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혼이 담겨있는 영산(靈山)으로
우리의 가슴 속 깊이 남아
꼭 가보고 싶어도 가기가 쉽지 않은 그 곳...
기대되는 벅찬 마음으로 가지고
백두산으로 향한다
인천공항에서 12:30분에 도착하여
심양(沈陽)으로 가는 오후 2:40 이륙하는 비행기에 탑승하였으나
시간이 조금 지체되어 3:05에 이륙한다
이코노미석(Economy Class) 티켓으로
비지니스석(Business Class)에 앉게 되는 행운을 얻어서
식사 메뉴도 다른가 하고 물어 보았더니
식사 메뉴는 동일하다고 한다
비행기 창밖으로
짙은 구름이 끼고 비가 오는 흐린 하늘 아래
심양(沈陽)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이 없는 평원이 넓게 펼쳐지고
멀리 구름과 안개 사이 지평선으로
심양(沈陽)시 건물들이 보이며
심양 공항에서 도심으로 향한 도로가 보인다
오후 3:05에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946Km를 날아 심양(沈陽)공항에
이 곳 시간 3:20 (1시간 시차, 한국4:20) 도착한다
(비행소요시간 1시간15분)
공항 밖으로 나오니
우리와 함께 백두산 및 고구려 유적지 3박4일 일정을 같이 할
26살의 젊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일정은 바로
이 곳 요녕성(遼寧省) 심양(沈陽=선양)에서
동쪽으로 250Km 거리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통화(通化)시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저녁식사와 오늘 밤을 보내는 일정이다
심양 공항에서 출발하자 보이는 심양시 부근이
끝 없는 평원으로 펼쳐 진다
백두산(白頭山)에 가는 방법은
우리는 심양(沈陽)에서 가고 있지만, 단둥(丹東)에서,
장춘(長春)에서, 연변(延邊)에서 가는 방법이 있는데
백두산에 가는 길은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시간은 모두 비슷하게 많이 걸린다
심양(沈陽:Shenyang)은
약 4천300만여 명이 거주하는 요녕성(遼寧省)의 성도(省都)로서
인구는 약 680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심양은 중국에서 큰 중공업 도시로서
문화, 교통이 발달하여
동북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동북(東北)지방이라 함은
요녕성(遼寧省),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인 3개의 성으로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바깥 동쪽에 있다고 하여
관동(關東) 지방이라 불리웠다
심양(沈陽)은
중국말로 선양(Shenyang)이라 부르는데
한때는 후성현(侯成縣), 심주(瀋州), 요녕성(遼寧省), 성경(盛京),
봉천(奉天)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청(淸)나라 개국지로 알려진 심양(沈陽)은
2000년전인 전국시대에 이미 역사에 등장한 곳이다
평야지대라서 그런지
화력발전소들이 종종 눈에 띤다
심양(沈陽)에서 통화(通化) 방면 푸순(撫順)시를 지나니
서서히 끝 없는 지평선에서
산들이 보이기 시작 한다
심양(沈陽)시에서 지린(吉林)시로 가는 G1212 고속도로와
통화(通化)시 가는 S10 고속도로 분기점에 있는
남잡목진(南雜木鎭) 고속도로 휴계소이다
남잡목진(南雜木鎭) 고속도로 휴계소에서 나와
통화(通化)시 방면 S10번 고속도로에 올라 달린다
심양(沈陽)에서 통화(通化)까지 거리에서 중간 정도를 넘긴 것 같다
이 곳에 신빈만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이 있는데
중국 청(淸)나라의 태조 누루하치(1559~1626)가 태어나고
1616년 후금(後金)의 도읍지로 지정한 곳이다
누루하치가 죽은 후 4째 아들 황태극이 황제자리를 계승하고
1635년 여진의 각부를 폐지하고 만주(滿州)라고 하였으며
1636년 국호를 청(淸)이라 하였다
1645년 황태극의 9번째 아들 복림이 3대 황제인 청(淸)세조가 되면서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요녕성(遼寧省)에서 길림성(吉林省)으로 넘어가기 전에 있는
S10번 고속도로의 톨게이트이다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바로 휴계소가 나온다
이 휴계소는 요녕성(遼寧省)의 S10번 고속도로 상에서
왕청문진(旺淸門鎭)에 있는 마지막 휴계소로서
여기에서 잠시 쉬어 간다
휴계소에서 잠시 휴식 후 출발하여
요녕성(遼寧省)에서 길림성(吉林省)으로 넘어와
또 얼마 가지 않아 바로 톨게이트가 나온다
국경을 넘어가는 기분이다
심양(沈陽)에서 3시40분에 출발하여
통화현(通化縣)에 있는 희래등호텔(喜來登大酒店)에 도착한 시간은
9시10분으로 5시간30분이 소요된 시각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로비에 짐을 맡기고
다시 버스에 올라 30분 정도 이동하여
통화시(通化市) 내에 있는 한식화과(韓式火鍋)라는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다
중국에 와 첫 식사로서 저녁식당은 한식당으로서
메뉴는 삼겹살과 함께하는 식사로
즐거운 마음으로 오늘의 여독을 풀어낸다
밤 자정이 다 되어 다시 희래등호텔(喜來登大酒店)로 돌아와
방 배정을 받았는데
내일은 새벽 3시30분에 모닝콜을 하니
세수만하고 4시까지 짐을 방에 그대로 놓고 로비에 모이라고 한다
씻고 자면 잠자는 시간이 3시간 정도!!!
새벽 4:15
버스는 백두산을 향하여 출발한다
통화(通化)에서 백두산(白頭山)까지 거리는 약 280Km로
약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버스는 통화시(通化市) 도심을 통과하지 않고
외곽도로로 돌아서 통화시(通化市)를 벗어나고 있다
통화시에서 백산시와 연결되어 흐르는 혼강(渾江)이다
혼강(渾江:Hunjiang River)은
길림성(吉林省) 백산시(白山市) 동북쪽에 있는
영문정동(迎門頂東:Yingmendingdong)의 산악지대에서 시작하여
백산(白山), 통화(通化)를 거쳐
고구려 발원지의 졸본성이 있었던
요녕성(遼寧省) 환인(桓仁)을 지나 굽이굽이 흐르다
요녕성과 길림성의 경계로 해서 압록강으로 흘러간다
혼강(渾江)은
우리의 고구려(高句麗) 역사에서도 거명되는 강으로
당시 혼강(渾江)을 비류수(沸流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주몽(朱蒙)이 비류수(沸流水) 변에 집을 짓고
나라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녹색 S10 고속도로는 심양(沈陽)에서 통화(通化)까지만 있고
통화에서 이 곳까지 구간은 적색 G201 국도인 것 같은데
요금을 받는 백산(白山) 톨게이트가 나온다
바이산(白山)시는 석탄이 많이 나는 곳이며
물 자원이 풍부 한 곳으로
광천수와 수력발전이 발달한 곳이며
우리나라의 민간단체들과 기업들이 많이 진출하고 교류가 있다고 한다
바이산(白山)시 총 인구는 130여 만명 정도 이고
행정구역은 우리가 가는 백두산(白頭山) 일부까지 관할지로 하며
훈장구(渾江區), 장위안구(江源區=바다오장구:八道江區) 시직할구 2곳과
린장(臨江)시 1개의 현급 시
푸송현(撫松縣), 징위현(靖宇縣) 2개의 현과
인구 8만명 정도의 창바이조선족자치현(長白朝鮮族自治縣)으로
구성되어 있는 도시이다
바이산(白山)시를 지나치면서
보이는 것은 석탄을 쌓아 놓은 장면이 많이 보이더니
화력발전소가 시가지를 벗어 나려 할 때 보인다
바이산(白山)시는
원래 훈장(渾江)시에서 승격되어
1985년 지급(地級)시가 되었는데
다시 1994년 바이산(白山)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개칭된 이유는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백두산을 3번을 방문하였으나
천지(天池)를 보지를 못하였다고 한다
이 때도 몇 번째 방문인지는 모르나
1994년 백두산에 올라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하고 내려와
당시 지급(地級)시에서 묵게되면서
이 곳을 "바이산(白山)이라 하면 어떻겠느냐?"라고 하여
백산(白山)시, 중국말로 바이산(白山)시로 개칭 되었다고 한다
바이산(白山)시에서 장위안구(江源區)를 지나
백두산으로 가는 갈림 길목에 있는 송강하(松江河) 방면의
S201 국도가 매우 좁아진다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
아직은 발달이 안되어 도로 사정이 안 좋다고 하더니
실제로 보니 정말 안 좋다
좁은 도로를 달리던 버스가
비포장 마당이 있는 허름한 '고구려 휴계소'에 정차한다
여기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가자고 한다
호텔에서 싸준 도시락을 들고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컵라면을 사서 뜨거운 물을 얻어 아침을 해결하는데
의자도 부족한 테이블이 2개 뿐이어서
둥그렇게 둘러 서서 먹어야 한다
우리가 다 먹고 나올때 쯤 되니
백두산으로 향하는 버스들이 몇대 더 들어와
실외 마당에 자리잡고 식사 준비를 한다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하며 밭 사이로 보이는 마을이
아침의 평온함으로 눈에 다가온다
고구려 휴계소에서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터널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니
만구진(灣溝鎭)이라는 곳을 지난다
버스가 차도가 아닌 아파트 단지 내
도로 같은 곳으로 간다
만구진(灣溝鎭)은 우리의 시골 읍내 정도의 규모 같은데
버스가 다니는 G201 국도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어
길을 모르는 초보자가 운전하면 많이 헤멜 것 같은 도로다
만구진(灣溝鎭)의 읍내 같은 곳을 통과하니
도로가 조금 나아진다
다시 휴게소에 버스를 세운다
백두산에 갔다가 오면서 토종닭 백숙이나 먹자고 했더니
가이드가 자기가 잘 아는 집 있다고 세운 집이다
그러나 이 집 주인은 닭이 없어 안 된다고 하여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출발한다
중국에서 차 번호판 보는 법은
예를 들어 '吉F H1191'라고 되어 있으면
吉은 길림성(吉林省)을 뜻하고 F는 ABCDEF 6번째이므로
길림성에서 6번째 크기의 도시에서
온 차량이라는 표시라고 한다
길림성에서 통화시가 6번째 정도 도시라고 들은 것 같은데
저 차는 아마도 통화(通化)시 번호판이 아닌가 한다
버스는 무송진(무송진) 입구에서 G201 도로에서 좌회전하여
송강하(송강하) 방향 S302 도로로 가나 했더니
X094 산길 도로로 꼬불꼬불 오른다
한참을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오니
넓은 경사진 초원이 펼쳐 진
X094 도로에서 이름 없는 도로로 접어들어
두도묘령촌(頭道廟嶺村) 부근을 지나고 있다
이름 없는 도로에서 빠져 나와
송강하(松江河)로 가는 S302 도로로 다시 나와 달린다
어! 직접오는 좋은 도로 놔 두고
왜 산길로 돌아 왔지 ???
송강하진(松江河鎭)의 초입에
저수지 건너 금륭목산(金隆木山)이라는 회사 같은데
지왕지판(地王地板)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송강하진(松江河鎭)을 지나고
장백산 공항 입구를 지나
장백산 리조트 및 스파 지역(Changbai Mountain Horizon Reasort & Spa)에
도착하니 직진하면 백두산(白頭山) 서파로 가고
좌회전 하면 북파로 가는 거라 한다
우리는 좌회전하여 백두산 북파로 간다
백두산으로 북파로 가는 길은
도로 양쪽으로 나무들이 무성하여 주변을 바라 보기가 지루하다
지루한 이런 길을 1시간을 넘게 달려 간다
다리를 건너며 잠시 지루함을 떨치는 풍경으로서
대감장촌(大堿場村)이 보인다
오늘 광복절에 백두산에 오른 기념으로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플랫카드를 펼치고 만세 삼창을 하고 싶었는데
백두산에서는 플랫카드도 안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불러도 안된다고 한다
중국 공안들이 감시하고 있으며
행하였을때 문제가 심각해 질 수 있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가는 길목에 버스를 세우고 플랫카드를 펼쳐든다
다시 버스에 올라
지루한 숲 길을 달린다
지루한 숲 도로 길을 한참을 달려 빠져 나오니 시내가 나온다
여기가 어디인가 찾아 보니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 중국명 얼다오바이허진 이다
지도를 보니 왠지 빙글빙글 돌아서 온 느낌이다
무송진(撫松鎭)에서 G201 도로로 로수하진(露水河鎭)을 거쳐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으로 왔으면 빨리 왔을 것 같은데
그러나 무송진(撫松鎭)에서 산길로 빠져 동람진(東嵐鎭)으로 해서
나무숲 도로인 환산선(環山線) 도로를 타고 전천림장(前川林場)을 거쳐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에 왔으니 한참을 돌아서 온 느낌이다
얼다오바이허진(二道白河鎭)에 도착하자
버스는 골목 길 같은 곳으로 들어가
성원대주점(盛源大酒店)이라는 식당 앞에 주차한다
이 곳은 숙박까지 할 수 있는지 빈관(賓館)이라는 글귀도 보인다
여기에서 점심을 빨리 먹고 백두산으로 이동하자고 한다
식사를 하고 나오며
백두산에 갔다가 오면서 먹겠다고 닭 백숙도 미리 예약하고 나온다
식사하고 밖으로 나와 길거리를 바라 보니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낙후된 지역의 느낌으로 다가 오는데
이 곳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은
2014년6월에 우리나라 농심(農心) 회사가
'백산수(白山水)'라는 글로벌 브랜드 육성을 목표로 하여
연간 100만톤 생산이 가능한 생수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2000억원을 투자한 곳이다
다시 버스에 올라 백두산으로 향한다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은
백두산으로 가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하는 곳으로서
도약 하기 위해 공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호텔 공사로 보이는데
싱가포르에 있는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Marina Bay Sands Hotel)처럼 짓고 있었다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지
약 1시간 가까이 되어 약 30Km 떨어진
백두산(白頭山) 북파(北坡) 주차장에 11:55에 도착한다
통화(通化)에서는 출발할 때는 약 5시간 정도 소요되어 9시30분 정도면
백두산 입구에 도착 할거라고 했는데
04:15에 출발하여 11:55에 도착으로 총 7시간40분이 소요되어 도착하였다
중국에서는 창바이산(長白山)이라 부르는
우리의 백두산(白頭山)을 북쪽에서 오르는 입구이다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서
저 건물을 통과하면 뒤편에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
그 곳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에 오르는 봉고로 갈아타는 중간 주차장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백두산 입구를 통과하는데 125위안(한화 약23,000원)
셔틀버스 탑승료 80위안(한화 약14,800원) 짜리 표를 구입하여
건물을 통과하여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간다
건물을 통과하여 뒷편으로 오니
넓은 주차장도 보이고
우리가 타고 이동할 셔틀버스도 보인다
셔틀버스는 환경 친화적인 버스라고 한다
셔틀버스에 오르기 위해 지그재그로 줄을 서는데
가이드는 당부를 한다
"일행들 중간에 모르는 사람을 끼워주지 마라"고...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데
여기는 새치기가 심하며 다른 가이드들이 일부로 중간에 끼어들어
자기 일행을 자기 앞으로 불러들이고
한사람이 끼면 그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게 하여
셔틀버스를 타지 못하는 불상사로 일행들하고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셔틀버스를 약 18Km를 30분정도 타고 와
백두산 천문봉으로 오르는 승합차를 타는 정류장에서 내린다
멀리 백두산과 비룡폭포(飛龍瀑布,중국명:長白瀑布)가 있는
달문(達門)이 나무 뒤로 보인다
백두산 천문봉으로 오르는 표를
80위안(한화 약14,800원)에 구입하여 승합차에 오른다
승합차는 출발과 동시에 속도를 높인다
시속 70~80Km >>>> ::!
산길을 무서운 속도로 달려나간다
꼬불꼬불한 도로에서 속도를 줄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승합차에 앉아 있는 몸은 중심을 못잡고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이 얼을 빼 놓으며
승합차는 백두산으로 오른다
승합차는 약 20분을 달려 올라와
천문봉 휴계소 앞에 도착하여 승합차에서 내리니
천문봉(2670m)과 자하봉(2618m)이 눈에 들어 온다
백두산(白頭山) 여행에 대하여 이해를 돕고자
다른 곳에서 지도를 <펌>해 왔다
백두산(白頭山) 날씨는 변덕이 심하여
천지(天池)를 못 보는 수가 있으니
사람이 몰려 있는 천문봉(2670m)은 나중에 올라가고
먼저 천지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는
1년 365일 중 300일은 볼 수가 없다고 하며
하늘이 허락하는 자에게만 보여 주기 때문에
10번을 와도 못보는 사람은 못보고
처음을 와도 보여 줄 사람은 보여 준다고 한다
나는 허락을 받은 사람인 모양이다
백두산으로 올라 오면서
천지를 못 보고 가면 너무 아쉬울텐데 하는 걱정이 앞섰는데
너무나도 천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오늘이 광복절!
이 의미 있는날
우리의 영산(靈山)인 백두산(白頭山)에서 천지(天池)를 바라보며
플랫카드를 펼치고 '만세 삼창'을 하고 싶었는데
중국 측의 절대 통제로 문제가 심각해진다며 하지마라 당부하니
너무 마음이 저려 온다
자암봉에서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한 쪽에 있는
백두산의 최고봉으로 정상에 구름이 있는 장군봉(將軍峰:2750m)과
향로봉(2719m:망천후), 쌍홍봉(2651m)이 보인다
장군봉 높이는 예전에 배울 때 2744m라고 알고 있었는데
다시 측량하여 2750m로 수정하였다고 한다
천문봉(2670m) 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의 인파로 엄청 몰려 있다
우리 민족이 성산(聖山)으로 여기 듯
청 나라를 일으킨 여진족도 성산으로 여긴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이유는
단군신화에서 곰이 백두산의 굴에 관련된 내용도 있지만
고구려 시대 국내성에 있는 무덤의 묘(墓)자리에서
모든 무덤들이 정북에서 동쪽으로 53˚로 틀어져
성스러운 백두산을 향해 머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올라오는 관광객들 대부분이
중국인 들이며
우리 한국인들은 별로 보이질 않는다
백두산이 이대로 가면 중국에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우리가 백두산으로 올라온 북파 방면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이 백두산 뿐만 아니라 저 밑으로 보이는 간도 땅도
예전엔 우리 한민족들의 기상이 어려있던 곳이였는데.....
다시 휴계소 뒤편으로 가서 줄을 섰다가 천문봉으로 오른다
천문봉에 오르는 것은
한꺼번에 인파가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정체되지 않을 만큼만 짤라서 사람을 올려 보내고 있었다
한민족의 기상과 애환이 함께 공유하는 간도(間島) 땅!
우리 민족의 신화가 생겨 났을 때 부터
우리 민족이 숨이 어려 있는 곳
사연을 많이 보여 주려는 듯 멀리까지 보인다
철벽봉(2560m) 쪽으로 다시 백두산에 오르니
천지(天池)가 확 눈에 들어오는데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 정상은
아직도 보여주기 싫은지
살포시 구름을 안고 있었다
백두산(白頭山)에는
2500m가 넘는 봉우리는 17개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 8개 봉우리가 북한 쪽에 속해 있으며
9개 봉우리는 중국 쪽에 속해 있다고 한다
중국에 속해 있는 봉우리 중
제일 높은 백운봉(2691m) 정상도 구름에 가리우고 있었다
우리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생각만으로 벅차오르는
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는
수면 해발은 2,257m, 상단부 직경 5Km, 최고수심 384m, 평균수심 213.4m,
둘레 14.4Km, 면적은 9,165㎢로서
969년(±20년) 화산분출로 인해 형성된 칼데라 호수이다
천지(天池)는
1962년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에서
중국이 6.25전쟁에 참전하여 북한을 도와줌을 감사하는 답례로서
북한이 백두산 일부를 넘겨주는 조약을 맺어
천지의 54.5%는 북한에, 45.5%는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백두산은 매일 정상에 엄청난 인파가 올라온다고 한다
초창기 백두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한국인들이었으나
중국에서 2002년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으로서
백두산을 장백산풍경구(長白山風景區)로 대대적으로 개발함으로서
한국인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인파 대부분이 중국인들로서 백두산으로 몰려 올라오고 있다
천문봉 휴게소를 바라보니
승합차들이 쉴새 없이 관광객들을 내리고 태우고를 반복하며
줄지어 오르내리고 있다
백두산을 내려 가기 전
아쉬움에 다시한번 북한쪽 천지를 바라 보니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將軍峰:2750m)이 구름을 벗어내고
잘가란 듯이
보여주지 않던 정상의 위용을 보여주니 감격이다
백두산(白頭山)과 천지(天池) 관광을 마치고
천문봉휴계소 주차장으로 이동하며 북파 능선으로 보이는
끝 없이 펼쳐지는 간도(間島) 땅을 바라보며
간도(間島)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조선과 청의 국경이 명확하지 않은 시기인
1712년(숙종 38년)에 청(淸)은 오랄총관(烏喇摠官)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조선과 청의 양국간 경계하는 백두산에 정계비 세운다
이 때 조선(朝鮮)에서도 관리를 파견하였는데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인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백두산에 가지 못하고 무산에 머무르게 되고
접반사 군관, 차사관, 통관 등이 갔으나
청(淸)의 일방적인 의지에 의해 정계비(定界碑)가 세워진다
1881년 청(淸)이 간도(間島)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朝鮮)은 정계비의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
(서위압록동위토문:西爲鴨綠東爲土門)"을 근거로 해서
조선(朝鮮)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淸)은 토문(土門)은 두만강(豆滿江)을 말한다며
간도(間島) 일대가 청(淸)나라 땅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조선(朝鮮)은
두만강(豆滿江)은 정계비(定界碑)에서 수십리 밖에서 발원한 강(江)이고
정계비(定界碑) 옆에 흐르는 물줄기가 토문강(土門江)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간도(間島)는 조선의 영토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는데
청일전쟁 후 일본(日本)은 1909년9월4일 청(淸)과 간도협약(間島協約)을 맺고
남만주 철도부설권을 자기들이 얻는 대신
일방적으로 남의 땅 간도(間島)를 청(淸)에 넘기면서부터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승합차는 또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내려 간다
꼬불꼬불한 길을 70~80Km로 달리며
브레이크 사용도 잘 안하고 쏜살같이 달려 내려 간다
천문봉 관문인 중간 주차장에 도착하여 승합차에서 내려서
다시 비룡폭포(飛龍瀑布, 중국명 장백폭포)에 오르는
셔틀버스로 옮겨 타 약15분 정도 오른다
버스에서 내리니 여기에도 사람들로서 붐비며
백두산 달문(達門) 방향을 바라보니
천지(天池)로 올라가는 계단 터널이 보인다
비룡폭포(飛龍瀑布)로 오르며
온천지대를 지나 뒤를 돌아보니
계곡이 직선으로 길게 이어져 아름답게 보인다
이 지류가 토문강(土門江)으로 흘러 쑹화강(松花江)을 거쳐
아무르강과 만나 러시아 사할린 섬 위쪽의 오호츠크 해로 빠져나간다
언덕을 돌아 오르니 장엄하게 68m 높이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비룡폭포(飛龍瀑布)가 보인다
언제부터 인가
우리의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명칭은 낯설어 지고
중국명인 장백폭포(長白瀑布)라는 명칭이 귀에 익숙하게 들리는
우리의 비룡폭포가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품고 있었다
비룡폭포(飛龍瀑布)에서 터널계단을 거쳐
백두산 천지(天池)가 있는 달문(達門)으로 오르는 등산로인데
등산로가 폐쇄되어 있었다
비룡폭포로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 사이에 있는
온천지대로서
비룡폭포에 오를 때는 피어 오르는 수증기가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았으나
비룡폭포로 올랐다가 내려 오는 길목에서의 수증기는
카메라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비룡폭포 입구로 내려와
백두산 온천수에 삶은 계란 15개를 50元(위안)에 구입하여
맛들을 보게하였는데
껍질이 흰자와 함께 두툼하게 벗겨진다
백두산 관광이 끝나간다
우리가 통화(通化)에서부터 타고 온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입구로 나가는
백두산풍경구 내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타기 전
아쉬운 마음에 다시한번 뒤돌아 본다
백두산 정상 천지에서 처럼 잘가라는 듯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작별의 정인지
어두운 구름을 몰아내고
파란 하늘 아래로 백두산의 위용을 선명하고 진하게
우리의 가슴에 담을 수 있도록 보여주고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입구 주차장으로 가던 중
장백산풍경구 보호센터 입구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퇴근시간으로 통근 차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비룡폭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백두산 북파 입구 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이 곳에 도착하여 백두산을 향하여 출발한지
총 5시간 5분에 걸쳐 백두산 일정을 마치고
우리가 다시 통화현(通化縣)에 숙소로 타고 갈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백두산 북파 주차장에 도착 한 것이다
버스에 오르기 전 백두산 북파 주차장에서 모여
기념 촬영을 한 후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에서 점심을 먹은 식당에다
주문해 놓은 닭백숙을 먹기 위해
성원대주점(盛源大酒店)으로 향한다
어제 이도백하진(二道白河鎭)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7시에 출발하여
다시 이 곳 통화현(通化縣)의 희래등호텔(喜來登大酒店)에
새벽 1시30분(총 6시간 30분 소요)에 도착해서 잠을 자고
아침 7시에 기상하니
몸이 찌뿌등하고 피곤하다는 느낌이 온다
2일을 밤에만 이 호텔에 들어와 잠을 잤으나
오늘에서야 호텔의 모습을 제대로 본다
통화(通化) 시(市)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통화(通化) 현(縣)에 위치한 작은 호텔이다
오늘의 일정은
통화시내에서 90Km정도 떨어진 압록강 변의 지안(集安)으로 이동하여
국내성터, 광토태왕비, 릉, 장수왕릉을 관광 후
또 환인(桓仁)까지 가는 일정이다
지안(集安)으로 가기 위해
호텔을 나와 통화(通化) 시(市)내로 향하는
통화(通化) 현(縣) 거리의
화려한 가로등들이 줄지어 보인다
통화(通化)시내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의
동남부는 압록강을 경계로하여 북한의 자강도,
서남부는 요녕성(遼寧省),
북부는 길림성 랴오위안시(遼源市),
동부는 바이산시(白山市)와 접하고 있으며
행정구역 편제상의 성(省)과 현(縣) 사이의 규모의
현(縣)과 진(鎭)을 포함하는 지급시(地級市) 이다
통화시(通化市) 인구는 총 230만여 명이며
시내에 거주 인구는 약 80만명 정도라고 한다
통화(通化) 시내 한 가운데는 고구려 시대 비류수(沸流水)라고 일컷는
혼강(渾江:Hunjiang River)이 흐르고 있었다
통화시를 벗어나기 전에
면세품 점에 잠시 들렸다가 가자고 한다
대나무를 원료로 하여 제품들을 파는 상가인데 설명만 듣고 밖으로 나와
길거리 상가 수퍼 앞에 있는 파라솔에 모여 앉아
음료와 안주거리 주문하여 잡담을 즐기고 있으니
한사람씩 나와 합류하기 시작한다
웃고 떠들다 버스에 올라타
11:05 통화(通化) 시내에서 약 90Km 떨어진
압록강 변에 있는 집안(集安:중국명 지안)을 향하여 출발한다
지안(集安)은 우리의 고구려 역사에서
AD 3년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당시 국내성(國內城)으로 불렸던 집안(集安)으로 천도하여 온 후
AD 427년까지 고구려의 수도(首都)로서
424년간 찬란하게 번성기를 누렸던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적지가 있는 곳이다
통화(通化) 시내에서 지안(集安)까지 2/3 정도 달려 왔을까?
지도를 보니 가십방자구(家什房子溝) 근처로서 검문소가 있다
그 곳에서 버스기사는 차를 세우고 내려
공안에게 면허증을 주고 다시 버스에 오르더니
앞 쪽에 보이는 넓은 공간에 버스를 주차하더니 검문소로 걸어간다
검문소에 가더니 면허증을 받아
아무일 없다는 식으로 다시 면허증을 받아 온다
이유는 이 검문소를 지나면
험하고 꼬불꼬불 위험한 고개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졸음 운전을 하지마라고
버스기사를 의무적으로 버스에서 내리게하여
걷게 만드는 구간이라고 한다
꼬불꼬불한 고개는 장백산맥(長白山脈)의 줄기로서
높은 산길을 넘은 것 같은데
고구려 시대 때
압록강 변에 있던 국내성(國內城)은
이 산악 지형이 자연적인 방어진지가 아니었나 싶다
사진은 고개를 넘어와 차창 밖으로 보는 첫번째 마을인 듯하다
더덕 밭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밭들이 많이 보인다
압록강 변이 가까와 질수록 산새가 낮아지고
옥수수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산악지형이 끝나갈 무렵이라 그런지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며
평소에 국내 여행하며 자주 보는 듯 친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지안(集安) 현(縣)으로 접어드니
중국의 다른 대다수의 도시들 처럼 공사중인 곳이 많이 보이는데
세계적으로 철(鐵)을 제일 많이 소비하는
블랙홀이라는 말이 실감이 간다
지안(集安:Jian)은
통화시(通化市) 행정구역에 속한 현(縣)급의 도시로서
인구는 25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하며
우리의 북한땅 만포시와 압록강(鴨綠江)을 사이에 두고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지안(集安)은
우리의 역사에서 고구려(高句麗) 국가가 세워진
기원전 37년에서 패망하던 668년의 총 705년의 역사 중에
제2대 유리왕이 AD 3년에
고구려가 발원한 환인(桓仁)에 있는 졸본성(卒本城)에서
당시 지명 국내성(國內城)이고 현 지명은 지안(集安)으로 천도한 후
427년에 제20대 왕 장수왕이 평양(平壤)으로 수도(首都)을 천도 할 때까지
424년간 우리 민족의 고도(古都)로서
과거 대륙을 호령하던 우리 조상들의 기개(氣槪)이 서려있는 장소이다
버스가 지안(集安) 시내로 접어들자 점심 식사부터 하자고 한다
식당으로 향하던 중
국내성(國內城) 터라고 가르키는데 황당 그 자체였다
국내성(國內城)이 있던 성터 위에는
아파트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낮으막한 성벽만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자리 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구려(高句麗)의 도성(都城)으로서 국내성(國內城)은
성곽의 총 길이가 2,686m, 높이는 5~6m로서
성문 6개를 갖추고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북쪽 성벽 가운데 300m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버스는 국내성 근처에 있는
묘향산이라는 북한 식당 앞에 정차한다
통화시에서 11:05에 출발하여 집안에 도착한 시각은 12:40으로
약 90Km를 1시간 35분을 달려와 버스에서 내린다
북한 식당에 가는 것은 일정에 없던 내용으로
가이드에게 부탁하여 일정을 변경하여 가는 일정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무대 바로 앞 테이블은
중국인들의 회갑잔치하는 주빈석이었고
우리 일행은 바로 그 뒤 한 가운데 1개 테이블을 지정 받았는데
식당 안은 우리 외에는 온통 회갑잔치에 온 중국인 하객들 뿐이었다
좌석에 착석하자 바로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식당에 들어 오기 전에
가이드에게 북한 들쭉주를 서비스 부탁해 놓았는데 2병을 들고 온다
백두산 들쭉주는 알콜 도수에 따라 가격차가 있으며
종류는 30%, 35%, 40%짜리 3종이 있다
예전 캄보디아 여행시 40%짜리를 8만원에 구입해 마신적 있다
그래서 가격 때문에 들쭉주 종류를 알게 되었는데
곤명 여행 시 5만원을 받기에
캄보디아에서 8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여기는 싸다고 하니
설명을 해주는데 확인해 보니 35%짜리 였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당연히 40%짜리를 요구해 서비스로 받았다
공연이 시작되어
중국인들은 그들의 잔치인데도 조용히 식사만 한다
우리 일행들은 우리 가락이 나올 때 마다 환호와 함께 박수치며 같이 불러주니
공연하는 아가씨들은 우리 좌석으로 와서 우리와 같이 춤추고 흥을 돋꾼다
그들의 잔치가 아닌 우리들의 축제로 바뀐 모습이다
식사는 공연과 함께 약 1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
공연하는 북한 아가씨들은 무대 뒤로 들어 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한복과 무대복을 바꿔 입어가며 공연을 한다
노래가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를 하는데
언제나 통일이 되어 왕복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웃으며 "반갑습니다"를 할까?
식사 후 압록강으로 이동하여
선착장 앞에 선다
여기에서 보트를 타고 북한 땅 가까이 가 보려고 한다
보트를 타러 선착장으로 내려 가던 중
바로 강 건너 편으로 우리의 북녘 땅이 보인다
그러나 갈래야 갈 수 없는 통제된 아쉬움이 남는 우리의 땅이다
압록강 건너 상류편 저 멀리 굴뚝이 보이는데
저 곳은 북한의 만포시이다
우리가 탄 보트는 그 쪽을 향해 강을 빠르게 거슬러 오른다
북한 마을이 가까이 시야에 들어오고
강가에 어린 애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데
보트를 조정하고 있는 기사는
우리를 물놀이 나온 관광객으로 착각했는지
보트를 가지고 바나나 보트를 탄 식으로 자기 자랑 쌩쇼를 하며
쳐다 보기도 힘들 정도로 험악하게 조정을 하고 있어
짜증 지수가 상승을 한다
남북으로 국토가 분단되어 있는 우리 땅을
가까이에서 조금이라도 더 쳐다보고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계획에 없는 돈을 주고 일부로 보트를 탓는데
한국인의 마음을 모르는 이 철없는 놈이
기분을 망쳐 놓고 있었다
저 부표가 국경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트를 타고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 오던 중
똑같이 지어져 일 열로 줄지어 늘어선
북한의 마을이 눈에 들어 온다
모터 보트를 타고 구경보다는
모터 보트 기사의 쌩쇼에 시달리며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한바퀴 돌아서 순식간 선착장으로 돌아 왔기에 손해 본 것처럼
기분이 잡쳐 압록강을 바라보는데
유람선 한대가 유유히 지나간다
저 배는 1시간을 압록강을 천천히 유람한다고 한다
저 배를 탔어야 하는데....
압록강 선착장 앞의 압록강변의 모습이다
북한 쪽과는 전혀 다르게
발전된 모습을 하고 있고 사람들도 여유 있어 보인다
압록강에서 아쉬움을 뒤로 한채 버스에 올라
지안(集安) 시내 중심가에서 북동쪽으로 4Km 정도 위치한 곳에 있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릉(陵)과 비(碑)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지안(集安) 역 북쪽에
6세기 말경에 조성된 5개의 고분이 십자형으로 있으며
그 중에서 5호 묘만 공개되였었다고 하는데
내외부 온도차 결로현상에 의한 손상 우려로
지금은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묘실 안 사면에는 거대한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천장 받침돌에는 일원신(日月神)과 제륜신(制輪神) 등
1500년전의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碑) 매표소 옆에 있는 안내도이다
소방시설과 함께하는 안내도로서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재 관리 차원에서
소방시설 표시와 함께하는 안내도를 설치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碑)와 릉(陵)은
2004년 7월7일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었다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91~412년) 비(碑)는
그의 첫째 아들인 제20대 장수왕(長壽王)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세웠다
높이는 6.39m, 무게는 37톤이며
4면에 광개토대왕 업적을 1775자로 기록을 하였으나
현재 판독이 가능한 문자는 1600여자 정도만 가능하다고 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碑)는
풍화를 막기 위해 유리관 건물로 보호되고 있었고
중국에서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호태왕(好太王)이라 칭하고 있었다
근거는 광개토대왕 비(碑)의 1면 비문(碑文)에
고구려 시조 주몽의 탄생 신화와
광개토대왕이 18세 때 즉위하여 39세 때 사별에 관한 것과
북으로 거란 정벌과
남으로는 백제 토벌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제19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즉위하는 내용 중에
고구려 시조인 주몽(추모왕:鄒牟王) 동명성왕(東明聖王)에서 이어져
17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고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2면 비문(碑文)에는 아리수(한강)을 건너 백제 토벌과
신라에게서 조공을 받는 내용과
신라에 군대를 파견해 왜구를 섬멸하고 신라를 구원한 내용이며
3면 비문(碑文)에는 백제와 왜구가 연합하여 경계를 침입하자
몸소 출병하여 궤멸시키고
동부여(東夫餘)가 조공을 받치지 않자 몸소 출병하여 항복을 받고
64개 성을 공파(攻破)하여 1천4백개의 촌을 취득한 내용이며
4면 비문(碑文)에는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생존시 교시(敎始)로
선대왕들의 묘(墓) 관리가 안되어 연호에 오차가 있으므로
석비(石碑)를 안치하라는 내용과 자신의 묘(墓) 관리에 대해 적혀있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碑)가 있는 곳에서 바라보니
북한 만포시에 있는 굴뚝이 가깝게 시야에 들어 온다
산 위에 굴뚝이 서 있어
땅속으로 무엇인가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광개토대왕 비(碑)에서 릉(陵)으로 향하며
릉(陵) 쪽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현재 이 곳엔 한국 사람은 우리 일행들 뿐이 없는데
대부분이 중국 사람들이다
백두산에서도 엄청난 중국 사람들 인파로 넘쳐나더니
여기에도 많은 중국인들이 입장하여 관광을 한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소중하고 귀중하게 지켜야 할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에 온다고 하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러다가는 2002년부터 중국에서 진행되어지고 있는 동북공정에 의하여
우리의 소중한 고구려(高句麗)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귀속되어 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머리에 스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릉(陵)은
비(碑)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릉(陵)은 직사각형 돌을 7단으로 쌓아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 묘로서 한변의 길이가 66m나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고 있으며
남아있는 높이가 14.8m라고 한다
석실이 있는 상단부는 철재 계단으로 오르면
대왕과 왕비가 합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실이 있다
이 묘(墓)가 광개토대왕 릉(陵)이라 추정하는 것은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는
원태왕릉 안여산 고여악(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이란 명문(銘文) 벽돌이
이 무덤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 릉(陵)이라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 릉에서 사방을 둘러보며
지금은 이 곳에 찾아 오기도 힘든 다른 나라 땅이 되었지만
저 멀리 요동 땅과 만주벌판 전역을 호령하며 다스리던
옛날 우리 조상들의 기백이 생각이 나
아쉬움 마음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광개토대왕 릉에서 장수왕 릉으로 가는 장군로(將軍路) 도로이다
장수왕 릉은 광개토대왕 릉에서
북동쪽으로 약 0.5Km 떨어진 룽산 기슭에 있다
장수왕(長壽王) 릉(陵)인 장군총(將軍塚)으로 이동 중
"고구려 28대왕 박람관"이라는 우리 한글 간판과
우리 한글로 고구려 왕조에 대하여 소개하는 글이 적혀 있는
최근 지어진 새 건물을 발견하였는데
고구려 역사를 중국 역사에 포함된 동북방의 소수민족 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설명하는 소개 글이라 한다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412~491년) 릉(陵)은
장군총(將軍塚)이라고 하는데
장수왕 묘(墓)로 추정하고 있을 뿐
부장품이 모두 도굴되어 누구의 무덤인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장수왕(長壽王)은 즉위된 15년인
427년에 고구려(高句麗) 수도(首都)를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천도하였는데
왕이 즉위하면 묘자리 공사를 하기에 이 곳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장수왕(長壽王) 릉(陵)으로서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장군총(將軍塚)은
1,100개가 넘는 화강암을 7단으로 쌓아 올린 구조로서
한변의 길이는 31.58m이고 높이는12m,
5단 중앙에 석실 입구가 있으며
이 곳에서 3단 현실(玄室)로 이어진다
묘(墓)의 사방에는
넓이 1.4m, 높이 3m 정도되는 돌이 세워져 기대어져 있다
이유는 돌들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 하였다고 하는데
종교적인 의미도 있어 보인다
장군총(將軍塚) 바로 뒤쪽에는 있는 작은 부장묘(附葬墓) 하나가 있다
장군분1호배분(將軍墳1號陪墳)라는 적석묘로서
이 무덤은 장군총(將軍塚)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장군묘라는 설과
후궁의 묘라는 설이 있는데
도굴로 인해 자료가 없어 확실한 것은 없다고 한다
고구려의 국내성(國內城)인 지안(集安)에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12,000기가 넘는 고구려시대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많은 수가 사라지고
약 6000기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고구려 시대 국내성에 있던 모든 무덤들은
백두산에서도 언급했듯이
정북 방향에서 53˚ 동쪽으로 틀어져 배치되어 백두산을 향하고 있다고
재중동포 사학자가 연구 끝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백두산(白頭山)이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성산(聖山)임을 말해주고 있다
백두산은 하느님(天帝)과 하백(河伯:물을 다스리는 신)이 만나는 곳으로서의
신앙을 바탕으로 신성시하고 있는 것이다
* 하백(河伯) : 고구려 시조 주몽의 외조부인 전설상의 인물로
주몽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해모수(解慕漱)와 사통을 하자
이를 벌하여 태백산 남쪽의 우발수(優渤水)로 내 쫓았다고 한다
* 해모수(解慕漱) : 천제(天帝)의 아들로 북부여의 시조
고구려 국내성 관광을 마치고
17:00 길림성(吉林省) 지안(集安)에서 약 200Km 떨어진
요녕성(遼寧省) 환인진(桓仁鎭)에 있는 숙소로 향한다
건강촌(建疆村:Jianjiangcun)과 대립자구(大砬者溝:Dalizigou) 부근의
압록강변의 도로를 지나며 보는
우리의 북녘 땅...
수영을 해서도 건널 수 있을 것만 거리...
쳐다만 보고 있어도
뭉클해지며 가슴이 저미는 우리 땅...
가서 볼래야 가볼 수 없는 땅...
언제나 통일이 되어 웃으며 갈 수 있으려나...
압록강변을 벗어나 내륙지방으로 향하는데
지도를 보니 단동(丹東)과 연결되는
집단선(集丹線)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버스가 얼마나 달렸나 피곤하여 눈을 감고 있는데
가이드가 "가이드를 못하겠으니까 가이드 바꾸세요"라고 하며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차에서 내린다
무슨 일인가 알아보니
통화(通化)에서 지안(集安)에 도착하여 식사전 국내성(國內城)에서
사진을 찍고 갈 수 있도록 정차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식사 후 시간을 내주겠다고 하여 기다렸으나
장군총(將軍塚)을 마지막으로 관광하고 국내성 부근을 지나면서도
세우지 않고 지나쳐와
"국내성에서 세우지 않고 지나쳐 왔다"고 이야기하니
화를 내고 내리더라는 것이다
어린녀석이 괘씸하여 여행사에 전화하여 바꾸고 싶었지만
이 시골에서 어느 세월에 바꿔서 출발하나 생각이 들어
달래서 버스에 태우고 다시 출발한다
집단선(集丹線) 도로를 달리던 버스는
양수조선족향(凉水朝鮮族鄕:Liangshuixiang) 입구에서
환인(桓仁) 방향 우회전하여 양괘선(凉掛線) 도로를 달린다
날이 어두워져 눈을 감고 있다 보니
환인(桓仁) 시내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환인(桓仁)은 우리의 고구려(高句麗)가 발원한 곳으로
졸본성(卒本城) 터가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 있는 곳이다
환인(桓仁)에 도착하자 저녁식당부터 찾는다
지안(集安)에서 오후 5시에 출발하여 환인(桓仁)까지 약 200Km를 달려와
도착한 시간은 저녁8시30분으로 총 3시간30분 소요된 시간이었다
이번 여행의 중국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환인진(桓仁鎭) 혼강(渾江) 변에 있는 륭흥국제호텔(隆興國際大酒店)이다
어제밤 이 호텔 옆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모두들 과했는지
컨디션들이 아침부터 힘들어들 한다
오늘의 일정은
우리의 고구려(高句麗)가 발원한
졸본성(卒本城) 터가 있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을 관광하고
심양(沈陽) 공항으로 이동하여 집으로 가는 일정이다
환인(桓仁) 현(縣)은
만주족 자치구(滿洲族自治溝)로서 14개 민족이 거주하며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이 중에 만주족(滿洲族)이 30%정도 된다고 한다
환인(桓仁) 현(縣)에서 약 22만명 정도가 농업에 종사하는데
이 곳은 기후가 좋아
지금까지 큰 수해도 가뭄도 없었으며
청정자원으로 인삼을 비롯한 한약재와
산호도, 산포도 등의 작물이 좋은 편이라 한다
고구려 시대에 비류수(沸流水)라고 하던
혼강(渾江:Hunjiang River)이다
혼강은 길림성(吉林省) 백산시(白山市) 동북쪽에 있는
영문정동(迎門頂東:Yingmendingdong)의 산악지대에서 시작하여
백산(白山), 통화(通化)를 거쳐
고구려 발원지의 졸본성이 있었던
요녕성(遼寧省) 환인(桓仁)을 지나 굽이굽이 흐르다
요녕성과 길림성의 경계로 해서 압록강으로 흘러간다
고구려 건국사에서 비류수(沸流水)에 대한 언급은
주몽이 동부여 금와왕의 왕자들의 박해를 피해
비류수(沸流水)를 건너와 2번째 부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하고
졸본성에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에서 언급된다
호텔에서 약 20분 정도 이동하면 오녀산성(五女山城)입구에 다다른다
매표소를 통하여 들어가
고구려시대 졸본성(卒本城) 등에서 출토되었다는 유물들이 전시된
고구려 박물관을 관람하며 돌면서 올라가게 되면
성처럼 보이는 위쪽에 셔틀버스 주차장으로 나가게 된다
* 박물관 내 촬영 금지
셔틀버스 주차장으로 나오니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고구려 시조비(高句麗始祖碑)가 들어 온다
셔틀버스 주차장에는 기념품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이 곳에서 셔틀버스를 약 15분 정도를 타고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이동한다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중
정상부가 암반 위에서 평평하고 요새처럼 보이는
산 형상이 들어 온다
BC 37년에 주몽(朱蒙)이 고구려(高句麗)를 최초로 건국했던 장소인
졸본성(卒本城)으로 추정하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다
오녀산성(五女山城)도
2004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 성(城)에 대해서 기록은
서진(西晉)의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30권 중
동이전(東夷傳)에서 흘승골성(訖升骨城)이라 처음 언급했으며
광개토대왕비에서는 홀본성(忽本城),
삼국시대 다른 기록들은 졸본성(卒本城)이라 쓰여 있으며
고려사(高麗史) 공민왕조에서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으로 쓰여 있다고 한다
※ 삼국지(三國志) :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셔틀버스는 오녀산성(五女山城) 서문(西門) 앞에 정차하였다
그런데 역사적 근거가 없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 했을까?
이 산의 설화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산과 마을을 수호하던 선녀 5명이
이 지역을 공격하는 흑룡과 싸우다가 전사를 하였다는데
선녀 5명이 살던 곳이 오녀산(五女山)이라는 내용이다
고구려 역사적 내용과는 근거가 없는 것 같다
오녀산의 높이는 820m로 우리 북한산 836m 높이와 비교되는데
셔틀버스가 640m정도 높이까지 오른다
버스에서 내리면 엄청난 경사도의 999개 계단을
땀을 흘리며 올라야 성(城)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오녀산 위의 높이 200m에 이르는
천연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그 곳에서 비교적 산새가 완만했던 동쪽과 남쪽에만 성벽을 쌓은
천연 요새로서 고구려 멸망 전까지는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城)이라 한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의 남북 길이는 600여m 정도이고
동서 너비는 130~300여m 정도로서
산 정상이지만 성(城) 안에는 천지(天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2000년 동안에 마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니
천연 요새로서 적합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성 위로 올라와 좌측으로 언덕 길이 있어
조금가니 운해송도(雲海松濤)라는 비석이 있고
막다른 길이 나온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 우측길로 향한다
걷다보니 고구려 궁터가 나온다
주축돌들이 놓여 있어 왕궁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아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2000년전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이신 동명성왕(東明聖王) 주몽(朱蒙)께서
여기에서 기거하며 호령했을 모습이 그려진다
조금더 지나 약간 구릉 쪽으로 내려서면
천지(天池)라는
연못이 2곳이 나오는데
1개는 자연적인 연못으로 보이고
사진에서처럼
1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모습이다
이 연못은 2000여년 동안을 한번도 말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천지(天池)를 지나 나즈막하게 오르는 언덕길을 걷다보니
당시 사용하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멧돌도 보이고
사람들이 살았다는 거주지(居住地) 터들이 있다
거주 공간도 작아 보였지만
당시의 생활상들이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 같았다
거주지 터를 지나치면 점장대(點將臺)로서 성 안 동쪽 끝이 나온다
이 곳은 장수(將帥)가 진두지휘하던 장소로 보인다
점장대(點將臺)에서 내려다 보는 환인호(桓仁湖)...
안개로 인해 전망 시야가 뿌였다
바로 밑으로는 셔틀버스 다니는 길이 보인다
이 곳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은
동문(東門) 방향 일선천(一線天) 계단 쪽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비행기 탑승 시간이 늦겠다고
올라 왔던 서문(西門)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 가
오녀산성(五女山城) 관광을 아쉬운 마음으로 마친다
10:50 버스는 심양(沈陽) 공항을 향해 출발한다
환인(桓仁)에서 심양(沈陽) 공항까지의 거리는 약 200Km로
16:35 이륙하는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서는
14:30까지는 공항에 도착하여야 하기에 바쁜 시각이다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 기록된
주몽(朱蒙)이 비류수(沸流水:혼강)를 건너 고구려(高句麗) 건국을
오녀산성(五女山城)의 졸본성(卒本城=홀본성:忽本城)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면
광개토왕비 1면 비문(碑文)에
"아시황천지자(我是皇天之子) 모하백여랑(母河伯女郞) 추모왕(鄒牟王)
위아련가부귀(爲我連葭浮龜)"
응성즉위련가부귀(應聲卽爲連葭浮龜)。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하백(물을 다스리는 신)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거북이를 띄워 갈대로 이은 다리를 놓아라"
소리를 듣고 즉시 거북이를 띄워 갈대를 이은 다리가 만들어졌다
연후조도(然後造渡) 어비류곡(於沸流谷) 홀본서(忽本西)
성산상이건도언(城山上而建都焉)。
연후 강을 건너 비류계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다
부락세위(不樂世位) 인유황룡래하영왕(因遺黃龍來下迎王)
왕어홀본동강(王於忽本東岡) 이룡혈승천(履龍頁升天)。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아 하늘에서 황룡이 내려와 왕을 영접하였고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다는
광개토왕비 1면 비문에
신의 아들로서 주몽(朱蒙=추모:鄒牟)이 고구려 건국 과정과
죽음에 이르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주몽(추모) 탄생 신화에 알아보자
고대국가 부여(夫餘:기원전2세기~494년)는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일대를 지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예맥계 부여족의 부족 국가로서 일명 북부여(北夫餘)라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로부터 기원한 국가로 추정하고 있다
고대 부여는 초기국가 형태로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신화는
천제(天帝)에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北夫餘)를 세웠다고 한다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해부루(解夫婁) 때
다시 동해 기슭의 가섭원(迦葉原)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동부여(東夫餘)라고 하였으며
해부루(解夫婁)가 죽자 그의 아들 금와(金蛙)가 왕이 되었다
주몽 탄생 신화는 이 때부터 시작된다
동부여(東夫餘)의 금와(金蛙) 왕이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 물으니
"나는 하백(河伯:물을 다스리는 신)의 딸 유화(柳花)인데
여러 아우들과 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와 자기는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며
나를 웅신산하 압록강가의 집 속으로 꾀어 사통하고 가서
돌아오지 않으므로
아버지가 중매 없이 혼인한 것에 화가 나 여기로 귀양을 보냈다"고 말하니
금와(金蛙) 왕이 유화(柳花)를 궁으로 데리고 가서 방에 가두었다
그런데 방 속에서 일광이 비쳐와 몸을 피하여도 쫓아와서 비치매
확인하니 태기가 있던 유화(柳花)가 닷대 정도 되는 알을 낳았다
금와(金蛙) 왕이 불길하게 여기어
알을 버리어 개와 돼지에게 주니 먹지를 않고
길에 버리니 우마가 피해다니고
들에 버리니 새와 짐승이 덮어 주니
깨뜨려 버리려고 하다가 차마 못하고 다시 유화(柳花)에게 돌려주었다
유화(柳花)가 보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이 줄거리가 주몽(朱蒙)의 탄생 설화이다
이 내용으로는 해부루(解夫婁)와 주몽(朱蒙)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는 같은 아버지를 둔 이복 형제이며
금와(金蛙) 왕은 조카라는 결론이 된다
"주몽" 드라마 상에서는
유화부인이 금와(金蛙) 왕의 후궁으로 나오는 데
할머니를 후궁으로 둔 격이 된다
환인(桓仁)에서 심양(沈陽)공항까지
2/3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온 것 같다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 없다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편하게 식사하고 가자고 하여
남잡목(南雜木) 고속도로 휴게소에 정차 한다
그런데 식사를 주문한 후 중국의 만만디 정말 장난이 아니다
식사를 코로 했는지 입으로 했는지
정신없이 먹고서 다시 공항으로 향한다
주몽(朱蒙)의 성장 및 고구려 건국 내용은
나이 7세에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성숙하고 영리하며
혼자 화살을 만들어 백번을 쏘면 백번을 맞추었다
나라 속담에 활을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함으로
주몽(朱蒙)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金蛙) 왕에게도 아들이 있었는데 주몽(朱蒙)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
장자 대소(帶素)가 아버지 금와(金蛙) 왕에게 고하기를
주몽(朱蒙)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니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 고한다
이에 금와(金蛙) 왕은 장자 대소(帶素)의 고언을 무시하고
주몽(朱蒙)에게 말을 기르게 한다
주몽(朱蒙)은 준마(駿馬)를 알아보고 적게 먹여 힘없게 보이게 하고
노마(老馬)는 잘 먹여서 살 찌우게하여 힘있어 보이게 함으로
왕이 살찐 노마(老馬)를 타고 준마(駿馬)를 주몽에게 주었다
이때 왕의 여러명의 아들과 신하들이 주몽(朱蒙)을 죽이려고
모략을 꾸미고 있었는데
주몽(朱蒙)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이를 알고
아들 주몽에게 "너를 죽이려고 하니
너의 총명함에 어디를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
빨리 도망을 가라"고 한다
이에 주몽(朱蒙)은 자기를 잘 따르고 친한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와 4명이 함께 벗을 삼아 도망을 간다
죽이려는 금와(金蛙)왕의 아들 대소(帶素)왕자를 비롯한 적들이 쫓아 오는 가운데
비류수(沸流水)가 가로막아 피하기 어려운 난관에 처했을 때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기록 된 내용처럼
주몽(朱蒙)이 비류수(沸流水)에 소리쳐 명령하기를
"아시황천지자(我是皇天之子) 모하백여랑(母河伯女郞) 추모왕(鄒牟王)
위아련가부귀(爲我連葭浮龜)"
응성즉위련가부귀(應聲卽爲連葭浮龜)。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하백(물을 다스리는 신)의 딸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거북이를 띄워 갈대로 이은 다리를 놓아라"
소리를 듣고 즉시 거북이를 띄워 갈대를 이은 다리가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몽(朱蒙)이 즉시 이 다리를 이용하여
비류수(沸流水)를 건너 추격하는 적들을 따돌리고
홀본(忽本) 서(西)쪽 산 위에 성(오녀산성:五女山城)=졸본성:卒本城)을 쌓고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고 한다
심양(沈陽) 외곽순환 도로를 거쳐 심양공항에 거의 도착을 해 간다
이번 여행은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 관광을 주목적으로 여행을 계획하였지만
우리의 역사인 고구려 발원지까지 둘러보는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의 역사가 중국의 동북지역의 소수민족의 정권으로 격하되어지며
중국 역사의 일부분으로 포함하여 진행되어지고 있는
동북공정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우리 역사에 소홀히 대하는 우리의 교육정책이 생각나
가슴에 무엇인가 뭉쳐있는 것처럼
그저 답답하고 아프다는 생각이 저며 오는 여행이 되었다
환인(桓仁)에서 10:50에 출발하여
심양(沈陽) 공항까지 약 200Km를 달려와 15:10인
4시간20분만에 도착을 한다
공항에서 수속을 마치 후
16:35에 이륙하여 약 950Km를 1시간10분정도를 비행하여
인천공항에 18:45 도착으로 이번 여행을 마친다
'해외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황산 & 삼청산 여행 (0) | 2015.05.28 |
---|---|
미국 서부 여행 (0) | 2015.04.16 |
중국 계림과 랑산 여행 (0) | 2014.07.07 |
인도 여행 (0) | 2014.03.20 |
네팔 여행 (0) | 2014.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