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동유럽 여행 8. 오스트리아 (잘즈부르크, 짤즈캄머굿, 할슈타트, 비엔나, 멜크수도원)

천황봉 2013. 11. 18. 16:46

이번 동유럽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인

오스트리아로 왔다.

이 곳에서는 3일간의 일정으로

오늘 첫 일정은 잘즈부르크에서부터 시작하여 동부쪽으로 가며

오스트리아 여행을 비엔나에서 마칠 예정이다

 

슬로베니아 블레드에서 출발하여

오스트리아 국경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지나쳐

잘즈부르크(Salzbrug)를 향해 오스트리아를 달리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국토 3분의 2가

알프스 산지로 이루워진 나라라 그런지

보이는 산세가 험해 보인다. 

 

오스트리아는 유럽 중심에 자리한 나라로서

스위스, 독일,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리히텐슈타인 8개국과 국경을 마주하여

유럽의 동서남북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나라이다.  

 

인구는 약 830만명 정도이며

국토의 면적은 우리 남한 면적보다 약간 작은 8만3854㎢로

동서로 540Km를 가늘고 길게 뻗어있는 국토이다 

 

민족은 게르만계가 90%, 나머지는 동구계와 유대계이며

언어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 74%, 프로테스탄트 5%,

기타 이슬람, 그리스정교, 유대교를 믿고 있다.

 

국토 3분의2가 알프스 산지로서

서쪽지방의 산지는 해발 2500~3700m 높이의 산지를 이루고

동쪽지방의 산지는 해발 1800~2500m의 산맥으로 형성 되어있다

 

산악지형은 기복이 심한 특유한 500~800m 깊은 계곡을 형성하여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는 나라이다 

 

알프스에서 발원한 오스트리아의 대부분의 강들은

독일에서 발원한 도나우강으로 흘러서

아름다운 바하우계곡과

동쪽 헝가리와 여러나라를 거처 흑해로 흘러간다.

 

기후는

평야지대와 산악지대의 기후가 크게 다르다

또한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심하여

여름에도 여행하는데는 춘추복을 준비하는 것이 좋으며

겨울철이 우기여서 10~12월에 많은 비와 눈이 내린다

 

정치는 9개 자치주로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으로

각각의 주가 주의회에 의해 독자적으로 영위되지만

정치적 결정은 중앙의 연방 정부와 의회에 위임되어

중앙 집권제 성격이 짙은 나라이며

 

연방의회는 국민의회와 연방 참의원의 이원제로 구성되어 있고

국가원수는 국민투표로 연방 대통령을 선출한다

 

역사는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변의 많은 열강들 사이에 속국이나 작은 독립국으로 명맥을 이어가다

10세기말 바벤베르크 왕가가 집권하고

13세기에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유럽사에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면서

절대권력의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중부유럽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을 지배하는 국가가 되어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결성하여

동부유럽 및 지금의 러시아 일부 지역까지 포함한

광할한 지역을 지배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면서

650여년을 이어오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멸망하며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신생독립 공화국이 생기며

국토는 1/4로 줄어 들며 공화국이 수립되는데 

 

1938년 나치 독일에 점령되어 협조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해

미, 영, 불, 소 4개국에 분할 점령되어 지배를 받다가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주권을 회복되어 

 

지금은 경제적으로 유럽에서도 부강한 나라로

유럽연합(EU)에 가입되어 있는국가이다

 

우리의 차는 슬로베니아 국경에서 켄르텐주를 지나 열심히 달려

잘츠부르크주의 주도인 독일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잘츠부르크(Salzburg)에 도착한다

'잘츠부르크'는 독일어로 '소금 성'이라는 뜻으로

잘츠부르크는 소금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던 도시라 한다

 

성 안드레 교회 앞에서 버스를 내려

 차도를 건너 담장의 조그만 문으로 들어서니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유명한 미라벨 정원이 펼쳐진다.

'미라벨 정원(Mirabell Garten)'은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뜻으로

이 정원에는 여러가지 형상으로 꽃밭을 만들어

많은 관광객들이 꽃밭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미라벨 궁전은

17세기 초에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그의 애인 잘로메 알트를 위해 지은 궁으로 알테나우 궁이라 하였다. 

잘로메 알트는 상인의 딸로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며

그녀와 사이에서 15명의 자식을 두었으며

성직자로서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디트리히 대주교가 실각할 때까지 

잘로메 알트는 이 궁에서 살았으며

 

이후 대주교들의 별궁으로 사용되다가

18세기초 힐데브란트라는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궁전으로 개축되면서

'미라벨 궁전'이라고 이름을 개칭되었다고 한다. 

정원은 오스트리아 바로크의 명장 피셔 폰 에를라흐에 의해

1900년에 완성 되었다고 한다.

 

미라벨 궁전 옆에 이 계단은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등 5개 부문을 휩쓴

1965년작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에서

마리아 수녀가 아이들과 도레미송을 부르며 오르던 계단이며

 

마리아와 7명의 아이들이

정원 이곳 저곳을 노래 부르며 뛰어 다니던

영화에서 나오는 장면을 생각하며

그 장소를 카메라 담아 보았다 

 

그런데 아이러니(irony)하게

'사운드 오브 뮤직'은 오스트리아에서 별로 관객을 끌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잘즈부르크는 '모차르트 도시'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 도시'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엄청난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미라벨 궁전 앞에는 영화에서 나오는 장소를 4시간 정도

버스로 돌아보는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를  

여러 여행사가 운영하고 있다.

 

미라벨 정원에서 구시가지로 가기 위한

잘자흐 강의 마카르트 다리가 있는 쪽으로 나가는 문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상들이

미라벨 정원 양쪽에서 부터 이 정문까지 놓여 있어

정원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미라벨 정원에서 바라다 본

저 위쪽의 호엔잘츠부르크(Hohensalzburg) 성과

아래쪽 돔의 호화로운 대주교 성관인 레지덴츠(Residenz)이다

 '호엔잘츠부르크(Hohensalzburg) 성'은

잘자흐 강에서 120m 높이의 언덕에 위치한 성으로

1077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81년에 완공한

대주교가 사용하던 성으로 황금의 방인 접견실이 있고

알 수 없는 고문 기구와 무기를 전시해 놓은 방도 있다고 하는데

당시에 대주교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잘츠부르크는 이 잘차흐 강을 경계로

 호엔잘츠부르크 성과 레지덴츠가 있는 저 건너편 구시가와

미라벨 정원과 성 안드레 교회가 있는 쪽의 신시가로 나누는데

구시가에 오늘 무슨 행사가 있는지

강변에는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고

전통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여성들이 종종 눈에 들어 온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등을 인형극으로 공연하는

마리오네트 극장을 지나자 잘차흐 강의 마카르트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의 약해 보이는 다리 난간으로 철망을 쳐 놓았는데 

철망에는 연인들이 잠금쇠 걸어 사랑을 맹세한 흔적들이 있어

잘차흐 강의 운치를 더 느끼게 하고 있었다

 

구시가 쪽으로 마카르트 다리를 건너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면

좁고 긴 거리에 4~6층 건물이 줄지어 있고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

게트라이데가세(Getreidegasse)라는 거리가 나오는데

그 한가운데 '모차르트 생가'가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1월27일 이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의

바이올린, 건반, 악보, 초상화, 편지 등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

먹는데에서도 동그란 모양의 쵸콜릿을

모차르트 얼굴이 그려진 금박지에 싸서 파는 가게가 많이 있는데

이 것의 명칭은 모차르트쿠겔른(Mozartkugeln)이라는 쵸콜릿이다.

이 쵸콜릿은 아몬드와 달걀, 설탕을 이겨 만든 과자에 막대를 꽂아

누가와 쵸콜릿, 헤이즐넛을 표면에 묻혀 말린 후 막대를 빼고

모차르트가 그려진 금박지에 포장한 것으로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잘츠부르크의 명물이다

우리 돈으로 1개에 약 1,800원 정도 한다고 한다.

 

게트라이데가세에서 2~3분 정도 걸으며

레지덴츠(Residenz) 광장과 대주교 성관이 보인다.

대주교 성관인 레지덴츠는

16세기 잘츠부르크 대주교로 임명된 볼프 디트리히가

잘츠부르크를 '북쪽의 로마' 만들려고 건설하기 시작하여

18세기 팔리스로드론 대주교가 완성시킨 건축물로

성직자인 대주교의 권력이 대단히 막강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황제의 방(Kaisersaal), 기사의 방(Rittersaal), 옥좌의 방(Thronsaal)

흰색 방(Weisser Saal) 등을 관람할 수 있는데

우리는 시간이 너무 늦어 아쉽게 입장을 못하고

사람이 붐비는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레지덴츠 대주교 성관 앞에 있는 모차르트 광장이다

어떤 행사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걷던 중 알프스풍 전통복장을 입은 여자들도 많이 보였는데

이곳에서는 많은 사람들 포장마차에서 즐기고들 있다.

포장마차 체질인 나 역시 한자리를 차지하고 같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에서는 이런 분위기도 있어야 되는데...  

 

모차르트 광장의 중앙에는 모차르트 동상이 서 있다.

모차르트 동상은 1842년에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졌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미라벨 정원 앞에 있는

성 안드레 교회 쪽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모차르트 생가에서 모여

이동하기로 하였는데 2명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핸드폰 연락 결과 잘차흐 강에는 여러개의 다리가 있는데

우리가 건너고자 하는 다리가 아니라

모차르트 광장 옆에 있는 모차르트 다리에 있다고 한다. 

 

잘차흐강 마카르트 다리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대기하던 중

건너편에 알프스풍 전통복장을 한 여자들이 서 있다.

지나가며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을 찍으려 해도

자꾸 쳐다보기에 찍기가 좀 민망했는데

때는 이때다하고 줌으로 당겨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성 안드레 교회 옆에서 저녁식사를 위하여 이동을 한다

현지식 만 먹다가 중국식 식단이라 한다. 

 

어젯밤 식사를 마친 후 잘츠부르크 시내를 벗어나

캄캄한 도로를 달리다 소로 길로 접어들어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숙소이다 

 

잠에서 깨자 창밖을 보니 정원수 뒤로

높은 산들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그런데 사진에는 그렇게 안 보인다... 실제는 높은데...)

 

숙소 주변에 산책을 나오니

처음 본 아담한 기중기가 보여

무슨 공사를 하나 궁금함에 공사장으로 가본다

보이는 집 뒤로 또 집을 짓고 있었는데 일하는 인부가 몇 명이 안된다

기중기 조정하는 사람과 목공 등 총 7명이 공사하고 있어

작은 공사장에 이런 장비도 필요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츠부르크 동쪽에 펼쳐진 산악지대를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라 하는데

 '소금의 영지' 또는 '소금 황제의 창고'라는 뜻이라 한다

우리는  그 곳으로 가고 있는데

 

오늘의 일정은

장크트 길겐(Sankt Gilgen)과

여행에서 꼭 가 보아야 할 곳으로 선정된 할슈타트(Hallstatt)에 갔다가

비엔나(Vienna)로 가는 일정이다

 

잘츠카머구트(Salzkammergut) 지방은

곳곳에 2000m 정도의 산과 호수가 흩어져 있고

암염 광맥이 있어 예전엔 소금 산업으로 번성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폐광되었지만

당시의 작은 마을들은 그대로 남아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므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한다. 

 

숙소에서 1시간 정도 달려왔나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듯 하더니 호수가 보인다

주차장으로 보이듯 하는 곳에서

차들을 세우고 사진을 찍는 모습들이 보이는데

사진을 찍고 보니 각도는 조금 트러져 교회쪽은 안나왔지만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에 나오는 배경 아닌가!

비록 버스로 지나치며 급하게 셔터를 눌러댔지만...

 

우리가 탄 차는 마을로 내려가

호수가 옆에 있는 주차장에서 우리를 내려 준다

이 곳 마을의 이름은 장크트 길겐(Sankt Gilgen),

호수의 이름은 장크트 볼프강호수(Sankt Woffgangsee)이다

 

장크트 길겐에 도착하자 첫 일정으로

선착장으로가 유람선에 오른다

그런데 스피커에서 한국말 설명이 나온다

이 작은 장크트 길겐 마을의 유람선에서  우리 한국말로 설명이 나온다니

기쁘고 반가운 생각과 우쭐한 마음이 앞선다.

 

장크트 볼프강호수는 서북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 있으며

길이는 11Km, 수심은 114m로

알프스의 빙하가 녹은 호수이다 

 

 사진에 보이는 장크트 길겐은

3,500명 정도 주민이 사는 마을이지만

세계 전역에서 관광객들이 찾아 오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모차르트의 외가집이 있는 동네이며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 영상과

장크트 볼프강 호수에서 샤프베르크 산에 오르는 산악 열차..

산 정상부 초원에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에

아름다운 알프스의 영화 발자치를 따라

많은 관광객이 찾아 오는 곳이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눌러대다 보니

유람선 스피카에서 황소 추모비라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말인가? 후렴부만 들어서...???  이 저사람에게 물어 본다

대충 내용은 이런 것 같다

황소를 이끌고 길을 가던 농부가 미끄러져

호수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데

소가 호수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와

농부를 이끌고 사진에 보이는 저 섬으로 올라가

농부인 주인을 살렸다고 한다.

그래서 소의 주인인 농부가 감사함에

추모비를 세웠다는 이야기 인 것 같았다

 

사랑의 사연을 담고 있는 추모비라고 한다

이 호수는 항상 얼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호수 위에서는 결혼식을 자주하였는데

그러던 어느날 결혼식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호수가 녹아 결혼을 하던 신랑 신부와 하객들이

모두 빠져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 일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추모비라고 하는데.. 전설따라... 

 

오스트리아 국기에 대한 이야기는

1191년 제3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대공 레오폴트5세 흰 갑옷이

아콘 전투에서 피로 물들었는데

칼을 찬 부위만 흰색으로 남아았다는 설과

또 독일황제 하인리히 6세가

그에게 붉은색 흰색 붉은색 문양을 주었다는 설에서

123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이 것을 처음 도안해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학교 였으나

청소년 수련원 캠프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장크트 길겐에 도착하던 아침시각엔

 구름인지 안개인지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구름이 서서히 거치며 나타나

알프스의 위용과 자태를 자랑하는 듯

하나 둘 산 봉우리들을 보여 주는데 장관이다

 

코끼리 바위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고...

숲속에 코를 박은 코끼리??

아니 반대쪽으로 호수쪽으로 코를 박은 코끼리???

모르겠다.

 

절벽과 어울려

호반위에 아름답게만 집들과....

 

알프스 산들과 호수와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풍광은

나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나게 한다

 

장크트 길겐 마을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페르틀이 1720년 태어난 고향 집으로서

1747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청 음악가였던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결혼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모차르트의 외할아버지는 이 곳의 시장과 판사를 지내셨다고 하며

모차르트의 누나 난넬도 결혼하여 이 곳에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모차르트 어머니의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장크트 길겐(Sankt Gilgen)이라는 마을 명은

장크트(Sankt)는 영어로 하면 세인트(Saint)로서

성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길겐(Gingen)이라는 이 마을의 후원자였던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작은 동상과 분수가 있는 모차르트 광장인데

장크트 길겐 마을의 중앙 광장 같은 곳이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집들이 있는 골목길에

작은 기념품가게 및 골동품가게들이 있다.

한적하고 조용함에 평화스러움 더하여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랄까?

서서히 거닐며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교복입은 학생들이 몰려 온다. 점심시간인가 보다...

어! 그런데 학교가 어디에 있었지?

학교를 찾아 다시 골목길을 내려 가본다

 

이곳이 학교인데

건물만 있고 운동장이나 다른 시설은 없어 보인다

체육 시간은 마을에 있는 체육시설에 가서 한다고 한다  

 

장크트 길겐 마을의 모차르트 광장에서

위쪽 방향 큰 도로로 나가서 좌측으로 조금 걷다보면

츠뵐페르호른에 오르는 케이블카 탑승장이 나온다

 

이 케이블카는 1957년부터 운행한 모양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1522m의 츠뵐페르호른(Zwölferhorn)

 정상으로 갈 예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는 중에

장난갑 집을 가져다 진열한 것처럼 보이는

유럽풍의 집들이 줄지어 있어 카메라에 담아 본다.

 

산의 경사 심하여 작은 계곡의 물이

폭포되어 흘러 내린다

 

케이블카가 점점 높아지며

장크트 길겐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한 10분정도 타고 있었나

케이블카가 츠뵐페르호른의 정상 종착지에 다다른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정상으로 가기위해 밖으로 나오니

츠뵐페르호른에 대한 안내도가 있다

이 산에 오를 수 있는 등산 코스가 여러 곳이 있는데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반가운 생각이 들어 카메라에 담는다

 

케이블카 종착지에 내려

계단을 통해 능선에 올라서니

츠뵐페르호른 정상에 십자가가 보인다

 

비록 기계의 힘을 빌려 편하게 정상에 왔지만

정상에 올랐다

해외여행을 여러번하면서도

산 정상에 올라본 것은 이번이 두번째..

중국 태산과 오늘 오스트리아  츠뵐페르호른.. 

 

이 곳은 페러글라이딩도 타고  겨울에는 스키도 탈 수 있는 곳이라 한다

츠뵐페르호른 정상에서 내려가기 전

장크트 길겐과 볼프강호 바라본다

사진의 우측의 호수에서 산 정상부는 안 나왔지만 앞에서 언급한

샤프베르크 산으로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나오는 산 언덕 초원과 

산악열차를 타고 오를 수 있는 산인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츠뵐페르호른 정상에서 내려와

마을 이곳저곳을 산책을 하다 점심식사를 하러 간 곳이다

 

장크트 길겐 마을과 볼프강 호수를 뒤로하고

할슈타트로 간다

 

할슈타트와 바트 이슐(Bad Ischl)이라는 마을로 가는 삼거리이다

장크트 길겐에서 달려와 직전하여 조금만 가면  바트 이슐인데

아쉽지만 사진 좌측에서 우회전하여 앞쪽길로 틀어 할슈타트로 간다

바트 이슐(Bad ischl)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모후가

이 곳의 광염수는 불임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자주 찾은 곳이라 하며

그래서 '소금의 왕자'라 하는 3명의 왕자를 얻었다고 한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시대에는 유럽의 유명한 사교 장소로

귀족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었다고 하며  

또한 1853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모후의 조카 뻘되는 바이에른 공작의 딸 헬레나와

 맞선을 보기 위해 이 곳에 방문하였는데

헬레나와 함께 온 그녀의 동생 15살 엘리자베트에게 반하여 

 엘리자베트를 황후로 선택 곳이라 한다 

 

다음에 언젠가 오스트리아에 다시 여행을 오게 된다면

 샤프베르크 산(Schafberghorn)과 바트 이슐(Bad ischl)은

꼭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프스의 좁은 암벽의 급경사에 자리 잡은

호숫가 마을...

세계유산으로 정해진 곳 우리는 할슈타트(Hallstatt)에 도착하였다

할슈타트는 1200명 정도 사는 작은 마을이다

 

해발 800m 위 고원의 호수마을....

동화 속에서 나올

예쁜 집들을 짓고사는 마을...

'잘즈카마구트의 진주'라 불리는 할슈테터 호수...

엽서나 화보에 수시로 나오는 곳..

차에서 내려 바라보는 순간 "야~!" 소리만 나온다 

 

호수 건너 저 곳에는 기차역이 있어

잘츠부르크나 비엔나에서 기차를 타고

이 곳에 올 수 있다고 한다

 

알프스 협곡에 자리 잡은 할슈테터 호(Hallstatter See)는

주위 알프스 산들과 조화로 짙푸른색을 띠우고  

 

높은 산 아래 고요한 호수가에

평화스럽고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평온한 마음과 설레임을 주는데

이 자체가 힐링이 아닌가 한다

 

호수가를 따라 마을로 접어드는 길

그 길을 걷다가

집들과 어울리는 예쁜 담장이 있어

그 곳에도 서본다

 

기원전 약 3000년 전 부터 이 곳에 사람이 살아오며

한 때는 할슈타트 시대를 열기도 했던

오랜 역사를 가진

이 곳을 거닐며 만껏 느끼고 누려본다

 

좁은 골목사이로 보이는 교회당의 종탑은

방문자에게 안식을 주는듯 발길을 불러 모아

마음이 들뜬 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교회 앞에는 할슈타트 마을의 중앙 광장이 있다

이 광장에 있는 탑인데

주위에는 게스트하우스(Guesthouse)들이 많이 있다 

 

중앙광장에서 보니

교회로 보이는 건물이 언덕 위로 또 보인다.

이 골목 쪽에 보이는 건물들은 신 건물인 것 같다 

 

걷기도 힘든 급경사에 집들이 올라가 있다

나무로 지은 집을 이 곳에서는 '살레'라고 한다고 하는데

저 끝 위에 있는 집 뒤로 한참을 올라가면

소금광산이 나온다고 한다

 

할슈타트에서의 시간이 다 되어 간다

비엔나를 향해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시간을 거스르지 않고

몇 일이라도 이 곳에 머물다가 갔으면...

 

이젠 할슈타트에서 아쉬움을 뒤로 남겨두고

할슈타트에서 약 280Km 거리에 있는 비엔나로 가며

 

할슈타트의 소금광산에 대하여 설명을 듣는다

할슈타트의 소금광산은 무려 45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암염 광산이라 한다

 

소금광산의 발견은

 고대에 사냥꾼이 발견하였다고 하며

붉은색을 띠고 있는 암반소금이다

 

여기에서 채굴되는 소금은

기원전부터 지중해와 발트해 연안까지

진출하였다고 하며

 

소금 무역으로 인해

BC800년경에서 BC400년경 사이에는

할슈타트 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소금광산은 지금 관광지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할슈타트 광산까지는

걸어올라 갈수도 있으나 너무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광산까지 올라가는 광산열차가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젠 잘츠카머구트에서 비엔나를 향해 많이 달려 온 모양이다

알프스의 높은 산들은 보이지 않고

끝없이 펼쳐진 평원만 보인다

 

빈(Vien)이라고도 부르는 비엔나(Vienna)를 향해 

잘츠카머구트에서 동쪽으로 계속 달리고  있는 중 이다 

 

비엔나(Vienna)는 오스트리아 국토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로서

위쪽에는 체코, 동쪽은 슬로바키아, 남쪽 헝가리 국가와

가까이 근접하고 있는 도시이다

 

비엔나(Vienna)는 12세기 중엽에 바벤부르크가가 궁정을

이주해 오면서 수도가 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시대에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이 늘어서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기 전까지

유럽의 중심에 서는 영광을 누린 도시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많은 음악가와 예술가가

활동했던 도시이다

 

땅거미가 몰려오는 시간에

우리는 비엔나에 도착한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그 나라 수도에 진입하다보면 차들로 정체가 되는 모습을 본다 

 

비엔나에 도착하자마자  

비엔나 분위기를 느끼려면 반드시 가보라는

호리이게(Heurige)를 즐길 수 있는 식당에서

비엔나의 첫 일정을 시작한다

 

식당에 들어서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클린턴 대통령을 위시하여

여기를 다녀간 많은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호리이게는 "올해에 만든 포도주' 만든 포도주를 의미하는데

역사는 18세기에 빈(Wien) 북쪽의 넓은 평원에는

예부터 품질 좋은 포도가 재배되어 맛있는 포도주 생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이 여기에서 생산된 포도주를

모두 매입가므로 농민들은 마실 수 없어 불만이 높아져 갔다

그래서 농민들은 요제프 2세 황제에게 포도주판매권을 달라고 청원을 했는데

황제는 이 청원을 받아들여

자기 밭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팔거나 마시도록 허가한 것이

호리이게 시초가 되었다고 하며

새로 만든 포도주는 해마다 11월11일 성마르틴의 날에 출시한다고 한다

 

식사 중에는 바이올린, 아코디언, 기타를 든 사람들이

자석을 돌아다니며 신청곡을 받고

슈라멜(Schrammel)이라는 경쾌한 음악을 연주를 한다.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이 여러 테이블로 나눠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돌고

우리 여행 일행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왔는데

노래 신청하는 테이블이 없다

손짓으로 우리 테이블 석으로 오라하여 '아리랑' '그대 그리고나'

'오솔레미오' 외 1곡을 다같이 합창으로 불러

여행의 흥을 돋아 주었는데 흥에 취해 인증샷이 없다.

옆 테이블의 외국인 석으로 가 연주하는 그들을 다시 부르기도 그렇고... 

 

여행 일정으로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오늘의 일정은 비엔나에서 오전 일정과

오후에는 멜크로 이동하여 수도원을 본 후

비엔나로 돌아와 비엔나 커피(?:비엔나에서 커피)를 즐기고

내일 아침에는 비엔나 공항에서 도하를 경유하여 집으로 갈 예정이다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

레오폴트1세 황제가 현재의 쇤부른 궁전 뒤의 사냥터에 있던 궁전이

오스만투르크와 전쟁 중 파괴되어

그의 아들 요제프1세를 위해 1696년 설계를 에를라흐에게 맡겨

175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까지 이어진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다 

 

레오폴트1세 황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능가하는

궁전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전쟁을 치르며 자금이 없어 실현하지 못하고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니콜라스 파카시에게 설계안을 바꾸도록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궁전의 앞 정원은 양쪽에 분수만 있을뿐 학교 운동장처럼

무언가 비어있는 휀한 느낌이 드러었는데

뒤에 있는 정원으로 오니 화려한 느낌이 든다

넵튠 분수(Neptunbrunnen)와 글로리에테(Glorlette)...

저 위의 건축물 글로리에테 뒤가 사냥터라고 한다 

 

 

정원수를 가꾸어 놓은 형상이 특색이 있다 

나무의 양쪽을 단면으로 만들고

아취 터널식으로 균일하게 만든 모형이

그 아래를 걸어 보고픈 마음이 일게한다

 

쇤브룬(Schönbrunn)은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으로

17세기초 마티아스 황제가 이 곳에 있던 사냥터에서

아름다운 샘을 발견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정원수 아름다워 그 곳에서 왔다 갔다하며

카메라를 눌러대던 중에

정원수 사이에서 탑이 보인다

'원형의 수반'이라 하며 그 뒤쪽의 정원수 안에는

이 궁전 이름의 근원이되는 아름다운 샘이 있다

 

쇤브룬 궁전 뒤쪽 정원에서 바라 본 전경이다

중심에서 좌우로 대칭으로 길이는 180m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좋아하는 황금색으로 칠하고

내부는 로코코 양식으로 다듬고 연회장을 여러개 만들어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내부에서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카메라를 사용할 수 없었다

 

쇤브룬 궁전은 합스부르크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 1세가

1918년11월11일 이 궁전에서 퇴위식을 가졌는데

그 이후로 궁전으로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쇤브룬 궁전을 관광을 마치고 슈테판 대성당으로 가며 보게 된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의 하나로 유명한

파리 오페라 하우스, 밀라노 오페라와 함께하는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Wien Staatoper)이다

1869년 완공되어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로 막을 올렸다고 한다

 

1853년2월18일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한다

황제의 상의 금속단추에 흉기가 걸려 미수에 그치게 되었는데

황제의 동생인 막시리안 대공이 황제의 무사함에 감사하며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보디프 성당(Votivkiche)를 지어 헌납하게 한다

1879년에 완공되었지만

이미 멕시코 황제가 되어 떠났던 막시리안은

혁명으로 처형된 후라고 한다 

 

차에서 내려 골목을 통해 슈테판 대성당 앞에 오니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고

마부들은 정복을 입고 손님들을 기다고 있었다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

1147년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85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시련과 수난을 빈(Wien)의 역사와 함께해 온

빈의 얼굴이며 자랑이라 한다

처음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교회가 세워진 것이 시초이며

14세기에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4세에 의해

고딕 양식의 대교회로 개축되었다

첨탑의 높이는 137m의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슈테판 대성당의 수난은

17세기 터키군의 침략이었으며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폭격으로 크게 무너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지붕까지 전부 소실되었는데

전쟁 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재를 모아

194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검게 보이는 부분이 많이 있다고 한다  

 

슈테판 대성당의 모자이크 지붕은

빈의 상징이라고 한다

 

슈테판 광장에서 똑바로 남쪽으로 국립 오페라 하우스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보행자 전용 도로인 케른트너 거리(Kἂrntner Strasse)이다

빈(Wien)에서 그라벤(Graben) 거리와 함께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사진에서 우측으로 골목길로 접어들면

그라벤(Graben) 거리로서 케른트너 거리와 함께

빈에서 가장 번잡한 거리이다

그라벤 거리의 중앙에는 약 1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페스트 전염병이 끝난 것을 기념하여

1693년 레오폴트 1세가 세운

페스트 기념주(Pestsaule)인 삼위일체 상이 있는데

여행시 그 곳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 입구에서 쳐다만 보고 지나쳐

카메라에 담지를 못하였다  

 

콜마르크트(Kohlmarkt) 거리이다

유럽의 명품이란 명품은 모두 만나볼 수 있는고급 쇼핑가로서

현재의 이름은 14세기 초엽에

여기서 목탄시장이 열렸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콜마르크 거리 끝에 있는 페터 성당(Peterskirche)

11세기에 지어진 빈(Wien)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건물로

로드마이어가 그린 천장의 프레스코화 '마리아 승천'이 유명하다

 

슈테판 대성당에서 그라벤 거리의 반대쪽 방향으로 골목길을 걷다가

우측으로 돌아 걷다가 다시 좌측으로 조금 걷다보니

한.일식 전문식당이 나온다

이 곳에서 점심식사를하고

벨베데레 궁전에 갔다가 멜크에 갔다가 올 예정이다

 

식사를 마치고 골목길을 빠져나와

다시 케른트너 거리로 나와 국립오페라 하우스 방향으로 걷는다

이 거리는 고급 선물용품점, 부티크, 카페, 레스토랑 등이

늘어서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장소이다

거리 좌측에 보이는 아스토리아(Astoria) 호텔

19세기 말에 세워 졌으며 로비는 유겐트슈틸 양식으로 꾸며다고 하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종종 찾는 장소라고 한다 

 

케른트너 거리를 걸어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 뒤쪽의

알베르티나 광장(Albertinaplatz)에 도착하였다

중앙 좌측의 하얀 건물은 19세기 말 문을 연 란트만(Landtmann) 카페인데

현지 사람들이 주로 찾는 카페로 가벼운 점심식사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곳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다

 

아랍풍 건물위에 황금빛 공을 올려 놓은듯한 제체시온 앞을

 버스는 지나쳐 가며 제체시온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1897년 역사주의의 낡은 예술과 인습을 따르는 예술가에 반기를 들은

건축가 올브리히와 화가 클림트는 새로운 예술목적으로

'제체시온'이라는 분리파를 결성하였는데

'역사주의'로부터 분리하려는 것으로 

1898년 올브리히가 자신들의 활동 거점으로 이 건물을 세웠다고 한다. 

현관 위에는 금색 글씨로

'시대에는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예술의 자유를'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카를 교회(Karlskirche)

18세기 건축가 피셔 폰 에를라흐가 바로크 양식으로 세운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라고 한다  

 

벨베데레 궁전은 빈 국립 오페라하우스에 출발하여

우측 창밖에 보이는 카를 교회를 지나 바로 우회전하여

낮은 고개길을 오르다 보면

좌측에 담장과 담장안으로 나무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곳 안에 있다

 

트램 뒤를 서서히 따라 오르다

고개길 위에 거의 다 도착하기 전에 버스는 정차한다

주차할 곳이 없으니 빨리 내리라고 한다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너 궁전의 쪽문이랄까

조그만 문으로 들어가면 궁전이다

 

벨베데레 궁전(Schloss Belvedere)

상궁(Oberes Belvedere)과 하궁(Unteres Belvedere)이 있는데

밖에서 작은문을 통해 들어오니

우측에는 상궁이 있고

좌측으로는 스핑크스 조각상과 뒤로는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진다

우측의 스핑크스는 관광객들이

가슴을 만지며 사진들을 많이 찍어 손때가 많이 묻어 거무수룩하다

 

프랑스식 정원 한가운데 끝으로 보이는 건물이 하궁(Unteres Belvedere)이다

빈(Wien)의 유력자 였던 오이겐 공이

바로크 건축의 거장 힐데브란트에게 건축을 맡겨

1716년 별궁인 하궁을 세우고

완만한 언덕을 이용한 프랑스 정원을 만들고

위쪽에는 1723년에 연회장으로 사용할 상궁을 세웠다고 한다

오이겐 공은 프랑스 사보이 공의 아들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 났으나

루이14세의 사생아라는 소문과 함께 루이14세에게 미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여 군인이 되어 수 많은 전투에서 거두었으며

 정치능력도 뛰어나 빈(Wien)의 유력자가 되었다  

 

오이겐 공이 죽은 후 합스부르크가에서 이 궁을 매입하여

왕위 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된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하기 직전까지

이 곳에 거주하며 미술 수집품을 모아 보관하였다고 한다

 

하궁(Unteres Belvedere)

18세기의 회화와 조각이 전시된 바로크 미술관

위 사진의 상궁(Oberes Belvedere)

19~20세기 회화관으로서

구타프 클림트의 세밀하고 여성의 성적 매력과 신비적 특징을 강조한 

'키스''유디트' 등을,

에곤 실레의 사회에 대한 반발로 어둡고 고통스게

 성을 사실적 그린 '죽음과 소녀''가족'등을 ,

코코스카가 굶주린 야수의 표정을 사실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자기의 부인을 사자굴 앞에 세워 놓고 그린 '호랑이-사자'가

전시되고 있는데

하궁과 상궁을 합쳐 오스트리아 미술관이라 한다

하궁까지는 가지 않고 상궁(Oberes Belvedere)에 있는 미술관에 들어가 

설명을 들으며 감상하고 나왔다

미술관 내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다 

 

벨베데레 궁전에서 나와

빈(Wien)에서 80Km 정도 서쪽에 위치한

멜크 수도원(Stift Melk)으로 향한다

 

멜크(Melk)는 합스부르크 왕가 이전 시대인

1076년~1106년 이 지역을 통치한 바벤베르크 왕조의 수도 였다

이 곳에는 유럽 최대의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인

멜크 베네딕트회의 수도원이 있다

 

바벤베르크 왕가가

1106년 멜크에서 빈으로 수도를 옮기며

베네딕트 수도회에 기증한 왕궁이

2차례의 대화재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고 

1702~1726년에 개축한 것이 현재의 모습이라 한다 

 

정문 우측에 기를 든 동상은 성 레오폴드(St. Leopold)가 서 있고

좌측은 황금 지팡이를 든 성 콜로만(St. Coloman)이며

문위의 글씨는

ANNO는 서기를 말하며 M은 1000, D는 500, C는 100, 또 C 100

나머지 로마 숫자는 18로  모두 합치면 1718 이므로

서기 1718년에 지었다 의미라고 한다

 

멜크 수도원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해발 422m 산 정상부에 요새처럼 건축되어서

수도원 내부로 들어 가기 위해서는 아취형 문을 3개를 지나야 했다 

건물 꼭대기 하얀 십자가 아래 보이는 글씨는

"ABSIT GLORIARI NISI IN CRUCE"

'오직 십자가 안에 영광'이라는 뜻이다

 

20세기 최대의 문제작이라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라는 추리소설은

1600년대에 멜크 수도원에서는 14세기에 이 수도원에서 있던

독일인 수도승 아트존이 견습 수도승 때의 회상하는 수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수기를 바탕으로 썻다고 한다

'장미의 이름'의 추리소설 내용은

중세 수도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살인 사건 속에

타락한 성직자들의 잔인하고 더러운 욕망을

주인공 윌리엄과 그의 제자 아조가 파헤쳐가는 내용으로 

수도원에서 발생한 미스테리한 살인사건에서

중세의 타락한 교회의 실체와 이단 논쟁, 교황권의 대립과 마녀사냥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 추리소설이다 

 

좌측에 바울과 우측에는 베드로가 서 있다

가운데는 열쇠 문양이 있는데

하나는 천국의 열쇠이며 하는 지상의 열쇠라고 하며

이는 화해와 화합을 의미한다고 한다

 

멜크 수도원은

12세기 수도사를 위한 학교와 수도하는 장소로 시작되어

현재는 30 여명의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있으며

1000 여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와 기숙사로 운영되고 있으며

우리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도 몇 명이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멜크 수도원 중앙광장에 서 있다.

우리가 내부로 들어가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좌측에서 두번째 보이는 아치문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서 부터 안쪽으로 가며 관람하게 되며

멜크 마을이 보이는 성벽길로 나가서 돌아

9만여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서고에서 1층으로 내려가

화려고 웅장한 성당을 관람하고

다시 그 아치문으로 나오게 된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올라 가면 황제의 방이 나오는데 그 곳에는 입구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1세

부부 초상화가 먼저 보인다

 

첫번째 전시실에 들어가면 푸른색 조명으로 되어 있다

푸른색은 '명상, 우주, 근원'을 의미하며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상 옆에는 조명에 의한

"HÖRE"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 글은 영어로 Hear 인데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 480~543년)는 수도제도를 창설한 사람으로

480년경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누르시아의

부유한 로마제국의 귀족출신으로 태어나

어린시절 로마 행정관으로 필요한 교육을 받으러 로마로 유학을 갔으나

환락과 퇴폐가 만연한 로마에 실망하여 자퇴하고

귀족신분까지 버리고 수비야코 계곡 깊은 산속 동굴에 3년간 홀로 은거 중

기도의 기적으로 세간에 알려져 따르는 사람들이 찾기 시작하였다.

인근의 수도 공동체 비코바로(Vicovaro)의 원장 청탁에 마지못해 수락하고

규율이 문란하고 퇴폐에 찌든 수도생활을 개혁을 위해 엄격한 규율을 세웠다.

수도생들은 불만이 많았졌지만 모셔온 그를 다시 내쫒을 수도 없어 

식사시간에 그를 살해하려 포도주에 독을 섞어 권했는데

베네딕토는 식사 전 성호를 그었을 때 잔이 깨졌다고 한다.

살해 음모를 눈치챈 베네딕토는 그날 바로 수도원을 떠나

다시 수비야코로 돌아가 12명의 제자와 함께 작은 수도원을 설립한다.

그러나 인근의 성당 신부 플로렌시오의 시기를 받게 되자

 또 그 곳을 떠나 525년 몬테카시노로 가게 되는데

 그 곳 사람들이 믿는 아폴론 신전을 모조리 파괴하고

이교도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킨다.

530년 그 곳 산정에 베네디토 수도원의 모체가되는 수도원을 세우고

몬테카시노 수도 공동체의 규칙서인

 "베네딕토 규칙(Regula Benedicti)"를 저술하여

올바른 금욕생활과 기도, 공부, 육체 노동 등 공동체를 지도하기 시작하여

모든 수도의 법전이 되었으며

그가 세운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은 수도원의 발생지가 되었으며

 베네딕토 수도회의 총본부가 되고 있다  

 

 

첫번째 방에 전시된 것으로

위쪽 좌에서 옆으로 아래쪽 좌에서 옆으로 가며

가이드가 순서적으로 뜻을 설명하여

 

위 사진 전시된 것으로 설명을 마치는데

늦게 가고 어수선하여 설명을 듣지를 못하여 

내용을 적지 못하는데 아시는 분은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다

 

12세기에 보리수로 만든 십자가 상으로

비엔나 루퍼트 성당에 소장하던 것을

1799년에 이 곳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역대 수도원장들이 미사를 집전했던 성물들로

다양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는 듯하다

 

한올 한올 금박으로 섬세하게 수 놓아 화려하기만

장례 미사복이며

 

모자부터 신발까지 금박으로 수놓은 평상시 미사복에서 보듯

베네딕토의 수도사들로서 수행하여야 할 금욕생활에서 벗어나

중세시대의 천국으로 가는 면죄부를 판매하고

성물주의 신앙에 빠져 성인 치아, 머리카락, 손가락, 뼈, 사용하던 물건 등을

팔아 부를 쌓아 권위주의에 빠져 있던

 가톨릭의 타락과 부패했던 시대를 나타내고 있다.  

 

중세 시대에는 문맹자가 많아

그림으로서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멜크의 베네딕토회 수도원과 멜크마을 조형물인데

중세시대에 멜크 수도원은

종교개혁에 반대하며 저항하는 근거지인 요새였다고 한다. 

 

연회실 천정의 프레스코 화이다

마리아 테리지아 여제가 멜크 수도원에 3번을 방문하였는데

이 곳 연회실에서 파티를 하였다고 한다

 

천정의 프레스코화가

보는 각도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여

이동하여 촬영하였는데 정말 움직인다. 

 

멜크 수도원에서 내려다 본 멜크 마을과 멜크강이다

멜크 마을은 약 50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멜크강은 여기서 조금만 흘러 내려가면

도나우 강과 합류된다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는

9만 여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는 서고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다

원형계단 가운데 거울을 설치해 놓아

한참을 내려 가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1층으로 내려와 문을 들어서니

웅장한 애비 성당이다

성당이 너무 화려하다는 생각이 든다

온 갖 번쩍이며 섬세한 금박으로 조각되어 있다

 

성당의 천정은 천국을 의미하는 벽화들로

화려하게 채워져 있고

 

금장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멜크 수도원의 애비 성당은

중세시대의 수도원의 위용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 같다

 

여기의 파이프 오르간은

모짜르트가 방문하였을때 연주를 했었다고 한다

 

수도원을 나와 주차장이 있는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멜크 수도원 관광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며 바라 본 멜크마을 모습이다

여행의 뒷자락의 아쉬운 마음에서

뒤돌아 보는 것이랄까...

 

멜크 수도원을 이쪽에서 바라다 보는 것이

더 멋지다고 가이드가 이야기 한다.

달리는 버스에서 일어나 건너편 좌석창밖으로 보이는

수도원을 향해 셔터를 눌러 보았다. 

 

오스트리아 멜크까지 왔다가

고속도로를 타고 비엔나로 가게 되면은 아쉬움이 많이 남게 된다며

세계유산이 된 도나우강의 명승지

'바하우(Wachau) 계곡'을 보면서 비엔나로 가자고 한다

 

바하우 게곡은 도나우강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말하는

멜크(Melk)에서 크렘스(Krems)까지 약 36Km 구간으로서

포도밭과 포도주 산지의 조그만 마을들...

바위산 꼭대기에는 수도원과 고성들이 있어

보통 도나우강에서 배를 타고 관광을 많이 하는데

우리는 버스로 도나우 강변을 달리며 관광을 하고 있다 

 

다랭이 논처럼 계단식으로 포도밭이 늘어서 있는

슈피츠(Spitz) 마을이다

포도밭을 가파른 계단식으로 만든 이유가

일조량과 지열을 올리기 위한 방법이라 한다

이곳은 많은 맛좋은 포도주가 생산되는 곳이라고 한다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던 영국의 리처드왕이 이 곳을 지날 때

 이곳의 레오폴드 공이 십자군 원정 시 자신의 명예를 손상 시켰다며

리처드 왕을 옥탑방에 구금시켰다는

뒤른슈타인(Dürnstein)성이 운전석 앞쪽 위로 보이다가

우회전 하니 성이 차 위쪽에 위치하여  카메라에 담지를 못하였다

 

산위로 악슈타인(Aggstein)성이 보인다

13세기 말에 파괴되어 15세기 폰 발트가 재건하였는데

오스만 투르크 군에 다시 파괴되어

현재는 폐허가 된채로 남아 있다고 한다.

 

레오폴드 공작이 영국의 리처드왕을  

왜 뒤른슈타인성에 가두었을까? 사연은

1190년 영국 리처드 왕, 프랑스 필리프 2세,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제휴하여 제3차 십자군을 연합 편성하여 출정한다

출정길에 터키 코니아 부근에서 강을 건너던 중

프리드리히 1세가 말에서 낙마하여 강에 빠져 익사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 후 참전한 신성로마제국 독일의 영주들은 다 돌아가고

프리드리히 1세 병사들만 남게 되어

레오폴드 공작이 그 병사들의 수장을 맡게된다.

 

첫 전투인 아코성 전투에서 십자군 연합이 이슬람의 살라딘에게 승리하여

아코성에 전투한 승리의 깃발이 걸린다

영국의 리처드왕 깃발, 프랑스 필리프 2세 깃발, 

프리드리히 1세를 대신한 레오폴드 공작 깃발이 걸게 된다

그러나 리처드왕은 국왕인 자신들의 깃발과

공작인 레오폴드 깃발이 같이 걸려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깃발을 내리도록 한다

레오폴드는 자기 깃발이 내려짐을 항변하지 못한고 수치심만 간직한채

지켜 보아야만 했다

프랑스 필리프 2세는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고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하면서도 빨리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던

리처드왕은 살라드에게 강화협상을 요구한다.

내용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지를 순례할 때 안전을 보장하라는 것으로

살라딘은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여 전쟁이 끝난다.

이에 각나라에서 온 병력들을 각각 돌려보내고

왕비와 본대 병력을 배에 실어 고국에 먼저 보낸다.

마지막으로 수하들과 배편에 올라 귀국 중 풍랑에 배가 좌초되어

수하들을 거의 잃고 십자군병사 복장으로 변장하고 육로로 귀국길에 오른다.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드 공작 영지인 이 곳을 지나다

레오폴드 수하가 얼굴을 알아보고 체포되어 

1192년 레오폴드 공작은 자기에게 수치심을 준 리처드왕을

뒤른슈타인성 옥탑방에 가두어 버린다.

옥탑방 가치어 할일이 없는 매일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낸다

어느날 성밖에서 자신이 즐겨부르던 노래가 들려와

노래로 화답하였는데 자신에게 노래를 받친 음유시인 블롱덴이

리처드 왕을 찾으려 지나던 중이었다. 

 

외부세계에 알려진 것이 겁이 난 레오폴드는

리처드왕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재판에 상정하나 아무도 재판관을 맡지않는다

이에 자기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하인리히6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필리프2세는 풀어주지 말것을 부탁한다

고민하던 하인리히 6세는 영국에 거액의 몸값을 요구한다.

리처드왕의 어머니와 심복 솔즈베리 주교 휴버트, 그리고 심복들이 단결해

거액을 만들어 휴버트 주교가 하인리히 6세에게 가 풀어줄것을 요구한다

하인리히 6세는 황제인자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는 챙피해

부하가 될것을 서약하라고 한다

리처드왕은 휴지짝 뿐이 안 될 서류에 서약을 해주고 풀려나게 되었다고 한다

 

멜크에서 바하우 계곡을 통과하면서

쳐다보며, 설명을 들으며 오다보니

비엔나의 거리는 깜깜해졌다

 

오늘 비엔나 커피를 마시기로 했는데...

비엔나에는 비엔나 커피가 없다

비엔나에서 마시는 커피가 비엔나 커피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마지막 만찬이다

오늘 밤만 지나면 내일 아침에는 비엔나 공항에서

도하를 경유하여 우리집으로 가게된다

여행의 마지막은 항상 아쉬운만 남는다

 

여행의 아쉬움에 카메라를 눌러 본다

비엔나의 밤거리를 조금더 기억하고 싶은 마음으로...

 

비엔나 시내에서 공항 방향 숙소로 가는 길목의

석유화학 단지로 보인다

우리나라 여천석유화학 단지에 갔을 때

야경의 화려함이 생각나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비엔나에서 2일밤을 지냈던 호텔이다

이 곳에서 공항은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다

조식을 가볍게 마친 후 공항으로 향한다

 

비행기 출발시간은 11:45

비엔나에서 도하까지 거리는 3970Km

 

비행시간은 5시간반 

카타르 도하에 도착 현지시간은 18:05 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