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비니에서 네팔의 국경인
싯다르따나가르(Siddharthanagar)에 아침 8시20분에 도착하여
출국수속을 마치고 국경을 통과한 시간이 8시45분 이었다
인도쪽 국경인 소나울리(Sonauli)로 들어와
인도 입국수속을 받기위해
모두들 버스에서 내려 출입국 사무소로 간다
네팔에서 인도로 넘어와
국경도시인 소나울리(Sonauli) 첫 인상은
우리나라 시골의 읍내와 같은 도시로
네팔쪽 국경에는 상가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는데
인도쪽 국경인 소나울리의 도로변에는 상가들이 많이 늘어서 있었다
외국에서 국경과 국경을 통과하며
출입국 신고를 위해 출입국 사무소를 들어가 본적이
태국의 아난에서 캄보디아의 포이펫으로 가는 국경과
헝가리에서 크로아티아로 들어가 무라(Mura)쪽 출입국사무소와
슬로베니아로 나갈때 크로아티아의 출입국사무소인데
그 중에 본 제일 작은 출입국사무소인것 같다
그렇다고 출입국 절차는 간단하지 않고 마찬가지 똑 같다
입국 수속을 받을 동안
버스는 국경에 있는 출입국사무소 앞에는 도로가 좁고
번잡하여 주차를 할 수가 없어서
500m 정도 더 지나가서 주차하여 대기하고 있기에
입국수속을 마친 우리는 조금 걸어야 하였다
걷는 동안 길거리에는
네팔로 넘어 가려는 화물차량 행렬이
출국 수속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라나시를 향해 출발하려고 버스에 탔는데
창밖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들이 보인다
학교에 가는 모양이다
얼굴이 밝아 보인다
신문을 돌리는 사람도 보인다
저 정도 양이면 한 120부 정도 될 것 같았다
나도 신문을 돌려 본적이 있기에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신문을 돌리던 시절은 70년대 초반으로서 중학교 시절
축구공을 사려고 6개월 정도를 신문배달을 한적있으나
한푼도 받지 못하고 그만 둔 기억이 난다
그것도 150부 정도를 메어들고
헉헉거리며 서울 안산을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입국 수속을 마친 우리가 버스에 올라 타
출발하는 시간은 오전 9시35분...
국경 출입국수속 시간이 1시간15분 소요되었다
인도 여행은 지금 여기 네팔과 국경인 소나울리에서 출발해서
버스로 바라나시, 카주라호, 오르차, 잔시까지 가서
기차로 잔시에서 괄리오르까지 이동할 계획이다
다시 괄리오르에서 버스로 아그라, 자이푸르, 델리까지 갈 것이며
델리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우랑가바드로 날아가
엘로라 석굴과 아잔타 석굴을 본 후
버스로 뭄바이로 가 그곳에서 인도여행 일정을 마칠 예정이다
한국과 시차는 3시간 30분이며
네팔과 시차는 국경을 통과하자 15분이 늦은 시차를 가진다
오늘의 일정은
이곳 소나울리에서 바라나시까지 가는 일정으로서
거리는 약 320Km 정도이며
시간은 7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 320Km가 무슨 7시간 씩이나 ???)
소나울리 시내를 벗어나 조금 달리다 보니
차도변 옆으로 농산물 노점을 시작하는 모습이 보인다
오늘의 여행은 버스를 타고 바라나시까지
차 창밖을 하루종일 바라보고 가는 일정으로서
거닐며 관광하는 계획은 없다
달리는 버스 차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온 가족들이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불을 쬐고 있는 모습이 많이들 보인다
집들이 난방 시설도 없고
문도 커튼으로 되어 있어서
밤새 추위에 떨어 몸을 녹이고 있는 것 같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이 학교는 여학교인 모양이다
2시간 쯤 달렸나 버스를 도로 한쪽에 세운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다
네팔과 국경에서부터 이곳까지 달려오는 동안
도로들이 사진에 보이는 상태라
버스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덜커덩 덜커덩 거리며
힘들게 이곳까지 달려 왔다
인도는 힌두어로 바라트(Bharat) 또는 바라타바르샤(Bharatavarsha)라 부른다
이는 전설적 현인 군주인 '바라트의 땅'이라는 뜻이라 한다
인도의 공식 국가명은 인도공화국(Republic of India)이다
면적은 3,287,263㎢로 세계에서 7번째 큰 나라로서
우리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 면적 보다 약 15배 정도가 크고
인구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12억2천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나라이다
민족은 다문화 사회로 벵골인, 타밀인, 펀자브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등
기타 굉장히 많은 소수민족이 분포되어 살고 있어
인도에 살면 인도인이라고 한다
크게 분류하면 인도아리아족 72%, 드라비디아족25%, 몽골족으로 분류한다
언어는 힌두어와 영어가 공식 언어이나
인도에는 벵골어, 카슈미르어, 마라타어 등의 3372개 언어가 존재하고
이중에 1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216개라 하는데
헌법으로 지정된 언어는 18개라고 한다
종교는 힌두교 81%, 이슬람교 13%, 기독교 2.4%, 시크교 1.9%,
불교 0.8%, 자이나교 0.4%, 기타 등을 믿고 있다
기후는 열대 몬순성 기후이다
수도는 뉴델리(New Delhi)이며
정치는 연방공화제로서 다당제와 양당제의 의회형태로서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며 정부수반은 총리라고 한다
사진은 소와 함께 모닥불을 쬐고 있는 장면이다
소 등에 담요를 덮어 준것도 특색이 있으나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닥불 가까이 에서 소가 업드려 있는 것도 특색이 있다
2013년도 국민 1인당 GDP는 1414$로
우리나라(23,837$)에 비교해 많이 가난한 나라이다
그러나 인도는 인공위성도 띄우고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이며
전자분야가 발전한 강대국인 것이다
인공위성과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인데
국민은 못산다 ???
버스를 타고가며 도로 사정이 매우 안 좋아
사진을 찍기 어려울 정도로 덜커덩 거림과
차창밖으로 보이는 모습들은
경제수준이 너무 궁핍하게만 보인다
인도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을 가진 나라이다
인도에서 농업은 BC7000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인더스 문명은 BC2600년경에 발상하였다고 한다
인도는 많은 신을 섬기는 신들의 나라로서
카스트 제도의 특유의 세습적 계급이 있는 사회인데
카스트 제도는 BC2000년경 생성된 베다교와
이를 계승한 힌두교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카스트 제도의 세습적 계급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BC6세기 경에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발생 하였다고 한다
인도에서 이슬람교는
AD1000년경 이슬람교도의 침략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1206년에 델리에 술탄국을 세웠으며
1526년에는 무굴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차장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이 마음을 아려 온다
네팔을 관광하고 인도에 첫발을 딛는 중인데
네팔보다 GDP가 높은데도
생활상은 더 힘들어 보이는데 왜 일까?
지붕이 다 무너진 천막집 앞의 모닥불로
온 가족이 몰려드는데 너무 추워들 보인다
내 눈으로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니겠지만
모습들이 너무나도 곤고해 보인다
자전거에 통들을 메달고 있는 모습이 새롭다
우유 통인지 무슨 통인지 모르겠고
배달하는 통인지? 납품하는 통인지?
그냥 그냥 궁금해 질 뿐이다
오후 3시가 다 되어 점심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수삼즈 하베리(Susham´s Haveli) 식당에 도착한다
식당 안은 어두침침하고 손님들이 많은 식당은 아닌듯하다
식탁도 먼지가 많이 쌓여 있고
식당같은 분위기도 안나고
그런데 왜? 인도에서 첫 식사를 이런 곳으로 왔지?
하기사 네팔에서 이곳까지 달려 오는 동안 도로 변으로
이 곳 보다 깨끗한 식당 건물이나 호텔은 본 적이 없는 듯하며
주민들이 외식을 즐길만한 입장이 아닌 듯한 분위기로 느꼈기 때문이다
늦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바람을 쏘인다
이 길을 가야 하는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거리가 반도 못 왔다고 한다
길거리에 저런 것들이 많이 보인다
소똥으로 만들어 놓은 땔감이라 하는데
파는 용도로 보인다
식사 후 얼마를 달렸나 도로가 더욱 더 좁아진다
삼거리에서 좌측 길로 접어드니
도로가 더욱 좁아 보였는데
이 길이 가로 질러 가는 길인가 ???
퇴근하는 시간이 되었나보다
오토바이들이 많이들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 컴컴하여져 디카에 풍경을 담는 작업을 마친다
어둠이 내려 앉은 거리를 한참을 달려
바라나시 시내로 진입하여
힐 타워 호텔(Heal Tower Hotel) 앞에 정차한다
시간은 저녁 9시25분으로
오늘아침 네팔 룸비니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14시간 40분만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린다
오늘의 숙소가 이 호텔인지 알았는데
그 옆에 있는 리바타스 호텔(Rivatas Hotel)이 숙소 였다
도착과 함께 짐은 로비에 놓아두고
저녁부터 해결한다
갠지즈 강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씻고
버스를 타고 강으로 나간다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을 통과하니
갠지즈 강가의 케다르 가트(Kedar Ghat)가 나온다
가트(Ghat)란 강가에 있는 계단을 뜻하는 말이며
계단의 이름은 신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는데
갠지즈 강(Ganga River)가에는 4Km에 걸쳐 이러한 가트(Ghat)가
100여개의 줄지어 조성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인도를 여행하며 필히 들러야 하는 곳으로
바라나시는 인도를 대표하는 곳이며
인도하면 바라나시, 바라나시하면 인도를 연상하는 곳이다
바라나시의 갠지즈 강(Ganga River)은
인도 힌두인들의 성지이며 어머니의 강으로 신성시 여겨
그들이 죽기 전에 한번쯤은 꼭 성지 순례를 하고픈...
삶의 종착지로 하고 삼고픈...
갠지즈 강가에 이 가트들의 아침 풍경이 더욱 뭉클하게 다가온다
미국의 유명 작가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도 바라나시(Varanasi)를
"역사보다. 전통보다, 전설보다, 오래된 도시"라고 하였는데
이 도시를 느끼고 싶다면
이 도시를 가로 지르는 갠지즈 강으로 가라고 한다
케다르 가트(Kedar Ghat)에서 배를 타고 일출을 보기 위해
갠지즈 강의 동편에 있는 모래사장으로 건너 오니
많은 젊은 청년들이 떠들썩하게 몸을 씻고 있었다
가트 쪽에서는 연세가 있는 남녀들이 씻는 모습이 많이 보였는데...
일출을 보기위해 모래 사장에 내려 기다렸지만
안개가 진하게 끼여 포기하고
다시 배에 오른다
배가 출발하는데
옆에 있는 배에서 "워~ 워~~~" 소리를 크게 외쳐대자
갈매기로 보이는 많은 새들의 무리가 그 쪽으로 몰려든다
"어! 무슨 일이지?" 궁금해 지는데
우리 배에서도 가이드가 새 모이를 나누어 준다
아! 아~! 새 모이로 유혹 했구나
파괴의 신 시바(Shiva)와 모든 죄를 씻어준다는 강가(Ganga)여신이다
왜 같이 있을까? 부인은 파르바티(Parvati) 인데... 이유인 즉슨
갠지즈 강(=Ganga River)은 본래 '천계(天界)'에서 흐르던
강가여신의 강이다
그런데 갠지즈 강이 지상에 내려와 흐르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을 수행하여 공덕을 쌓은 인도의 고승의 요청으로
강가여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려 하였으나
천계를 흐르던 강이 지상으로 내려 오던 중 실수를 범할 때는
온 세상이 파멸을 가져올 수 있기에
강가여신은 고민 중에 있었다고 한다
이때 시바신이 도움을 주었는데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 올 때
시바 신이 머리로 받아 머리카락을 타고
안전하게 내려오게 하여 이 곳으로 흐르게 도와 주었다는 신화이다
갠지즈 강가에는 화장터가 몇 개가 있으나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는
바라나시의 갠지즈 강가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대표되는 화장터이다
매일 60~100구의 시신을 화장하는데
화장하는데도 경제 능력과 신분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카스트 신분에 따라 높은 브라만이나 크사트리아는 위쪽에서 화장하며
경제능력이 가난한 사람은 시신을 다 태우지도 못하고 강물에 버린다고 한다
화장의식은 흰천(순수)과 빨간천(행운)으로 싸고 대나무 위에 올린 시신을
고인의 친지나 이웃들이 "람람싸드야해(라마신은 알고 계신다)" 외치면서
화장터로 옮겨 시신을 강가에 적시고 장작 위에 올리면
머리를 박박깍은 상주가 시신 주위를 돈다
이때부터 화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한다
또한 이 곳 주변에는 무크티바완 호텔(구원의 집)이라는
죽음을 기다리는 투숙객들이 묵는 곳이 있다고 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섰기에
2주일 내에 죽지 못하면 방을 비워주어야 한다
이 곳에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몰리는 이유는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는 갠지즈 강에서의 죽음은
어머니 품에서 잠들 수 있다는 믿음과 유골이 이 곳에 뿌려져
죄를 씻어 버리고 더 나은 환생을 바라는 신앙에서 오는 것이라 한다
화장터 바로 위에서 목욕의식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강물은 깨끗하지가 않다
타다만 시신, 사람과 짐승(특히 소)들의 배설물, 생활 쓰레기 등
온갖 부유물들이 떠다니는데....
저들은 경건한 자세로 목욕도 하고 심지어 떠 마시기도 한다
왜 그럴까?
인도 사람에게 목욕이란 몸의 때를 씻는 의식이 아니라
정신을 정화시키는 의식으로서
강가에 몸을 담글때는 반드시 머리는 동쪽을 향하고
입으로는 만트라(Mantra)를 외워야 한다고 한다
강가(갠지즈강)는 죄를 씻어 주는 강이라는 믿음에서 왔다고 한다
인도 신화에 의하면
파괴의 신 시바(Shiva)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창조와 지배의 신 브라흐마(Brahma)와 다투고
머리를 자르고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자신이 예전에 도와 주었던 강가를 찾아 왔다고 한다
강가여신은 죄를 씻기위해 자신을 찾은 시바를
신까지 죽인 죄까지 깨끗이 씻기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신을 죽인 죄까지 씻기어 주는
강가여신의 구원을 바라는 믿음으로 이 강으로 몰려와 의식을 행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아침에만 목욕을 할까?
브라흐마 신의 활동 시간은 오전 3시경에서 오전 9시경이기에
갠지즈강에서 목욕도하고 공부도 한다고 한다
화장터에는 주로 남자들만 서성이고 있는데
인도의 사티(Sati)제도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예전에 남편이 죽으면
그의 시신을 태우는 장작더미에 함께 드러누워 죽는
사티(Sati)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힌두교도들은 사티(Sati)가 과부들의 자발적 행위라고하는데
살고 싶어 거부하며 울부짓는 과부들을 강제로 끌어내
태워 죽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고 한다
1802년 이 곳에서 약 450명 정도가 사티로 희생되어
그래서 1829년에 법으로 금지하였다고 한다
화장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배는 다시 우리가 처음 탓던 지점으로 선수를 돌린다
시신을 화장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마음은 엄숙함에 가라앉는 느낌이다
화장터에서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몰래 몰래 디카 줌으로...
바라나시 갠지즈 강에서 중심 가트는
다사스와메드 가트(Dasaswamedh Ghat)라고 할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가
10마리의 말을 바쳐 제사를 지낸 곳으로
das는 10, aswa는 말, medh는 희생이 합쳐진 이름이라 한다
이 곳은 성스롭게 여기는 강에서 목욕을 하거나
물을 성수로 떠가기 위해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몰리는 장소로서
낮에는 순례자의 의식을 도와주는
힌두교의 푸자 바바(Pooja Baba) 의식을 볼 수 있으며
저녁마다 강가여신에게 받치는 제사인
아르티 푸자(Arti Pooja) 의식도 이 곳에서 열린다
아침 식사전 가트에서 멀지 않은
바라나시의 베나레스 힌두대학을 방문부터 하자고 한다
베나레스 힌두대학교(Benares Hindu University:BHU)은
1916년 민족주의자이며 교육자인
판디트 마단 모한 말비야(Pandit Madan Mohan Malviya)가 설립하였다
베나레스힌두대학교는
고대 인도의 아유베나경전을 연구하며
문과, 농과, 공과, 예술 등 다양한 단과대학을 보유한 종합대학교로서
크기가 6Km정도에 걸친 약150만1500평으로
서울대(약42만평)의 약 4배 정도 큰 캠퍼스를 보유한 학교로서
학생이 약 5만5천명, 교수가 약3천명, 64개의 기숙사 있으며
의과 대학이 유명한
인도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학교라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대학교 구내에서 우리가 발디들 틈도 주지도 않고
베나레스 힌두 대학교를 한바퀴 휙 돌더니
캠퍼스 밖으로 나와 호텔로 향한다
쉬리구루라비다스 문(Shri Guru Ravidass Gate)은
호텔로 향하다가 보는 문이다
버스는 아침 식사를 위해 호텔로 가는데
이슬람 교도들의 행사로 인해 호텔로 가는 길들이 막혀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한다
이날은 힌두교 행사가 있는 날인데
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이슬람교도 같은 날 행사한다고 한다
이 같은 갈등은
1194년 이슬람의 침략부터 시작되어
이후 3세기 이상을 통치하며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고 학자들을 학살하였다
16세기에 악바르 황제가 등극하며 힌두교 활동과 순례를 잠시 허용하였으나
뒤이어 등극한 아우랑제브는 다시 힌두교 사원을 허물고 박해하였다
아우랑제브가 죽은 후 무굴제국은 급속히 쇠락했지만
힌두와 이슬람은 현재까지 죽고 죽이는
종교 갈등이 계속되어 오고 있다고 한다
바라나시에서 타종교에 절대 흡수되지 않는 이슬람교의 확장은
힌두교도들은 근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는데
인도에서 종교적 갈등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바라나시를 유력하게 꼽고 있다고 한다
사진은 이슬람 남자 신도들은 길거리에서 행사하고 있는데
여신도들은 건물 로비 앞에서 내려 오지 않고 몰려 있어서.....
바라나시에도 로타리 클럽 활동이 왕성한 모양이다
2005년에 세워진 기념탑으로서
그때는 나도 로타리 클럽활동을 한참 활발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이슬람 행사 인파를 피해 빙빙 돌아서
호텔로 돌아와 아침을 해결한다
아침식사 후 호텔 내에서
요가 체험을 한 후 오전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가이드에게 윈도우 쇼핑이나 가자고 부추겨 본다
그런데 남성만 가자고 그런다
'여성들이 가면은 안간다'고 '여성들은 위험하니 호텔에 있으라'고 한다
반발하는 여성들을 두고 남자 몇 명만 밖으로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좀 걷다 보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 곳을 지나 걷는 중
10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 놈이 애를 안고 오더니 구걸을 한다
못 본 척하고 걷는데
누가 때리기 한 듯이 주저 앉아 울음을 터트린다
황당한 순간 가이드가 다가가 사내 놈한테 야단을 친다
이 후 가이드는 다시 호텔로 돌아가자고 하여
가던 길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려 호텔로 향한다
호텔로 돌아와 휴식시간과 점심식사 후
바라나시 시내에서 12Km 떨어진 녹야원으로 향한다
한자명으로는 녹야원(綠野園)으로 부르는 사르나트(Sarnath)는
불교 4대성지 중 하나로서
깨다름을 얻은 싯다르타(Siddhartha)가 처음으로 설법을 편 곳이다
지금도 부처님이 앉아 설법을 펼치던 자리와
제자들이 앉아 설법을 듣던 자리들이 빨간 벽돌들로 자리잡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가
첫번째 설법 장소로 사르나트를 택한 이유는
자신과 함께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5명의 도반(道伴) 때문이라 한다
육체적 고행을 같이 하던 5명의 도반은
싯다르타가 고행만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진리를 터득하고
처녀 수자타(Sujata)에게서 우유죽 공양을 받자
변절자로 취급하며 떠났다고 한다
5명의 도반이 떠난 후에 수행에 더 정진한 싯다르타는 깨달음 얻어
부다(Buddha)가 되었는데
진리를 전할 첫 대상으로 자신을 떠난 5명의 도반을 택하였다고 한다
변절자로 취급하며 싯다르타를 떠났던 5명의 도반들은
부다(Buddha)가 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예를 올렸고
부다는 이들을 제자로 받아 들여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四聖蹄)와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쳐
불교를 인도와 전세계에 전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 왕조 시대의 아쇼카 왕명에 의해 세워진
아쇼카 석주(Ashoka Pillar) 이다
지금은 이슬람의 침입으로 파괴되어 하단만 남아 있으나
다행히도 상단 일부를 장식 했던
사자상은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 사자상(Lion Capital)은 인도 국기에 있는 진본으로서 유명하다
아쇼카 석주는 여기 뿐만 아니라 룸비니를 포함한
인도 전역에 여러개가 세워져 있어
인도 고대사에 중요한 역사 자료라 한다
부다가 5명의 도반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행한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드 것으로 추정하는
다멕 스투파(Dhamekh Stupa)이다
지름이 28.5m, 기단을 포함한 높이 33.53m 로서
높이에서 11.2m 까지는 큰 돌로 쌓고
그 위로는 벽돌을 쌓아 완성 하였느데
탑의 하단은 마우리아 양식, 상단은 굽타 양식으로 되어 있어
아쇼카 왕 때 지어진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고 한다
다멕 스투파 옆에서는
스리랑카 승려의 진두지휘 아래 꽃 장식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저녁에 무슨 행사가 있을 예정이라는 것만...
사르나트를 녹야원(綠野園)이라고 하는 이유는
녹야원은 사슴정원이라는 뜻인데
부다(Buddha)의 전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설화에 의하면
바라나시에 사냥으로 사슴고기를 즐기던 왕이 있었다고 한다
매일 사냥으로 생명의 위협으로 불안한 날을 보내던 사슴의 왕은
바라나시 왕을 찾아가서
매일 한마리씩 받칠테니 사냥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하여 허락을 받는다
순번을 정해 한마리씩 죽여 받치던 어느날
새끼를 밴 사슴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안 사슴 왕은 새끼를 밴 사슴 대신 자신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 것이 바라나시 왕에게 전하여져 감동을 받은 왕은
자신은 사슴보다 못한 자비심을 까진 것을 꺠닫고
사르나트에 있는 사슴을 죽이지 말고 자유스럽게 살도록 명한다
사슴의 왕은 후에 부다(Buddha)로 환생하였다고 하는 설화이다
사르나트를 관광하고 바라나시 시내에 있는
머플러 생산공장과 판매를 겸하는 곳으로 이동한다
버스는 골목길로 꼬불꼬불 들어가더니 차를 세운다
조그만 쪽문으로 들어서니
베틀 기계들이 놓여져 있고 작업은 않고 있었다
기계들이 있는 공장에서 또 쪽문을 열고 들어서니 매장이 나온다
머플러 1개에 50$ 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들은 네팔 포카라에서 12$에 구입하였었다
일행들은 10$부터 흥정을 시작한다
30$에서 더 이상 흥정이 안된다
흥정을 포기하고 전원 철수하기로 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25$까지 하자고 한다
무시하고 밖으로 나와 버스에 오른다
버스를 붙잡는다
5개까지 구입하면은 20$까지 주겠다고....
몇명이 버스에서 내려 구입하러 간다
그런데 갔다가 다들 다시 돌아 나오는데
나의 아들님 혼자만 누나준다고 20$에 사들고 나온다
매장에서 나와 사이클 릭샤(Cycle Ricksaw)를 타는 곳으로 간다
우리가 타는 릭샤의 기사(릭샤왈라)인데
사진을 찍으려니 근엄한 표정을 한다
릭샤 투어는 30분정도를 타고 갠지즈 강가까지 가는 일정으로
그 곳에서 갠지즈강의 석양 유람 및
아르티 푸자(Arti Pooja)의식을 관람할 예정이다
릭샤(Ricksaw) 종류는
사이클 릭샤(Cycle Ricksaw)와 오토 릭샤(Auto Ricksaw)가 있는데
관광객은 사이클 릭샤를 선호한다
이유는 바라나시의 시내는 좁은 골목길이 많고
갠지즈 강가의 가트(Ghat)는 신성시하여
오토 릭샤나 택시는 출입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이 거리에 축제가 있는 것 같다
밤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을 전구트리를 설치하여 놓았다는데
나중에 알아 보니 종교행사 때문이라 한다
릭샤를 타고 가다보니
스피커에서 코란 읽는 소리도 크게 울려 퍼져 나온다
요즘 힌두교 행사기간엔
맞불을 놓기 위해 오늘 아침에 본 이슬람 행사도 같이 연다고 하는데...
갠지즈 강가에 거의 다 도착 한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는 듯 복잡해 진다
릭샤 기사는 관광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자기 릭샤를 이용해 달라고 부탁을 해 오는데
알았다며 아들은 둘이서 인증샷까지 해 댄다
인파로 복잡한 가트로 들어오는 길을 통과하여
다시 갠지즈 강가에 섰다
예약 해 놓은 보트를 기다리며 갠지즈 강을 바라다 본다
갠지즈강은 시바신의 머리에서 흘러나와
가시강(산스크리트어)을 지나 와라나강을 거치고
바라나시를 흘러간다고 믿는다고 한다
갠지즈 강에서 보이는 건물들은
대부분 400년이 넘는 건축물이라 하며
가트(Ghat)들의 이름은 신들의 이름을 붙여 지어 졌으며
유심히 살펴보면 히말라야 산들의 지명이 많이 보인다
또한 우기에는 강물이 범람하여
가트(Ghat) 위의 건물 창문으로 보이는
아래 건물 벽까지 물이 차오를 때가 수시로 있다고 한다
함께하는 우리 일행들은 가이드가 구해준
갠지즈강에 띄우는 작은 소원의 불꽃 '디아'를 들고
처음으로 단체샷을 한다
보트로 서서히 갠지즈 강을 유람하며
화장터인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에 도달하니
날이져 깜깜하다
화장은 24시간 계속 이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죽었어도 화장하지 못하는 다섯 부류가 있다고 한다
사두(수행자), 임신한 여자, 2살이하 어린아이, 문둥병 환자,
코브라에 물려 죽은 사람은
무거운 돌덩이에 메어 강 밑으로 수장을 한다고 한다
킹 코브라에 물려 죽은 사람은
비쉬누(Vishnu) 신에게 노여움으로 죽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화장터에서 배를 돌려
아르티 푸자가 열리는 다사스와메드 가트(Dasaswamedh Ghat)로 향하며
소원을 빌며 갠지즈강에 띄우면
소원을 이루워 준다는 작은 불꽃 '디아'를 물에 띄어 보낸다
소원? 말해주면 부정타지^^
세계 평화를 위해 빌었다고 해두지 뭐^^
다사스와메드 가트에 도착하니
아르티 푸자(Arti Pooja) 의식이 행하여 지고 있었다
신들의 나라인 인도에서는 푸자(Pooja)의식이
인도인들의 일상생활 중의 일부분 이라고 할 수있는데
푸자(Pooja)란 일반인들이 신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매일 행하는 힌두교의 숭배의식으로서
집에서 행하는 간단한 의식부터
사원에서 행하는 복잡한 의식까지 포함하여 말한다
아르티 푸자(Arti Pooja)의식은
강가(Ganga=갠지즈강)여신에게 받치는 빛의 의식으로서
만트라(Mantra)를 외우며
불붙은 심지가 담긴 금속접시 신상 주위에 돌리는데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손을 불꽃 위에 올리기도 한다고 한다
의식의 절정은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하게 커지고
향불을 돌리며 돌 때이다
가트(Ghat)에서 나와 릭샤를 타는 곳으로 갔더니
우리를 갠지즈 강까지 태우고 온 릭샤왈라가 우리를 보더니
다른 릭샤를 타지말고
자기 릭샤를 타라며 기다리라고 한다
호텔로 돌아와 오늘도 내일의 화이팅을 위하여
늦은 저녁을 즐긴다
오늘의 일정은
이 곳 바라나시에서 약 600Km 떨어진
세베그램(Sevagram)에 위치한 카주라호(Khajuraho)까지
가는 일정이다
시간 상으로는 10시간 걸린다고 되어 있는데
네팔과 국경인 소나울리에서 바라나시까지 약 320Km를
14시간 40분이나 걸렸는데....ㅠㅠ~~
아침 8시에 리바타스 호텔(Rivatas Hotel)을 출발하여
카주라호로 향하는데
바라나시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바라나시 준션 기차역(Varanasi Junction Railway Station)을 지난다
가트(Ghat)로 가기 위해
자유여행 하는 사람들은 이 곳에서 내려
릭샤왈라에게 다사스와메드 가트(Dasaswamedh Ghat)로 가자고 해야지
다른 가트를 말하면 많이 헤메게 된다고 하며
타기 전에 비용을 흥정하고 타야 문제가 안생긴다고 한다
외국만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인도는 타타(TATA) 자동차 회사 간판이 많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현대(HYUNDAI) 자동차 간판이 보이니 반가운 생각이 든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니
옥상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띠인다
특히 남자들 보다는 여자아이들 모습이 더 많이 본 것 같다
바라나시(Varanasi)의 시가지를 벗어 나는 것 같다
바라나시는 기원전부터 있었던 도시라고 한다
인구 300만명 정도가 거주하는 도시로서
첫 인상은 도로는 매우 좁고, 비포장 도로도 많으며
사람은 많으나
구걸하는 사람이 많이 보여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한 도시로 느껴졌다
바라나시가 기원전 부터 있던 오래된 도시라는 것은
BC 600년경 당대의 지배종교였던 브라만교(Brahmanism)에 저항하는
신흥 사상가들이 몰려들어
지식과 사상을 논하는 곳이 바라나시 였다고 한다
부다(Buddha)가 첫 설법지로
이 곳에서 약12Km 떨어져 가까운 사르나트를 택한 것도
그 이전 부터 바라나시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도시라는 것이다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신이 다스리는 나라로 신비함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카스트 제도 속에서
삶의 힘들고 고달픔과 육신의 춥고 배고픔까지도
자기의 업보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신께 내세에는 보다 나은 행복한 삶을 기원하면서
순응하며 살아간다고 하니...
2시간 이상 달렸나 버스가 정차한다
휴게소 아닌 휴게소 앞이다
그래도 도로는 인도에 첫 날 들어 올때 보다는 좋아 보인다
오늘은 점심을 먹기 위해 정차하여 식당에 들리지 않는다
호텔에서 도시락을 싸들고 나와
달리는 버스에서 알아서 식사하게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흔들리는 버스에서
식은 식사를 하려하니 밥맛이 나질 않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광경을 바라보다 보면은
조금 피곤하고 찬밥이라 하여
밥 맛이 없다고 ???
내 자신이 너무 호사스럽고 배부른 짓을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버스가 출발한지 4시간이 넘어서니
차안은 다들 피곤한지 조용해지며 눈들을 감고 있다
그런데 맨뒤에 앉은 우리 일행 중 최고 어린
엄마, 이모와 함께 여행을 온
이번에 초등학교에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는 ㅈ욱이가 있는데
옆에 아저씨와 형하고 장난을 친다
옆에 있던 이모가 미안했던지
"ㅈ욱아! 아저씨와 형아 피곤하신데 쉬시라고 너도 좀 자"라고 재촉을 한다
이에 삐진 ㅈ욱이는 이모를 팔아 버린다고
10,000원에 경매에 붙인다
"우리 이모를 경매에 붙입니다 경매 시작은 10,000원부터 시작합니다"라고
버스에서 큰소리로 외친다
순간 차안은 웃음보가 터지며
여기저기서 20,000원, 30,000원...을 외쳐댄다
지루하고 심심했던 버스 안이 이에 호응하며
온 통 웃음 바다로 지루함이 재미있는 여행으로 변한다
웃고 떠드는 사이 알라하바드(Allahabad) 시내를 통과하여
야무나 강(Yamuna River)의 나이니(Naini) 다리를 건너 가는데
다리 밑에는 엄청난 텐트촌이 형성되어 있다
무슨 일이지 ??? 여기에 사는 사람들 인가 ???
이쪽 부족들의 축제 현장이라고 한다
인도에는 각 지역마다 축제가 있으며
매년 몇 일씩 대규모로 열리기 때문에 이때는 흩어져 살던 부족들이
이처럼 모여서 축제를 대규모로 치른다고 한다
수동 펌프 수돗가에 아낙들이 모여서
설거지를 하고 있고 어린아이들이 그 옆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우리나라 60년대 70년대 초반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인다
비가 쏟아진다
도로는 온통 진흙 길로 변하고
버스는 느린 속도에서 더욱 속도를 줄여
비틀 덜커덩 거리며 달려 간다
화물트럭이 진흙 길에 전복되어 있다
폭이 좁은 도로에서 빗길의 미끄러운 진흙길은
아차하는 순간 전복될 수 있기에
만일에 전복된다면 사람이 다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다치는 사람이 없이 차량이 고장이 난다면
대체 차량을 오고 가지도 못하는 이런 오지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끔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후 3시가 넘어 도로가에 버스를 세운다
허술한 움막이 있는데
이 곳에서 버스기사가 점심 식사를 하고 간단다
남자들은 버스에서 내려 아무대나 서서 쏴를 해대고
여자들은 화장실을 찾으로 움막 뒤로도 가보고 바쁘게 왔다갔다 한다
다시 버스에 올라 타 움막안을 쳐다보고 있는데
위생관념이 전혀 없다
빗물에 설거지하고 음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 목격된다
조금 전에 저 빗물 통에 있는 물로
버스에 오르기 전 진흙 묻은 신발까지 닦았는데.....
움막 안에서는 버스기사와 몇 명의 화물차 기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 식사를 어떻게 하나.....
날이 어두워 졌다
버스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도로 갓길에 정차한다
버스 조수가 밀감을 사러간다
그런데 경찰이 다가와 버스가 무단정차 하였다고 벌금 딱지를 떼는 모양이다
벌금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벌금액이 높다고 한다
가이드 왈 버스기사가 화가 난 것 같다고
조용히 가자며 웃는다
세베그램(Sevagram)에 위치한 카주라호(Khajuraho)의
클락 호텔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9시40분으로
13시간40분 걸려 바라나시에서 이 곳까지 약 600Km를 달려 온 것이다
아침 8시에 먼저 버스로
클락 카주라호 호텔(Clacks Kajuraho Hotel)에서
약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카주라호 서쪽 사원으로 향한다
카주라호(Kajuraho)는 인도 대륙의 정 중앙부에 있는
마드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 주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 20,000만명 정도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라 할 수 있다
(인도 12억이 넘는 인구 중 2만명 정도는..)
베낭 여행자들이 카주라호를 여행하는데는
인도의 수도인 델리에서 기차편도 없고
대중교통인 버스는 몇 번씩 갈아 타야하고
도로 사정은 안 좋은 시설 등의 불편한 교통 문제로 인하여
이곳까지 오는데는 매우 힘든 여정을 보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길거리에 한국 식당임을 알리는 간판들이 보인다
인도에서 제일 먼저 생겨난
인도인들이 운영하는 한국식당들이라 한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디카에 담는데
높은 기대는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다
카주라호의 사원군 중 서부 사원군만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입장료는 Rs250로 우리돈 약 5,000원 정도이다
카주라호 사원(Kajuraho Temples)들은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이 사원들은 950년~1050년 사이에 이 일대를 지배하며 번성했던
찬델라 왕조(Chandela Dynasty)에 의해 세워 졌다고 한다
찬델라 왕조는 달의 신인 찬드라(Chandra)의 후손이라고 믿는
라즈푸드(Rajpud) 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로
시조는 찬드라 트르레야(Chandra Trreya) 인데 어린시절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 죽였다는 설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찬드라 트르레야가 태어난 설화는
어머니인 헤마바티(Hemavati)는 매우 아름다운 공주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너무 과신하므로
인드라(Indra)신의 저주를 받아 16세에 과부가 되는 불운 겪게 되는데
그러나 그녀의 너무도 아름다움에
달의 신 찬드라(handra)가 반하여 딱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결과 태어난 아이가 찬드라 트르레야로서
달의 신이 떠나기 전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카주라호 사원들은
14세기에 이슬람의 지배로 인하여 수난을 받게 되는데
우상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85개 사원 중 대부분이 파괴되고
22개 사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서부 사원군에서 유일하게 흰벽을 가진 사원인
파르바티 사원(Parvati Mandir)이다
사원 안에는 강가 여신이 악어를 타고 있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는데
들어가서 보지는 않았다
파르바티(Parvati)는 파괴의 신인 시바(Shiva)의 부인으로
그 녀는 산의 신 히말라야와 그의 아내인 메나 사이에서
태어 났다고 하는데
파르바티의 정체는 시바(Shiva)의 부인이었던 사티(Sati)가
시바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스스로 불속에 뛰어 들어가 죽었다가
파르바티로 환생하였다고 한다
부인 사티가 죽었다는 것에 낙심한 시바는 환생한 파르바티를 못알아 보고
히말라야 산속으로 들어가 고행을 하고 있는데
파르바티는 시바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여름에는 불속에 앉아 태양을 바라보고
겨울에는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고행을 하였다고 한다
결과 검은 여신 이었던 파르바티는 몸이 황금색으로 빛나기 시작하여
빛과 미의 여신인 우마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어느날 노승이 그녀를 찾아와 밥을 달라고 하여 씻고 오라고 했는데
노승은 강에서 목욕을 하던 중 물에 빠져 악어에게
물려 죽을 처지가 되어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모습 본 파르바티는 시바 외에는 어느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처지였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어 노승을 구해주었다고 한다
노승은 시바가 변신한 사람이었는데
그녀의 착한 심성을 확인한 후 다시 시바로 변하여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비쉬누(Vishnu) 신에게 봉헌된 락쉬마나 사원(Lakshmana Mandir)이다
950~975년 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서부사원군의 사원들은 에로스(Eros) 사원이라 하는데
춤추는 요정인 압사라(Apsara)와
성애를 표현하는 미투나(Mithuna) 상들이
섬세하고 화려하면서
쳐다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인 조각품들이 일품이다
락쉬마나 사원은 서부 사원군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다고 한다.
섬세한 문양과 그 사이로 신들의 조각상,
춤추는 압사라 조각상과 음란한 미투나 조각상들이 아울려 있으며
높이 솟아있는 첨탑 위에까지
조각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수 놓아논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렵고 힘들게 이 곳까지 14시간을 달려온 것이
조금도 피곤하지 않게 만든다
춤추는 요정인 압사라(Apsara)와
삼지창을 들고 있는 시바(Shiva) 신으로 보인다
하나 하나 조각하여 갖다가 붙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돌을 가지고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각하였다니
1000년전의 이들의 예술성이 대단하게만 보인다
시바(Shiva) 신과 파르바티(Parvati)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며
지혜와 행운의 신인 가네샤(Ganesa)이다
가네샤는 원래 코끼리 머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태어난 배경은
시바와 파르바티는 섹스를 하루에 3번을 즐기는 부부였다고 한다
어느날 시바는 파르바티와 관계 중 질외사정을 한다
시간이 흐른 후 파르바티는 간지러움을 느껴 목욕을 하면서
벗겨낸 때를 가지고 사람형상을 만들었는데
건강한 사내아이가 되어 울음이 터트리며 탄생하였다고 한다
코끼리 머리를 가지게 된 배경은
어느날 파르바티는 목욕을 하면서
아들 가네샤에게 어느 누구도 집안에 들여 보내지 마라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 시바가 집에 돌아와 안으로 들어가려하자
아버지인줄 모르고 막무가네로 막아 섰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시바는 메고 있던 도끼로 아들의 목을 잘라버렸는데
목욕을 하고 나오던 부인 파르바티가 이를 목격하게 되어
울고불고 난리가 난 파르바티가 어둡고 피를 좋아하는
암흑의 여신 칼리로 변하여 모든 것을 파괴하였다고 한다
이때 인도 땅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지금의 스리랑카 섬이 생겨 났다는 설화가 있다.
시바신이 이에 놀라 파르바티를 달래며
제일 먼저 만나는 동물의 목을 잘라 붙여 놓기로 약속을 하며 달랜다
이때 제일 먼저 지나가던 코끼리가 있었는데 목을 잘라서
마음에는 안들지만 신들의 약속이니 어쩔 수 없이
잘려나간 아들의 목에 붙여 살려 놓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가네샤는 코끼리 얼굴을 갖게되었다고 한다
지혜와 행운의 신으로 추앙 받는 것은
가네샤의 스승이자 브라흐마 신의 아내인
사라스바티(Saraswati)가 필기도구를 선물함으로서 얻게 되었다고 한다
사라스바티는 예술과 학문을 관장하는 신으로 물을 소유한 풍요의 여신이다
락쉬마나 사원의 계단을 내려와
사원 옆으로 돌아가 사원의 기단을 바라보니
19금의 여러가지 성행위의 미투나(Mithuna) 조각상들이 나온다
바라보고 말하기도 민망하고 낯뜨거울 정도로
세밀하게도 조각하여 놓았다
성스러운 사원에 음탕한 미투나 상을 왜 조각 했을까?
남성의 에너지의 상징인 시바(Shiva)와
여성의 에너지의 상징인 사크티(Shakti)의 결합을 통한
해탈을 추구하는 힌두교의 영향이라고 한다
미투나 조각상들은
4세기 경에 쓰여진 성애서(性愛書) 경전인 카마수트라(Kamasutra)를
참고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이야기 한다
미투나 조각상들 중에 유명한
'말과의 성교하는 옆에서 손으로 눈을 가리는 여자 조각상'으로
인간들에 있어
성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려 해도 성욕까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성적인 욕망은 적절히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미투나(Mithuna) 조각상들은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들이
단순히 성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성적인 욕구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조각하였을 것이라 한다
또한 고대의 인도인들은 남성과 여성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며
불안전에서 벗어나려면 남녀가 섹스로 하나되었을 때가
완전한 상태라고 보았으며
섹스는 종족 번식 또는 쾌락 이전에 완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수행의 과정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라 한다
락쉬마나 사원을 관람하고 뒤쪽으로 나오니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Kandariya Mahadev Mandir)과
마하데바 사원(Mahadeva Mandir)과
데비 자가담바 사원(Devi Jagadamba Mandir)이
하나의 기단 위에 나란히 보인다
위대한 신의 사원이라는 뜻의 1025년~1050년 경에 건립된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Kandariya Mahadev Mandir)은
서부 사원군 중에 가장 큰 규모로 높이가 31m로서
시카라(Shikhara:첨탑) 부분은 84개의 돌을 조각하여 포개 쌓았다고 한다
조각상들은 내부에 226개 외부에 646개가 있는데
미투나 상들은 모두 외부에 있어
여행자의 눈길은 내부 보다는 외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쳐다 본다
전설에 의하면
시바(Shiva)와 파르바티(Parvati)는
약 10만 년에 걸쳐 108,000가지 체위로 섹스를 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 성애서 경전(性愛書 經典)인 카마수트라(Kamasutra)에
핵심적인 체위만 추려낸 것이 108가지로서
이 곳에 있는 미투나 조각상은 카마수트라의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시바신을 모신 마하데바 사원(Mahadeva Mandir)로서
칸다리아 마하데브 사원과 데비 자가담바 사원의 사이에 있는
조그마한 사원이다
마하데바(Mahadeva) 란 위대한 남신을 의미하며
마하데비(Mahadevi)는 위대한 여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흔히 데바(Deva), 데비(Devi)로 줄여서 말하며
보통 시바신 부부를 지칭할 때에 사용한다고 한다
이 사원은 크게 주목 받지는 못하나
이 사원 앞에 있는 사자상은
찬델라 왕조의 문장으로 추측하고 있어
최고의 조각품으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데비 자가담바 사원(Devi Jagadamba Mandir)는
원래는 비쉬누(Vishnu) 신을 모셨던 사원이었지만
현재는 시바와 파르바티 부부를 모시는 사원이 되었다고 한다
시바(Shiva) 신은 4개의 얼굴과 팔이 있으며
위로 뻗친 머리에 초승달을 달고, 검푸른 몸에는 독사를 감고
허리에는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한손에는 삼지창을 잡고
미간에 있는 제3의 눈은 모든 것을 태우는 불 빛을 발한다고 한다
시바의 목은 파란데 이는 '한방울만 땅에 떨어져도 세상이 멸망'하는
우유 바다 밑에서 나온 독을 마셨기 때문이라고 하며
독을 완전히 삼키지 않고 목구멍에 담고 있는 이유는
시바(Shiva)라 할지라도 완전히 마시면 죽기 때문이라 하며
독을 마신 이유는 비쉬누(Vishnu) 신의 부인인 락슈미(Laksmi)를
탐하다가 거부 당해서라고 한다
이처럼 창조의 신 아버지인 브라흐마의 목을 자르고
아들인 가네샤의 목을 자르고
남의 부인을 탐하는 막장인 파괴의 신 시바(Shiva)는
브라흐마, 비쉬누, 시바로 이어지는 3대 신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신으로 추앙을 받는데
이유는 단순히 생명이나 재산 등 물질적인 것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업보, 고난 등 추상적인 것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현실에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
궁핍하고 먹고 살기 힘들수록 인기가 높아지는 신이라 한다
서부 사원군을 관광하고 정문 밖으로 나오는데
기념품을 파는 사내들이 벌떼처럼 몰려든다
한 두명이 접근해야 뭔가하며 물건을 볼텐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얼을 빼니
서둘러 버스로 가 올라 탄다
카주라호가 있는 인구 2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세베그램(Sevegram)의 중심 로타리이다
우리나라 작은 읍내처럼 평온하고
인도 여행시 여기까지 오기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이지만
그래도 여행자가 많이 몰리는 곳이다
서부 사원군에서 1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하니
동부 사원군 샨티나트 사원 입구에 도달한다
힌두교 사원들이 몰려있는 서부사원군에 규모가 떨어지지만
동부 사원군은 자이나교 사원들과 힌두사원이 함께 있는 곳으로서
산티나트, 파르스바나트, 아디나트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곳이다
먼저 산티나트(Shantinath) 자이나교 사원에
신발을 벗고 맨발로 입장한다
자이나교는 불교의 전신으로서 불교보다 약 60년 정도 앞선 종교로서
BC 6세기 경에는 힌두교의 베다 의례가 매우 형식적으로 치우친 시기였다
이에 환멸을 느낀 신흥 사상가들이 대거 등장했던 시기였는데
당시 동물희생제를 반대하며 불살생(不殺生)을 핵심윤리로 삼아
마하비라(Mahavira)가 자이나교를 창시하였다
크샤트리아 출신인 마하비라는 BC 599년 바이샬리에서 태어나
30세에 출가 했는데
23대 틸탄기르(Tiltangir)인 파르슈바나타파(Parshuvanatapa)의 제자가 되어
초창기에는 옷을 걸친 수행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옷을 전혀 걸치지 않은 나체 수행과
걸식을 위한 그릇마저도 휴대하지 않는 무소유 고행을 실천하였다
그래서 자이나교 불상들은 하나같이 발가벗은 모습으로
남성의 성기까지 세밀하게 조각되어 표현하고 있다
마하비라는 12년간 고행 끝에 최상의 경지에 이르러
비하르주의 파바푸리에서 입적하였다고 한다
현재 자이나교는 금욕주의와 고행주의에 기원을 두고
무소유를 강조하며 비폭력과 채식을 옹호하고 있다.
자이나교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수도방식 때문에 2개 분파로 나뉘는데
흰옷을 입으며 여자 수도자들도 있는 슈베탐바라파(백의파)와
무소유를 완전히 실천한다며 나체로 다니며
또한 여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디감바라파(공의파)가 있다고 한다
산티나트 사원에서 나오면 바로 옆에 힌두교 사원처럼 보이는 사원이 있다
외벽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조각상이
힌두교 신들인 브라흐만 신, 비쉬누 신 등과
춤추는 요정인 압사라(Apsara) 조각상들로 채워져 있지만
힌두교 사원이 아닌 자이나교 사원인
파르스바나트 사원(Parsvanath Mandir)이다
원래는 아디나트(Adinath)에게 바쳐진 사원이지만
1860년에 파르스바나트 조각상으로 대체되어 조각상 이름을 따서
사원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파르스바나트 사원 앞에서 본 산티나트 사원이다
같은 자이나교 사원이지만
파르스바나트 사원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룬다
카주라호 서부군 동부군 사원을 다 보고 나니 오전 10시20분
우리는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기 전에
다시 점심 도시락을 받기위해
우리가 하룻밤을 보냈던 클락 카주라호 호텔로 가
준비되어 있는 도시락 차에 싣는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달리는 차에서 점심을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위의 사진은 카주라호에서 나와 75번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 사진이다
오늘 일정은
카주라호에서 약 275Km 떨어진 괄리오르로 가는 일정으로서
버스로 약 175Km 거리에 있는 잔시(Jhansi)까지 가서
그 곳에서 기차를 타고 괄리오르(Gwalior)로 약100Km 정도 가는 일정이다
잔시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지나가는 길목에서 7Km만 들어가면 되는
오르차(Orcha) 고성을 보고가기로 한다.
추가비용은 인당 20$ 이란다
오르차 고성에 가는 것은
함께 여행하는 일행들이 어제저녁 식사를 하면서
가니 안가니 회의를 한 끝에
많은 사람들이 가기를 원해 결정한 일정이다
오늘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카주라호에서 잔시로 가는 차창 밖 길거리의 풍경은
네팔에서 바라나시까지의 거리 풍경과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까지 오는 풍경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인도에 와서 어제까지 길거리의 풍경이
궁핍하고 사람들 모습이 무기력하게 보였다면
오늘의 모습은 사는 모습이 활기차고
지난 모습보다는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도로는 편도 1차선, 왕복 2차선으로
우리의 지방도 수준이지만
제법 어제까지와는 달리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에 보이는 모습에는
강가나 물이 많이 흐르는 지점에서는 빨래터가 있어
커다란 빨래를 세탁하여 널어 놓은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가 있다
상점과 거리의 풍경...
작은 마을이지만 그래도 분주해 보인다
인도에서는 소는 신성시 하여
소들은 길거리에 주인 없는 소들이 활보하고
소들을 팔고 사지 않는 소들의 천국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목하여 키우는 주인이 있는 소들이 많았으며
소를 때리는 장면도 목격하였는데
인간 사는 동네는 다 똑같은 것 같다
다산 강(Dhasan River) 다리에 진입하는데
많은 인파들이 몰려가며 몰려들 있다
이 곳도 축제가 열리고 있는 현장이라 한다
다리 밑을 보니 다리가 아닌 강둑이 보인다
저 둑이 강을 건너는 보행자 도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축제 현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 가는 것 같다
인도에서는 이 시기에 곳곳에서 많이 지역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가며 자주 목격되는 장면으로
공동 수도에서 음식물 씻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목욕하고
인도의 생활 상을 어느정도 엿볼 수가 있는데
집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편리함에 빠진 우리의 생활 상...
다시 한번 되 집어 생각해 보게 한다
염소 떼를 몰고 간다
앞에서 자식인 듯한 젊은이가 길잡이를 하고 있고
노인 듯한 사람이 염소 떼 뒤를 쫒고 있다
비가 온 듯 도로가 젖여 있다
지금까지 차창 밖으로 보았던 인도의 거리의 풍경들은
포장이 안 된 대부분의 도로 모습으로
비라도 쏟아지고나면 이처럼 질퍽질퍽 도로로 변한다
거리 모습이 시장으로 보이는데 시장이 열리기 전 인가보다
쥐불이라도 놓고 있는지
사람들이 모여서 불을 지피고 있다
소똥으로 땔감을 만들어 건조시키고 있다
파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로가에서 이런 장면도 자주 목격되는 풍경이다
마우라니푸르(Mauranipur)부근을 지날때는
시장이 열기 전 이었는데
바루아 사가르(Barua Sagar) 부근에 오니
시장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잔시(Jhansi)가 가까운 반구완(Banguwan) 부근이다
도시가 가까운 외곽 지역에는
많은 천막촌이 형성되어 있음을
인도 여행을 하면서 종종 보게되는 장면 중의 하나이다
카주라호에서 잔시로 가던 중 반구완(Banguwan)에서
좌회전하여 약 7Km 정도 들어가면 오르차(Orcha)에 다다른다
카주라호에서 오전 10시20분에 출발하여 4시간30분을 달려
오르차에 도착 시간은 오후 2시50분을 지나고 있었다
위의 사진은 오르차 바자르(Orcha Bazar)의 거리 모습이다
오르차는 인구 약 2000명 정도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지만
중세의 궁전과 사원들이 산재되어 있어
여행자들에겐 매력이 있는 곳이라 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오르차 고성 반대편으로 음침하면서도 웅장한 고성이 보인다
비슈누(Vishnu) 신을 모시는 힌두교 사원인
차투르부즈 사원(Chaturbhuj Mandir)이라 한다
875년경 구르자라 프라티하라(Gurjara Pratihara) 왕조시절에 세워졌다고 한다
수학에서 "0"을 처음 사용한 나라가 인도라고 하는데
이 사원 벽에는 "0" 이라는 심볼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차투르부즈 사원 반대편으로 오르차(Orcha) 고성이 보인다
17세기 후반 오르차(Orcha)는 화려한 전성기인 황금시대를 누린적이 있었다고 한다
1602년 당시 이 곳 오르차의 분델라 왕국(Bhundela Dynasty)의 종주국이였던
무굴제국의 수도 아그라(Agra)에서 아들 살림(Salrim) 왕세자가
악바르 황제가 원정을 나간 사이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라고 선포하였는데
원정을 나갔던 아버지인 악바르 황제가 돌아와 평정하게 된다
반란에 실패하고 아버지에게 쫒기게된 살림 왕자는
이 곳 오르차(Orcha)로 도망을 와
"나중에 보답할테니 숨겨 달라"고 한다
분델라의 마하라자였던 비르 싱 데오(Bir Singh Deo) 왕은
고민하다가 도박을 하는 마음으로 숨겨 주었다
악바르 황제에게 들키면 왕의 자리뿐만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
그런데 3년 뒤인 1605년 악바르 황제가 죽게되고
도망자였던 살림 왕세자가 황제인 제항기르(Jehangir)로 등극하게 된다
이 때부터 지방의 소국이었던 분데라 왕조는
제항기르 황제의 비호 아래 급격히 성장을 하며
잔시의 성을 포함해 55개의 왕궁과 성을 짓는
화려한 전성시대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특권은 오래가지 않았다
제항기르가 죽고 샤자한(Shah Jahan)이 황제가 되자
특권이 사라지며 쇠락의 길을 걷게 되자
다시 한번 도박으로
1627년 무굴제국에 반란을 도모하다가
당시 샤자한 황제의 아들 13살이였던 아우랑제브에게
처참하게 패하여 멸망하였다고 한다
오르차(Orcha)라는 지명은
"은둔의 땅" "숨겨진 땅"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오르차(Orcha) 성은
1531년 오르차로 도읍을 옮긴
분델라 왕조의 루드라 프라타브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마두카르 샤가 완공하였다고 한다
오르차 성의 제항기르 마할(Jehangir Mahal)은
1602년 반란에 실패하고 악바르 황제로부터 피신 온 살림 왕세자를 위해
자신이 거주하는 궁전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당시의 분델라 왕조의 마하라자 였던
비르 싱 데오(Bir Singh Deo) 왕이 지은 궁전으로서
총 5층의 132개 방으로 이루어 져 있으며
□ 자의 궁전으로 입구를 드러서면 중앙에 큰 정원이 있으며
옥상에도 올라가서 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어 옥상 위에서 오르차 지역을 관망할 수 있었다
제항기르 마할에 들어서 북쪽으로 난 베란다에서 바라보니
허술하게 보이는 건물과 정원이 보인다
라이 프라빈 마할(Rai Praveen Mahal)로서
1500년대 말 인드라니(Indrani) 왕이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던
그의 후처를 위해 지은 궁전으로
물을 주지 않아도 사시사철 푸름을 간직하는 신비한 정원이라 하였으나
하지만 발굴 결과 땅 밑으로 수로를 설치하여 그렇다는 신비함을 벗었다고 한다
또한 인드라니 왕의 후처는 악바르 황제에게 선물로 받쳐질 만큼
미모와 예술적으로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고 한다
제항기르 마할을 둘러보며 3층 베란다로 나오니
라즈 마할(Raj Mahal) 넘어로 저 멀리
차투르부즈(Chaturbhuj) 사원이과 람 라자(Ram Raja) 사원이
눈에 들어 온다
제항기르 마할의 남쪽 창문에서 밖을 바라보니
한적한 궁전의 정원이 보인다
예전에 이 곳을 다스리던 마하라자(Maharaja:토후국 왕을 지칭)가
이 곳에서 이 처럼 창 밖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착각에 빠져 본다
한바퀴를 돌아 동쪽 베란다에서
제항기르 마할로 들어서기 전에 가까이 가서도 궁금했던 건물을 바라 본다
이 곳의 왕이 타던 낙타들을 보관하는 마굿간으로
카멜 스테이블즈(Camel Stables)라고 한다
저 곳 멀리에는 나무들 넘어로
베트와 강(Betwa River)이 희미하게 보인다
제항기르 마할에서 나와 라즈 마할로 가던 중
호텔과 레스토랑이 보인다
제항기르 마할의 부속 건물인 쉬시 마할(Sheesh Mahal)인데
역사적인 문화재로 보존되어야 할 궁전 내부에서
장사를 하도록 허가를 내준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다
쉬시 마할 호텔은 인도에서 가장 저렴한 궁전 숙소로서는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라 한다
라즈 마할(Raj Mahal)은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왕궁으로서
1531년 오르차로 수도를 옮긴 분델라 왕조의
루드라 프라타브(Rudra Pratab)에 의해 건설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마두카르 샤(Madhukar Shah)가 완공한 궁전이라 한다
라즈 마할에서 볼만한 곳은 왕의 침실이라고 하는데
왕의 침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려한 벽화로 치장되어 있어 눈길을 사로 잡는다
벽화를 바라보며 무슨 내용인가를 상상해보며
당시에는 무굴제국의 이슬람이 번성하여
힌두사원을 탄압하고 파괴하던 시대인데
이슬람식 왕궁에 힌두 신들이 나오는 벽화로 장식되어 있어
그때의 시대상에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때 현지 가이드는 이 벽화에는 에로틱한 장면도 있으니
찾아보라며 음흉한 미소로 말하고 자리를 뜬다
라즈 마할의 중앙 홀인데
당시의 궁중 무희들이 춤을 추던 장소라고 한다
비록 오랜세월 속에 궁전의 색깔이 변하여 낡어 보이지만
당시엔 왕과 왕비 일행들이 위쪽 베란다에서
우아하고도 고고한 표정을 지으며
지켜 보고 있는 장면도 상상해 본다
오르차 성의 라즈 마할을 마저 둘러보고
성 밖으로 나오던 중 성문이 눈에 들어 온다
쇠 꼬챙이로 장식을 해 놓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적이 코끼리 떼로 공격을 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어 무기라고 한다
성에서 나와 버스로 이동하며 오르차 마을의 중심 도로인
오르차 바자르(Orcha Bazar) 거리를 걷던 중 골목길 끝으로 사원이 보인다
람 라자 만디르(Ram Raja Mandir)로
항상 푸자(Puja)를 드리는 인파로 넘치는 사원으로
마두카르 샤(Madhukar Shah)의 왕비였던 라니 가네샤(Rani Ghanesha)를 위해
아요디야(Ayodiya)에서 오르차까지 옮겨 왔다는
라마 신상이 있다고 한다
오르차 바자르(Orcha Bazar) 거리에
소 한마리가 유유자적하고 있다
고삐가 있는 모습으로 주인이 있는 소가 아닌가 생각되는데
돌보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소 홀로 서서히 지나쳐 간다
소의 지상낙원은 지상낙원인가 보다
오르차에서 17Km 떨어진 잔시(Jhansi) 기차역으로 이동하였다
이 곳에서 17:59 기차를 타고 괄리오르(Gwalior)로 가기 위하여 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짐을 기차역 안의 기차 타는 곳까지 옮겨 주는
포터들이 버스의 짐 내리는 곳에서 대기한다
인솔자는 그들과 흥정을 한참하더니 짐을 모두 맡기라고 한다
짐 하나당 2$을 부르는 것 같은데
토탈 얼마에 계산한지는 내가 지불하는 것이 아니기에 모르겠다
잔시 역사 안으로 들어와
기차탑승 시간까지는 약 50분 정도 여유가 있어
이쪽 저쪽을 기웃거려 본다
역사내의 수퍼, 대기시간 보내는 곳, 화장실 등..
수퍼는 달러는 취급 안하고 현지 화폐만 받으며
대기시간 보내는 곳은 남자실, 여자실 별도로 있으며
남자실에는 여자도 들어 올 수 있으며
화장실은 그 안에 각각 별도로 있었다
기차를 타는 플랫홈으로 이동하여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 어린애들이 몰려와 손을 벌려 구걸을 한다
반응을 안해주자 드러눕고 업드리고 하며 어설픈 쇼(Show)를 해댄다
노력이 가상하여 어쩔 수 1$를 주어 보낸다
괄리오르행 기차는 정확히 오후 17:59에 플랫홈으로 들어 온다
짐을 선반에 올리고 좌석을 바라보니
좌석이 우리의 기차(2+2)와 조금 다르게 3+2석으로 되어 있었다
내 좌석은 6호차 2번으로
문 바로 옆에 있어 2좌석 뿐인데 1번이 없어
홀로 앉는 편안함을 맛보는 시간이 되었다
날도 저물어 차 창밖도 볼 일이 없어
눈을 감고 있으려 하니
간식과 차를 즐기라고 쟁반에 뜨거운 물과 함께 가지고 와 내 앞에 내민다
기차는 어설퍼 보이는데 이런 서비스도 받아 볼 줄이야...
우리나라 KTX 열차에서는 이런 서비스가 없는데...
괄리오르 역에 도착한다
잔시(Jhansi) 역에서 괄리오르(Gwalior) 역까지는 약 100Km인
1정거장으로 1시간10분 정도가 소요되어
도착한 시간은 저녁 19시1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호텔로 이동하여 간단히 저녁식사를 마친 후
술한잔 하는 4명이 가이드를 부추겨 밖으로 나온다
어두 컴컴한 도로는 음산한 기도 있지만
우리는 괄리오르 역전 근처까지 걸어 2층에 있는 술집을 발견한다
사파리 비어 바(Safari Beer Bar)라는 술집으로 들어 갔는데
거기서 먹을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그곳에서 맥주 5병과 양주 1병을 사서 다시 호텔로 돌아와 분위기를 즐긴다
..........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컨디션은 그리 좋지는 않다
오늘 이 곳의 일정은 괄리오르 성(Gwalior Fort)을 본 후
아그라(Agra)로 이동할 예정이다
괄리오르 성(Gwalior Fort)은 천년의 역사를 지닌 성으로서
5세기경 라지푸트의 왕자 수라즈 센(Suraj Sen)이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토마르 왕조의 만 싱(Man Singh) 왕이 통치하던
1398년 경에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성 안에는 인도에서 유명한 사립 학교인 신디아 스쿨(Scindia School),
6개의 궁전, 3개의 힌두 사원, 1개의 시크교 사원 등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5세기경 수라즈 센(Suraj Sen) 왕자는 나병에 걸려
왕궁에서 쫒겨나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나
괄리오르에서 힌두교 성자인 괄리파(Gwalipa)를 만나
치료를 받고 완쾌가 되었으며
이름도 수한 팔(Suhan Pal)이라고 개명하였다고 한다
힌두 성자는 또 예언을 하기를
"수한 팔이 곧 왕국을 세울 것이며 팔(Pal)이라는 성을 쓰는
그의 왕국은 영원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성자의 예언대로 83대에 까지 이어져 오다가
1232년 수한 팔(Suraj Sen)의 84대 자손이 갑자기 성을 바꾸었는데
그 시기 북인도를 제패한 델리의 이슬람제국(1206~1526년)
2번째 술탄(Sultan)인 일투투미쉬(Iltutumish)의 군대가 쳐들어 오자
11개월의 항전 끝에 패하게 되어 수한 팔 왕조는 멸망하였다고 한다
만 싱 팰리스(Man Singh Palace)는
토마르 왕조의 마하라지였던 만 싱(Man Singh)이 지은 궁전으로
1486년 공사가 시작되어 1516년에 완공한 궁전이라 한다
외벽이 화려한 타일과 그림 때문에
페인티드 팰리스(Painted Palace)라고도 한다고 한다
괄리오르 성은
높이 100m의 낮은 구릉 위에 둘레가 3Km에 달하여
괄리오르 시내에서 보면 웅장하게 보인다
괄리오르 성에 들어오는 입구는 2곳으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남서쪽에 있는 우르바이 게이트(Urbai Gate)로 들어 왔는데
자유 여행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괄리오르 역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위 사진에 보이는 북동쪽의 포트 게이트(Fort Gate) 아래 쪽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 온다고 한다
1093년 지어진 사스바후 사원(Sasbahu Mandir)은
힌두교의 비쉬누(Vishnu) 신에게 봉헌된 사원이다
사스바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뜻으로
위의 사진은 시어머니(Sas) 사원이다
사스(Sas)는 시어머니고 바후(Bahu)는 며느리라고 한다
시어머니 사원 내부 모습으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해 놓은 모습이
며느리 사원에 비교해
시어머니의 위세를 나타내는 듯 하게 지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며느리(Bahu) 사원은
시어머니 사원에 비교해 작은 사원이다
시어머니 사원 옆의 성벽 가까이 있는 사원으로
이 사원을 보기위해 기단에 올라 서자
매서운 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성 밖에서 불어오는 쌀쌀한 모든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이 사원은
사원 내부에서도 바람을 피하기 어려운
시집살이 애환이 묻어나는 듯한 생각이 든다
사스바후 사원은 괄리오르 성 내에서
동쪽 성벽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성벽 끝은 아득하게 보인다
괄리오르 성 내에 있는
대리석으로 지어진 시크교 사원은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 사원의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터번을 쓰고 있다
여기서 일 할 수 있는 사람은 시크교도에게만 일이 맡겨진다고 한다
텔리 카 만디르(Teli Ka Mandir)는
사스바후 사원처럼 비쉬누 신에게 봉헌된 사원으로
9세기 경 지어진 괄리오르 성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 한다
높이 30m에 지붕은 남인도 드라비디언(Dravidian) 양식이고
그 이외의 장식은 인도 아리안(Aryan) 양식인
혼합된 양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예전에 왕이 결혼을 하면 부부가 함께 몇 일간 이 곳에서 지내야만 했다고 한다
괄리오르 성에서 나온 버스는
아그라(Agra)를 향해 바로 출발을 한다
괄리오르에서 아그라까지 거리는 약 125Km로서
시간은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괄리오르 성에서 아그라를 향해 출발한 시간은 오전 10시40분.....
괄리오르에는 현재까지도 중심세력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마하라지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신디아(Scindia) 가문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1754년경 라노지 신디아(Ranoji Scindia)가
지배권을 인정받아 왕국의 기초를 세운 이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1803과 1818년 영국에 많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했고
18040년부터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1857년 세포이 반란이 일어났을때 신디아(Scindia) 가문은
잔시(Jhansi)의 여왕인 라니 락쉬미바이가 이끄는 독립군을 격퇴시키고
영국에 충성하여 식민지 시절 자유로운 정치적 독립을 보장을 받았다고 한다
1948년 독립한 네루 정부시절부터 주지사 연임에 성공하는 등
마하라지 후손으로서
현재까지도 정치적 기반이 대단한 신디아(Scindia) 가문이라 한다
신디아(Scindia) 가문은
현재도 괄리오르 성에서 남쪽 시내에 위치한
자이 빌라스 궁전(Jai Vilas Palace)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자이 빌라스 궁전은 마하라지 였던
자야지 라오 신디아(Jayaji Rao Scindia)가
버킹검 궁전, 베르사유 궁전, 그리스 신전을 둘러 본 뒤
다양한 건축 양식을 혼합하여 건축하였다고 하며
현재도 후손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일부만 개방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는 버스에서도 보지 못하고 아그라로 향한다
괄리오르는 또한 '인도 성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미야스 탄센(Miyas Tansen)의 고향이라고 한다
그는 무굴제국의 제3대 황제 악바르(Akbar) 시대(1556~1605)에
궁정 음악가로 활동하였는데
힌두교 성자에게 교육을 받은 그가 노래하면
땡볕 가뭄에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내리고
마른 하늘에 번개와 벼락이 떨어지며 불을 내는
신묘한 음악가로서
악바르 황제가 가진 9개 보물 중의 하나로 여겼다고 한다
아그라(Agra)에 거의 도착하고 있는것 같다
아그라는 인도의 역사상 3번째 수도였던 곳으로
15~16세기 무굴제국 시대에 약 150여년을 정치, 행정, 경제 중심지로
번성 하였던 곳이며
또한 아그라(Agra)는 타즈 마할(Taj Mahal)이 있는 곳으로
인도의 수도 델리(Delhi)와 핑크시티로 유명한 자이푸르(Jaipur)와 함께
인도의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을 이루는 도시로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곳이라 한다
무굴제국 시대 아그라(Agra)는 인도 전역을 호령하던 중심지였지만
무굴제국의 멸망과 함께 그 모습은 사라지고
인구 10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우타르 프라데쉬(Uttar Pradesh) 주를 대표하는 중화학 공업단지가 있는
도시로서만 면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아그라에 도착하자 먼저 우리가 오늘 밤을 묵을 호텔로 가서
짐을 맡기고 점심식사부터 해결한다
괄리오르 성에서 10시40분에 출발하여 약 125Km를 달려
아그라에 13시40분인 3시간을 달려와 웃카르쉬 빌라스 호텔에 도착한 것이다
점심식사 후 아그라성(Agra Fort)으로 간다
야무나 강(Yamuna River)가에 있는 아그라 성은
무굴제국의 제3대 악바르(Akbar: 1556~1605) 황제가 1566년 세운 성으로서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져 '붉은 성'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성벽은 20m 높이이며 내부는 2.4Km나 된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남쪽에 위치하여 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아마르싱 문(Amer Singh Gate)으로 향한다
아마르 싱 게이트(Amer Singh Gate)의 이름은
샤자한(Shahjahan) 황제 때
라즈푸트 출신의 영웅인 아마르 싱 라토르(Amer Singh Rator)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1644년 황제의 뜰 안에서 왕궁의 회계사였던
사라바트칸이 자신을 조롱했던 아마르 싱 라토르를 모욕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것은 무갈군대와 아마르 싱 라토르와 전쟁을 일으키는
결과를 발생하게 하였다
그 때 아메르 싱 라토르가 탄 말이 요새의 높은 벽을 뛰어 넘게 되는데
말은 반은 도랑에 반은 길에 걸쳐 죽게 되는데
그 지점이 아마르 싱 문이 있는 곳으로
그의 충성스런 말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아마르 싱 게이트를 통과하니
다시 거대한 성벽과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 나온다
예전에 밖에 있는 성벽 쪽에는 큰 도랑을 파서 물을 가득 채워서
많은 악어를 풀어 놓아
적들이 접근을 못하도록 하였으며
문을 통과하더라도 또 안쪽에 이처럼 성벽이 있어
철옹성으로 만든 구조로 보인다
조그만 안쪽 성문을 통과하니
또 경사로 통로가 나오는데
양쪽 벽에는 중간 중간 기름을 쏟아 부을 수 있는 홈들을 파 놓아
전시에 안으로 쉽게 공격해 들어 오지 못하도록
이중 삼중으로 방어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경사 길을 올라서니
제항기르 팰리스(Jehangir Palace)가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악바르(Akbar) 황제가 어렵게 얻은 아들인
살림(Salim:훗날 제항기르황제) 왕자를 지은 궁전으로
힌두 양식과 아프가니스탄 양식의 건축 기법을 혼합하여 지어진 궁전이라 한다
그런데 살림 왕자는1602년 아버지 악바르 황제가 원정을 나간 사이
황제자리를 찬탈하려다가 실패하고 쫒기어
오르차(Orcha) 성으로 몰래 피신하였다가 3년뒤
1605년 악바르 황제가 죽고 난뒤 돌아와 황제로 등극하였다고 한다
제항기르 팰리스의 4면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서쪽 면은 메카를 향한 개인 신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북쪽 면은 대화의 장소로
남쪽 면은 그림을 그리는 방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동쪽으로 나 있는 베란다에서
타즈 마할(Taj Mahal)이 보인다고 하여
안개로 인해 보이지 않는 타지 마할 방면으로 무대포로 디카를 눌렀는데
사진을 확대 해보니 타지 마할이 뿌였게 나타났다
타즈 마할은 이곳에서 2.5Km 떨어진
야무나 강(Yamuna River)가에 위치하고 있다
황제의 접견실처럼 보이는데
황제와 황후 일행들이 머물던 장소라고 한다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황실 내부로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인 샤자한(Shahjahan)이 세웠다고 하는데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는 '포로의 탑' 뜻을 가진 궁전으로
샤자한이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에게
1658년 황위를 찬탈 당하고
이 궁전 한쪽 끝 조그만 방에 유폐되어
병들고 늙은 몸으로 아내인 뭄타즈마할(Mumtaj Mahal)의 묘가 있는
타즈 마할(Taj Mahal)을 바라보며
죽은 아내를 8년 간을 그리워 하다가
그의 사랑하는 딸 자한아라(Jahan Ara)의 무릎에서
1666년 쓸쓸히 숨을 거두웠다고 한다
이 곳이 샤자한(Shahjahan)이 말년을 죽을 때까지
8년을 갇혀 지내던 장소라고 한다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와 갈등의 시작은
샤자한은 제위시절 타즈마할, 무삼만버즈, 디와니카스 등
많은 건축물을 짓었는데
그로 인한 국고의 탕진이 많아지자 불만을 가지게 되었는데
아우랑제브는 1658년 형 다라시코(Dara Shikoh)와 싸움에서 이긴 후
황위를 찬탈하고 아버지를 무삼만버즈 한쪽 방(위 사진) 에 가두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못하도록 하면서 학대를 하였다고 한다
학대의 예로는 한 여름에 아그라 성 옆으로 흐르는
야무나 강물을 막아 고이게 한 후
짠맛 나는 우물물을 마시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갇혀 지내는 이 곳에서 그나마 아내가 잠들어 있는
타즈 마할(Taj Mahal)은 바라다 보여
황위를 아들에게 빼앗기고 유폐되어 사무치는 한과
부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매일매일 타즈마할을 바라다 보다 쓸쓸히 죽어 갔다고 하니
권력의 무상함과 더불어 마음속에선 무언가 모를 연민이 느껴 지는것 같았다
이 곳은
전쟁시 궁전을 보호하던 공간이다
군인들이 대기하는 곳이다 말들이 많았는데
코끼리를 방목하던 곳이라 한다
디와니암(Diwan-i-Am)은
대중을 위한 강연장으로 악바르 대제에 의해 건축되었는데
처음에는 목조 구조물이었으나
1628년 그의 손자 샤자한 황제가
붉은 사암으로 재건축하고 하얀색으로 회칠을 하였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공식적인 접견 장소와
또한 사무적인 일이나 민원이나 탄원을 듣던 장소로 사용 되었다고 한다
디와니암 앞 정원에는 작은 묘 하나가 있었다
궁전 안에 인도인 묘가 아닌 서양인 묘라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무굴 제국이 멸망하고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많은 파괴와 도난이 자행되었는데
여기에 묻힌 영국인 존 러셀 골빈(John Russel Golvin:1807~1857)이
아그라 성을 현재까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켜냈기 때문에 이 곳에 잠들 수 있었다고 한다
아그라성의 내부를 돌면서
악바르 대제(3대)와 그의 아들 살림(Salim: 제항기르 4대황제) 왕자와의 불화,
샤자한 황제(5대)와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6대)와의 불화에서 오는
최고 권력자들의 불행했던 역사 이야기를 듣고
성 밖으로 나오려는데
암울했던 이야기의 분위기 탓인지 하늘이 어두워지며 약한 빗방울을 뿌려댄다
숙소로 가기 전 기념품 샵에 들렸다 가자고 한다
기념품 샵은 고가의 물건들만 보인다
금박 실과 보석이 박힌 양탄자, 옥으로 만든 병 등등...
뒷면에 붙은 가격표를 보고
눈쇼핑으로 끝을 낸다
양탄자가 최소 1800$, 3600$....
어젯밤 컨디션이 안 좋아
저녁식사도 하지 않고 잠을 잣는데
아침의 컨디션은 많이 좋아진 것 같다
오늘 첫 일정은 타즈마할(Taj Mahal)을 보는 일정이다
가이드는 타즈마할로 가기 전
주의사항을 필히 지켜 주기를 부탁한다
신분증만 휴대하고
베낭이나 가방을 휴대하지 말 것
휴대용 가방에 젤류나 음식물, 식수, 라이터, 칼, 립스틱 등을
휴대하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한다
위의 사진은 멀리 보이는 타즈마할로 들어가는 동문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다
타즈마할 동문 입구에 서니
남자 줄, 여자 줄 별도로 서서 입장하는데
관광지 치고 검문 검색을 심하게 한다
나는 허리에 메는 휴대용쌕에 들어 있던 고추장을 차에다 빼 놓고 왔는데
그런데 진공포장된 가루용 소화제가 2개가 들어 있었다
1차 금속탐지 검색대를 지나니
2차 휴대품 검사하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쌕을 뒤지더니 이게 뭐냐고 인도말로 묻는다
이머전시 메디신(Emergency medicine:비상약품)이라고 하는데
쳐다보고 쳐다보고 하더니 통과시켜 준다
동문에서 검문 검색을 마치고
넓은 광장(앞뜰)으로 걸어 가니
타즈마할로 들어가는 정문이 웅장하게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정문을 들어서며 보는 타즈마할은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인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타즈마할인데
세계 건축사의 불가사의로 일컬어지는 건축물로서 인도인의 자랑이라는 것이다
타즈마할(Taj Mahal)은 샤자한(Shahjahan) 황제와
아름다움과 총명한 지혜를 겸비하여
샤자한이 무척 사랑하였던 그의 부인 뭄타즈마할(Mum Taj Mahal)이
14번째 아들 가할아라베굼(Gauhar Ara Begum)을 낳은 후
불치병에 걸려 죽어 함께 잠들어 있는 무덤이다
뭄타즈마할(Mum Taj Mahal)이 임종을 얼마 안 남겨 둔 시점에
남편 샤자한 황제에게 유언하기를
"세상이 갈라 놓을 수 없는 사랑의 증거로 기념비를 무덤에 지어 줄 것"을
부탁하고 1629년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래서 타즈마할 공사가 1631년 12월 공사가 시작되어
1648년에 공사가 완공되었는데
매일 2만 여명의 노동자와 1000 여마리 코끼리가 동원되어
22년만에 마무리 되였다고 한다
위 사진은 타즈마할의 좌측에 있는 건물로 이슬람 사원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타즈마할 주요 건축 재료인
흰대리석은 라자스탄 나가울 지역의 마크라나에서,
붉은 석은 돌푸르와 파테푸르시크리에서,
황색과 검정대리석은 날베즈와 챨코에서 공급 받았다고 한다
위 사진은 타즈마할 내의 묘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저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절대 금지하고 있다
타즈마할 본당에 들어 가면
샤자한(Shahjahan) 황제와 그의 부인 뭄타즈 마할(Mum Taj Mahal)의 묘가
우물처럼 파인 밑으로 나란히 보이는데 가묘(假墓)라고 한다
진짜 무덤은 본당 지하에 은폐되어 있는데
도굴을 막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안은 조명이 없어 어두침침하였지만
가묘가 있는 우물처럼 파인 벽면에 박힌 준보석들이
반짝반짝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가묘 주위에는 소원을 빌은 화폐와 동전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타즈마할의 장식에는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과
반 투명한 대리석 재질을 우아하게 나타내는 대리석 조각으로 표현하였다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은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다른 색 돌이나
준보석을 박아 넣는 기법으로 이탈리아 피렌체 등에서
볼 수 있는 기법으로 아침, 낮, 저녁으로 각기 빛을 발한다고 한다
야무나 강(Yamuna River)을 끼고 저 멀리 아그라 성(Agra Fort)이 보인다
또 아그라 성의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가 보인다
황위를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찬탈 당하고 유폐되어
아픈 몸으로 이 곳을 바라보며
죽은 부인을 애타게 그리며 죽는 그 날까지
8년을 매일 같이 하염없이 이 곳을 바라 보았을
샤자한(Shahjahan) 황제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인 샤자한(Shahjahan) 황제로부터 황위를 찬탈하고
온갖 치욕과 박해하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 황제가
샤자한이 죽은 후 이 곳에 묻힐 수 있게 하였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호의라 할까?
살아 생전 그처럼 애달프게 그리워 하던
그의 부인 뭄타즈 마할(Mum Taj Mahal)이 누워 있는
이 곳 타즈마할(Taj Mahal)에서 함께 잠들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타즈마할의 우측에 있는 건축물로
자마트 카나(Jamat Khana)라고 하는데
당시에 영빈관으로 사용되던 건축물이라 한다
샤자한은 그토록 사랑하였던 부인 뭄타즈 마할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의 언약으로
세계 역사상 유래없이 저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무덤을 만들어 놓아
현대에 와서 전세계에서 저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 오게 하였는데
당시에 샤자한의 권력의 무상함에서 사랑과
아들에게 배신 당한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애려 오는듯 하다
타즈마할을 보고 다시 동문 매표소 밖으로 나오는데
말이 끄는 한껏 치장한 통가(Tonga)가 다가온다
타즈마할과 2Km 정도 떨어진 아그라 성을 오가는 마차라 한다
여행의 색다른 풍미를 느끼기 위한 여행자들이
즐겨 탄다고 한다
타지마할을 보는 것으로
아그라(Agra)에서 일정을 모두 마쳤다
타지마할 내에서 3시간 씩이나 관광을 하였는데
가이드 왈 인도 여행에서 최고의 상징물이기에 시간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다음 일정지인 자이푸르(Jaipur)로 가려는데
일행들이 히말라야 기념품점에 들리자고 제안을 한다
히말라야 기념품이 뭐지?
일행들은 치약, 화장품류 등이 유명하고 좋다고 사야한다고 한다
마침 나는 치약이 떨어졌는데...
치약과 기념품으로 주석 소주잔을 샀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자는 화장품류, 남자들은 코끼리 기념품을 많이들 산다
코끼리가 행운을 가져다 준다나...
히말라야 기념품점에서 나와 자이푸르로 향한다
아그라(Agra)에서 자이푸르(Jaipur)까지 거리는 약 270Km 정도로
5시간 정도 소요 된다고 한다
아그라에서 출발하는 시각은 낮 12시40분...
도로 사정은 왕복 4차선으로
지난 날 이동할 때 보다는 차 흔들림이 적으며
속도도 더 빨라진 느낌이다
아그라를 여행하면서
몽골의 징기스칸의 후예들이 대단했음을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그라(Agra)를 기반으로 북인도 대륙을 호령했던
무굴(MUGHALS) 제국은 1526년 바부르(Babur) 황제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는 티무르(Timur) 족의 직계 후손이었다고 한다
바브르(Babur) 황제의 조상인
아미르 티무르(Amir Timur:1336~1405년)는
징기스칸의 직계자손 몽골인과 투르크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열인이였다고 한다
그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면서
전투에는 패한적이 없다는 맹장으로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건국한 시조라 하는데
그의 명성과 함께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그러한 그의 직계 자손이었던
바브르(Babur)는 한 여인에게서 인도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서
인도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고
보고 싶은 마음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으나 실폐하고
5번째 침공으로 성공하여 무굴제국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에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흥미를 끌만한 것이 없었다고 한다
버스가 달리던 중 간이 휴게소에 잠시 정차하였는데
원숭이 떼들이 많이들 몰려 다닌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텐트촌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의 삶의 행복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2013년도 UN에서 발표한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156개국 중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가
1위 덴마크(GDP: 인당 6위 57,998$, 국가 34위 3,242억$)이고
그 뒤를 북유럽쪽이 뒤를 이었으며
17위 미국(GDP: 인당 9위 52,893$, 국가 1위 16조7,249억$)
27위 카타르(GDP: 인당 2위 104,655$, 국가 52위 1,999억$)
30위 싱가포르(GDP: 인당 8위 52,917$, 국가 37위 2,873억$)
41위 대한민국(GDP: 인당 33위 23,837$, 국가 15위 1조1,975억$)
43위 일본(GDP: 인당 23위 39,321$, 국가 3위 5조0,072억$)
93위 중국(GDP: 인당 87위 6,569$, 국가 2위 8조9,393억$)
인도는 111위(GDP: 인당 151위 1,414$, 국가 11위 1조7582억$)라
조사되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을 느끼며 사는가 순위는
그 나라의 국가 GDP 순위보다
그 나라 사람들의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경제 소득이 있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삶의 행복이 연관되어 지는것 같다
개인 개인이 잘 살고 볼 일이다
차창밖을 바라보니
버스 정류장인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염소떼를 몰고 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앞에서 염소떼를 이끄는 사람은 소년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같으면 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뛰놀 나이인데....
저 정도 염소를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학교에 보낼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아그라에서 출발한지 2시간 반이 지나가는데
목적지까지는 아직 반도 달려오지를 못한 것 같다.
도로는 좋은데
버스는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어
피곤해지며 졸음이 몰려 온다
잠시 졸다가 눈을 떠 지도를 보니
4분의 3정도 달려 온것 같다
인도에 와서 창밖으로 자주 목격되는 풍경은
내가 어린 시절 우리나라 1960년대를 보는 듯 하며
삶이 곤궁해 보이는데
내가 겉만 보고 그렇게 느끼는 걸까?
목공소가 늘어서 있다
인도에 와서 지나치며 본 것은 장사하는 노점이나 가게들뿐 이었는데
그래도 일하는 사람들의 활력소가 느끼는 공간인것 같다
자이푸르(Jaipur)에 5분의 4정도 다다른
다우사(Dausa)시 외곽의 마두반 비하르 콜로니(Madhuvan Vihar Colony)를
버스는 지나가고 있는 중 이다
거의 도착한 모양이다
자이푸르로 빠져나가는 마지막 고속도로 톨게이트이다
어두워져서야 자이푸르 시내에 도착한다
자이푸르 시내는 바라나시, 괄리오르, 아그라 시내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 온다
화려하고 잘사는 도시의 풍경으로 느껴지는데
이제야 친숙한 느낌으로 마음에 와 닫는다
아그라에서 12시40분에 출발하여
이곳 클락 아메르(Clarks Amer)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18시40분으로 6시간이나 소요되었다
호텔에 도착하여 방에 들어섰는데
호텔 옆에서 콘서트를 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고
노래와 연주하는 앰프 소리가 쿵쾅 쿵쾅 매우 크게 들려 온다
방에서 나와 콘서트 구경을 하러 갔는데
입장하기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호텔로 들어간다
호텔 1층 로비에서는 결혼식이 열리고 있는데
신랑 신부 옆에는 오빠로 보이는 사람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이드왈 인도에서는 이런 곳에서 결혼하려면
굉장한 부자에 속한다고 한다
호텔 9층에 바(Bar)가 있다고 하여 그 곳으로 올라간다
어두침침하여 실내로 알고 자리에 앉자는데 천정을 보니 별이 보이는 옥상이다
처음에는 시원하다는 느낌이었으나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워온다
자리 옆에는 숯불 화로가 놓여져 있고 불을 피워 주는데
나중에는 화력이 약해져 열기가 없는 듯하여 몸은 더욱 시려 온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지난 시간은 과거 여행하는 기분이였으나
음악과 함께 호텔 바에서의 이 시간은
호사를 누리는 기분으로 업되어 간다
아침이 되어 식사를 하러 1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 왔는데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가는지 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빠인듯 사람이 눈물을 보이고 신부도 눈물을 보인다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호텔을 나와 일정을 시작한다
인구가 약 150만명가 거주하는 자이푸르(Jaipur)는 사막지대에 위치하고 있지만
델리, 아그라와 함께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로 불리며
라자스탄 주(州)의 주도(州都)이자
허브 시티(Hub City)로 알려져 있는 도시라 그런지
현대적인 도시 풍경을 하고 있고
지난 타도시에 비해 윤택하게 생활하는 도시로 느껴진다
아침 7시
호텔에서 약 1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하니 구 시가지인 핑크시티(Pink City)가 나온다
인도에서는 분홍색(Pink)은 '환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영국의 에드워드 7세가 왕세자 시절인 1879년 이 곳에 방문하였을때
도시 전체를 핑크빛으로 칠하고 성대하게 환영한 것에서
핑크시티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하여 현재도 핑크빛 건물만 짓도록 하는데
이를 위반시는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먼저 눈에 띠는 건물은 하와마할(HAWA Mahal) 모습이 들어 온다
이 건물은 5층의 건물로 일명 '바람의 궁전(Palace of the Winds)'이라고도 하는데
1799년에 바깥 출입이 제한된 왕족의 여인들이
자기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시가지를 지켜보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한데 입장은 하지 않고
여기에서 40분정도 떨어진 암베르 성으로 이동한다
암베르 성(Amber Fort)은 자이푸르 시내에서 약 11Km 정도 떨어진
동북쪽 외곽 언덕 구릉지대에에 위치하고 있는데
버스로 꼬불꼬불 언덕을 오르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린다
거의 도착한 것 같은데 짙은 안개로 인해 어디에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지프(Jeep)에 4사람씩 타라고 한다
지프는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10분 정도 꼬불꼬불 오르더니 내리라고 한다
안개가 너무 진하게 끼어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디카에 잘 잡히지를 않는다
암베르 성에 오르는 방법은 코끼리를 타고 성으로 오르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성의 후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오니
넓은 제1광장이 나오며 맞으편에서
암베르 성의 정문으로서 동쪽에 있다하여 태양의 문으로 지칭되는
수라즈 폴(Suraj Pole)이 안개 속으로 흐릿하게 나타났다
이 곳 성이 있는 암베르(Amber)는
1037~1726년까지 약 700년간 카츠츠와하(Kachchwaha) 왕조의 수도로서
이슬람의 북인도 지배라는 혼란한 정국에도
번성하였는데 무굴제국의 쇠퇴기를 감지한
카츠츠와하 왕조의 자이싱 2세(Jai SinghⅡ)에 의해
자이푸르(Jaipur)로 천도를 하고 영국이 인도를 지배한 이후에도 협조자가 되어
계속적으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매표소가 성밖에 있는데 이곳은 성안에 있었다
암베르(Amber)는 '하늘'이라는 뜻으로
암베르 성(Amber Fort)은
1592년에 마하라자 만 싱(Man Singh)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150년이 지난 마하라자 스와이 자이 싱(Swai Jai Singh)에 이르러
18세기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마하라자(Maharaja=위대한Maha+왕Raja)는 지방군주를 지칭>
암베르 성을 공사가 시작할 때 마하라자(Maharaja)였던
만 싱(Man Singh)은 자신의 여동생인 조다바이를
인도북부 전역을 통치하던 이슬람의 무굴제국 악바르(Akbar) 황제와
혼인동맹을 성사시켜 왕국을 반석위에 올려 놓았다고 한다
영화에서 보면 악바르(Akbar) 황제의 첫번째 부인인
조다바이(Jodabai)는 힌두교도로서
매우 똑똑하고 현명하여 악바르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인이었으며
무슬림 세력의 견제에도
악바르 황제가 '무굴제국에서 모든 백성은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무슬림에 의해 탄압받지 않아야 한다'는 선포를 하게 한다
또한 조다바이(Jodabai) 황후는 악바르 황제에게 300명이 넘는 아내가 있었음에도
악바르의 유일한 아들인 자한기르(Jahangir) 황제를 낳은 아내이기도 하였다
코치라카 전망대가 있는 계단을 올라 문을 통과하면
제 2광장으로 들어서는데
좌측으로 디와니암(Diwan-i-am)이 보인다
종주국이었던 무굴제국의 황제인 자한기르(Jahangir)가 암베르성에 방문하려고
먼저 사자를 보내왔는데 이들에게 숨기기 위해
호화롭던 장식 위를 덧칠하여
눈가림으로 본모습을 감췄다는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맞은 편으로는 가네쉬 폴(Ganesh Pole)이라는 3층의 건물이 보인다
1640년 지어진 건물로 마하라자(Maharaja)의 공적공간과 사적공간으로
나누는 문이 있는 건물이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의 한가운데 큰문을 통과하면
사적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가네쉬폴의 가운데 문을 통과하니
마하라자(Maharaja)의 사적 공간인
쉬시마할(Sheesh Mahal)과 딜라람 정원(Dilaram Garden)이 눈에 들어온다
쉬시마할(Sheesh Mahal)은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침실이 있는 곳으로
겨울 침실과 여름 침실이 있으며
또한 12명의 왕의 여인들이 있는 방으로 가는 비밀통로가 있다
쉬시마할(Sheesh Mahal)은
암베르성에서 핵심 볼거리 중의 하나로 꼽히는데
방을 거울 모자이크 방으로 꾸며
촟불 하나만으로도 방 전체를 환하게 밝힐 수 있다고 한다
쉬시마할(Sheesh Mahal)의 기둥에 있는 조각 장식품인데
꽃 조각 같으나 손이 장식을 어떻게 가리느냐에 따라서
전갈, 코프라뱀 등이 보인다
환락의 궁전이라 불리는 수크니와스(Sukh Niwas)에서 본
딜라람 정원(Dilaram Garden)과 쉬시마할(Sheesh Mahal)이다
딜라람 정원은 마하라자(Maharaja)의 개인 정원으로
이슬람 영향을 받아 기하학적 문양의 수로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한다
쉬시마할과 딜라람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환락의 궁전인 수크니와스(Sukh Niwas)이다
수크니와스는 벽과 바닥에 수로의 물을 순환시키는 배관이 있어
무더운 여름철에 방을 냉각시키기 위한 시설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또한 수크니와스에는 12명의 왕의 여인들이
각각 기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쉬시마할(Sheesh Mahal)과 수크니와스(Sukh Niwas)를 잇는 비밀통로이다
좁은 통로를 지나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왕이 이 곳을 지나며 왕은 이여인 저여인들에게로
이방 저방으로 찾아 다닌 길이라 한다
비밀 통로를 나와 다시 쉬시마할(Sheesh Mahal) 앞을 통과하여
가네쉬 폴(Ganesh Pole) 옥상으로 오른다
쉬시마할 2층은 자스 만디르(Jas Mandir)라 하며
마하라자(Maharaja)의 개인 접견실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성 바깥을 조망하면 아주 아주 멋있다고 하는데
안개가 너무 너무 끼어서 아무것도.....ㅠㅠ
위사진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왕실의 여인들이
저 격자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수하그 만디르(Suhag Mandir)로서
저창문에서 바라보면
왕이 국빈을 접견하는 디와니암(Diwan-i-am)과 제 2광장
암베르 성을 호위하는 병사들의 사열식이 열리는
넓은 제1광장까지도 바라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안개로.... ㅠㅠ
암베르성 의 제 4광장인 수크니와스 의 알현 광장은
왕과 왕실 여인들이 쉬고 거닐던 광장이라 한다
2층에 툭 튀어나온 망루가 보이는데
이 광장 4면에 모두 있는데 그 곳은 감시하는 사람이
이 광장을 지켜보고 있던 곳이라 한다
수크와니스 알현광장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던 우측 방향에 있는
건물의 통로를 통과하니
성안의 조그만 골목길이 나오며 기념품점들이 몇 개가 보인다
골목길에는 커다란 가마솥 같은 것도 여러개 보였는데
아마도 예전에는 이쪽이 성안의 주방이나 살림을 하던 사람들이
몰려 있던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골목을 통과하여 나오니
우리가 처음에 매표소가 있던 제1광장이 나온다
제1광장에 오니 태양의 문인 수라즈 폴(Suraj Pole)을 통하여
코끼리를 타고 들어오는 많은 관광객들이 보인다
코끼리를 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마음을 접고
처음에 들어왔던 다시 후문을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니
우리가 처음에 타고 올라왔던 지프(Jeep)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프를 타고 마오타 호수(Maotha Lake)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아침 일찍 이 곳에 도착 하였을 때는
너무 짙은 안개로 인하여 호수인지를 몰랐는데
지금도 안개는 많으나 호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시간 아침 9시10분
이제 우리는 델리(Delhi)를 향하여 출발한다
델리(Delhi)는 이곳에서 약 260Km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암베르성(Amber Fort)의 관광은
많은 아쉬움으로 마음 속에 남는 것 같다
우리가 암베르성 관광을 마칠때 쯤에야
조금씩 안개가 거치기 시작하여 시야가 확보되기 시작한다
안개로 인하여 가까운 곳 이외에는 전혀 볼 수가 없었는데
그나마 조금만 일찍 흐릿하게라도 안개가 거치거나
날씨가 좋았다면 산능선 위로 이어지는
멋진 넓은 성들과 성곽이
주변 경치와 어울려진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을텐데.....
아! 안개... 안개...
자이푸르(Jaipur)는 무굴제국이 쇠퇴하여 멸망하던 시기에
라자스탄 지역의 마하라자(Maharaja)였던 자이 싱 2세(Jai SinghⅡ)가
암베르(Amber) 지역의 비좁고 갑갑한 환경 때문에
1727년 자이푸르에 계획도시로 만들어
암베르에서 천도하여서 생겨난 오늘날의 도시라고 한다
또한 라자스탄 주는 '왕들의 땅'이라고도 하는데
현재까지도 많은 마하라자(Maharaja)가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이들이 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1712년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Aurangzeb)황제가 죽고
그의 후계자들이 후계에 오르기가 무섭게 폐위되는 혼란을 거듭할 때에
무굴제국에 대항해 끝까지 독립을 지켜냈고
1857년 영국에 멸망할 때에
영국의 편에 서서 도왔기 때문이라 한다
도왔다고 라자스탄 지역의 사람들의 자부심으로
영국이 마하라자(Maharaja) 권위를 인정해 주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영국은 지방군주 세력을 정치적 상징으로 놓아두는 것이
주민을 통제하고 식민지를 통치하는 것이
매우 수월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한 후에도 영국을 도왔던
마하라자(Maharaja)의 권위가 인정되었는데 이유는
어떻게든 하나의 인도(India)를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네루와 국민회의 정부가 각 지역의 행정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마하라자 권위를 인정해 주어
현재까지도 그들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차가 많이 밀린다
델리는 인구 밀도가 높은 인도(India)의 수도(首都)라서
델리로 가는 차들이 몰려 서행하는 것 같다
소 달구지가 아닌 낙타 달구지가
우리와 반대 차도에서 역방향으로 가고 있다
바라나시나 괄리오르, 아그라 등을 여행하면서는
낙타 달구지를 보지를 못하였는데
사막지형인 라자스탄 지역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것이 아닌가 한다
차장 밖을 무심코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차도로 양떼들이 우루르 몰려들어 온다
차도 옆에는 인도(人道) 시설이 별도로 없어
이동하려면 어쩔 수 없이 보인다
델리(Delhi)가 머지 않은 것 같다
델리(Delhi)는 남쪽의 올드 델리(Old Delhi)와 북쪽의 뉴델리(New Delhi)로 구분하며
면적 1,499㎢에 인구는 약 1670만명 정도가 거주한다고 한다
2000년에 들어와서 현재 델리는
주변의 다른 도시 및 지역과 연계하여
델리 NCR 또는 델리 NCT라고 부르는 집적도시로 표시하는데
델리 NCR(Delhi NCR)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집적도시가 된다고 한다
델리 NCR는 델리를 비롯해 19개 지구로 구성되며
중심 위성도시로는 델리에서 남서쪽의 구르가온(Gurgaon), 남동쪽의 노이다(Noida),
남쪽의 파리다바드(Faridabad), 동쪽의 가지아바드(Gaziabad) 4곳이 있다
모두 합친 델리 NCR의 총면적은 43,016㎢이며
인구는 약 4,500만명 정도에 달하며
델리와 위성도시들이 연계되므로 인해
세계화에 걸맞는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구르가온(Gurgaon)시는 인구가 약 100만명 정도가 거주하는 곳으로
IT, 자동차, 제약업 등이 발달한 도시라 한다
델리(Delhi)에 거의 도착한 것 같다
델리는 인도 역사에서 5번째인 현재의 수도이다
인도의 최초의 수도는 BC2500~BC1500에 인더스 문명을 일으켰던 도시
모헨조 다로(Mohenjo Daro)로
현재는 파키스탄의 국토에 속해 있는데
카라치에서 북쪽으로 3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두번째 수도는 BC5세기~AD5세기경까지 약1000년의 북인도를 호령하였던
마가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속했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로
현재는 바라나시에서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파트나(Patna)라고 지명이 바뀌었다고 한다
세번째 수도는 무굴왕국 시대(1526~1707)에
약 150년간 수도였던 아그라(Agra)이며
네번째 수도는 영국의 식민지 시절의 수도였던
벵골만에서 154Km 정도 상류있으며 당시 제1의 무역항 이였던
콜카타(Kolkata:1772~1912년)라고 한다
델리 톨게이트(Delhi Toll Gate)를 통과하는데
사람들이 각 통과대 마다 부동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델리(Delhi)는 무굴제국 후반기의 혼란한 시기에
아그라(Agra)에서 잠시 이전해와 수도가 되었으나
영국에 의해 콜카타(Kolkata)로 옮겨 졌다가
1912년에 영국령 인도 전체의 정식 수도로 지정되어 발전하였다
델리는 올드 델리(Old Delhi)와 뉴 델리(New Delhi)로 구분되는데
올드 델리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경제중심지인 반면
뉴 델리는 행정 관청들이 몰려 있는 중심지이고 계획 정리된 도시이다
델리 시내로 진입하여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옆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니 가로수가 정원처럼 관리되고 직선화된 도로로 접어든다
외국 대사관들이 몰려 있는 산티도로(Santipath)를 지나고 있는데
이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산티도로(Santipath)가 끝나갈 무렵에서 차나캬푸리(Chanakyapuri) 지역으로
좌회전하여 들어가 조금 가다가 도로변에 내린다
현재 시각 오후 2시35분
자이푸르에서 오전 9시10분에 출발하여
델리시내 이곳까지 약 260Km를 5시간25분을 달려 온것이다
도로변에서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라체엣 앞파이레(Lazeez Affaire)라는 식당이 나온다
이곳은 인도에서 고급 식당에 속한다고
가이드는 강조하는데
검개 탄 닭고기를 덜어 나누어 주고 간다
못 먹는다고 바꿔 달라고 싸인을 보내도 '뭐가 문제냐'라는 식으로
눈만 껌벅거리고 있다
우리가 이곳 사람들에게는 행복에 겨운 항의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델리에서 첫 일정으로 야무나 강(Yamuna River)가에 있는
라즈가트(Raj Ghat)로 향한다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 앞을 지나는데
일반 사람들은 진입을 하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있었다
오늘 일정 중에 코스로 되어 있는데
지나가며 멀리서만 볼 수 있을 뿐
가까이에서 관광을 할 수 없다고 한다
델리(Delhi)는
많은 사람들이 영국이 만든 계획 도시라고 알고 있는데
인도 사람들에게는 까마득한 고대시대부터 존재한 도시라고 한다
영국이 계획한 도시는 지금의 뉴델리 중심 구역으로 일부이며
델리 자리에 세워졌던 도시는 모두 7개로
시대에 따라 각기 이름을 달리하고 있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오래된 델리(Delhi)의 옛 명칭은
3000년전의 도시로 인드라프라스타(Indraprastha)라고 하는데
델리(Delhi)가 오랜 예전부터 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북쪽이 히말라야 산맥으로 막혀있는 지형 때문으로
인도로 침입하는 수 많은 외부 침략자들이 지나야 하는
필수 통로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7개 도시 명칭 중에서 5개의 도시 명칭은
인도인이 아닌 타 민족이 붙인 도시 명칭이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델리는 외부 침략에 의해
여러 명칭으로 변하여 왔지만은
'델리(Delhi)를 점령하는자. 곧 바로 델리(Delhi)를 잃는다'라는 말이
인도인에게 구전되어 오고 있다고 하는데
오랜 기간동안 델리(Delhi)를 다스렸던 외부국가는 없었다고 한다
라즈 가트(Raj Ghat)로 입장하니
넓은 잔듸에 가족들과 나와서
평화롭고 평온하게 즐기는 모습들이 많이 눈에 띤다
조금전까지 타도시와 버스 타고 지나오며
뭔가 힘들고 곤궁하게 보인다는 느낌이 많이 있었는데...
옷을 입은 복장 모습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는 라즈가트 제단이 자리하고 있는 평지길로 가지가지 않고
라즈가트가 잘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 간다
라즈가트(Raj Ghat) 제단 주위에는
많은 인도인들의 참배객으로 줄을 잇는다고 하는데
오늘도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라즈가트(Raj Ghat)는
인도의 국부(國父)로 추앙되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화장된 곳으로서 추모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흑색 대리석 제단에는 간디가 마지막으로 한 말인
'헤이 람..(Hai Ram:라마 신이여)'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제단 앞에 분향된 꽃들은 절대 시들은 법이 없다고 하는데
연중 1000만명이 넘는 추모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간디에 대한 인도인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대단한 존경심과 사랑을 느끼는 현장을 보며 경건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라즈가트(Raj Ghat)에서 나와 바하이(Bahai) 사원으로 이동하는데
버스창 밖의 가로수 뒤로 고성이 보인다
푸라나 길라(Purana Gila) 성으로
원래는 무굴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Humayun)이
이 부근을 지배하고 있던 델리 술탄국을 내쫒고 이 성을 세웠지만
15년만에 델리 술탄국의 말기 시절 지배자인 세르 샤(Sher Shah)가
후마윤을 다시 내쫒고 개축한 성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이곳을 수복한지 6개월도 넘기지 못하고
도서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고 마는 불행한 지배자 였다고 한다
푸라나 길라(Purana Gila) 성의 현재는
관광객은 별로 없고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많이 즐기는 장소라고 한다
라즈가트(Raj Ghat)에서 버스는 남쪽으로 시내를 약 30분정도 달려
바하이(Bahai) 사원 근처에 내려 놓는다
정문 가까이에는 복잡하여 버스가 접근하기 어렵다고 한다
바하이(Bahai) 사원은 '연꽃 사원'이라고도 하는데
27개의 꽃잎을 형상화하여 신비감을 주는 사원이었다
1986년에 완공된 사원으로서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는데 신발도 맡기고 맨발로 입장하라고 한다
일행들 신발을 한푸대에 같이 넣어 맡기고 번호표를 받는데
사람들이 여기저기 몰려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제대로 맡기고 받은 건지???
줄을 서서 있는데 안내원들이 몇몇 명씩 줄을 끊는다
입장하기 전 줄을 서 있는 우리에게
안내원은 입장 시 주의사항을 알린다
사원안에서는 절대 침묵이라 하며 뛰어서도 안되고
사진 촬영은 절대 금하며 조용히 움직이라고 한다
안으로 입장하였는데 긴 의자만 줄지어 놓여져 있고 별다른 장식물은 없었다
조용히 홀로 기도하고 나오면 된다
바하이(Bahai) 사원에서 종교인 바하이교는
이슬람교에서 분파된 신흥종교라 한다
이 교는 전 인류의 형제화와 종교의 통일 및 세계 모든 국가의 통합을 주장한다고 한다
부처나, 예수 그리고 마호멧이나 모든 성인 등은
하나님 뜻을 알리기 위해 헌신한 동등한 존재이며
바하이 종교를 창시한 바하 울라(Baha Ullah:1817~1892)는
이들 중 같은 마지막 화신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원 안에서는 각자 종교에 따라 기도드리면 된다고 한다
또한 숫자 중 9를 신성 시 하여
이 바하이(Bahai) 사원도 9면체로 만들었다고 한다
바하이(Bahai) 사원을 나와 버스에 오르니 어두워진다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 앞을 지나간다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지키고 있었다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던 인도 군인들을 위한 위령탑으로
높이가 42m로 벽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8만5천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퇴근 시간인지는 모르겠으나 밀리는 차도에서
차선을 무시하고 몇 줄을 만들어 차들이 운행하는 모습이 어수선하게만 보인다
저녁식사는 올드 델리(Oid Delhi) 쪽에서 한다고 하여
이동하던 중 재래시장이 보였는데 일행들은 구경을 하고 가자고 하여
차를 세워 재래시장에 들어 갔는데
너무 엄청난 인파로 행여 놓칠세라 일행을 쫓아가기도 바쁘다
밤에 움직이는 사진이라 찍히지가 않는다
식당에 도착하여
입장을 하는데 쇼핑센터 건물이라 그런지
검색대를 통과하며 한명 한명 검사를 한다
밥 먹으러 가서 이렇게 검사 받아보기는 처음인데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이번 인도에서 마지막 여행지인
뭄바이(Mumbai)에서 테러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새벽부터 바쁘다
델리(Delhi)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오랑가바드(Aurangabad)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새벽 3시반에 모닝콜하여 4시에 공항으로 이동한다
아오랑가바드(Aurangabad)로 이동하여
엘로라 석굴(Ellora Caves)과 아잔타 석굴(Ajanta)을 관광할 예정이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Indira Gandhi International Airport)에서
새벽 05:55분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을 날아서 갈 예정으로
항공기로 짐을 붙이려는데
짐의 무게를 15Kg 이하로 제한하고 있었다
초과하면 별도의 추가비용을 내야한다고 한다
인도 비행기는 제 시간에 이륙을 안할 때가 빈번하게 있다고
이야기를 들었으나 정확하게 시간을 지켜 이륙한다
몇 일전 잔시(Jansi)에서 괄리오르(Gwalior)까지 기차를 탈 때도
시간을 안지킬 때가 많다고 하였는데
정시에 정확하게 탔었다
인도에서는 시간을 안지킨다는 말은 이제는 옛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구름위로 여명이 밝아 온다
아래는 짙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지상 날씨는 안 좋게 느껴져 오늘 여행에 대하여 걱정이 밀려 온다
수평선도 아니고 지평선도 아니고
운평선(雲平線)이라고 해야 하나
그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오랫만에 보니 장관이다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구름 아래로 내려가며 보는 태양 모습도 멋지게 만 보인다
일출을 봐서 들떠서 그러나...
밑을 보니 산이 우리나라 산하고 아주 다르게 보인다
데칸 고원(Deccan Plateau) 지역이라 그런지
산 정상 부위가 평평하게 넓게 펼쳐져 있다
기수를 낮출수록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안개가 자욱히 낀 날씨로
오늘의 일정에 지장을 줄까하는 걱정이 내심 몰려 오고 있었다
자이푸르 암베르 성에서도 안개로...하는 생각과 함께...
괜한 기우였을까?
공항 활주로에 비행기는 내려 앉는데 비행기 창 밖으로
그래도 걱정 했던 것보다는 시야가 꽤 멀리까지 잘보인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내려 부스 통로를 따라
공항 심사대로 가는데
일부는 트랩으로 내려 활주로를 걸어서
공항 심사대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처럼 앞쪽으로 내린 사람과 뒷문으로 내린 사람이
서로 다르게 가는 모습을 공항에서 보게 됐는데
특이한 장면 중에 하나인것 같았다
델리공항에서 새벽 5시55분에 이륙한지 2시간25분이 소요된
8시20분에 공항 밖으로 걸어 나오니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에서 우리와 일정을 함께 할 버스가 대기하고 있고
버스에 오르자 바로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약 29Km 정도 떨어진
엘로라 석굴(Ellora Caves)을 향하여 출발한다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는
엘로라 석굴과 아잔타 석굴로 가기 위한 관문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교통편은 그리 좋지 않은 도시라고 한다
또한 인도에서 다른 유명한 도시 못지 않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현재까지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도시라고 한다
이 도시가 생성된 시기는
BC2세기~AD2세기경 이 도시에서 남쪽으로 56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파이탄(Paithan)을 수도로 삼고 있던
사트바하나스 왕조(Satvahanas Dynasty)가
당시 그리스, 로마와 무역통로인 웃자인(Ujjain)으로 연결되는 노정(路頂)에
아우랑가바드 도시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이름은 "바위가 많은 곳"이라는 뜻의 카드키(Khadki)였으나
파테 나가르(Fateh Nagar)로 개칭되었다가
1633년 니잠샤히 왕조(Nizamshahi Dynasty)가
무굴제국의 샤자한(Shahjahan)황제의 군대에게 멸망하고
이후에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Aurangzeb) 황제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장기간 머물다가 1707년 이곳에서 죽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우랑가바드(Aurangabad)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10년경 니잠샤히 왕조(Nizamshahi Dynasty)의
말리크 암바르(Malikh Ambar)가 이 곳에 군사기지를 설치하면서 부터라고 한다
니잠샤히 왕조(Nizamshahi Dynasty)는
1490년 말리크 아흐마드 니잠샤히(Malikh Ahmad Nizamshahi)가
뭄바이(Mumbai)에서 남쪽으로 약 156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바꾼 아흐마드 나가르(Ahmad Nagar)를
도읍지로 정해 왕조를 세우고
이후 데칸고원 북서부까지 호령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고 한다
1499년에는 다울라타바드(Daulatabad) 요새를,
1574년에는 베라르가(Berarga) 왕국을 병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북쪽에 있는 무굴 제국이 침략해 오면서부터
니잠샤히 왕조(Nizamshahi Dynasty)는 급속히 쇠퇴하여지기 시작하여
1629년 무굴제국의 샤자한(Shahjahan) 황제에게
데칸고원(Deccan Dynasty)의 일대를 장악 당하였으며
1633년 다울라타바드(Daulatabad)에서 그나마 힘들게 버티던 니잠샤히 왕조는
샤자한(Shahjahan)의 군대에게 점령 당하면서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후 1658년 무굴제국의 샤자한 황제가 죽고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zeb) 황제가 수도를 아그라(Agra)에서 이 곳으로 옮겨와
이 곳에 머물러 있던 시절에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는 최고의 황금기 시절을 누렸다고 한다
아우랑제브가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겨 온 이유는
힌두교 세력으로 인도의 역사에서 영웅으로 칭송되는 쉬바지(Shivaji)가 이끄는
마라타(Marata)족들이 끊임없는 저항이 이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으며 무굴제국이 몰락해 가자
이 도시는 서서히 쇠퇴하여 갔다고 한다
이 후 독립적인 니잠(Nizam:귀족)들의 수도로 있었는데
이들이 다시 수도를 하이데라바드(Hyderabad)로 옮겨 가면서
급속히 잊혀져 갔다고 한다
1947년 하이데라바드 주가 인도의 연방으로 참여하면서 인도의 영토가 되었으며
현재는 마하라슈트라(Maharashtra)주 아우랑가바드 행정구의 행정중심 도시이다
아우랑가바드 공항에서 딱 1시간이 소요된 9시20분에
엘로라 석굴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자이나교 석굴 사원군 앞에 도달한다
엘로라 석굴(Ellora Caves)은
아우랑가바드에서 북서쪽으로 29Km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데
데칸고원의 바위산 서쪽 사면에
2Km에 걸쳐 있는 암반을 깍아 만든 석굴사원이다
엘로라 석굴에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석굴이 혼재되어 있어
종교간에 분쟁이 심한 현대 종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현 시대에 있어 3개의 다른 종교 사원이
한 곳에 어울려 존재하는 곳은 이곳으로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석굴은 남쪽에서부터 순서적으로 번호를 정하였는데
1번 석굴부터 34번 석굴까지 있다
불교사원 석굴은 AD600~800년경, 힌두교사원 석굴은 AD600~900년경,
자이나교사원 석굴은 AD800~1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자이나교(Jainism) 석굴 사원군은
30번에서 34번으로 5개의 석굴이 줄지어 있는데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이 곳의 자이나교 석굴사원들 중 대표되며
'인드라 신의 회의실(Indra Shaba)'이라고 애칭이 있는
2층 구조로 만들어진 32번 석굴로 들어 간다
작은문 입구을 들어서자 사면당(四面堂:Four Faced)이라는 뜻을 가진
차트루무카(Chatrumukha) 사당의 고탑(高塔:Sikhara)이 앞을 막아선다
이 탑은 9세기경 지어진 탑이라 한다
차트루무카(Chatrumukha) 사당의 고탑(高塔)을 가운데로 하여
우측에는 아쉽게도 상아가 부러진 코끼리 조각상이 서 있고
좌측으로는 높은 기둥 탑이 서 있었다
자이나교에 대하여는 몇 일전 카주라호의 동쪽 사원군을 관광할때 설명을 한
금욕주의와 고행주의에 기원을 두고 무소유를 강조하고 있다
이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이나교(Jainism) 5가지 출가 오계(出家五戒)가 있는데
- 불살생(不殺生) : 생명체를 죽이지 마라
- 불망어(不妄語) :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지 마라
- 불투도(不偸盜) : 탐욕스럽지 마라
- 불사음(不邪淫) : 성적쾌락을 추구하지 마라
- 무소유(無所有) : 집착하지 마라
이 오계를 자이나교 수도자들은 실천하려고
고행하고 있는 모습을 길거리에서 가끔씩 볼 수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BC 6세기경 베다의례의 형식적으로 행하여지던 동물희생제를 반대하며
불살생(不殺生)을 핵심윤리로 삼아
자이나교를 창시한 마하비라(Mahavira) 상이 모셔져 있다
위 사진의 조각상 내용은
마하비라(Mahavira)가 각종 유혹을 물리치고
고행하는 모습을 이라 한다
32번 석굴을 나오니 옆으로 31번 석굴 방향 표시가 있다
대표적인 32번 자이나교 석굴을 보고 불교 석굴 사원군으로 향한다
자이나교(Jainism)의 창시자인 마하비라(Mahavira)는
BC 599년 바이샬리에서 현재까지도 인도 특유의 세습적 신분계급 제도인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는데 크샤트리아(Kshatriya) 계급으로 태어났다
이 카스트(Caste) 제도는 승려 계급인 브라만(Brahman 4%),
귀족과 무사로 지배 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7%),
평민 계급인 바이샤(Vaisya 12%),
노예 계급인 수드라(Sudra 77%)인 4계급으로 분류하는데
계급 순인 브라만(흰색)은 머리, 크샤트리아(붉은색)는 팔,
바이샤(노란색)는 넓적다리, 수드라(검은색)는 발에서 나왔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베다에서 보면 크샤트리아가 첫번째 서열이었으나
전설에 의하면 비슈누 신의 6번째 환생인 파라슈라마(Parashurama)가
폭정을 일삼던 크샤트리아를 진압되어 권력에서 쫒아 냈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데
이는 크샤트리아가 브라만과 권력 싸움에서 밀려났다는 것을 전해준다 것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 카스트제도 안에 들지 못하는 카스트 제도 아래의 계층이 있다
파리아(Pariah)라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계층으로
이들은 악의 근원으로 악마, 악귀 등의 사회악으로 취급 받아
다른 계층에게서 접촉을 해서는 안되는 사람들로 경멸을 받으며 산다고 한다
이들은 시체 화장이나 가죽 다루는 일, 화장실 청소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간다는데 이들에게도 특권은 있다
모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권을 허용 받았다는 것이다
불교 석굴 사원군으로 걸어 가던 중
현장학습을 온듯한 학생 무리를 만났다
이들은 손을 흔들며 사진 촬영에 응해주는데
소박하면서도 순진한 미소가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지며 마음에 담겨졌었다
엘로라 석굴(Ellora Caves)이 시작되는
불교 석굴 사원군의 1번 석굴이 저 멀리 보인다
불교 석굴 사원군 형성은
인도에서 불교의 교세가 활발하게 커지고 있을때가 아닌
힌두교의 영역으로 동화되어 가던 시기인 6세기경에 조성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엘로라 불교 석굴 사원에서는
힌두교 신상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곳까지 왔으니 인증샷은 하고 가야지...
추억으로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는데...
엘로라 석굴 불교 사원군 1번 석굴 앞에 섰다
응 그런데 이게 뭐야???
보수 공사를 시멘트 벽돌로 하고 있다니!!!
우리나라로 말하면 문제가 심각하여 국민 여론에 뭇매를 맞을 일인데...
1번 석굴은 스님들이 기거하던 공간이라 한다
2번 석굴 안으로 들어 서니
많은 스님들이 들어와 돌아가며 예불을 하고 있었는데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돌 조각상 부처 모습으로 흔하게 볼 수 없는 사자좌를 하고 있었다
엘로라 석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이라 한다
엘로라 석굴을 번호순대로 지나치며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든다
이처럼 엄청난 바위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깍아
화려하게 석굴 사원을 만들어 놓았다니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흘러 나오게 한다
어느 나라의 스님인지는 모르겠으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 같다
엘로라 석굴에서의 옛스런 스님 모습과 발달된 현대 문명과의
만남이라 할까? 분위기가 있어 디카를 눌러 보았다
5번 석굴은 엘로라의 불교 석굴 중 53m×36m인 직사각형 홀로
가장 규모가 큰 석굴이라 한다
이 곳은 승려들의 교육과 회의장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곳에서는 어 느나라에서 온 승려인지 모르겠으나
적색 옷을 입은 승려들이
당시의 포즈를 취하듯이 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 가니 부처상에
흰 고운 비단 같은 천을 걸쳐 놓았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걸쳐 놓은 깊은 정성은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엘로라 석굴의 불교 사원 군에는 일반 관광객 뿐만 아니라
성지 순례로 여러 곳에서 온듯한 복장의 스님들이 많이들 보인다
6번 석굴은 이원적 형태로 3단구조를 이루며
엘로라 석굴 사원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라(Tara) 조각상이 있는 곳이다
6번 석굴의 타라(Tara) 조각상은
타라상 중의 부귀영화를 나타내는 타라상이라 하며
우리나라의 관세음보살과 같은 존재라 한다
10번 석굴은 엘로라 석굴 사원군 중 유일하게 목조 건축의 형태를 띤
차이티야(Chaitiya) 양식으로
목수의 동굴(Carpenter’s Cave)이란 애칭을 가진 석굴이다
차이티아(Chaitiya) 양식은 사리탑을 모신 사원을 일커르며
차이티야 후기 양식으로
중앙탑 앞에 부처좌상이 있고
그 좌측에 연꽃을 들고 있는 연등보살이
우측에는 금강보살상이 지키고 있다
11번 석굴은 12번 석굴과 함께
세계 불교 석굴 사원 중 유일한 3층 석굴 사원이라고 한다
특히 12번 석굴은 세계최대의 3층 석굴로
크기는 35m×21.33m이며
기둥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엘로라 석굴에서 불교 석굴 사원군은 1번부터 12번까지로
이제부터는 힌두교 석굴 사원군으로 연결된다
힌두교 석굴 사원군은 13번 석굴부터 29번 석굴까지라고 한다
15번 석굴은 안내 화살표시에서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사람들은 오를 생각을 하지 않고 그늘 밑을 찾아들 간다
홀로 계단을 오른다
15번 석굴은 초기 불교 사원 형태인 비하라(Vihara) 양식을 띠고 있어
과거에는 불교 석굴 사원으로 추측되나
힌두교 쉬바(Shiva) 신을 모시는 사원으로
다스 아바타라(Das Avatara)라고도 부른다
동굴 안에는 비쉬누 신의 화신으로 앞려진 10명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는데
어두침침하여 사진이 찍히지를 않는다
이 석굴에서는 쉬바신의 링감에 경배하는
브라흐마와 비쉬누 신상이 있어
쉬바 신을 믿는 종파에 의해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15번 석굴에서는 반인반수 모양의
나라심하(Narashimha) 조각상이 유명하다고 한다
엘로라 석굴군에서 최고의 하일라이트(Highlight)라고 하는
16번 카일라쉬 사원(Kailash Temple)으로
엘로라 석굴 관광 마지막 발길을 옮긴다
이 사원은 일명 '석굴 사원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곳이라 한다
카일라쉬 사원은 전형적인 남인도 사원 건축 양식인
드라비디언(Dravidian) 양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원 내부 벽에는 다양한 부조들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조형미와 화려하게 수 놓은 조각 장식들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이 사원은 가로86m×세로46m×높이35m의 규모로
한 덩어리의 바위산를 깍아 화려하고 웅장하게 조각해 놓은 사원으로서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도 1.5배 더 큰 규모의 사원이라 한다
카일라쉬 사원은
쉬바(Shiva) 신의 고향 카일라쉬 산(Kailash Mountain)을 형상화하여
AD 760년경 라쉬트라쿠타 왕조(Rashtrakuta Dynasty)의
크리쉬나 1세(KrishnaⅠ:757~783년)에 의해 세워져
쉬바(Shiva) 신을 모신 사원이라 한다
사원의 입구 2층으로 올라와
바위에 뚫린 창으로 내다보니
엘로라 지역 고원의 평야지대가 그림의 한폭처럼 나타난다
이 사원 벽에는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 장면을 재현한
내용이 조각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시인 발미키(Valmiki)가
BC 300년 이 후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 것으로서
약 2만4천개의 2행연구가 7권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대서사시 '라마야나(Ramayana)'의 내용은
라마(Rama)는 아요디아 왕국에서 태어나
현인 비슈바미트라의 보호를 받으며 강건하게 자라게 된다
어느 시합에서 누구도 시바(Shiva)의 활을 휘지를 못하고 있는데
그는 그 활을 휘어 자나카 왕의 딸 시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음모를 받게되어 상속권을 상실하고
라마는 부인과 이복 형제였던 락슈마나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 14년을 보낸 후 왕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을 유인하려고 보낸 금사슬을 쫒아 숲속을 헤메게 된다
그때 랑카(Lanka:지금의 스리랑카)의 마왕 라바나가 시타를 납치해 간다
라바나는 시타에게 잘해 주고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하나 거절하고 있을때
라마와 락슈마나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길을 떠나
수 많은 위험과 모험을 하던 중 원숭이들의 왕 수그리바와 동맹을 맺는다
이 후 원숭이 장군 하누만과 라바나의 친형제인 비비샤나의 도움으로
랑카를 공격하여 라바나를 죽이고 시타를 구한다는 내용으로서
랑카의 마왕 라바나(Ravana)가 카일라쉬 산을 뽑아 버리려하자
쉬바(Shiva) 신이 엄지발가락 하나로 라바나를 지긋이 눌러 제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에 만들어진 판본에서는
시타는 랑카의 마왕 라바나에게서 구해는 졌지만
몸이 더렵혀졌을거라는 의심을 벗기위해 불의 시련을 받는다
그러나 아요디아에 돌아오니 백성은 아직도 왕비 시타의
순결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라마는 시타를 숲으로 추방한다
그 곳에서 시타는 현인 발미키(저자)를 만나 그의 암자에서
라마의 두 아들을 낳는다
아들들이 성장하여 라마와 재회하게 되지만
시타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대지에게 자신을 받아 줄 것을 부탁하는데
대지(大地)는 그 것을 허락하여 그녀를 삼켜버린다는 내용이다
현재도 이 이야기를 암송하는 것은 인도인에게는 공덕을 쌓는 것이라 하며
또한 여러가지 형태로 동남아시아 전역에 퍼져
공연에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쉬바 신이 타고 다닌다는 황소 난디(Nandi)라고 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
쉬바 신이 타는 난디는 등에 혹이 있어야 되는데 없다
인도인이 소를 섬기는 이유는
쉬바 신이 타는 난디와 연관이 있어 소를 신성시 한다고 한다
인도인이 소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하는데
일반 소는 먹지 않으나 물소는 먹는다고 한다
중앙사원 2층에는 쉬바 신의 상징인
링감도 있었는데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붐비고 대기하고 있어서
입장하기가 어려워 디카에 담지도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카일라쉬 사원을 나오며
아쉬웠던 것은 사원 뒤쪽의 언덕 위로 올라가
이 사원의 웅장한 모습을 디카에 담았어야 하는데
시간에 쫒겨 사원 안에서만 둘러 보고 나오니 아쉬움으로 남는다
'엘로라(Ellora)'라는 뜻은 '액이 나오는 돌'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에 이처럼 대규모의 석굴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엘로라(Ellora)라는 의미와 같이
다른 바위와 달르게 깍아내기가 편하지 않았나 한다
카일라쉬 사원을 나와 점심식사 예약을
사원 주변에 있는 매점 식당으로 정하였다고 하여 그 곳으로 이동한다
이번 인도 여행에서는 100% 현지식으로
식사를 소화하고 있으며
카레는 매 끼니 때마다 나오는 메뉴로
매콤한 맛도 있고 일반 카레 맛도 있는데
전반적으로 내 입맛은 잘 적응하고 있었다
엘로라 지역에서 아우랑가바드 시내로 가기전
엘로라 지역에서 내려가는 지역에 있는
다울라타바드(Daulatabad) 성을 보고 이동하기로 하였다
아침에 공항에서 엘로라 석굴로 올때
산꼭대기에 성처럼 보이는 것이 보여 그냥 고성(古城)인가 보다하고
지나쳤는데 이 곳이 다울라타바드 성의 일부라고 한다
버스는 내려가던 중 도로 옆으로 서고 가이드는 모두 내리라고 한다
성(城)도 안보이고, 주차장도 아니고,
차가 겨우 왕복교차 할 수 있는 차도에서...
언덕 넘어 무너진 폐허된 성을 보라는 것인가 ???
가이드를 따라 차도를 걸어 조금 내려가니 포장마차들이 보이고
거기에서 조금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웅장한 성(城)이 나타난다
다울라타바드(Daulatabad) 성이다
'행운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다울라타바드는
12세기말 데칸지방에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던
힌두세력의 야다바 왕조(Yadava Dynasty)의 빌람(Vilram) 왕이
데바기리(Devagiri:다울라타비드 옛 지명)를 나라의 수도로 정한 곳이다
이 후 빌람의 손자 싱가나(Singhana 1210~1247년) 대에 이르러
남, 동, 북쪽 일대의 정복전쟁 승리로 최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다울라타바드 성은 거대한 바위에 요새로 지어진 성으로
난공불락이어서 계략을 쓰지 않고는 점령당한 적이 없는 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야다바 왕조의 마지막 왕 라마찬드라(Ramachandra:1271~1309년) 시대에
1294년 델리의 술탄(Sultan)국 할지 왕조(Khalji Dynasty)의
알라 웃 딘(Allah Ud Din;1296~1316년) 왕의
이슬람 군대가 쳐들어와 종속국의 지휘를 강요 받았다고 한다
이 후 가신(家臣)의 지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델리의 이슬람 군대를 불러들이는 결과만 초래하고
라마찬드라 왕은 감옥에 갇혔다가 석방되어 죽을 때까지 복종하였다고 한다
라마찬드라 왕이 죽은 후 그를 계승한 아들이
다시 한 번 저항을 시도하였지만 전투 중 전사하였으며
힌두세력의 야다바 왕조(Yadava Dynasty)는
1317년 이슬람의 할지 왕조(Khalji Dynasty)에 합병되어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을 합병한 할지 왕조(Khalji Dynasty)는
1290년~1320년까지 델리 이슬람 술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왕조로서
존속 기간은 약 30년 정도이나
몽골 군의 침입도 막아내고
인도의 최남단을 제외한 인도 전역을 이슬람으로 점령한 왕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계속적인 내분과 왕위 싸움으로 왕조 6대의 30년만에
델리 술탄의 강대국이였던
투글라크 왕조(Tughlaq Dynasty)에 의해 멸망하였다고 한다
성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
언덕을 오르던 중 길을 복구 중인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동료는 보이질 않고
홀로 일하는 모습만 보였는데 급할 것이 있나 하는 긍정적 생각이 들었다
도로 보수공사를 옛 모습으로 하는 것을 보며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자
성내의 넓은 광장이 펼쳐지는데
바라트 마타(Bharat Mata) 사원의 광장이라 한다
바라트 마타(Bharat Mata)는
'인도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힌두교 사원인데
한때는 이슬람 사원이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는데 시주 돈을 내고 찍으라고 한다
바라트 마타(Bharat Mata)에서
'바라트'는 옛 조상인 바라트족을 일컬으며 인도를 뜻하며
'마타'는 어머니를 뜻한다고 한다
힌두인들에게 어머니와 같이 모든 것은 품어주기 때문에
숭배되어지는 것이 3가지가 있는데 대지, 강가, 소라고 한다
아마도 머나먼 옛날 농사짓는 일이 중요하기 시작하는 시대로부터
땅, 물, 소는 농사짓는데 제일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서
고대 신앙으로 토착화되어 내려오며 힌두신앙에 영향을 준 것이라 한다
바라트 마타 사원에서 나오면
찬드 미라르(Chand Minar)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슬람의 알라 웃 딘(Allah Ud Din;1296~1316년) 왕이
힌두 세력의 야다바 왕조의 수도였던 다울라타바드를 정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435년에 세운 높이가 60m인 '승전탑'으로
인도에서 2번째로 높은 탑이라고 한다
다울라타마드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먼저 이 곳을 점령했던 이슬람의 델리의 할지 왕조(Khalji Dynasty)를 멸망시키고
이 곳을 차지한 델리의 투클라크 왕조(Tughlaq Dynasty:1321~1413년)의
폭군 기야스 알 딘(Ghiyath Al-Din) 왕은
원래의 수도인 투클라카바드(지금의 델리 남부)에서
감정적으로 그 곳에 살던 10만명이 넘는 주민들을 모두 강압적으로 데리고
1100Km가 넘는 거리에 위치한 이 곳으로
1327년에 40일이 넘는 기간을 걸어서 천도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난리가 야기된 이유는
투클리카바드 거리에 자기를 비방하는 글을
여기저기 나붙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홧김에 천도를 하여 왔지만 이 곳에는 식수 시설이 안되어 있어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렵게 되고 죽는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백성들의 불만과 반발은 매우 커져가고
기야스 알 딘(Ghiyath Al-Din) 왕의 폭정은 더욱 심해져가
많은 사람이 폭정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야스 알 딘(Ghiyath Al-Din:1321~1239년) 왕이 죽고
다울라타바드로 천도해 온지
17년만에 그의 아들 무하마드 빈(Muhammad Bin) 왕에 의해
다시 투클라카바드(지금의 델리 남부)로
다시 1100Km를 힘들게 걸어 천도해 갔는데
많은 인구가 죽고 남은 5분의 1정도만 되돌아 갔다고 한다
산 꼭대기에 치니 마할(Cini Mahal)이 보인다
저기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올라가지는 못하였다
저 곳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하며
기야스 알 딘(Ghiyath Al-Din) 왕이 폭정을 일삼던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데칸고원 지역의 다섯 이슬람 술탄국 중의 하나인
골콘다(Golkonda: 현 하이데라바드)를 수도로 하여
고다바리 강과 크리슈나 강 하류 사이를 두고 벵골만 해안에까지
영역을 다스렸던 시아 왕조(Shia Dynasty:1512~1687년)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압둘 하산 타나샤(Abdul Hassan Tana Shah) 왕이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Aurangzeb) 황제에게 포로가 되어
1687년 나라를 잃고 저 곳에 연금되어 죽음을 맞이했으며
다울라타바드(Daulatabad)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갔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1947년 독립되기 전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울라타바드(Daulatabad)의 폐허가 된 고성(古城)을 보고 나오며
국가의 흥망성쇠가 덧 없음을 노래한
야은(冶隱) 길재 선생의 시가 생각이 났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아우랑가바드의 시내에 접어드니
출퇴근 시간인지 인도 전통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들 보인다
인도 여성들의 전통복장은 가장 대표적으로
사리(Sari), 가그라(Ghaghra), 펀자비(Punfabi) 세가지를 들 수 있다
사리(Sari)는 그냥 긴천을 두르고 주름을 잡아 접어 넣어 입는 옷이다
폭은 1m, 길이는 5~6m 정도이며
박음질이 없어야 순수하고 신성스럽다고 한다
활동하다 보면 쉽게 흐트러지고 풀러질 수 있음으로
사리에는 블라우스(졸리), 속치마(패티콧)와 함께 3가지를
한세트로 입는다고 한다
가그라(Ghaghra)는 사리와 비슷하나 재봉이 들어간 치마를 일컷는다
서부 라자스탄과 구자라트 사막지대에서 많이 입는 옷으로
펼쳐보면 도넛 같은 모양이다
입었을때는 사리와 차이를 구별하기 힘드나
자세히 보면 어깨에 두른 스카프가 따로 인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라자스탄 지역에서는 자수보다는
동그란 원 모양의 반짝이를 달아 멋을 낸다고 한다
펀자비(Punfabi)는 원래는 무슬림 여성들이 입는 의상이었으나
카슈미르 지역에서 종교에 상관없이 입게되어
현재는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사리만큼 보편화 되었다고 한다
살와르카미즈(Salwar Kamiz)라고도 하는데
살와르(Salwar)는 바지를 말하며
카미즈(Kamiz)는 원피스 또는 긴셔츠의 상의를 말한다
보통 젊은 여성들과 직장 여성들이 활동성 때문에 많이 입는다고 한다
펀자비는 지역에 따라 여러가지 말로 일커러진다고 한다
여학생들로 보이는 학생들이 지나간다
흰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가방을 메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니
신발은 샌들을 신고 있었다
인도를 여행하며
오늘 처음 어두워지기 전에 호텔로 온다
이 곳은 아우랑가바드 역이 가까운 지역의 중심가인데
우리의 시골 도시처럼 보이는 한적한 느낌으로 다가 온다
방을 배정받아 오랫만에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 쇼파에 앉았는데도 시간은 아니 간다
식사 시간도 멀었고
TV를 켰어도 말을 못알아 들으니
재미없고 지루한 시간만 흘러가고 있는데 후회가 밀려 온다
다울라타바드 성에서 시간 많은데 산꼭대기까지
올라 갔다가 오자고 우길걸...
지루함을 달래며
호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우랑가바드 시내는 저녁 노을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어제 밤은 이번 여행기간 중 긴 밤을 제일 푹 잔 것 같다
오늘은 아잔타 석굴에 갔다가 다시 이 호텔로 돌아 오는 일정으로
짐 싸지 않는 8시 출발이라 아침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아잔타 석굴까지는 아우랑가바드에서
동북쪽으로 10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도로 사정이 열악하여 버스로 약 3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인도 여행시
아우랑가바드(Aurangabad) 시까지 오는 것은 교통이 많이 불편하지만
인구는 약 70만명 정도가 시에 거주한다고 하며
엘로라(Ellora)나 아잔타(Ajanta)로 가기 위한 수 많은 관광객이
1년 내내 몰리는 곳이라 한다
또한 아우랑가바드 시에는
1958년도에 건립된 마라트와다 대학교와
그에 부속된 수 많은 단과대학들이 있어
교육 중심지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아우랑가바드 시의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고도(古都)의 명성은
도시를 지나는 곳곳의
긴 역사의 고풍스러운 흔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우랑가바드 시가 속해 있는
아우랑가바드 행정구는 데칸 고원(Deccan Plateau)에서
고다바리 강(Godavari River) 상류 유역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 아잔타 구릉지대에서부터
남쪽으로는 발라가트 산맥과 접해 있으며
행정구 면적은 16,200㎢이고
행정구 인구는 약 400만명라고 한다
데칸 고원에 위치한 아우랑가바드 행정구는
공업은 그리 발달하지 못하여
면·모의 방직업과 식용유 제조업 등으로 열악하지만
땅이 기름져 목화 재배를 많이 하고 있으며
기장과 땅콩 등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아우랑가바드에서 계속 평지를 달려온 것으로 보였는데
버스는 산길을 내려 간다
산길 밑에는 끝 없는 평원이 펼쳐진다
산길을 꼬불꼬불 내려오니 아잔타 주차장이 나오는데
아잔타 석굴 관광을 오는 모든 차량은 이 곳까지만 운행을 할 수 있어
우리가 탄 버스는 여기에서 주차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장사하는 일명 '삐끼'들이 대거 몰려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고, 걷고 있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온다
우리들은 이 곳 주차장에서 상가들이 밀집된 공간을 지나
아잔타 석굴까지 운행하는 천연가스 셔틀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 가야 하는데
석굴을 관광하고 나올 때 자기 상점에 들려 물건을 사 달라는 것이다
천연가스 셔틀버스는
일반 차량 주차장이 있는 상가 밀집지역에서 아잔타 석굴까지
4.5Km를 왕복만 하는 버스로
좌석 인원이 만석이 되어야 출발을 하였다
셔틀버스를 타고 아잔타 석굴 입구에 도착하니 매표소가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매표소를 지나 석굴로 가는 계단 언덕을 숨가쁘게 오르는데
인도의 학생들이 벌써 관광을 마치고 계단을 줄지어 내려온다
우리나라 학생들 같으면 방학시즌 일텐데
어제 엘로라 석굴에서도 학생들의 단체 관광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오늘도 많은 학생들이 보였다
인도 학교의 방학은 지역마다 다르다고 하는데
주로 일년에 한번 방학이 있으며
시기는 4월 중순경부터 6월 중순 전후에 방학이라고 한다
이유는 이 시기가 가장 더운 시기라 한다
그래서 인도 신학기는 대부분 6월이라 한다
언덕을 올라서니 데칸고원 인드아드리(Indhadri) 언덕 중턱의
와고라 강(Waghur River)을 따라 말발굽 형태의 절벽으로 늘어 선
아잔타 석굴 사원군들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아잔타 석굴(Ajanta Caves)은
'인도 불교 예술의 보고'라고 하는데
인도의 유산중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타지마할과 함께
가장 먼저 이름을 등재한 곳이라 한다
석굴은 사진 앞에서 부터 1번 석굴로 시작해서
순서적으로 28번 석굴까지 줄지어 있다
석굴 번호는 석굴 조성 순서가 아닌 보여지는 앞쪽부터 순서적으로
번호를 붙여 놓은 것이라 한다
석굴조성 시기는
BC 1~2세기(8~11번석굴)와
AD 5세기경(6~7번석굴, 12~20번석굴)과
AD 7~8세기경(1~5번석굴, 21~28번석굴)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불교는 8세기경 인도에서 쇠퇴기를 맞이하면서
아잔타 석굴은 존재 자체가 잊어져가 1100여년 간을 숨겨져 있었으나
1819년 동인도회사 소속의 영국 군인 '존 스미스(John Smith)'가
호랑이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고 헤메던 중
우연하게 발견되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잔타 석굴 1번은 가장 최근에 발굴된 석굴로
조성시기는 7세기인 AD 600~642년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19.5m의 정방형 비하라(Vihara) 형식으로 만들어진 석굴로
가장 아름다운 석굴중 하나라고 한다
특히 아잔타 석굴 사원에 있는 부다 조각상 중
가장 뛰어난 부다 상이 1번 석굴에 있는 것이라 하며
부다의 얼굴이 보는 각도에 따라 표정이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비하라(Vihara) 형식이란 승려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승방으로
중앙 설법공간 주위에 조성되어 있는 양식을 말한다
1번 석굴 사원은 원래 벽화가 유명한 사원인데
사원 안이 너무 어두운데도 후레쉬 촬영을 금하고 있어
디카에 담지를 못한 아쉬움이 너무 컷다
벽화에는 출가하기 전의 부다 모습을 담은 벽화와
아름다움을 표현한 흑인공주,
연꽃을 들고 기품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 보살 등이 있다
2번 석굴 또한 7세기 경에 조성되어진 비하라 형식의 사원으로서
부다의 전생과 이생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로 유명한 석굴 사원이다
그러나 긴 세월의 역사 속에 벽화의 훼손은 너무 심하였는데
그러나 그 중에 부다의 탄생에 관한 벽화로서
부다를 안고 있는 마야부인 옆에
힌두교의 브라흐마와 인드라 신이 있는 벽화가 있어
당시의 시대 상에서 불교와의 힌두교의 관계를 추측해 볼 수 있도록 있었다
4번 석굴을 보고 나와 석굴 군을 바라보며
이 절벽에 정과 망치를 들고 메달려
대규모의 석굴공사를 했을 모습을 생각해 본다
이 지역에 석굴 사원이 처음 조성되던
BC 2세기~AD 3세기까지는 데칸고원에서 번성했던
사타바하나(Satavahana) 왕조가 이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사타바하나 왕조는 인드라 왕조라고도 하는데
인도 역사에서 그렇게 두드러지는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부유했던 왕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석굴 사원공사에 많은 후원을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6번 석굴은 아잔타에서 유일하게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비하라 석굴로서
이 석굴에는 벽화는 거의 없고 부다 조각상 있는 석굴로
2층 기둥 중에는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울리는
음악 기둥(Music Piller)가 있어
관광객들은 이 기둥을 찾으려 두드려 보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9번 석굴은 BC 1세기경에 조성된 석굴로
아잔타 석굴 중 비교적 초장기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입구 위에는 아치형으로 아름다게 창을 만들어
다른 석굴들과 다르게 멋을 부린 석굴이다
또한 9번 석굴은 사리탑을 모신 차이티아(Chaitiya) 석굴로
소박하면서도 단순한 구조를 띠고 있는데
초기의 불교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석굴사원이라 한다
10번 석굴사원은 호랑이 사냥을 나갔던 존 스미스(John Smith)가
1819년 4월 28일 처음으로 발견하여
아잔타 석굴 사원들 중에서 가장 빨리 세상에 알려진 사원이며
또한 BC 2세기경에 조성되어
아잔타 석굴 사원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9번 석굴과 같이 차이티아(Chaitiya) 석굴로서
차이티아 석굴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보존상태는 그리 좋지 않은 상태이다
오른쪽에서 13번째 기둥에는 존 스미스가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John Smith, 28th Cavalry, 28th, April, 1819'라는 글이 적혀 있다
17번 석굴은 AD 5세기경에 조성된 석굴로
아잔타 석굴 사원 중 벽화의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고 한다
벽화의 내용은 부다의 이생과 전생 이야기로서
그 중에는 부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속세에서 인연을 맺은 아내와 두 아들을
탁발하는 장면이 벽화에 담겨 있다
19번 석굴 또한 AD 5세기경에 조성되었는데
이 석굴은 다른 석굴과 다르게 입구에서부터
섬세하게 조각되어진 조각품들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일명 '조각가들의 보물 상자'라고 불린다고 한다
또한 석굴 입구 좌측 벽에는
아잔타 석굴 사원 조각품 중에서 제일로 치는
7마리 코브라가 머리를 감싸고 있는 뱀의 왕 나가(Naga)와
1마리의 코프라가 있는 그의 아내 나긴스(Nagins) 조각품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이 또한 차이티아(Chaitiya) 형식의 석굴로서
9번, 10번 석굴에 비하여 기둥이나 벽에
섬세하게 조각되어진 조각품으로 가득차 있어 눈길을 끌었다
걷다보니 26번 석굴 앞에 까지 왔다
돌벽에는 이 석굴들을 조성할 때에 공사비용을 지원한
당시의 후원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는데
어느 돌벽에 써 있는지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특이점은 카스트제도에서
지배층인 크샤트리아 계급인 왕과 왕족,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층에 속하는 바이샤 계급인 상인 집단도 후원자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석굴은 28번까지 있으나
대부분이 26번 석굴까지 관람을 하고 되돌아 간다
그래서인지 26번 석굴 앞에는 다른 석굴 앞과 달리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26번 석굴은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여 갈 무렵인
AD 7세기경에 조성된 석굴로서
안으로 들어오니 차이티아(Chaitiya) 형식의 석굴로 되어 있었다
이 또한 섬세하게 조각되어진 작품들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인도에서 가장 큰 와상이
아잔타의 26번 석굴에 있는 이 열반상이라고 한다
6m 정도가 ???
이 열반상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다고 하며
열반상이 살며시 미소를 띠고 있는 듯한 모습에
알 수 없는 마음에 어떠한 감성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석굴 안에는 부다를 유혹했다고 하는
악마인 마라(Mara)의 조각품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장면인지는 모르겠는데
비슷해 보여 이 것이 아닌가 한다
석굴 한 가운데에는 스투파가 있고
기둥 뒤로는 돌아가며 불상 조각상들이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제복입은 인도인이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옮겨가며
불상 앞에 고개를 숙여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마음을 엄숙하게 만든다
26번 석굴을 끝으로 아잔타 석굴 관광을 마치고
뒤돌아 아잔타 석굴 입구로 나오던 중
와고라 강(Waghur River) 건너편 산위를 보니
정자 하나가 보인다
아잔타 석굴을 보는 전망대(View Point)라고 한다
이 와고라 강(Waghur River) 다리를 건너 가면
전망대로 오르는 길과 아잔타 석굴 입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전망대까지 오르는 시간은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상 전망대에 오르지 않고 입구를 향해 걸어 간다
아잔타 석굴 매표소에서 천연가스 셔틀버스를 타고 나와
우리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을 향해 상점 밀집단지 앞을 걸을 때
다시 삐끼들이 몰려든다
이 것도 관광이러니 하며 미소로 거절하며 걷는데
계속 따라붙는 이들 때문에 디카 한번 눌러보기도 힘들다
아잔타 석굴 주차장에서 우리가 타고 온 버스를 타고
다시 아우랑가바드(Aurangabad)를 향해 꼬불꼬불 언덕길을 올라오니
저 산 넘어에 아잔타 석굴이 있는데
산 정상들이 평평하다
데칸 고원(Deccan Plateau) 위로 올라 온 것이다
데칸 고원(Deccan Plateau) 위로 올라와 버스는 달리는데
산 위를 달리는지 평야지대를 달리는지 알 수가 없게
마을들도 나오고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지대도 나온다
1시간 정도 달렸나
작은 간이 휴게소처럼 보이는 곳에서 정차를 한다
사이 미란 호텔(Sai Milan Hotel)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 곳이 점심을 예약해 놓은 곳이라 한다
식사를 일찍 마치고 나와
사이 미란 호텔(Sai Milan Hotel) 식당 앞에서
우리가 가야하는 아우랑가바드 방향의 도로를 향해
디카를 눌러 본다
다시 버스에 올라 아우랑가바드를 향해 가던 중
창밖으로는 넓은 목화밭이 펼쳐지기도 하며
황량한 넓은 벌판도 펼쳐진다
이 곳이 데칸 고원(Deccan Plateau) 이라니
무심코 가다보면 이 사실을 잊고
그냥 평지를 달려가는 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일행이 가이드에게 질문을 한다
"데칸고원에 가는 것으로 일정상에는 있는데 안가요"라고
"여기가 데칸고원(Deccan Plateau) 인데요"
조용하던 차안은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인도 여행을 하며 천막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도 본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화장실이나 씻는곳이 없어
차안에서 보이는 곳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과 흙탕물에 뒷물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곤 하는데
위생상태가 너무 열악하게만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천막촌에서 물건을 진열해 놓고
장사하는 모습을 이번 여행기간에 지나가며
처음으로 보는 장면이다
힌두교와 관계가 있는 물건으로 보이는 것들로서
시바신의 남근을 상징하는 링가로 보이는 것과
시바신으로 보는 신상을 놓고 진열해 놓고 있었다
천막촌에 살지 않더라도
이들의 집들은 문과 창문이 없는 집들이
너무 많이 눈에 들어 오는데
이들을 보는 나는
너무 행복한 세상에 사는것이 아닌가 하는 반문도 해본다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며 불만을 토해내는 일에
길들어진 내 자신에게
이들의 생활 상을 바라보며
'너는 얼마나 행복한 곳에 사는 사람인지 아냐'고
되집어 보면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인도인에게는 버스 안에 있는 우리가 이상한지
이처럼 유심히 우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눈이 마주쳐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아
같이 쳐다보고 있기가 민망할 때도 종종 생겨 났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군것질을 하며 지나간다
내 어릴적 생각이 난다
내 어릴 적에는 서울에도 포장이 안된 도로가 많았는데
친구들하고 군것질하며 걷던 시절이 생각이 났다
과일가게에 과일들을 차곡차곡 가지런하게
쌓아 놓고 파는 것이 인상적이다
저렇게 쌓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
매일 같이 반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걸로 생각이 든다
여행을 하면서
그들 속에 들어가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많이 보고 느끼는
관광을 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라도 더 마음 속에 담고자
디카를 열심히 눌러대며 간다
인도 전통 복장인
사리(Sari)를 입은 여인과
간디 모자를 쓰고 상의는 꾸르따(Kurta)를 입고
하의는 사리(Sari)식으로 한장의 천을
앞에서부터 둘러 한끝을 다리 안에서 밖으로 걷어올려
허리춤에 둘러 고정시켜 입는 도띠(Dhoti)를 입고 있는 남성이 보인다
인도인들의 옷 입은 것을 쳐다보고 가다보니
학생들의 옷차림에도 눈길이 간다
어제 설명한 살와즈 까미즈(Salwar Kamiz)라고도 부른
펀자비(Punfabi)를 입은 학생들과 청바지도 입은 학생이 보인다
아오랑가바드에 거의 도착한 것 같다
가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마이크를 잡는다
아우랑가바드에는 아그라(Agra)에서 보았던
작은 타즈마할(Taj Mahal)이 있다고 하며
갈 마음이 있냐면서 가신다면
인당 입장료로 5$의 옵션을 걸어오는데
차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동의하며 가기로 한다
옵션치고는 엄청싸다는 생각으로 5$을 지불한다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하면서
옵션에서 이처럼 부담없이 싼 옵션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우랑가바드에 도착하자
기념품점에서 잠시 쉬었다 가자고
무갈(Mughal)이라는 기념품점 앞에 정차한다
살만한 물건은 하나도 없는데
물건들은 진품들이고 가격은 정찰제라고 하며
무지하게 비싸다
기념품점 안에는 살 물건도 없고
덥다는 생각에 문 밖으로 나와 놓여진 의자에 앉아 있다가
아우랑가바드에 있는 작은 '타즈마할'이라는
'비비 카 마끄바라(Bibi Ka Maqbara)'를 향해 가는데
무덤군처럼 보이는 곳의 옆을 지나간다
'비비 카 마끄바라(Bibi Ka Maqbara)'에 도착하여
가이드는 입장권을 구입하러 가고
대기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가 딸기를 들고와 사달라고 한다
귀찮아서 나올때 보자고하니 그냥 순수히 간다
입장권을 구입하여 와서 표를 나누어 주는데
100루피(Rupee)로서 우리돈으로 약 2,000원 정도였다
이 곳도 입장하는데 아그라의 타즈마할처럼 심하지는 않으나
안으로 입장하는 방문객의 검색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비비 카 마끄바라(Bibi Ka Maqbara)'는
무굴제굴 황제인 아우랑제브(Aurangzeb)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라비아 웃 다우라니(Rabbia Ud Daurani)의 무덤이다
타즈마할을 모방하여
1679년 큰 아들인 아잠 샤(Azam Shah)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타즈마할과 비교하여 규모가 작은편으로
타즈마할은 건물 전체를 대리석으로 만들었는데
비비 카 마끄바라는 본관 건물 돔에만 대리석을 사용했다고 한다
타즈마할처럼 공사하기에는
엄청난 공사비용이 들어가므로 재정이 없어
이 정도로 공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타즈마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비비 카 마끄바라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하려는데
인도인들이 같이 찍자고 옆으로 서댄다
인도 여행을 하며 자주 모델로 발탁되는 기분이다
안으로 들어서 가묘를 쳐다보니 하나뿐이 없다
타즈마할에서는 2기의 가묘가 있었는데...
이 곳은 아우랑제브 황제의 첫번째 부인 라비아 웃 다우라니 묘만 있고
아우랑제브 본인 묘는
엘로라 석굴 쪽에 있는 쿨다바드(Khuldabad)에 초라하게 묻혔었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대리석 장식으로 다시 꾸몄다고 한다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로서 아우랑제브가
이 곳에 묻히지 않고 쿨다바드에 초라이 묻힌 사연은
무덤을 조성하는 비용을
아우랑제브 자신이 직접 필사한 코란을 판돈으로만
충당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 한다
아우랑제브 황제는 아버지 샤자한에게서 1658년 황위를 찬탈하고
병들고 아픈 아버지를
아그라 성안의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다
1666년 쓸쓸하게 죽을 때까지
8년 동안을 감금하고 학대하던 불효 막심한 아들이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양심이 있었던지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타즈마할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아버지 샤자한을
사랑하였던 아내 뭄타즈마할 옆에 묻어 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정작 본인은 부인과 같이 묻히지 않고
유언으로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쿨다바드에 초라하게 묻혔다고 하니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은 든다
비비 카 마끄바라(Bibi Ka Maqbara)에 엮인 이야기를 듣고
뒤돌아 나가는 쭉 뻗은 이 길에서
아우랑제브 황제는 많은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이 길을 걸어 나갔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비비 카 마끄바라(Bibi Ka Maqbara)를 보고 밖으로 걸어 나가며
황량한 데칸 고원의 산과 뭔가 느껴지는 조화에
나의 마음도 쓸쓸하고 애처롭다는 생각을 하고 걷는데
젊은 여자가 미소지며 다가와 딸기를 내민다
'나올때 사겠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다렸던것 같아
할 수 없이 웃으며 5$에 2팩을 사 주었다
오늘 하루 일정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니
결혼식을 하였나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과 축하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호텔 로비에서 뭔가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자이푸르의 호텔에서도 결혼식을 보았었는데...
오늘 밤이 인도에서 잠을 자는 마지막 밤을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의 비츠 호텔(Vits Hotel)에서
12박 14일 일정의 12번째의 밤을 보낸다
아우랑가바드 비츠 호텔에서 인도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우리는
아침 7시 55분에 서남쪽으로 약 400Km 정도 거리에 있는
뭄바이(Mumbai)를 향하여 출발을 한다
인도를 여행하며 320Km 정도를
보통 10시간에서 14시간 이상을 버스로 이동하였던터라
오늘 관광 일정이 야간관광이 되는 것이 아닌지
은근히 걱정이 밀려온다
인도 관광 초반 몇 일은
비가 많이 오고, 흐리고, 안개가 많이 끼어
아쉬웠던 장소가 여러 곳이 있었는데
여행 마지막 날인 오늘은 아주 맑은 하늘이라
더 아쉬운 마음을 들게 하는 것만 같다
머나먼 지평선의 마을까지도 너무도 잘 보인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아쉬운 마음이 몰려와서 그러는 걸까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나하나가
더욱 정감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무엇일까
2시간 여를 달리다 버스를 세운다
건물 옆 논두렁 비슷한 곳에 화장실을 지어 놓았는데
지금까지 보다 유독 변지뢰들이 많아
조심조심 몰려들 간다
정차하여 있는 동안버스에서 내려 바람을 쐬며
뭄바이를 향해 계속 달려 갈 길을 바라본다
중앙 차선도 없는 좁은길이다
다시 버스는 뭄바이를 향해 가는데
차안이 온통 구린네로 진동을 한다
이 차 안에서 꼬맹이가가 밖에서 변을 밞은지도 모르고 차에 올라 타
앞에서부터 뒤자석까지 통로에 발자욱을 해 놓은 것이다
꼬맹이는 뒷자석에 앉아 있다가
미안한지 쑥스러워 하며 앞자석에 앉아 있는
엄마 옆으로 가버린다
우리는 그 모습이 웃으워 또 한 번 웃는다
이 번 여행에서 이 꼬맹이는
내내 웃음을 안겨 주었으며 지루한 시간들을
재미있는 여행으로 만들어준
일등공신으로 감초같은 아이였다
여행은 시작되는 날과
끝나는 날의 기분이 다르다
시작되는 날은 설레임으로 기분이 들떠 있지만
끝나가는 날은 아쉬움과 냉정을 되찾은 차분함으로
마음이 가라 앉아 있다고 할까?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학교 옆을 지나 가는데
학생들이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나무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이 길을 달려가며
지난 네팔(Nepal) 국경에서
인도 소나울리(Sonauli)로 들어와 바라나시(Varanasi)까지
또 그 곳에서 카주라호(Kajuraho)까지
또 이후 버스로 달리며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느끼는 감정은
북인도에 비하여 이 쪽에 사는 사람들이
더 잘사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 이유는
사람들의 옷차림, 움직임, 거리의 풍경 등에서
사뭇 북인도 쪽과는 다른 느낌으로
더 깨끗하고 분주하고 일하는 모습 등이
자주 내눈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날씨 탓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길을 달리 가는 날씨는 파란 하늘이지만
그쪽을 여행할 때의 날씨는
비가 오거나 흐리고 싸늘한 날씨가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이시기에는 그쪽 지역에 비해서
이쪽 지역의 온도가 따뜻하고 높아
활동하기가 좋아서 내눈에 그렇게 보이고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고가도로 아래에 툭툭이들이 많이도 서있는데
아우랑가바드에서 계속해서 서쪽으로 달려오던 버스는
이곳에서 뭄바이가 있는 남서쪽으로 좌회전을 하여 달려 간다
좌회전 하여 나쉬크(Nashik) 시내에 진입하니
도로가 우리나라 고속도로 식으로 넓고 좋아지는데
반대쪽으로 달리면 아그라(Agra), 델리(Delhi)쪽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다
나쉬크(Nashik) 시내를 벗어 날 무렵 산이 나온다
출발할 때 아오랑가바드에서 산을 보고
데칸고원(Deccan Plateau) 위를 몇 시간 동안을 달려 왔지만
산 하나 없는 지평선만 보며 달려왔는데
처음으로 산이 보여 디카를 눌러댔다
데칸고원(Deccan Plateau)은
인도 국토의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나르마다 강(Narmada River)의
남쪽 대부분을 가르키는 말로도 지칭하는데
동가츠(Eastern Chats) 산맥과 서가츠(Western Chats) 산맥를 사이를 말한다
서가츠(Western Chats) 산맥은 해발고도가 1,200m 정도이고
동가츠(Eastern Chats) 산맥의 해발고도는 600m 정도 이여서
데칸고원(Deccan Plateau)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기울어진 형태를 띠고이다
끝 없는 지평선만 보며 평야지대의 지루함에서
산들이 보이며 버스 창 밖을 풍경을 보는 기분이 나아 졌을때
아름답게 지어진 건축물이 보인다
힌두교 사원인
쉬리 파르쉬와나트 지자인(Shri Paeshwanath Jijain) 사원의 입구이다
버스가 달리는 속도가 있어
디카 셔터를 몇 번을 눌러 한장을 겨우 건진 사진이다
나쉬크(Nashik) 시내를 지나자
민둥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가츠(Western Chats) 산맥의 초입이 다가 오는 모양이다
산들이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들이다
저 산은 모래를 쌓아 놓은 듯 황량하게 보이는데
나쉬크(Nashik)에서 뭄바이(Mumbai) 구간의 고속도로는
고속도로로서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흠이 없어
인도 여행하면서 마지막 날인 오늘 처음으로
빠른 속도로 달리 가고 있었다
기차가 다니는 철교도 보이고
산 위에는 꼭 성을 쌓아 놓은 듯
우리나라 산하고는
데칸고원(Deccan Plateau)의 산들은 산세가 달라 보인다
산들이 우리나라 산처럼 쭉 연결되어 있지를 않고
하나 하나 또는 2봉우리 정도로
독립적인 형상이 특이하다라고 생각하며
산을 보며 가는데 버스는 서서히 속도를 줄여 정차한다
입구가 정원으로 가꾸어진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 점심식사가 예약된 사군(Shagun)이라는 식당이였다
카레가 준비된 인도에서 와서 계속된 현지식 식단 이었는데
그래도 질리지가 않고 전부 적응이 되는 식단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우리가 달려온 길을 바라다 본다
한적하게 보이면서도 동화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저 길을 지나온 시간들이
이제는 나의 마음속에 추억으로서 아쉬움과 그림움으로 남을 것이다
내가 저 곳으로 달려 갈 길이다
저 길은 아직 내 마음 속에는 미지의 세계이며
잠시 있으면 내 눈에 들어 올 현실의 세계인 것이다
여행이란 다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서가츠(Western Chats) 산맥을 지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산맥을 넘는 것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지 않고
높낮이가 없이 평지를 달리다가
계속해서 꼬불꼬불 내리막 길을 내려간다
데칸 고원(Deccan Plateau)을 벗어 나는 것 같았다
꼬부꼬불 내려오니
다시 끝 평원지대가 펼쳐 지는데
데칸고원에서 내려오는 도로와
데칸고원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산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데칸고원에서 내려와 얼마나 달렸나
푸연 시야 사이로 친숙해 보이는 산들이 보여진다
인도를 여행 하며 평원과 산형세가 우리산과 다른 민둥산만 보다가
우리 서울의 도봉산을 바라보는 듯하며
야산과 오솔길과 조화된 풍경들이
우리의 농촌과 흡사하게 보여
다시 한번 유심히 쳐다보게 지나친다
오늘밤 자정을 지나 내일 새벽이면 우리나라로 돌아가기에
나의 마음을 적응시키기 위해 보여 주는 듯하였다
한가하게 지나며 보던 도로 주변이 점점 복잡하여 진다
뭄바이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뭄바이(Mumbai) 시내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데
지금까지 보던 인도 풍경과는 다르게 보인다
다른 곳에서는 오토릭샤(Auto Ricksaw)들이 많이 보였는데
지나치는 승용차들이 많이 보였고
초고층 빌딩 숲들이 시야에 들어 온다
초고층 아파트 아파트로 보인다
인도에서 뭄바이(Mumbai)는 최고 잘사는 도시라는데
보여지는 모습이 사실로 느껴진다
아오랑가바드에서 아침 7시55분에 출발하여
뭄바이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40분...
약 400Km를 7시간45분만에 도착한다
뭄바이에 도착하면 어둠이 내려 밤중 관광을 해야 않을까
걱정했는데 괜한 기우였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시내로 접어드니
같은 모양의 새 아파트와 낡은 아파트가 혼재되어 있는 모습이
한채 건너 한채 식으로 줄지어 보인다
똑 같이 도색이라도 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아파트와 다른 점이 보인다
우리나라는 베란다 샤시를 동일하게 규격을 맞추어 시설하는데
베란다 샤시 공사를 한 집과 안한 집들이 보이고
샤시를 한 집들은 모습이 각각 다르게 보인다
뭄바이는 부(富)와 빈(貧)이
가장 큰 양면성이 있는 도시라 하는데
빌딩 숲들이 있는가 하면
수 많은 천막촌이 존립하는 도시라고 한다
뭄바이(Mumbai)의 예전이름은
영국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봄베이(Bombay)에서
1995년도에 개명하여 바꾸었다고 한다
뭄바이(Mumbai)란
어부들의 수호신인 뭄바데비(Mumbadev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뭄바이는 역사적으로 조그만 어업항구였으나
1662년 영국령으로 편입되어
1700년대 중반에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가
봄베이의 7개의 주변의 섬을 매립하여 항만으로 개발하면서
무역항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으며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인도 최대의 무역항으로 발전하였으며
그 때는 영국으로 목화와 곡물을 수출하는 무역항으로
인도 무역의 반 이상을 차지하였다고 하며
현재도 그러한 이유로
인도에서 가장 많은 부유층이 살고 있는 도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도에서 델리(Delhi)가 미국의 워싱턴 DC라고 한다면
뭄바이(Mumbai)는 뉴욕이라 할 수 있는 도시라고 한다
현재 인구는 2000만명이 넘는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도시로서
수출입 물량도 인도 교역의 50% 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인도의 대표적인 기업들의 본사들이 몰려 있으며
월스트리트(Wall Street)와 같은
대규모의 주식시장들이 몰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인도의 다른 도시와는 다르게 뭄바이는 빌딩 숲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나라 부산의 광안대교와 같은
반드라 월리 대교(Bandra Worli Sea Link)를 건너며 보는
윌리팁(Worli Tip) 마을과
그와 비교되는 바다건너 해변 뒤로
빌딩 숲을 이루고 있는 마힘(Mahim)지역이 보인다
뭄바이는 인도에서 최고의 부(富)의 도시라고 하나
그러나 최대 규모의 빈민촌들이 자리 잡고 있고
종교간 갈등이 심한 도시로
1992년 이후 폭탄테러 이후 매년 크고 작은 테러가 발생한다고 한다
몇일 전 우리가 델리에 있었을때
검문검색이 심하여 그 이유를 가이드에게 물어봤을때
뭄바이에서 테러가 발생하여 그렇다고 이야기를 들었었다
반드라 월리 대교(Bandra Worli Sea Link)를 건너와
월리 시페이스 도로(Worli Seaface Rd)에 진입하며 뒤돌아 본
반드라 월리 대교(Bandra Worli Sea Link) 풍경이다
우리나라 부산의 광안대교처럼 바다 위에 세워진 대교로
인도 뭄바이의 악명높은 교통란 해소를 위해
2000년 10월에 착공하였지만
환경단체의 반대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8년 만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총길이는 5.6Km에 왕복 8차선 도로이며
높이 126m의 2개의 주탑에 케이블을 연결한 모습은
뭄바이 앞바다의 또 다른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 알리 다르가(Haji Ali Dargah) 사원은
하지 알리만에 위치하여 육지와 연결된 작은섬에 있는
600년이 된 이슬람 사원으로
어느 종교를 믿던 관광할 수 있다고 한다
이슬람 신도들은 목요일과 금요일에 기도를 위해
많은 방문을 하는데
수요일인 오늘은 많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뭄바이에 도착하여 마하락스미(Mahalaxmi) 기차역 부근에서
처음으로 버스에서 내려 차도를 건너
기차길 위의 고가도로를 건너 부지런히 쫒아가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 고가도로 위에서 난간 밑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내려다 보니 도비 가트(Dhobi Ghat)였다
도비 가트(Dhobi Ghat)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빨래터로서
매일 5,000명이 넘는 도비왈라(Dhobi Walah)들이
1,000개조 넘는 세탁조에서 5교대로 빨래를 한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더러움을 극도로 싫어하여
카스트제도에서 빨래하는 업무를 전담하는 층으로 도비를 두었는데
도비(Dhobi)는 빨래하는 사람들을 말하며
카스트 제도의 최하층에서도 불가촉 천민(不可觸賤民)이
도비왈라(Dhobi Walah)라고 한다
도비왈라(Dhobi Walah)들의
하루 일당은 약 500루피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 돈으로 약 9,500원 정도에 해당하는 임금이다
그러나 현재는 경제발전으로 세탁기들이 많이 보급되었으며
뭄바이 도시 곳곳에 고층 빌딩이 올라가고 있기에
도시 미관을 해친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도비가트를 보고 버스가 다시 시내에서 해안가로 빠져 나오니
차들이 러쉬아워(Rush Hour)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 곳이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 도로 라고 한다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 도로는
말라바 힐(Malabar Hill)에서 나리만 포인트(Nariman Point)까지
이어지는 해변도로로서
뭄바이 최고의 산책로라고 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는
백베이(Back Bay) 해변을 동그랗게 둘러싼 모형을 하고 있어
"여왕의 목걸이'라고도 불리기고 했다고 한다
또한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 해변을 끼고
고층 건물들과 인도 최고 부호들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으며
말라바 힐(Malabar Hill)의 아파트 단지는
뭄바이 최고의 거주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 해안도로를 지나치는 동안
방파제의 난간 위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과
가족 단위로 몰려나와 즐기는 모습들이
많이 눈에 들어 오는데
최고의 산책로임에는 손색이 없는 것 같았다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를 달리던 버스는
나리만 포인트(Nariman Point) 부근에서 좌회전하여
마다메 카마 로드(Madame Cama Rd)를 지나쳐 가는데
성 안네스 고등학교(St. Annes High School)라고 쓰여 있는
학교건물 앞을 지나간다
마다메 카마 로드(Madame Cama Rd)를 지나니
돌아가는 5거리의 SP머커지 초크(SP Mukherjee Chowk)가 나온다
SP머커지 초크를 돌아 카페와 복합 상가가 입주해 있는
우드사이드 호텔(Woodside Inn) 전에 나있는 도로로
버스는 좌회전하여 들어간다
SP머커지 초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 오니
샤히드 바가트 싱 마그(Shahid Bhagat Singh Marg) 거리이다
이 거리에서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고풍스러운 건물인데
저렴함 숙소로 운영 중인
마제스틱 MLA 호스텔(Majestic MLA Hostel)이 눈에 들어 온다
샤히드 바가트 싱 마그(Shahid Bhagat Singh Marg) 거리를 달리다
맥도웰(Mc Dowell)과 가블레스(Gables) 식당 건물에서
좌회전하여 가면은 해안 도로인
PJ람찬다니 마그(PJ Ramchandani Marg)에 닫는다
이 곳에서 내려 약 300m 정도 거리에 있는
타즈마할 호텔과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를 향해 걷는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타즈마할 호텔(Taj Mahal Hotel)은 아시아의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를 받는 호텔로서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옆에 있었다
이 호텔은 구관과 신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관은 100년전 인도-사라세닉(Indo-Saracenic) 건축 양식이며
신관은 1973년에 세웠다고 한다
이 호텔은 출입에는 엄격하게 보안 검사를 하는데
이 호텔 내부에는 관광객으로서 보안검사를 받은 후 입장할 수 있었다
입장하여 로비 천정을 바라 보았는데
1층부터 건물 돔까지 높게 뚫려 있었으며
계단을 통하여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 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이 호텔 내에는 각 여행사 쇼핑 아케이드가 보였으며
또한 정부 관광국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이 호텔을 세운 계기가 있는데
19세기 말 인도의 민족자본가인
잠세티지 나세르완지 타타가(Jamsetiji Naserwanji Tataga)가
그의 영국 친구와 당시 뭄바이에서 최고였던
아폴로 호텔(Apollo Hotel)로 식사하러 갔다가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거절 당하는 치욕을 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분개한 잠세티지 나세르완지 타타가는
인도에서 최고의 호텔을 세우고자 결심하고
1898년부터 5년간 최고의 자재와 최신식 시설로
인도인의 자존심을 가지고 건축한 호텔이라고 한다
타즈마할 호텔 앞 광장에는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Gateway of India)가
아라비아 바다를 접하고 위용있게 서 있는데
뭄바이(Mumbai)의 상징물이라 한다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는 식민지 시절
1911년 영국의 왕 조지 5세(GeorgeⅤ)가 인도를 방문한 것을 기념해
공사를 시작하여 1924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 후 1948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할 때에
마지막의 영국의 총독과 군대가 이 문을 통하여 떠나갔다고 하며
줄리 베른(Jules Verne)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도
나오는 장면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문이다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Gateway of India) 앞에 있는 선착장으로
예전에는 인도로 출입국하는 배들은
이 곳을 거쳐 출입하였는데
교통 수단이 다양해진 현재는 이 곳에서 11Km 정도 거리에 있는
엘리판타 섬(Elephanta Island)까지만 운행하는
작은 보트의 선착장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Gateway of India)를 나와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PJ람찬다니 마그(PJ Ramchandani Marg)로
다시 발길을 옮기는데 꽃마차가 다가 온다
우리가 오랜 인도 여행을 모두 일정대로 무사히 마침을
축하해 주는 퍼레이션이랄까
그런 기분으로 꽃마차를 바라 보았다
아우랑가바드에서 출발할 때는
뭄바이 관광을 야경이나 보지 않을까 염려되었는데
다행히도 환한 낮에 일정을 모두 마치니 땅거미가 몰려 온다
마지막 인도에서 만찬을 하기 위해
다시 마린 드라이브(Marine Drive)를 지나는데
환하게 불을 밝힌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고 몰려들고 있었다
결혼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동네는 부자들만 살고 있다더니
부자들의 결혼식이라 저렇게 광대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도 여행 마지막인 뭄바이에서
사진을 한장이라도 더 남기려 디카를 열심히 눌러대는데
달리는 버스안에서 야간 촬영이라
사진이 전부 흔들리고 안나와 아쉬움만 더 남기고
여행을 마무리 한다
저녁 식사 후
시내에서 30Km정도 떨어진 뭄바이 공항인
차트라파띠 쉬바지 국제공항(Chatrapathi Shivaji International Airport)으로
이동하여 공항 대합실에서 쉬다가
새벽 4시10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5,768Km를
비행시간 7시간15분(시차3시간반)을 날아
인천공항에 오후2시 55분에 도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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