다

 

 

 

 

터키(Turkey) 카파도키아(Cappadocia)에서 열기구를 타는 것은 

요정들이 산다는 버섯 모양의 기암 괴석들이 펼쳐져 있는 지역을 보는 것이라면

이곳 룩소르(Luxor)에서 열기구 탑승은

나일강변을 끼고 펼쳐지는 녹푸른 초원지대와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의 경계선의 신비로움을 느껴보라는 것이라고 한다

 

 

 

 

검게 도로가 끝나는 쪽에 어제 방문하였던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전이 보인다

그 뒷 산 넘어로는 왕가의 계곡(Valley of Kings)이 있는 곳이다

 

 

 

 

우리가 열기구를 타고 오른 곳이다

우리 뒤에도 열기구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도 보이고

준비하고 있는 것도 보인다

 

 

 

 

하늘에 떠오른 열기구들이 장관을 이루는데

룩소르(Luxor)의 나일강변으로 펼쳐져 있는 푸른 초지에

일출 전의 붉어지는 동녘 하늘과 조화를 이루며 떠 있는 열기구들이

보는 이들에게 더욱 감탄사를 만발하게 하고 있다

 

 

 

 

룩소르(Luxor)의 동녘 하늘에서는

이집트 신화에서처럼

태양신 라(Ra)가 어둠의 세계 두아트(Duat)에서

악의 신 아펩(Apep)과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 동녘 하늘에는 붉은 하늘만 보이고

태양의 배는 나오질 않고 있다

 

 

 

 

옛 테베(Thebes)의 유적군으로

사람들의 거주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크기로 보아 장제전 또는 귀족이나 사제들과 관계되는 유적으로 보이고

 그 옆 작은 시설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유적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죽은 자들의 도시(Necropolis)로

왕들과 왕비의 무덤을 공사하거나 지키는 노역자들과

장제전에서 제사를 담당하는 사제들과 노역하는 사람들의 거주였다고 한다

 

 

 

 

동녘에 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Ra)가 태양의 배를 타고

드디어 어둠 속의 악의 신 아펩(Apep)과 싸움에서 승리하고

죽은 자의 어둠의 세계인 두아트(Duat)에서

광명의 붉은 빛을 발하며 의기양양 당당하게 빠져 나오고 있는 중이다

 

 

 

 

멀리 나일강이 붉은 빛에 반사되며 빛을 발하고 있고

세상은 서서히 광명의 아침을 맞이하기 시작하는 중이다

 

 

 

 

사막 한가운데 도로가 보인다

어제 우리가 갔었던

왕가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으로 들어가는 도로이다

 

 

 

 

이제는 동녘 하늘에 태양이 솟아 올라와 있고

나일강(Nile River) 주변으로 푸른 초지가 보이고

초지가 아닌 사막 쪽으로 주택단지들이 형성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진 땅에서

강 주변의 푸른 초지는 이집트 민족에게는 황금보다 귀한 땅이라고 한다

 

 

 

 

높게 떠 있던 열기구가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동북부 사하라 사막에 흐르는 나일강(Nile River)이 만들어 내는 생명의 푸른 초지와

사막의 신비로움에서 많은 신화들이 창조하여 졌음을 느끼며

푸른 초지와 사막의 경계선을 다시 한번 바라다 본다

 

 

 

 

고대 이집트 제19대 왕조시대(BC1295~BC1186)의 람세스 2세(Rameses2)의 아버지인

세티 1세(Seti1: BC1294~BC1279)의 장제전 모습이다

 

 

 

 

열기구들이 마을 있는 쪽으로 몰려들 간다

착륙지점을 찾아들 가고 있는데

도로변 건너 마을쪽으로 공동묘지가 보인다

 

 

 

 

열기구가 착륙지점을 찾아 마을 위의 상공을 날고 있다

마을의 건물 위 옥상에 짓다만 건축물처럼 보이는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이전 카이로에서 언급하였는데

세금 문제로 미완성 건축물은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라고 한다 

 

 

 

 

마을의 공마당에 열기구가 착륙하였는데

열기구를 싣고갈 트럭이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고

남자들은 내리고

여자들만 태운 상태에서

열기구를 트럭이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밀고 가는 장면이다

 

 

 

 

열기구 투어를 마치고

룩소르(Luxor)에서 후르가다(Hurghada)를 향하여 출발한지

1시간여 달려 퀴프트(Qift) 부근을 지나는데

버스 차창 밖으로 소총을 곁에 두고 군복을 입고 쉬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집트(Egypt)로 여행와서

지금까지 길거리에서 소총을 들고 지키고 있는 모습은 처음보았는데

이쪽 지역은 치안이 안좋은 지역인가 하는 느낌이 든다

 

 

 

 

 

퀴프트(Qift)를 지나쳐 10분 정도 달렸을까

또 소총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일강변의 초록 녹지에 건설된 인공수로로

나일강변에서 멀리떨어진 초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만들어져

룩소르(Luxor)에서 한참 남쪽에 있는 이스나(Isna)의 나일강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룩소르(Luxor)를 지나고 퀴나(Qina)를 지나 나그함마디(Nag Hammadi)까지

약 150Km를 흘러 나일강으로 흘러 나가는 수로이다

 

 

 

 

 

또 소총을 메고 군복을 입고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웬지 살벌한 지역으로 느껴진다

 

 

 

 

 

룩소르(Luxor)에서 출발한지 1시간 30분 정도 되어 퀴나(Qena)라는 도시에 진입한다

퀴나(Qena)는 키나(Qina)라고도 하며

퀴나 시(Qena City)는

퀴나 주(州)의 주도(州都)로서

룩소르(Luxor)와 이스나(Isna)까지 포함하는 주(州)라고 한다

퀴나 시(Qena City)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홍해(紅海)로 나가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주도(州都)가 되었으며

인구는 23만6,000여 명(2018년)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도시라고 한다

 

 

 

 

퀴나 시(Qena City) 중심부를 지나칠 때 보이는 광경은

더 살벌해 보인다

차량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러명 있으며

방호판까지 세워두고 뒤에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퀴나(Qena) 시내를 벗어나 사막으로 진입하여

후르가다(Hurghada)가 있는 홍해(紅海) 바다를 향하는데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사막에 세워지는 뉴 퀴나 시티(New Qena City)라고 한다

 

 

 

 

 

다시 사막길 투어가 시작되었다

아스완(Aswan)에서 아부심벨(Abu Simbel)를 왕복할 때

오랜 시간 사막길 투어 외에

대부분 나일강(Nile River) 주변에서 거하는 주요 여행코스였는데

다시 몇 시간을 사막길을 달려야 홍해바다가 나온다

 

 

 

 

 

사막의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가 평원을 이루고 있다

 

 

 

룩소르(Luxor)를 출발한지 2시간 정도되어 사막의 이름 모를 휴게소에 잠시 정차하여 내리니

이슬람 여성 복장인 니캅(Niqab)을 입은 여인이

자녀들로 보이는 아이들과 당나귀를 끌고 나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마리의 당나귀 등 위에는 염소새끼가 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관광객들에게 같이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버는 사막에 사는 베두인(Bedouin)들이라고 한다

 

 

 

버스가 사막에 깊숙이 들어 설수록 핸드폰의 통신 상태는 

전파를 받지 못하고 먹통 상태가 된다

 

 

 

 

 

후르가다(Hurghada)를 향해 사막을 한참을 달리다보니

저 멀리 검은 산들이 보인다

 

 

 

 

 

사막의 산맥으로 보이며 우리가 탄 버스는

사막의 검은 산맥을 넘어 후르가다(Hurghada)가 있는 홍해 바다를 향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사막길을 달려가고 있다

 

 

 

 

 

사막의 산악 지형을 넘어와 후르가다(Hurghada)로 가는 길목의

홍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사파가(Safaga) 부근에 있는

회전 로타리의 중앙의 '캐리비언 월드 리조트(Caribbean World Reasorts)' 광고 파란색 구조물이

뒤쪽에 있는 송전탑과 우연히 하나의 일체로 보여 다른 구조물로 보인다

 

 

 

 

 

이제 사파가(Safaga)에서 후르가다(Hurghada)가 있는 북쪽으로 달려간다

버스가 달려가는 방향 좌측은 멀리 사막의 산악지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평평한 사막지대로서

그곳 끝에는 홍해 바다가 있다

 

 

 

 

 

사막을 질주하는 고속도로에 있는 톨게이트이다

후르가다(Hurghada)가 얼마 남지 않았다

 

 

 

 

 

사파가(Safaga)에서 후르가다(Hughada)로 가는 홍해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이 사막 지역이나

수 많은 리조트(Reasort)들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1300Km에 달하는 이집트의 홍해 바다 해안에는

수 많은 리조트, 호텔, 빌라, 레스토랑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198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엄청난 관광 수입을 남겨주고 있다고 한다

 

 

 

 

 

후르가다(Hurghada) 시내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후르가다(Hurghada)는

홍해 바다를 접한 이집트의 휴양도시로서

원래는 조그만 어촌이었으나

1980년대 해변 리조트 도시로 개발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집트(Egypt)의 후르가다(Hurghada)는

멕시코(Mexico)의 칸쿤(Cancun)과 유사성이 많은 휴양지로서 

칸쿤(Cancun)도

1970년대에 카리브해(Caribbean Sea)의 작은 어촌이었으나

아름다운 카리브 해변의 휴양 도시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 마야문명(Mayan Civilization) 발상지가 자리하고 있어

최근에는 전세계의 청춘들의 허니문(Honeymoon) 열망지로 1순위에 꼽히는데

 

 

 

 

 

후르가다(Hurghada)도

아름다운 홍해(Red Sea) 해변의 휴양지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 나일강 문명(Nile River Civilization) 발상지가 있어

유럽인들의 휴양지로서 인기가 치솟는 중이라고 한다

 

 

 

 

 

오늘의 숙박지인 힐튼 후르가다 리조트(Hilton Hurghada Resorts)에 도착한다

룩소르(Luxor)에서 후르가다(Hurghada)까지 약 313Km 거리를

약 4시간을 달려 버스에서 내린다

호텔 로비에서 방 배정을 받아 짐을 옮긴 후

호텔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한 후 후르가다에서 다시 일정을 시작한다

 

 

 

 

 

이집트(Egypt) 후르가다(Hurghada)의 인구는

약26만2000여 명(2017년)이 거주하는 홍해 주의 도시라고 하며

해안을 따라 36Km 뻗어 있는 도시라고 한다

 

 

 

 

 

후르가다(Hurghada)에는

1905년도에 처음 마을로 정착하며 작은 어촌에서 시작하였다고 하며

지명은 고대부터 이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힐튼 후르가다 리조트(Hilton Hurghada Resorts)에서 버스로 약 10분 정도 이동하여

후르가다 마리나(Hurghada Marina)에 도착한다

 

 

 

 

 

후르가다 마리나(Hurghada)에 도착하여 아치 문을 통과하여

해안가로 나오니

많은 음식점들이 길게 이어져 자리잡고 있다

 

 

 

 

 

후르가다(Hurghada)는 홍해 바다가 너무 아름다워

많은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라고 하는데

첫 일정은 반잠수정을 타고 나가 아름답다는 홍해 바다 속을 관광하는 일정으로

사진은 우리가 타고 나갈 반잠수정이다

 

 

 

 

반잠수정이 서서히 선착장 부두에서 출발하기 시작한다

 

 

 

 

 

후르가다 마리나(Hurghada Marina) 해변으로

알미나 모스크(Al Mina Mosque)가 2개의 첨탑 사이로 보인다

 

 

 

 

 

후르가다(Hurghada)에서는

일년 내내 건조하고 온화한 기후와 자연 해변의 아름다움 때문에

다양한 수상 스포츠 적격인 장소가 많이 있어

수상 레저를 즐기려는 많은 세계 동호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레크레이션 수상 스쿠버 다이빙과 스노클링으로 인기가 많은 장소라고 한다

그러한 장소라고 하여 홍해 바다 속을 보기 위하여

반잠수정을 타고 나가며 갑판 위에서 여흥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후르가다의 앞 홍해 바다의

유주르 아부 민카르(Juzur Abū Minqār) 섬 가까이 있는 산호 지대에 다다르자

반잠수정 밑칸으로 내려가

바다 속을 바라볼 수 있는 유리 창틀 앞에 자리 잡고 앉는다

 

 

 

 

 

산호지대가 회색으로 보인다

홍해 바다 속의 산호지대는 울긋불긋 아름다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조금 실망감이 느껴지는 관경이다

 

 

 

 

 

열대어들이 떼지어 지나 간다

 

 

 

 

 

이름 모를 열대어 한마리가

창 가까이와 미소짓는듯 하는 표정으로 지느러미까지 흔들어 주는

애교의 서비스를 선사해 준다

 

 

 

 

 

바다 속의 열대어들의 더 많은 종류들을 찾으며 향연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사람 얼굴이 불쑥 나타난다

 

 

 

 

 

잠수부가 얼굴을 내밀었다가 사라지자 열대어 떼들이 몰려들어 창 앞을 가린다

잠수부가 모이를 뿌리고 간 것 같다  

 

 

 

 

 

큰 열대어 종은 보이지 않고

같은 어종들만 몰려들어 모이 먹기에 바쁘다

 

 

 

 

 

모이를 먹던 물고기들이 서서히 흩어지자

다른 어종 몇이 보인다

 

 

 

 

 

반잠수정 아래 칸에서 다시 갑판으로 올라오니

바다 멀리 사막으로 보이는 하얀 모래 섬이 눈에 들어온다

'유주르 아부 민카르(Juzur Abū Minqār)' 섬이다

 

 

 

 

 

홍해 바다에서 다시 후르가다 마리나(Hurghada Marina)로 귀항하는데

'알미나 모스크(Al Mina Mosque)'가

이 지역 해안에서 포인트인것처럼 웅장하게 보인다

 

 

 

 

 

홍해 바다에서 반잠수함 투어를 약 1시간 30분 소요하여 마치고

후르가다 마리나(Hurghada Marina) 선착장에 도착하여

우리가 타고 나갔던 반잠수정 앞에서 사진으로 남기고

사막에서 노을을 보기 위하여

사막투어를 나갈 지프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한다

 

 

 

 

 

후르가다 마리나(Hurghada Marina)에서 지프(Jeep)를 타고 출발하여 달린지

약 1시간 정도되어 사막 한가운데 도착하여 차에서 내린다

달려오는 동안 창문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창은 모래 먼지로 뿌였고 너무 흔들거려

사막을 달리는 동안에는 사진으로 담지는 못하였다

 

 

 

 

 

지프(Jeep)에서 내리자 검게 보이는 자갈로 덮힌 나즈막한 언덕으로 오른다

 

 

 

 

 

나즈막한 사막 언덕 정상에 도착하니

평평한 정상부가 나오고 멀리까지 시야가 넓어진다

 

 

 

 

 

사막의 산에 올라 잠시 사진을 찍으며 대기하고 있으니

해는 서쪽 사막 지평선으로 기울어 가기 시작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해는 지고

해가 진 서쪽 사막 지평선은 서서히 붉은 노을이 시작된다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Ra)가 어둠의 세계인 두아트(Duat)로 들어가

지하 세계의 악의 신 아펩(Apep)과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태양신 라(Ra)와 지하 세계 아펩(Apep)의 싸움의 시작으로 시작된

사막의 붉은 아름다운 노을 바라보며

나즈막한 산 언덕에서 내려와 다시 지프(Jeep)를 타고

사막의 유목인인 베두인(Bedouin)들이 사는 마을로 향한다

 

 

 

 

 

베두인(Bedouin) 마을에 도착하니

사막투어용 지프(Jeep)가 여러 대가 주차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다른 사막투어 관광객들이 먼저 와 있는 것 같았다

 

 

 

 

 

 

베두인(Bedouin) 마을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라

어둑어둑해지니

자세히 마을을 볼 수도 없고 누가 베두인인지 알 수도 없었다

 

 

 

 

 

사막의 베두인 마을에서 보는 주변의 야경이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 지지 않아 마을 구경은 어려워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워져 가는 사막의 지평선과 하늘의 아름다운 모습은

사진으로 남길 수가 있었다

 

 

 

 

 

후르가다(Hurghada)에서 남서쪽으로 1시간 정도에 위치한 사막에서의

어둠이 짙어져 가는 지평선과 하늘의 모습이다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길을 후레쉬를 켜들고 가이드가 따라오라고 한다

한 100m 정도 따라 걸었을까

어둠 속에서 돌기둥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사이로 들어 간다

 

 

 

 

 

기둥 사이로 들어서니 우물이 있는 곳이다

오아시스가 없는 이곳 베두인들은 어떻게 식수 공급을 받을까 궁금했었는데......

작은 돌맹이 하나를 던졌는데 한참 있다가 풍덩소리가 들린다

 

 

 

 

 

사막의 우물가에서 다시 베두인(Bedouin) 캠프로 돌아와

어두워진 모레바닥에 융단이 깔리고 방석이 놓여진 곳에 몰려 앉아 있으니

어두침침하여 무슨 차인지 모르겠는 차를 베두 원주민이 들고와 놓고 간다

아마도 홍차로 보인다

차를 마시며 밤하늘의 별을 보는데

쏟아지는 별들이 내 핸드폰 카메라에는 찍히질 않아 포기하고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 일행 중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여 떼창으로 번진다

"조개 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고~~~~~"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등의 몇 곡을

모닥불은 없지만 어두운 밤하늘에 별 빛이 쏟아는 사막에서 둘러 모여 앉아

떼 창으로 노래를 부르는 낭만을 즐김은

또 하나의 추억으로 간작하게 되었다

 

 

 

 

 

후르가다 힐튼 호텔(Hurghada Hilton Hotel)에서 새벽에 일어나 베란다로 나오니

수영장에 불빛이 푸르게 멋짐을 바랑하듯이 보인다

어제 사막에서 돌아와 늦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바로 잠들어 일찍 일어난 것이다

 

 

 

 

 

후르가다 힐튼 호텔 & 리조트(Hurghada Hilton Hotel & Reasorts)는

1994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홍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숙소도 있으며

나이트 클럽, 야외 수영장, 테니스장,

구내에서 스노클링을 할 수 있는 시설들이 구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레스토랑에 입맛에 맞는 다양한 음식들이 많이 구비되어 있었고

우아하게 먹을 수 있어 기분이 좋았었다

 

 

 

 

 

후르가다(Hurghada)에서 일정을 마지막으로

이집트(Egypt)에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카이로 국제공항이 있는 카이로(Cairo)를 향하여 출발한다

 

 

 

 

 

후르가다(Hurghada)에서 카이로(Cairo)까지

거리는 약 470Km로서

소요되는 시간은 약 6시간 정도 된다고 한다

 

 

 

 

 

카이로(Cairo)로 이동하면서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이집트 왕들의 이야기와 신화에 대하여 더 알아보려고 한다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과 성경에 나오는 모세(Mosses)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려한다

하트셉수트(Hatshepsut:BC1508~BC1458) 여왕은

고대 이집트 제18왕조(BC1550~BC1295) 5대 파라오(BC1473~BC1458재위)로서

3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1세(Thutmose1: BC1504~BC1492재위)와

2대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Amemhotep1:BC1525~BC1504재위)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무남독녀 외동딸로서

성경책 출애굽기 2장 5절에 나오는 바로의 딸(Pharaoh's daughter)이라고 한다

 

 

 

 

 

성경의 모세 5경 중의 하나인 출애굽기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이후부터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죽기 전까지의 기간인

BC1446~BC1406년경에 기록였다고 하며

모세의 성장과정에서 보면

애굽의 파라오가 된 투트모세 3세(Thutmose3:BC1479~BC1425 재위)와 함께

왕자로서 궁에서 함께 성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세(Moses)는

애굽 왕 투트모세 1세(Thutmose1:BC1539~BC1514재위) 때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며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늘어나 애굽인들에게 위협이 되어질까 두려워

애굽 왕은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출애굽기 1:16)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출애굽기 1:22) 하여

히브리 족속의 레위 여자가 임신 출산하여 3개월간을 숨기고 키웠으나

더 이상 숨기고 키울 수가 없어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숲에 놓아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시녀들을 데리고 나왔다가 아기가 울고 있는 상자를 발견하였는데

히브리 사람의 아기 임을 알고 불쌍히 여기고 있을 때에

몰래 지켜보던 아기의 누이가 다가가

바로의 딸에게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아기에게 젖 먹일 유모를 소개하여 주겠다"고 하여

그 아기의 어머니를 유모로 소개시킨다 (출애굽기 2:8)

바로의 딸이 유모에게 이르되 "삯을 주리니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이라"(출애굽기 2:9)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어 그의 이름을 '모세(Moses)'라 하였는데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뜻이라 한다 (출애굽기 2:10)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의  딸은

당시의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시대의

제3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1세(Thutmose1: BC1504~BC1492재위)와

제2대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1세(Amenhotep 1 : BC1525~BC1504재위)의 딸 사이에서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난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BC1479~BC1458재위)의 공주 시절로 추정하고 있다

모세(Moses)가 파라오의 궁전에서 살 수 있었던 것도

대단한 권력을 가진 하트셉수트(Hatshepsut)의 양자였기 때문이라 한다

하트셉수트(Hatshepsut)는

그녀의 아버지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Thutmose 1)가 사망하자

그녀와 배다른 이복남매인

제4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2세(Thutmose 2: BC1492~BC1479재위)와 결혼하였는데

그녀와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남편 투트모세 2세가 사망하자

그녀의 딸을

남편 투트모세 2세와 궁녀 사이에 낳은 아들인

투트모세 3세(Thutmose 3)와 결혼시키고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시대 제6대 파라오 투트모세 3세(Thutmose 3: BC1479~BC1425재위)와 함께

고대 이집트 사상 여성 최초로

제5대 파라오인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BC1479~BC1458재위)으로 즉위하였다고 한다

 

 

 

 

 

 

이후 함께 즉위한 투트모세 3세(Thutmose 3)는 명목상 왕이었을 뿐

모든 실권은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이 행사하였기 때문에

모세(Moses)를 궁에서 키울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BC1479~BC1458재위)은

남장을 하고 수염을 만들어 붙이고 강력한 여성 군주로서 이집트를 지배하였다고 한다

강력한 여성 군주였다는 증거는

현재 이집트에서 가장 큰 사원 중 하나인

룩소르(Luxor)에 있는 '하트셉수트(Hatshepsut) 장제전(葬祭奠)'이

지금까지 웅장하게 보전되고 있는 것이다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이 사망하고 난 후에는

그녀의 오랜 섭정에 앙심을 품은 투트모세 3세(Thutmose 3: BC1479~BC1425재위)가

그녀가 세운 기념물들과 무덤을 파괴하며 분풀이하여 

그녀의 시신인 미이라도 영원히 사라진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하트셉수트 여왕의 양자로서 궁에서 함께 자란 모세(Moses)도

그 시기에 투트모세 3세(Thutmose 3)의 핍박을 받으며 출애굽한 것으로 보고 있다

 

 

 

 

 

풍력 발전기가

홍해(紅海) 바다가 가까운 사막지대에

버스로 1시간 가까이 달려가고 있는데도 끊임없이 보인다

굉장한 풍력 발전 단지이다

 

 

 

 

 

홍해(紅海) 바다에 유조선이 지나가고 있고

그 뒤로는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가 눈에 들어 온다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는

구약 성서에서 '모세(Moses)' 일행이 출애굽하여

추격해 오는 애굽 왕과 군사들을 피해 홍해(Red Sea) 바다의 갈라짐의 기적으로

시나이 반도로 건너가 광야에서 생활과

시내산(Mt. Sinai :2285m)에서 십계명과 언약을 받는 구약성서의 중요한 무대인 곳이다

 

 

 

 

 

라스 가렙(Ras Ghareb)이라는 도시 부근을 지나치고 있는데

그 뒤로 홍해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홍해 바다 건너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의 산들이 멀리 눈에 들어 온다

 

 

 

 

 

후르가다(Hurghada)에서 출발한지 약 2시간 45분 정도되어

카페테리아 알-아지제야(Cafeteria Al-Azizeja)라는 휴게소에 도착하여 

버스는 잠시 정차한다

 

 

 

 

 

휴게소에서 보는 홍해(Red Sea) 바다와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이다

홍해(紅海: Red Sea)는 붉은 바다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유래는

바다와 접해있는 시나이 반도의 산들과 사막에 있는 적색 보크사이트 때문에

태양이 뜰 때면

사막 및 산들 주변이 붉게 변하여 장관을 이루는데

그 모습이 바다에까지 붉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붉게 보여

홍해(紅海)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10분 정도 휴게소에서 머물다

다시 버스에 올라 카이로(Cairo)를 향해 출발한다

 

 

 

 

 

휴게소에서 출발한지 약 40분 정도 경과하니

자아파라나(Zaafarana)로 들어서는 톨 게이트(Toll Gate)에서 서행한다

 

 

 

 

 

카이로(Cairo)를 향하여 자아파라나(Zaafarana)를 지나치자

사막에

다시 풍력 발전 단지가 끝없이 펼쳐진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자아파라나(Zaafarana)를 지나 20분 정도 달려가고 있는데

사막지대에서 볼 수 없는

푸른 잔디로 가꾸어진 LA VISTA3라는 리조트(Resort)가 보인다

이 지역은 캔쿤 비치(Can Cun Beach Resort), 로망스 비치 리조트(Romance Beach Resort),

라 시레나 리조트(La Sirena Resort) 등의 리조트들이 모여 있는

리조트(Resorts) 단지를 지나치고 있었다

 

 

 

 

 

리조트(Resort)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인지

공사하다가 중단한 것인지

허름하게 보이는 리조트 단지도 여기저기 눈에 들어 온다

 

 

 

 

 

홍해(Red Sea) 바다가 보이는

사막 산 중턱으로도 개발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포르토 소크나(Porto Sokhna) 지역에

홍해(Red Sea) 바다 해변을 마주하고 있는

'호텔 포르토 소크나 비치 리조트(Hotel Porto Sokhna Beach Resort)'이다

보기에는 멋있어 보이는데

인터넷 검색에서 서비스에 대한 질은 그리 좋은 것 같지 않은 글이 많이 보인다

 

 

 

 

 

포르토 소크나(Porto Sokhna) 지역을 거의 벗어나는 부근에

사막 산으로 올라가는 리프트 시설이 보인다

아직 공사 중으로 보인다

 

 

 

 

 

가라라 리조트 아인 소크나(Galalah Resort -Ain Sokhna)가 있는

교차로 부근을 지나치며 보는 배경이다

 

 

 

 

 

홍해 해변에 있던 카페테리아 알- 아지제야(Cafeteria Al-Azizeja) 휴게소에서 출발한지

2시간 30분 정도되어 카이로(Cairo)에 근접한

'와타네야 시르크레 케이(Wataneya Circle K)'라는 주유소가 있는 휴게소에 정차한다

여기 주유소 휴게소는 휴게시설이 미흡하여 볼일만 보고

바로 버스에 올라 출발한다

 

 

 

 

 

휴게소에소 출발한지 약 30분 정도되어

카이로(Cairo) 시내로 진입하는 톨게이트(Toll Gate)에 도착한다

 

 

 

 

 

톨게이트(Toll Gate)를 통과하는데

각 진출입로에 스핑크스(Sphinx)를 세워 놓았다 

 

 

 

 

 

카이로(Cairo) 시내 외곽에서 중심가로 향한다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곳은

카이로 시내 서쪽의 나일강(Nile River) 건너 가자(Gaza)지구에 있다고 한다

 

 

 

 

 

다시 고대 이집트(Egypt)의 파라오 중의 이름이 알려진

람세스 2세(Rameses2: 재위 BC1279년~BC1213년)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자

람세스 2세는

고대 이집트 제19 왕조시대(BC1295~BC1186년)의 제3대 파라오(Pharaoh)로서 

고대 이집트 시대에서 가장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파라오로 전해지는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20 왕조시대(BC1186~BC1069년)에는

제1대 왕 세트나크테(Sethnakhte: BC1186~BC1184재위) 파라오만 제외하고

람세스(Rameses)로 불리우기로를 바라는 파라오(Pharaoh)들로 인해 

제2대 왕인 람세스 3세부터 제20왕조 마지막 왕인 람세스 11세까지

람세스(Rameses)로 불리는 왕조시대가 있었다  

 

 

 

 

 

람세스 2세(Rameses 2: BC1279~BC1213재위)는

고대 이집트 역사상 2번째로 오랫동안 이집트를 통치한 파라오이며

아부심벨 대신전(Great Temple of Abu Simbel)과 룩소르의 카르나크(Karnak)에 있는 신전과

룩소르(Luxor) 신전 등의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들을 지은 인물로

고대 이집트의 제19대 왕조시대의 황금기를 가져온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파라오라고 한다 

 

 

 

 

 

'람세스 2세(Rameses 2: BC1279~BC1213재위)'의 업적으로는

당시 아버지인 '세티 1세(Seti 1: BC1294~BC1279재위)'가 원정으로

이집트(Egypt)는 다시 북아프리카-소아시아 일대에서 어느정도 회복하였으나

'하트셉수트 여왕(Hatshepsut: BC1479~BC1464재위)'과

'투트모세 3세(Thutmoses 3: BC1479~BC1425재위)의

황금기와 비교하면 통제력이 약화되어 많은 문제점이 있던 시기에 왕권을 이어 받았다고 한다

북쪽에서는 히타이트(Hittite)가 세력을 확장하며 이집트(Egypt)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해상에서는 '바다 민족'이라고 불리는 해적들이 지중해 동부부터 나일강(Nile River) 하류까지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2세는 재위 2년만에 '바다 민족'을 제압하며 토벌하였는데

바다민족들이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습성을 파악하여 단 한차례 공격으로 소탕하였다고 한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북벌 준비에 착수하여

재위 4년에 비블로스(Byblos: 현재 레바론 베이루트 북쪽 30Km지점)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카데시 전투(Battle of Kadesh: BC1274)에서

히타이트(Hittite)가 카데시를 포기하고 철수했다는 거짓 정보에 성급하게 진격하였다가

전차병 매복에 기습 당하여 이집트 2개 사단이 궤멸 당하며

람세스 2세도 구사일생으로 피하여 이집트로 돌아와야 하였다고 하며

이후에도 2차례 원정을 더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집트 신전에는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를 물리치고 평정하였다는

조각 그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후 재위 21년되는 해에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평화협정을 맺는데

열세 속에서 히타이트 공주와 결혼하고 소아시아에서 영향력 낮아졌지만

히타이트와 대등한 관계에서 '카데시 조약'이라는 평화 조약의 비문을 새겼다

이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평화조약으로서

이 조약문은 현재 국제연합 본부에 복제본이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후르가다(Hurghada)를 출발한지

470Km 거리를 6시간 정도 달려와 카이로(Cairo) 서부 나일강 건너에 있는 

가자(Gaza) 지구에 도착하여 

이집트에서 마지막 점심식사부터 하러 간다

 

 

 

 

 

점심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이집트를 떠나가기 전 기념품 샵인 파피루스(Papyrus) 기념품 샵으로 향하는데

쿠푸왕(Khufu) 피라미드와 카프라왕(Khafra) 피라미드가

이집트를 떠나는 우리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라도 하듯이 홀연히 나타난다  

 

 

 

 

 

파피루스(Papyrus) 기념품 샵이다

 

 

이곳에서 이집트를 상징하는 그림 위에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처럼

내 이름을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로 새겨

이집트 여행 기념으로 챙긴다

 

 

 

 

 

파피루스 기념품 샵을 나와

이제 우리의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카이로 국제공항으로 향한다

 

 

 

 

 

카이로 국제 공항(Cairo International Airport)로 향하던 중

웅장하게 성벽으로 둘러싸인

 '알-나세르 모하메드 이븐 칼라운 모스크(Al-Nasser Mohammed Ibn Kalawoun Mosque)'

보인다

1318년 지어진 중세적인 성벽의 이슬람 요새로서

카이로 성채라고 한다고 한다

 

 

 

 

 

또 무명용사 기념탑(Unknown Soldier Memorial)이 보인다

1973년 중동전쟁 때 수에즈 운하를 건넌 승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를 기리는 기념탑이라고 한다 

 

 

 

 

 

카이로의 '무명용사 기념탑' 앞에 있는 사열대이다

1981년 10월 6일 '수에즈 운하 도하 8주년 기념'의 승전 기념 행사를 위해

특별히 설치한 사열대라고 한다

이날 이 사열대에서 사다트(Muhammad Anwar Satat) 대통령이

군대 사열을 받고 있다가

행진 대열에서 움직이던 군트럭 한대가 멈추어 서며 군 장교가 내려

사열대로 다가오며 소총을 난사하고

또 다른 3명이 소총과 수류탄을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하여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된 장소라고 한다

범인들은 서방에 대한 게릴라 투쟁 활동을 하는 '이슬람 지하드'의 회원들로

이스라엘과 타협한 사다트(Sadat)를

'전체 무슬림과 아랍 민족의 배신자'라는 이유로 암살하였다고 밝혔다고 한다

 

 

 

 

 

카이로 국제공항(Cair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여

출국 여권심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오른다

 

 

 

 

 

이집트 여행 9일 일정으로 

우리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면적의 4.5배가 넘는 이집트 국토를

이집트 북쪽 땅끝 지중해에 있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부터

여행을 하며

이집트 최남단 수단(Sudan) 국경이 가까운 아부심벨(Abu Simbel)까지 갔다가

홍해 해변에 있는 후루가다(Hrughada)로 돌아서

카이로(Cairo)로 돌아오는데

버스, 기차, 나일강 크루즈, 마차, 펠루카, 열기구, 반잠수함, 지프 등

많은 것을 타고 움직였던 바쁜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하여 인천공항을 향해 비행기는 이륙을 시작한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전세기인

인천공항과 카이로 공항까지 운항하는 직항기로서

비행거리 8441Km를

인천공항에서 카이로(Cairo)로 올 때는 12시간 15분 정도 소요되었지만은

카이로(Cairo)에서 인천공항으로 돌아갈 때는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약 10시간 정도로 시간이 단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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