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쪽의 국경도시 바다호스(Badajos)에서
포르투갈의 국경도시인 엘바스(Elvas)로 넘어와
첫번째 방문지로
성모가 발현한 세계 3대 성지 중의 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파티마(Fatima)로 향한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넘어오는 국경에는
국경이라는 검문소나 표시가 없어
버스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스쳐 지나 간다
포르투갈 여행은
파티마(Fatima)에서 성모발현 성당에 갔다가
다음날 오비도스(Obidos)에 들려 아담한 성읍 마을을 구경하고
신트라(Sintra)로 가 14세기 때부터 역대 왕들의 별장으로 쓰이던 왕궁을 보고
유럽 대륙 최 서쪽 끝단인 까보다로까(Cabo da Roca)로 가서
대서양 바다를 바라다 보며 가슴을 활짝펴고 깊은 호흡을 해 보고
포르투갈(Portugal) 수도 리스본(Lisbon)으로 이동하여
대항해 시대의 찬란했던 역사유물을 볼 생각이다
포르투갈(Portugal)은
유럽 이베리아반도의 최 서남단에 위치한 나라로서
면적은 우리 대한민국의 남한 면적보다 약간 작은 92,212㎢이며
인구는 약 1083만명 정도가 거주하는 국가이다
수도는 리스본(Lisbon)이며
언어는 1290년 동 디니스 국왕의 선포에 따라 채택 된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다
2015년 국가 GDP는 2010억$(47위), 1인당 GDP는 19,324달러(39위)의
경제력을 지닌 나라지만
<대한민국 : 2015년 국가GDP 1조4351억 달러(11위), 1인당GDP 28,338달러(28위)>
선진국 중의 하나로서 의료시스템을 잘 갖추어 삶의 질이 최상 수준으로
가장 세계화되고 평화로운 나라에 속한다고 한다
인종은 이베리아족, 로마족, 켈트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종교는 94%의 국민 대부분이 로마카톨릭을 믿고 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였던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 대항해 탐험 결과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전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 중의 한 국가였다
포르투갈은 1415년 세우타(Ceuta)를 정복을 시작으로
1999년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할 때까지
거의 600년 동안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이었지만
강대국으로서 힘은
1822년 브라질이 독립을 함으로서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유럽 대륙에서 서남쪽으로 최 끝단에 위치한 포르투칼 땅에는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다고 한다
2만4500년 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사이 혼혈의 흔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는 지역이라고 한다
'포르투갈(Portugal)'이라는 이름은
930년과 950년 사이에 불려지기 시작하였고
10세기 후반에는 빈번해지다가
1067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1세가 아들 가르시아에게 영토를 주면서
공식적으로 '포르투갈(Portugal)'이라는 이름이 명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1139년 포르투칼 왕국이 성립되고
1143년 독립을 승인을 받고
1249년 국경을 확립 함으로 인해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국가가 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국경을 통과한지
약 2시간 정도가 지나서 산타렝현에 있는
파티마 톨게이트에 도착한다
파티마에 도착하자
기념품을 파는 할인 매장부터 들린다
나는 여행하면서 그 나라를 상징하는 조그마한 악세사리를
하나씩 사는 습관이 있는데
포르투갈을 상징하는 것은 수닭이라 한다
포르투갈에서 수닭은 정의와 신념의 상징을 표현한다고 한다
'수닭에 대한 설화'있는데 내용은
한 수도사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민박에 머물게 되었으며
그 민박집의 주인에게는 미모가 아름다운 예쁜 딸이 있었다
그 딸은 그날밤 수도사를 유혹하며 신앙심까지 시험해 보려 하였으나
별별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자 자존심이 매우 상하여
자신의 금으로 된 귀중품을 몰래 수도사 가방에 집어 넣어
누명을 씌울 계락을 세웠다
날이 밝은 후 자신의 귀중품이 없어졌다고 난리를 치며
경찰에게 신고를 하여 민박에 머무는 사람들을 조사하게 한다
소지품 조사한 결과 수도사 가방에서 발견되자
도둑으로 몰리어 끌려간 수도사는
법정에서 절도로 인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선고 판결을 받게 된다
사형을 집행하기전 마지막 식사로 닭고기 요리가 나왔는데
이때 판정관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묻는다
그때 수도사는 말하기를
"나는 물건을 훔친적이 없고 결백하다! 내가 사형을 당한다면
이 요리에 있는 닭이 수닭으로 살아나와
나의 결백을 알리기 위해 '꼬꼬댁' 울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판정관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비웃으며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그때 수닭이 나타나 '꼬꼬댁'하고 크게 울어대
사형은 중지되고 수도사는 결백을 인정 받게되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수닭 악세사리는 죽을 운명에서도 살아 날수 있게 해주는
행운의 증표라고 한다
어두워져서야 성모 발현지에 있는 파티마 대성당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 대성당이 있는 이 파티마(Fatima) 지역은
가톨릭을 믿는 신도들에게는
멕시코 과달루페(Guadalupe), 프랑스 루드르나(Lourdes)와 함께
세계 3대 성모 발현지의 한 곳으로서 신성하게 여기는 장소이다
광장 한가운데 표시해 놓은 이 길은 300m의 거리라고 하는데
이 곳에서는 순례자들이
성당을 향해 무릎으로 걸어 가며
두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1928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953년에 봉헌된 파티마 대성당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졌는데
중앙에 보이는 탑의 높이는 68m이고 그 좌우에는 나선형 회랑으로 되어 있다
앞에 중앙광장에는 30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이라고 한다
1967년5월13일 성모발현 50주년 기념일
교황 파울루스 6세가 평화를 기원하는 집전 미사때는
약 100만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 파티마(Fatima)에 성모 마리아께서 발현하신 해는
1917년 5월13일에서 10월13일 사이로서
어린 목동들인 프란치스코(9살), 히야친따(7살), 루치아(10살) 3사람에게
<프란치스코와 히야친따는 남매, 루치아는 사촌>
매월 13일, 6번에 걸쳐 발현하셨다고 한다
발현하실 때 모습은
참나무 가지 위에 걸친 구름에 올라
하얀 옷에 하얀 두건을 쓰고 가슴에는 금색 지구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두손은 묵주를 걸고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계셨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믿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소문이 나서
10월13일 수많은 사람들(7만 정도 추산)이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모여들었는데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열리고
엄청 밝은 빛을 발하며 성모 마리아께서 나타 났다고 한다
어린 목동들과 2번째 만남에서는
성모마리아께서 3가지 비밀을 말씀하셨는데
2가지 예언은 밝힐 수 있었으나 1가지는 비밀에 부쳐지고 있었다
첫째는 거대한 불바다의 지옥의 환시를 보여주며
곧 제1차 대전이 끝날 것을 예시 하셨고
둘째는 러시아로 인해 많은 국가가 파멸하고 고통과 순교를 당하나
러시아를 봉헌하고 평화가 올 것이라 예시하셨다
세째는 공개하지 않았는데
성모님께 오른손으로 천사를 향해 광채를 발산하시자
천사는 큰소리로 '참회하라, 참회하라, 참회하라!' 외치고
하나님 안에서 보여지는 거울과 같은 것에서
흰옷을 입은 주교(교황 성하로 추정)를 보게 되었다
그는 투박한 십자가가 있는 가파른 산으로
몸을 떨고 절뚝거리며 오르는 모습과
고통과 슬픔에 쌓여 중간중간 널려 있는 시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시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고 한다
산에 오르시어 십자가 밑에 무릎을 끓고 앉으시자
군인들이 총과 활 쏘아 죽임을 당하셨고
같이 있던 다른 주교들과 신부님, 남녀 평신도들도 다 그렇게 죽었는데
십자가의 양팔 아래에서 두 천사가 손에 수정 성수 쟁반을 들고
순교자들의 피를 받아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영혼들에 뿌리는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이 내용은 1981년 교황 바오로 2세 암살 피격 사건으로 인해 공개하였다고 한다
파티마 대성당 앞에 있는 예수그리스도 상이다
여기에서 성수가 터졌다고 하며 성수를 담아 갈 수 있다고 한다
어린 목동들 중에 프란시스코는 1919년 11세, 히야친타는 1920년 10세때
당시 유행하던 독감으로 어린나이에 사망하였으며
루치아(1907년3월22일 출생)는
1928년 코임브라 수녀원에 들어가 입소하여 수녀가 되어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증거하며 봉사하다가
97세가 되던 2005년2월13일 선종하셨다고 한다
매일 저녁 9시30분이 되면 촛불 미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호텔로 가서 잠시 쉬다가
미사에 참석해 보려고 시간을 맞추어 다시 나왔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과 이곳의 주민이 함께하는 미사로
많은 사람이 야외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포르투갈 말로
"산타마리아 어쩌고 저쩌고
아베마리아 어쩌고 저쩌고 ~~ "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
뒤에서 멀뚱멀뚱 서서 앞만 바라 보고 서 있는다
나중에 듣게 되는 내용의 함축이
'로사리오의 기도를 자주 외우고
은총이 가득한 성모마리아의 무원죄 잉태를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라는
것이라 한다
미사가 끝이 나고 호텔로 돌아오니
밤 10시 40분이 다 되어 간다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호텔 로비에서
아직 미사를 마친 후 돌아오지 않은 일행들을 기다리며
그림이 좋아 보여 찍은 사진이다
포르투갈에서 첫 하루밤을 보내고 아침부터 서두른다
오늘의 일정은 오비도스로 해서
신트라, 까보다로까, 리스본로 가는 일정으로
첫 방문지인 오비도스를 향해 출발 한다
오비도스(Obidos)는 이 곳 파티마(Fatima)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
포르투갈의 이전 역사를 살펴보면
이베이아 반도에는 약 20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나
이 곳이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한니발 전쟁이라고 일컷는 제2차 포에니 전쟁(BC218~BC202) 때부터라고 한다
지중해안 낀 북아프리카 일대와 스페인 남부에서 포르투칼 땅 일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피레네 산맥과 알프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 공화정과 싸워 연속으로 대승을 하다가
로마의 스키피오(Scipio) 장군에게 역공을 당하여 패전한 전쟁으로
전쟁에서 이긴 로마가 영토를 넓혀 가는 시기부터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옆나라인 스페인도 마찬가지로 이때부터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BC 29년에 고대 로마제국에 편입되어 속주 루시타니아로서
이후 5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아 왔다
로마 제국의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게르만계 민족이었던 서고트족과 수에비족이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8세기 경에는 북아프리카로부터 건너온 이슬람교인이었던
무어인들에게 정복 당하여 약 500년간 영향을 받게 된다
포르투갈의 역사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고 기독교 국가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포르투칼의 저항 운동인
레콩기스타(Reconquista)기간(718년~1249년)에
868년 포르투칼렌스 백작령이 세워지면 시작된다
백작령은 갈리시아 왕국의 일부였다가 스페인 북부에 있던
레온 왕국으로 편입되어 진다
1096년 레온의 알폰소 6세는 동 엔히크 백작에게 갈리시아 백작령
남쪽 땅의 통치권을 양도하여 포루투칼레 백작령이 세워진다
동 엔히크 백작이 사망한뒤 아들 동 아폰수 엔히크스가 권좌에 올라
1139년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보르고냐 왕조(1139년~1385년)를 세우고
주요 거점에서 무어인들을 몰아 내었으며
1143년 교황과 주변국 왕들과의 사모라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의 독립을 승인 받았다
1249년 아폰수 3세가 알가브르를 점령하며
포르투갈에서 레콩기스타를 끝내고 국경을 안정시켰다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며 해외원정 및 확장을 시작되어
1415년 아프리카의 세우타(Ceuta)를 정복 시작으로
1434년 질 이아네스가 바다의 끝으로 여겨지던 보자도르 곳을 넘어가
아프리카 해안을 탐사하였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지나
대서양과 인도양이 이어져 있음을 밝혀내며
아시아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확장하는데 기여를 하였다
1530년 돈 주앙 3세가 브라질을 식민지로 편입시킴으로서
최고의 황금기를 누렸다
오비도스(Obidos)에 거의 다 도착 한것 같다
역사 이야기는 뒤로 하기로 한다
차창 밖의 낮으막한 산 위로 성이 보인다
오비도스(Obidos)성이다
버스는 성안 마을로 들어가는 주차장에 정차하고
골목길을 따라 들어 가면 성안으로 들어가는
마을 문(Porta da Villa)이 나온다
오비도스 성안 마을을 둘러 보는데는 약 1시간 정도면 충분한
작은 성안 마을이다
성안으로 들어서니
조그만 골목길에 아기자기한 예쁜 가게들이 보이는데
아직은 너무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한가롭게 보인다
우리가 둘러 볼 길은
일직선으로 된 성안 마을 중앙 골목길로서
마을 안 길에 있는 오밀조밀한 가게들의 운치를 느끼며 계속 걸으면
성끝이 나오며
그 곳에서 성벽으로 올라
성벽 길로 돌아서 내려 올 수 있다
산타마리아 성당은 12세기에 건축된 성당이라고 한다
오비도스에 사는 인구는 현재 약 800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 곳에서 로마시대 때 유적이 발견됨으로
그 때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로마 멸망 이후에는
서고트족이 이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713년 이후에는 이슬람의 무어족들이 이 언덕에 요새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1148년 포르투칼의 초대 왕 아폰소 엔리케스(Afonso Henriques)의 군대가
무혈로 입성하여 이슬람의 무어족들을 쫒아 내어 수복하였으며
1186년 이 곳을 산수 1세가 성벽을 더욱 튼튼하게 보강하여 요새화 하고
1195년에 처음으로 도시로서 인가를 받았다고 한다
오비도스 성안은 시골의 아담하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집들 담장엔 꽃들이 우거지고
돌길로 조성된
좁은 골목길을 걷노라면
정겨우면서 들뜨는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곳이었다
이슬람의 무어족에게서 오비도스를 되찾고
성을 더욱 견고히 보강한 것은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 지방 등지에선
당시 막강하게 통치하고 있는 무어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벽으로 둘러 쌓인 작으막한 이 곳 마을의
'오비도스(Obidos)'라는 지명은
요새 도시를 뜻하는 라틴어 '오피디움(Oppidium)'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올라 뒤를 돌아보니
성안의 성
망루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벽에서 성 밖을 바라보니
기차길 넘어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우리나라의 농촌 마을과 너무도 흡사하게 다가 온다
성벽길이 너무 좁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걷기가 힘들듯 한데
예전에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운신하기가 쉽지 않았을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비도스(Obodos)는 '여왕의 도시'라고 하던데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성 안의 마을이 포근하게 보인다
'여왕의 도시'라는 유래는
1210년 아폰소 2세(AfonsoⅡ)는 울라카 왕비(Queen Urraca)와 결혼하며
이 도시를 결혼 선물로 주었고
1282년 디니스(Dinis) 왕은 에스파냐의 이사벨(Isabel) 여왕과 결혼하며
이 도시를 결혼 선물로 줌으로서 얻어진 별칭이라고 한다
오비도스 성 안을 거의 다 둘러보고
성 밖으로 나가는 성문으로 다가 가는데
무슨 용도인지 모를 돌기둥 하나가
성 안 마을을 지켜 주는 수호신 인양 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성문을 통과하여 들어 올 때는 보지 못하였는데
성 안쪽에서 보이는 성안으로 들어오는 성 문 위에 장식되어 있는
아줄레주(Azulejo) 타일 장식이다
'작고 아름다운 돌'이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하였으며
포르투갈의 왕 마누엘 1세(ManuelⅠ:1469~1521년)가
에스파냐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에 방문하였다가 이슬람 타일장식에 매료되어
포르투갈로 돌아와 자신의 신트라(Sintra) 왕궁에 타일 장식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포르투갈만의 독특한 양식의 '아줄레주'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오비도스 성 밖으로 나와 주차장 부근으로 도착하니
아치교처럼 보이는 것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1570년에 세워진 수로(水路)로서
길이는 3Km에 걸쳐 늘어서 있다고 한다
버스에 올라 신트라(Sintra)에 있는 왕궁을 향해 간다
다시 포르투칼 역사에 대하여 이어 이야기 해보자
그러나 1578년 모로코 정벌에 나선 동 세바스티앙 국왕과 귀족들이
알카세르키비르 전투에서 대패하며 전사하고
왕위를 이을 후계가 없어
뒤를 이은 추기경이었던 엔히크 왕도 2년 뒤 사망하자 혼란에 빠진다
이에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나고
1580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가
이베리아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국왕을 겸하는 에스파냐 왕국의 부속 왕국으로 전락한다
이후 스페인과 묶여 네덜란드와 전쟁에 휘말리면서
인도양 독점까지 잃으며 쇠락의 길을 가게 된다
1640년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의 지배를 종식 시키고
동 주앙 4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로 인해 스페인과 전쟁이 일어나는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고
1668년에 리스본 조약을 통하여 왕정복고와 독립을 승인받게 되었다
1755년 동 주제 국왕 통치 시기 대지진이 발생하여 리스본을 폐허로 만드는데
폼발 후작이 이러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중상주의적 개혁을 통해 재건에 앞장서 경제발전을 주도하였다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고 있던 포르투칼은
프랑스가 대륙봉쇄령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나 거절하여
1807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되어
1808년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도피하며 수도를 옮긴다
1816년부터 포르투갈-브라질-알가브르 연합 왕국의 왕이 된
동 주앙 6세가
1821년 첫 헌법을 공포하기 리스본에 간 사이
1822년 그의 아들 동 페드루 4세가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며
브라질의 국왕 동 페드루 1세로 즉위하였다
이 후 브라질의 독립으로
포르투갈은 내전과 혁명, 반란 등에 휘말려
정치, 경제적인 분열이 일어나며 사회적으로 큰 혼란기를 겪게 된다
포르투갈이 정복한 아프리카 대륙을 통한
식민지 지도를 그리려던 계획을
1886년 베를린 회의에서 결정된 지역을 영국은 인정하지 않는다
1890년 영국으로부터 아프리카 분쟁 지역에서 포르투갈은 철수할 것을
최후통첩 받은 후 굴복하고 마는데
이로 인해 국력이 쇠락해지면서 국민들에게 불만과 불신이 높아지면서
1908년2월1일 동 카를루스 국왕과 동 루이스필리프 왕세자가 암살된다
이로 인해 1910년 왕정이 종식되며 포르투갈 공화국이 수립된다
1910년 왕정이 종식되고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으나
수년간 노동자투쟁, 소요사태 등의 혼란이 계속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에 참여하면서 더 큰 혼란에 빠져든다
1926년 군부쿠데타가 일어나며
코임브라 대학교의 교수였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각료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어 재정을 회복하면서
단일 정당과 국영노조를 가진 국가조합주의적 권위주의 정권인
이스타두 노부(새로운 체제)라는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 들어서며
독재체제가 시작되었다
1968년 살라자르가 병으로 권력에서 멀어지며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뒤를 이어 권력을 잡았지만
1974년 무혈 쿠데타인 카네이션 혁명으로 독재정권은 붕괴된다
이 후 낙하산부대원과 헌병들이 주축이 되어
다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1975년 새롭게 수립된 포르투갈 제3공화국은
아프리카의 앙골라, 모잠비크 등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키면서
의회민주주의를 시행하며 오늘에 이르며
1999년 마지막 식민지로 남아 있던 마카오도 중국에 반환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경제 협력 개발기구(OECD) 창립회원국이면서
유럽 경제공동체(EEC)에 가입 국가이며
1999년 유로존에 가입한 국가로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여 있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차 창 밖으로 저 멀리 산꼭대기 위에 성이 보인다
우리가 가고 있는 신트라(Sintra)의
포르투갈 왕가의 여름별장인
'페나성(Palacio Nacional da Pena)'이다
오비도스(Obidos)에서 출발한지 1시간10분만에
신트라(Sintra)에 도착하여 신트라 왕궁 앞으로 걸어 간다
신트라 왕궁(Palacio Nacional de Sintra)은
14세기 때부터 역대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이용되던 곳으로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28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붕 위로 솟아 있는 두개의 굴뚝이 이 왕궁의 랜드마크라고 한다
신트라 왕궁은 다른 왕궁에 비교하여 건축 양식이 독특함을 느낄 수 있는데
이슬람풍의 무데하르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의 이전 양식인 고딕양식,
마누엘 양식이 조합된 건축물이라 한다
내부에는 마누엘 1세(ManuelⅠ:1469~1521년) 국왕이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왕궁에 방문했다가
그 곳에 장식된 타일 장식을 보고 반하여
돌아와서 이 곳에 처음으로 타일장식을 하여 유행시켰던
아줄레주(Azulejo)가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날은 내부를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왕궁 앞에서 산 위를 쳐다보니
1147년 아폰수 엔히케스(Afonso Henriques) 왕이 공략하여
성벽만 남게되었다는
7~8세기 경에 이슬람 무어인들이 만들었다는 성터가 보인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으나
성터 뒤로는 '페나성(Palacio Nacional da Pena)'이 자리하고 있는데
해발 500m 산 위에 지어진 아름다운 동화 속의 성으로서
그 성 또한 왕가의 여름별장으로
16세기 수도원 건물들이 있었던 곳으로
177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인해 모든 건물들이 무너지고
폐허 상태로 남게 되었다고 한다
1836년 결혼과 동시에 사별한 포르투칼 여왕 마리아 2세(16살)가
독일 작센 코부르크 코타의 페르디난트(페르난도 2세)와 재혼을 하였다
결혼 후 페르디난트는 신트라에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폐허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
수도원 및 주위 부지까지 사들여
1850년 아름다운 페나성으로 완공하였으며
여왕 마리아 2세는 내란, 입헌군주제와 민주주의 세력간의 싸움에 지쳐
1853년 맏아들 페드루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34세 나이로 출산 중에 사망하였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들려온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는
저 위의 페나성은 시간상 올라가지 않겠다고 한다 ㅠㅠ
왕궁 광장에서 신트라(Sintra) 지역을 바라보니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
이 곳을 방문했던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에덴동산' 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신트라(Sintra)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2만명 정도라고 하며
14세기에 왕궁이 세워지면서
휴양지로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지금도 부자들의 별장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하며
인구가 얼마 안되는 아담한 작은 도시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오는 명소로서 알려진 곳이라 한다
왕궁 앞의 대로변과 골목길을 따라
기념품과 음료를 파는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는
중세적으로 보이는 상점들도
지나치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떠나가야 하는 발걸음에 아쉬움이 남게 만드는 것 같았다
신트라 왕궁 부근에서 버스를 타고
신트라 기차역 부근에 있는 점심식당으로 이동한다
신트라(Sintra)역 부근에서 버스에 올라
페나성이 있는 산 넘어 뒤 쪽에 있는
대서양 바다를 끼고 유럽 대륙에서 최서단의 땅 끝 마을인
까보다로까(Cabo da Roca)로 간다
신트라에서 출발한지 20여 분이 지났을까?
까보다로까(Cabo da Roca) 빨간 등대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주차장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면
십자가 탑이 대서양 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다
여기 까보다로까(Cabo da Roca) 곶이
유럽 대륙에서 최서단의 땅끝이라는 표시이다
십자가 탑 돌기둥에는 현 위치의 좌표와
포르투칼의 민족시인
카몽이스(Luis Vaz de Camoes:1524~1580년)의
"AQUI... onDE A TERRA SE ACABA E O MAR COMECA"
"여기...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라고 내용이 적혀 있어
유라시아 대륙의 땅 끝임을 상징 표현하고 있었다
위 사진은 바다 쪽으로 내려 갔다오는 길이다
예전 가톨릭으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던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1473~1543년)가
'지구는 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여
이태리의 물리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564~1642년)가
지구는 둥글다는 지동설을 증명해 내기까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둥글지 않고 평면 위에 있는 것으로 믿어
여기가 세상의 땅 끝이라 생각하여
바다 멀리 나가는 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에 빠진다고 믿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위배된다고
이단시 당하여 가톨릭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던 시대도 있었다
여기 까보다로까 곶은
대서양 바다와 맞붙어 있어 평소 바람이 심하게 분다고 하는데
오늘 하늘은 맑고 바람이 없이 포근하며 바다도 잔잔하다
오늘 우리의 방문은
땅 끝의 육지와 대서양 바다가 환영 해 주는
복도 많은 날인가 보다
까보다로까 등대가 멀어져 간다
까보다로까를 관광하며 한가지 아쉬점이 있는데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보니
관광안내소에 가서 '서쪽 끝에 왔다는 증명서'를 발급 받는다는 것을
깜박하고 버스에 올라 리스본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까보다로까에서 리스본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어느 여가수의 파두(Fado)음악이 은은하게 흘러 나오는데
갑자기 무언가 대서양 바다에 내려놓고 온 것처럼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이 생겨난다
'아리랑'이 우리 한국인의 얼이 살아서 숨시는 음악장르라면
파두(Fado)음악은
포르투갈 사람들의 얼이 살아서 함께하는 음악장르라 하겠다
무어인의 지배, 스페인의 지배 등의 암울한 역사와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파도와 늘 싸워가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뱃사람들과
해양강국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돌아올 기약없이 떠나가는 사람들과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한없이 기다리는 그리움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야 했던 포르투갈 사람들의 음악이라 하겠다
파두(Fado)라는 단어는
운명,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 'Fatum'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두에는 포르투갈 민족 고유의 얼이 담겨 있어
향수와 동경, 슬픔과 외로움 등의 표현의 가락이
음악을 듣고 있는
나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것 같았다
까보다로까에서 출발한지 약 50분쯤 지나서 리스본 시내에 도달하여
처음으로 보게되는 광경은
리스본은 '노란전차의 도시'라고 하던데
노란전차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벨렘탑 공원에 도착하여 벨렘탑을 향해 걷던 중
먼저 수상 비행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1922년 리스본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3000Km를
가구 코티뉴(Gago Coutiho), 사카두라 카브랄(Sacadura Cabral)대위가 타고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비행기를
실재 크기로 재현하여 나무로 만든 비행기라고 한다
그러나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비행에 성공으로 기재된 비행기는
1927년 파리에서 뉴욕을 횡단한 린드버그의 비행기라고 한다
이유는 린드버그 비행기는 한번에 날아 횡단한 비행기이며
코티뉴의 비행기는 주유를 위하여
여러번을 쉬어 횡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벨렘탑(Torre de Belem)이다
1515년 마누엘 1세가 항구를 감시하기 위해 태주강변에 지은 요새라고 한다
이 곳은 강과 바다가 연결되는 곳으로
당시는 해양강국시대로서 많은 배들이 전세계 탐험 및 정복을 위해 드나들때
통관절차를 밟기도 하고 맞이도 하던곳이라 한다
인도 항로를 발견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도
여기에서 배웅을 받으며 출발하였다고 한다
물길이 바뀌어 지금은 아니지만 벨렘탑이 지어지고
스페인의 지배시기부터 19세기까지
1층은 물이 차올랐다 빠졌다를 반복하여
정치범들의 물고문을 자행하는 감옥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벨렘탑 앞에서 바라보니
발견 기념비(Padrăo dos Descobrimentos)와
테주(Tejo)강을 건너는 4.25다리(Ponte 25 de Abril)가 보인다
미국의 금문교를 세웠던 건설회사가 1966년 세운 현수교로서
길이는 2,278m로
유럽에서는 그리스의 하리라오스 트리코피스 다리(2883m) 다음으로
2번째로 긴 다리라고 한다
1966년 세워질 때는 독재자의 이름 '살라자르 다리' 라고 명명했으나
'4.25다리'라고 이름지어진 것은
1974년 4월25일 '카네이션 혁명'의 성공을 기념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1008Km로 가장 긴 강으로
이름이 언어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데
포르투갈은 테주(Tejo)강, 스페인은 타호(Tajo)강
영어로는 타구스(Tagus)강으로 표현한다
발견 기념탑(Padrăo dos Descobrimentos)은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세워진 53m의 범선 모양의 기념비로서
1960년 포르투갈을 해양제국으로 이끈
항해왕 엔리케 왕자(Henrique O Navegador:1394~1460) 의
서거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범선 모양의 많은 인물 조각상들은
대항해 시대때 활동하였던 탐험가, 선원, 선교사, 군인 등의
수 많은 인물들을 조각해 놓았는데
맨 앞쪽이 엔리케 왕자이며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민족시인 카몽이스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고 한다
항해왕 엔리케 왕자(Henrique O Navegador:1394.3.4~1460.11.13)는
영국과 프랑스의 100년 전쟁(1337~1453년) 중에
포르투갈의 2번째 왕조인 아비스 왕조(1385~1495년)의
시조인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인 막내로 태어나
형, 조카, 3대에 걸쳐 왕을 모시면서 왕위에 오른적 없는 왕자였다
21살때인 1415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서아프리카 무슬림의 항구도시인 세우타를 정복함으로서
영웅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415년 이후 죽을때까지 대서양 바다를 낀 아프리카 항로개척에 몰두함으로서
포루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맞이 하도록 한 주역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엔리케 왕자는 항해에 나간적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는 항해보다는 항해에 나갈 범선 개발과 필요한 용구를 개발하여
사람을 보내 항로 개척에 지원하는데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그의 항로 개척을 기초로 하여
1400년대 후반기에는
아프리카 해안을 끼고 전 지역을 발견하고
정복해 나갔으며
1500년대 전반기에는
인도네시아, 필리핀, 마카우, 일본 등까지도 진출하였다
이 시기에 일본은 이들로부터 조총을 만드는 기술을 받아들여
조총으로 무장하고 우리의 조선을 침범함으로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우리나라 전강토에서 엄청난 살상과 피해를 생각하니
당시의 포르투갈은
전세계에 걸쳐 막강한 힘을 미치는 굉장한 강국이었음이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과 인도양, 태평양 섬에는
많은 식민지와 교역로를 개척했던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대륙에는
카브랄에 의해 발견된 브라질 외에는 식민지를 두지 못하였다
이유는
남아프리카 대륙을 두고 스페인과 신대륙 식민지 쟁탈전을 두고
전쟁이 벌어질 만큼 대립이 심각해지자
1494년 교황 알렉산드르 6세가 중재한
또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에 합의 함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두 나라 사이에 발견되는 신대륙 소유권은
아프리카 대륙 최서단 끝 해안에서 서쪽으로 1500Km 지점에 선을 그어
그 선 동쪽으로 발견되는 땅은 포르투칼 소유지이고
그 선 서쪽으로 발견되는 땅은 스페인 소유지로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발견기념탑 광장에서 바라보니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산타마리아 성당이
제국의 광장 넘머로 보인다
제로니모스 수도원(Mosteiro dos Jerōnimos)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 항로 발견을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1502년 마누엘 1세가 건축하기 시작하여 약 170년이 지나 완공하였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포르투갈 고유 건축양식인 '마누엘 양식의 대표 건축물'로서
세워질 때 포르투갈의 힘과 재력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또한 제로니모스(Jerōnimos)라는 이름은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성인(聖人)으로서 영어 명은 제롬(Jerome)이라고 한다
제로니모스 수도원과 이어져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Igreja Santa Maria)으로 간다
산타마리아 성당 종탑은 공사 중에 있었다
제로니모스 수도원 입장은 유료이나
산타마리아 성당은 무료 입장이어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었다
산타 마리아 성당(Igreja Santa Maria)은
항해왕 엔리케 왕자가 항해에 도전하여 떠나는 선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안전과 성공을 기원하는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지은 성당이라 한다
바스코 다 가마도 항해를 떠나기 전 이 곳을 찾아
미사를 드린 후 항해를 떠나 갔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서니
25m의 천정 받치고 있는 기둥 사이로 주 제단이 보인다
주 제단에는 성화 5점이 보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에 관한 성화로 보였다
이 제단은 1571년 돈 주앙 3세(Don Joao Ⅲ)의 왕비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누이동생인 카타리나 왕비가
의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스테인드 글라스가 화려하다
이 것은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라 20세기에 그려진 것이라고 한다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아시아로 가는 인도항로를 발견함으로서
포르투갈이 대항해 시대에 해양강국이 되도록 만든
십자가, 범선, 혼천의가 조각되어 있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1460~1524년)의 석관이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60년 포르투갈 남서부 알렌테호 주 해안에 있는
시네스요소니 요새의 사령관이었던 에스테방 다 가마의 세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평화로운 시대에 프랑스 선박들이 포르투갈 선박에 대하여 해적질을 함으로
1492년 국왕 주앙 2세는 바스코 다 가마에게
리스본 남부 세투발 항구와 포르투갈 최남단 알그라브 주에 보내
프랑스 배를 나포하도록 하였는데
매우 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다고 한다
아비스-베자 왕조(1495~1580년)의 시조인 마누엘 1세가
항해왕 엔리케 왕자가 추진하였던 해로 개척을 이어 받은 원정 함대를 만들어
아버지 에스테방 다 가마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그가 죽자
바스코 다 가마가 승계받아
1497년 7월 8일 4척의 배로 170명의 선원과 함께 리스본을 출항하여
희망봉을 경유하여 모잠비크, 몸바사를 통과하여
다음 해인 4월 아프리카 케냐 지역인 마린디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인도 항로를 알고 있는 이슬람 아랍상인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1498년5월20일 인도 남부인 캘리컷(Calicut)에 도착하여
힌두 통치자 사모린(Zamorin)의 환영을 받기 하지만 조약을 맺지 못하고
긴장 관계에 놓이자 8월 인도를 떠나 마린디에 도착하였으나
인도양을 건너던 중 역풍으로 많은 희생자로 인해 배 1척을 불 태운다
다시 희망봉을 지나 리스본으로 귀환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서로 헤어져 2척을 먼저 리스본으로 1499년 7월과 8월 귀환시켜고
그는 아조레스(Azores)제도의 테르세이라(Terceira) 섬으로 갔으나
형 파울루가 죽자
배를 먼저 귀환시키고 그는 비탄에 잠겨 있다가 리스본으로 9월에 귀환한다
마누엘 1세(Dom ManuelⅠ)는 그와 형제들에게 'Dom'이라는 작위를 하사하고
그 작위의 세습을 허락하였으며 그에게 '인도양의 제독'이라는 칭호도 하사하였다
이 후 마누엘 1세는 항해사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에게
13척의 배를 주어 캘리컷(Calicut)에 보내 포르투갈인들을 남겨 놓고 왔는데
이슬람인들에게 선동된 힌두교들에게 학살 당하는 사건이 터진다
1502년 2월12일 바스코 다 가마는 20척의 함선을 이끌고 2차 항로에 나선다
인도 고아(Goa)에 도착하여 잠복하고 있다가
이슬람의 아랍배 상품과 200~40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도착하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배 안에 가둔채 불 태워 모두 죽이는 잔인함을 보인다
그리고 사모린(Zamorin)의 적이었던 카나노레의 통치자와 동맹을 맺고
캘리컷(Calicut)으로 가서 항구에서 이슬람인을 추방하겠다고 최후 통첩을 보냈다
사모린(Zamorin)은 우호를 청했지만 항구를 폭파하고
자신의 배로 장식품을 팔기 위해 온 힌두인 38명을 학살하고
배 밖 해변에 버리고 아랍상인 배들 상대로 해적질을 하였으며
캘리컷에서 29척의 아랍함대를 격퇴시킨다
이를 계기로 1502년10월30일 사모린(Zamorin)과 유리한 무역협정을 맺고
1503년 7월 리스본으로 귀국한다
이후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낳고 특권을 누리며 살다가
1519년 왕가의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 최초로 백작 작위를 받아
비디게이라(Vidigueira)주의 성주가 되었다
1521년 마누엘 1세(Dom ManuelⅠ)가 죽고 주앙 3세(JoaoⅢ) 때
인도를 통치하던 총독
에두아르도 드 무네세스(Eduardo de Munezes)의 무능함으로
1524년 인도 총독으로 임명되어 9월 고아(Goa)에 도착하여
전임 총독의 행정적 혼란을 바로 잡는데 몰두하다가 과로와 여러 원인으로
그해 12월 코친(Cochin)에서 죽었으며
1583년 그의 시신은 포르투갈로 돌아와 여기에 안치되었다
그의 평가로서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포르투갈에서는 인도항로를 연 대단한 영웅으로 평가되지만
인도에서는 많은 사람을 학살한 인물이며 식민시대를 가져온 장본인으로서
포르투갈 정부가 인도 정부와 함께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항해 500주년 행사를 추진하였으나
인도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월계관과 악기와 펜이 조각되어 있는
포르투갈의 민족시인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Luis Vaz de Camŏes:1524~1580년) 석관이다
카몽이스의 생애는
리스본에서 태어나 학문 때문에 1542년까지 코임브라에서 자랐으며
이후 주앙 3세(Joao Ⅲ)의 왕궁에서 일을 보다가
1547년 북아프리카 세우타에서 무어인들과 전투에 참여하여 오른쪽 눈을 잃는다
고국에 돌아와 다시 왕궁 일을 보던 중
1552년 왕궁 관리와 시비가 붙어 칼로 찌르는 상해를 입혀 구속 당하는데
옥중에서 대서시인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제1편을 쓴다
이듬해 석방된 그는 인도로 건너가 각지의 전투에 참여 했으며
1558년 마카오에서 부재자와 사망자의 재산관리인으로 근무하며
우스 루지아다스 제6편을 마무리 한다
그러나 직무 태만으로 구속되어 인도 고아(Goa)로 호송되던 도중
급 물살로 메콩강 하류에서 조난 당하였으나
그는 우스 루지아다스 초고만을 꼭 쥔채 헤엄쳐 빠져 나왔다고 한다
고아(Goa)에서 다시 체포되어 16년만인 1569년 리스본으로 돌아와
1572년 우스 루지아다스를 출판하여 국왕으로부터 연금도 지급 받았지만
1580년 극심한 가난과 신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우스 루지아다스(Os Lusiadas) 는 '포르투갈인'을 지칭하는 말로
포르투갈인들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대서사시'이다
내용은 10곡으로 분류하는데
1곡 : 포르투갈인들의 위대한 업적을 노래할 것을 밝히며 왕에게 헌사와
포르투갈 함대가 아프리카의 동해안을 따라 북상할 때
올림푸스의 신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인간의 도전에
격론을 하며 찬반을 논하는데 비너스는 호의적 자세를 취하나
다른 신들은 동양에서 자신이 가진 명성에 누가 된다며 적대감을 취하나
포르투갈 함대는 모잠비크 해안에서 혈전을 벌이며 몸바사 항구에 도착한다
2곡 : 몸바사 왕 바꾸는 포르투갈 선단을 파괴하기 위해 몸바사 항구에서
우정을 가장한 음모를 꾸미지만 비너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쥬피터는 비너스의 간청으로
포르투갈인들이 동방에서 이룩할 업적을 예언한다
3곡 : 멜린드(Melinde)에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는 멜린드의 왕에게
유럽의 역사와 포르투갈 건국에서 역대 왕들의 치적과
이네스 드 카스트로(Ines de Castro)의 비극적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4곡 : 마누엘 1세가 꿈에서 본 갠지즈 강과 인더스 강을 상징하는
두 노인의 계시로
출항하게된 경위와 리스본 항에서 출발할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많은 희생 따르는 무리한 항해를 취소하라고 충고를 한다
5곡 : 아프리카를 지나 올때 불안한 여정과 만난 부족들, 자연현상을 소개하고
용맹스런 모험담, 희망봉의 아다마스토르(Adamastor) 신화를 소개하며
분노한 신은 동방원정에 많은 재앙을 예언한다
6곡 : 바스코 다 가마의 이야기에 탄복한 멜린드의 왕은 큰 향연과
인도로 가는 길을 잘아는 항해사를 소개해 주는데
몸바사의 왕 바꾸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 가자
바다의 신 넵툰(Neptuno)에게 간청하여 풍랑을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비너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나 인도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다
7곡 : 함대는 닻을 내리고 현지의 왕 사모린(Zamorin)에게 사신을 보내고
양국 간에 외교수립과 교역을 제안하여
함대를 방문한 재상 까뚜알은 포르투갈의 높은 수준의 새로운 문명에 놀란다
8곡 : 그러나 현지의 점술가들은 포르투갈인들의 도착이 불길한 징조라고 하자
이슬람인들은 까뚜알을 매수하여 바스코 다 가마 일행을 육지에 억류시키지만
물욕에 어두운 이들은 많은 돈을 제시하자 일행을 석방시킨다
9곡 : 교역에 성공하진 못하였지만 동양에 대한 상징적 물건과
항로개척의 성공이라는 희소식을 가지고 귀국 길에 오르고
비너스는 포르투갈인들의 불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랑의 섬(Ilha de Amor)'을 만들고 수고한 용사들이 요정들로 인해 쉬도록 한다
10곡 : 포르투갈의 용사들이 요정들과 연회로 인해 원기가 회복되고
요정 테티스(Tetis)는 바스코 다 가마를 성스러운 산으로 데려가
우주의 원리와 천체의 구성에 설명한다
원기를 회복한 용사들은 섬을 떠나 조국으로 귀환하여 많은 인파의 환영받는다
마지막으로 카몽이스는 충성스런 용사들에게 합당한 대우로 왕의 선정과
영광을 예언 형식으로 간구한다
설명이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무덤을 표현한 것 같다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나와
성당 앞의 분수가 있는 제국의 광장(Praca Imperio)에서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에그타르트(Egg Tart)를 사 가지고 온다
에그타르트는 리스본에서 아주 유명한 계란빵으로서
산타마리아 성당에서 우측으로 멀지 않은 위치에
1837년에 시작한 파스테이스 드 벨렘(Pasteis de Belem)이라는
가게에서 판다고 한다고 한다
에그타르트는 이 리스본에 왔으면 필히 맛을 보아야 한다고 하며 나누어 준다
로시우 광장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라 출발하는데
테주강 건너 425다리 위로
1959년 세운 28m 높이의 양팔 벌린 예수그리스도 상이 보인다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 유명하고 거대한 예수그리스도 상이 있는데
이를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카이스 두 소드레 역(Estacāo Cais do Sodrė)이 보인다
리스본 시내에는 총 5개의 기차역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나 스페인 마드리드와 발착하는 국제열차 역은
산타 아폴로니아역(Estacāo Santa Apolonia)과
오리엔트역(Estacāo do Oriente)이며
호시우 역(Estacāo do Rossio)에서는 신트라, 호카 곶 행 열차가 발착한다
카이스 두 소드레 역은 근교 도시로 이동할 때 편리하다고 한다
영어로는 리스본(Lisbon),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라고 불리는
리스본(Lisbon)은
포르투갈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인구는 약 55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면적은 84.8㎢이다
리스본은 BC 12세기에 페니키아 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여
그후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서고트족, 이슬람교도들이
번갈아 장악하고 지배하여 왔다고 한다
1243년 알폰소 3세가 국토회복을 완료하고 리스본을 수도로 정한 뒤
대항해시대의 포르투갈 전성기가 리스본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시내에는 옛날 전차들이 다니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어릴적 서울 독립문 근처(영천)에서 살았는데
그 곳이 서울 시내 어디든 갈 수 있는 전차 종점이어서
많이 탓던 기억이 되살아나
정감있게 옛 모습을 간직한 평온한 도시로 다가 온다
코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에는
주제 1세(JoseⅠ) 동상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코메르시우 광장은 테주(Tejo)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하며
1755년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마누엘 1세의 궁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궁전 광장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또한 리스본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대지진때 거의 파괴되고
주제 1세(JoseⅠ)의 신임을 받은 폼발 후작에 의해 재건 되었다고 한다
주제 1세(JoseⅠ) 기마상이다
주제 1세는 주앙 5세(JoaoⅤ)와 오스트리아에서 시집온
마리아 아나 왕비 사이에서
세번째로 태어난 아들로 형 페드루가 2살때 죽자 왕세자가 되었다
주제 1세(JoseⅠ:1714~1777년)는
1729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딸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결혼하였으며
부부는 사냥과 음악을 좋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자녀는 7명의 남매를 두었으나 아들 2과 딸 1명을 사산하고
4명의 딸만 두었다
1750년 주앙 5세가 죽고 36세 나이로 즉위에 하였으나
폼발 후작으로 더 유명한 세바스티앙 조세 드 카르발류 이 멜류(Sebāstiao Jose
de Carvalho e Melo)에게 실권을 주어 행사하며 통치하게 하였다
1755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10만명이 사망하고 대부분의 건물은 파괴되었을 때
폼발 후작은 재건사업을 맡아 강력하게 시행하였으며
주제1 세는 지진 여파로 밀실 공포증이 생겨 건물 안에서 있지 못하고
거처를 아쥬다 언덕에 텐트를 설치하여 생활하였다고 한다
폼발 후작은 왕궁이 무너진 자리인 코메르시우 광장 중앙에
주제 1세 기마상을 세운 후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1759년에 주제 1세 부부는 암살 음모에서 구사일생 살아나기도 하였는데
이 때 폼발 후작은 왕으로부터 더욱 신임을 받아
왕권까지도 위협할 만한 실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777년 주제 1세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죽은 후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는
함께 즉위한 장녀 마리아 1세와 시동생이자 사위인 페드루 3세에게 조언하여
강력한 실권을 휘두르며 왕권을 위협하던 폼발 후작을 숙청하였으며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는 처가인 에스파냐에 방문하여 평화협정을 맺고
남편이 죽은지 4년 후인 1781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호시우 광장(Praca do Rossio=로시우 광장)에 도착하였는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온다
바이샤 지구와 리베르다드 거리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호시우 광장은
공식행사가 열리는 리스본의 중심지라고 한다
'호시우 광장' 중앙에는 페드루 4세 동상이 서 있어
'동 페드로 4세 광장'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페드로 4세(Pedro Ⅳ:1798~1834년)는
주앙 6세(Joao Ⅵ)의 아들로서 리스본에서 마리아 1세와 페드로 3세의
1798년 손자로 태어났다
1807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되어
1808년 참화를 피해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도피하여 수도를 옮길 때 따라가 그 곳에서 지냈다
조모 마리아 1세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 주앙 6세는 포르투갈-브라질-알가르브 연합왕궁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1821년 아버지 주앙 6세가 포르투갈로 귀국하여
포르투갈 본국 의회에서 연합 왕국을 해체하고
브라질을 식민지로 하려고 하자 브라질 인들은 반발하며 시위가 발생하였다
1822년 9월 이에 편승한 페드로 4세는 브라질의 독립을 선포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인 페드로 1세(PedroⅠ)로 즉위하였다
1826년 아버지 주앙 6세가 사망하자
페드로 4세(Pedro Ⅳ)로서 약 2개월 정도 포르투갈 왕을 겸하기도 하였다
그는 7살 난 딸을 '마리아 2세'라 하여 포르투갈 왕으로 즉위시키고
동생 미겔에게 섭정을 하도록 하고 페드로 1세인 브라질 황제로만 남았다
브라질 황제로 즉위한 초에는 국민들의 지지가 높았으나
내부의 대립으로 지지도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대립을 진압할 전제주의적 통치 방식을 택하자 반발은 더욱 심해 졌으며
1828년 우루과이를 놓고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우루과이 독립을 승인하자 그에 반대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자
1831년 불과 5살인 아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고 포르투갈로 귀향하였다
포르투갈로 돌아온 페드루 4세는 동생 미겔이
딸 마리아 2세에게서 왕위 찬탈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며
1834년 5월 미겔을 추방시키고
9월 결핵으로 자신이 태어났던 켈루스 궁전에서 35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페드로 4세는 왕위 계승 문제와 통치 방법으로 논란이 많았지만
1834년부터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포르투갈 왕정의 국가 작곡자였다고 한다
호시우 광장 한 복판의 페드로 4세 동상 옆에는
화려하게 만들어진 조각품들 사이에서 물을 뿜는 분수가 있어
광장의 운치를 더 해 주는 듯이 보였다
호시우 광장을 한바퀴 돌아 둘러보고
다시 춤을 추고 있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아프리카 전통춤을 추는 전부 어린 학생들로 보이는데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가 열성을 다해 추며
지켜보는 관중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춤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 어린이들은 춤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발표회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포르투갈에서 마지막 관광지인
에두아르도 7세 공원(Parque Eduardo Ⅶ)으로 향한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정이 많다고 한다
1961년 4월 15일 우리나라와 국교를 수립한 포르투갈은
2002년 FIFA 월드컵 이후 한국을 아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2007년 9월 한국의 영화 <괴물>이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토 영화제 감독상을 받으며
스크린 점유율과 관객 점유율 1위를 기록해 한국과 한층 가까워 졌으며
최근에는 우리 한국인 관광객 증가와
더블어 한국 기업의 제품 소비가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폼발 후작(Marques de Pombal: 1699~1782년)의 동상이 보인다
폼발 후작의 본명은
세바스티앙 조세 드 카르발류 이 멜류(Sebāstiao Jose de Carvalho e Melo)로서
기병대장이며 왕실 귀족이었던 마누엘 데 카르바요 아타이데의 아들로 태어나
쿠임브라 대학교에서 공부를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여 상병으로 전역하고
역사와 법률공부에 전념하다가 34세에 포르투갈 역사대학에 입학하였다
1733년 콘데 데 아르코스의 조카인 과부 테레사 마리아데 노로냐와 결혼하고
쿠임브라 근처의 소레 마을로 이주해 학문과 농사에 열중하였다
1738년 리스본으로 돌아온 그는 삼촌의 도움으로
당시 주앙 5세(JoaoⅤ)의 총리였던 주앙 다 모타의 천거를 받아
영국 주재 포르투갈 대사로 7년 동안 머무르게 된다
이때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면밀히 공부하며
외교적 협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신임을 받게 되었다
1745년 빈 주재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신성로마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로마 교황청 간의 분쟁해결을 위한 중재자로 나서기도 하였다
1750년 주앙 5세가 사망하고 주제 1세(JoseⅠ:1714~1777년)가 즉위하자
폼발은 다른 2명과 함께 총리자리에 오른다
왕에 오른 주제 1세는 폼발을 매우 신임하여 무한한 재량권을 주었고
그는 이때부터 포르투갈의 정치와 권력을 장악하여
활발한 대외무역과 각종 개혁정책으로 국내 산업 발전과 국력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1755년 리스본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3이 잿더미와 폐허가 되고
10만 여명이 사망하는 사건으로 개혁정책에 제동이 걸렸다
폼발은 즉시 군대를 동원하고 피난처와 병원을 설치하여 구난작업에 힘쓰며
도시의 재건을 맡아 건축가 에우게니오 도스 산투스의 설계에 따라
리스본을 아름다운 도시로 탈바꿈하는 재건에 성공하였다
또한 1759년 일부 귀족들이 주제 1세 부부를 암살하려는
음모로부터 구출하여
주제 1세로부터 더욱더 신임받아 권력은 왕권보다 더 강하여져
암살음모 사건과 연관시켜 정적 타보라 가문을 제거할 구실을 만들고
예수회를 연관시켜 포르투갈에서 추방하고 교회가 가졌던
공교육의 지배권과 막대한 토지를 확보 하였다
그러나 왕비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폼발이
남편인 국왕 주제 1세에게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항상 눈에 가시로 보이고 매우 못마땅해 하며 싫어하고 있었다
주제1세가 뇌졸증으로 쓰러지고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가 섭정하다가
1777년 주제 1세가 사망하자
함께 즉위한 장녀 마리아 1세와 시동생이자 사위인 페드루 3세에게 조언하여
권력 남용죄로 구속 시키고
1779년 10월부터 1780년 1월까지 재판부의 가혹한 심문을 받으며
유죄판결을 받고 리스본에서 추방되어 폼발로 내려가 1782년 사망하였다
에두아르도 7세 공원(Parque Eduardo Ⅶ)이다
공원 앞으로 폼발 후작 동상이 보이고 저 멀리 테주(Tejo)강이 눈에 들어온다
에두아르도 7세(Eduardo Ⅶ)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Edward Ⅶ)로서
에두아르도 7세 공원(Parque Eduardo Ⅶ)은
1902년 영국의 에드워드 7세(Edward Ⅶ:1841~1910년)의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공원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7세(Edward Ⅶ:1841~1910년)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앨버트 사이의 큰아들로 태어나
태어난지 1개월만에 왕위 계승권자인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작위를 받는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녔으며
1861년 아일랜드의 군부대에서 근무중에 여배우와 연애한 적이 있는데
1861년12월 아버지 앨버트 공이 장티푸스로 사망하게 된다
앨버트 공이 죽기전에 아들의 연애 사건으로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았기에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앨버트공의 사망에
왕위 계승권자인 아들이 일말의 책임있다고 생각하여
국정에 전혀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고 하며
50세가 넘어서 겨우 내각 회의록을 보고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1863년 덴마크 공주 알렉산드라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고
영국과 유럽 대륙을 돌아다니며 폭 넓은 사교와 스포츠 활동을 하였으며
알렉산드라는 가정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1901년 1월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고 왕위에 올라
1902년 8월 9일 대관식을 올리고 유럽 여행길에 올랐는데
여행지 중 한 곳으로 리스본에 방문하였다고 생각된다
에두아르도 7세 공원을 떠나
동해(東海)라는 중국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오늘 밤을 지낼 숙소로 향한다
테주(Tejo)강을 건너는
바스코 다 가마 다리(Ponte Vasco da Gama)를 지난다
유럽에서는 최고 긴 다리로 알려져 있는 다리로
총 길이가 17.2Km 달한다고 한다
설계자들은 다리의 길이 때문에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설계하여
1998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테주(Tejo)강을 건너가며
바스코 다 가마 다리(Ponte Vasco da Gama)에서 보는 리스본 시내다
내일 새벽이면 공항에서
리스본을 떠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떠나야 하기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 포르투갈 여행에서
리스본은 크지는 않지만 볼거리가 많았던
정말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든다
테주(Tejo)강을 건너와 몬티조(Montijo) 지역에 있는
트립 몬티조 공원 호텔(Tryp Montijo Parque Hotel)에서
포르투갈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05:00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새벽도 아닌 오 밤중부터 서둘러 버스에 오른다
리스본 공항에 도착하니
시계는 03:03을 가르키고 있었다
05:00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으로 향하는 비행기 수속을 마치고
공항에서 대기하는데
안개로 인해 비행기 이륙이 지연되고 있다가
07:30분이 다 되어서야 이륙을 하며
이번 포르투갈 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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