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스페인 여행

천황봉 2015. 12. 28. 14:14

꽃보다 할배로 유명해진 스페인으로 가기 위하여

인천공항에서 네덜란드 항공을 타고

9041 Km 거리에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환승하여

바르셀로나 엘 프라트 공항(Aeroport de Barcelona El Prat)에 도착한다

 

스페인 하면 먼저 투우가 생각나고

플라멩코 춤이 떠오르는

열정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인식되는 국가로서

현재는 축구 스타플래이너가 많은 프리메라리가(Primera Liga)에서

FC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Lionel Messi)

레알 마드리드에 크리스티아노 호날두(Cristiano Ronado)

골 득실 경쟁으로 재미를 더하여

먼저 생각나게하는 국가이다

 

이번 여행 계획은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10박 13일 일정으로서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며 보고 느끼는 여행이다 

 

스페인에서 일정은

바르셀로나에서 사라고사, 마드리드, 톨레도, 콘수에그라, 코르도바,

그라나다, 미하스, 말라가, 푸에르토바누스를 거쳐

타리파 항에서 모로코로 건너가 관광을 하고 다시 타리 항으로 건너와

론다, 세비야를 거쳐

바다호스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는 일정이다

 

스페인에 도착하여

바르셀로나 엘 프라트 공항(Aeroport de Barcelona El Prat)에서

먼저 바르셀로나의 상징이자 스페인이 자랑하는

안토니 아우디가 설계하고 건축하기 시작하여 100년이 넘게

아직도 건축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성가족 성당)를 향해

그란비아(Gran Via) 도로를 지나 가는데

도로에 많은 차들로 정체가 심하다

 

에스파냐 광장(Placa d' Espanya:스페인 광장) 중앙탑이 보인다

 

에스파냐 광장 중앙탑이 있는 로터리를 지나는데

차창 밖 앞에 베네치안 타워와 멀리 몬주익 언덕을 등진 카탈루냐 미술관과

그 앞으로 '마법의 분수'라고 불리는 음악분수가 보인다

베네치안 타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종탑을 닮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에스파냐 광장과 카탈루냐 미술관은

1929년 박람회로 인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마법의 분수는 어둠이 깔리면 쇼를 시작하는데

5~9월은 화, 금, 토, 일요일 21:00~23:00에 30분 간격으로 쇼를 하며

10월~4월은 금, 토요일 19:00~20:30에 30분 간격으로 쇼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일찍 자리를 잡아야 하며

소매치기도 주의하라고 한다  

 

에스파냐 광장 중앙탑이 있는 로터리에

바르셀로나 박람회장(Fira de Barcelona)이다

 

히스파니타트 광장(Placa de la Hispanitat)에서 버스에서 내려 걷다보니

사그라다 파밀리아(La Sagrada Familia:성가족 성당)이 보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Temple de la Sagrada Familia:성가족 성당)

카탈루냐(Cataluna) 출신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1852~1926년)

생애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가톨릭 대성당으로

1883년 한 가톨릭 독실한 단체가 신자들의 모금으로

가우디에게 성당 건축을 맡기면서 시작되어

1926년 가우디가 전차에 치여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성당 방문객들의 입장료로 계속 건축 중인 대성당이다

성당 정면에는 예수를 상징하는 중앙 첨탑과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상징하는 4개의 첨탑이 서 있으며

그리고 작은 12개의 첨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한다고 한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중앙에 있는 첨탑과

높이 120m에 달하는

 4개의 첨탑 중 가장 좌측에 있는 첨탑이 

가우디 생전에 유일하게 지어진 첨탑이라고 하며

첨탑의 높이가 현재 120m이나  

설계시에는 높이를 170m로 설계하였는데

몬주익 언덕이 171m로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넘봐서는 안된다는 가우디의 믿음 때문이라 한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중앙 첨탑 아래에 있는 

성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은

'예수탄생' 파사드로서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고지 장면과

예수탄생, 동방박사와 목동이

경배하러 오는 장면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웅장하며 섬세한 첨탑들 아래 예수탄생 파사드를 바라보며

"직선은 인간이 만든 선이고 곡선은 하나님이 만든 선이다"라는

안토니 가우디의 말이 실감이 남을 느낀다  

 

  내부로 들어서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 보이며

장엄함과 엄숙함에 경건해지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를 감정에 사로 잡혀짐이 느껴져 온다

 

성당 내부는 자연을 모티브로 하여

가우디가 숲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설계한 것으로  

 

높이 60m 기둥은 나무를 의미하며

그 위로는 줄기들이 뻗어 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거쳐 안으로 들어오는 빛깔은

자연의 계절을 표시한 것 같이

각 방향에 설치되어 있는 것에 따라 달리 비추이는데

위의 사진은 봄의 향연을 노래하는 듯이

예수 탄생 파사드가 있는 정문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의 환희를 나타내고 있는 것 같으며 

 

겨울의 차가운 향연이 펼쳐 지는 듯

예수 수난 파사드가 있는 후문 쪽 방향 벽에서 비추고 있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로서 죄악된 인간 세상을 구원하기 오셔서

수난과 고초를 받으시며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외로이 돌아가심의 슬픔을 나타내는 듯 하였다

 

성당 내부의 벽과 기둥들은 하얀 색상으로 마무리 하였는데

그 것은 스텐인드 그라스를 통해 들어 오는 햇빛을

그 색 그대로 벽면에 비쳐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성당 내부에 있는

글씨가 양각과 음각으로 조각되어진 큰 판은

2002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공사 중인 '글로리아(영광)'라는

성당 남쪽 문으로 이용될 예정인 문으로

우리 한글이 조각되어 있는 부분을 발견하고 카메라에 담아 본다

참고로 정문은 동쪽 문으로 '예수 탄생' 파사드가 있으며

후문은 서쪽 문으로  '예수 수난' 파사드가 있다   

 

후문으로 나오니 정문 쪽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예술작품을 보는 시야는 문외한에 가깝지만은

정문 쪽의 '예수 탄생' 파사드는 곡선을 이용한 작품이였다면

후문 쪽의 '예수 수난' 파사드는 직선을 이용한 작품으로 보인다

'예수 수난' 파사드는 가우디가 사망한 30년 후

호세 마리다 수비라츠(Josep Maria Subirachs)라는 모더니즘 조각가의 작품으로

가우디와는 정 반대 성향인 각진 정형화 및 추상화가 가미되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얼굴 부분은 음각으로 조각하여

어떤 방향에서 바라봐도 보는 사람과 마주 보는듯한 착시를 주고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에게 키스하고 있는 모습으로

뒤쪽의 뱀은 배신을 의미하고 있다고 한다

옆 쪽의 사각 숫자판은

33 마방진으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 계셨던

33년의 생애를 의미한다고 한다 

 

1883년에 공사가 시작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926년 75세 일기로 전차 사고로 안토니 가우디가 죽은 후

1935년 스페인 내전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50년대에 와서야 공사가 재개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사가 늦어 지고 있는 이유는

건축가인 안토니 가우디가 사망 후 남아 있는 불완전한 설계도의 재해석과

기부에 의한 자금조달에 대한 어려움이 있어

적은 인원을 공사에 투입하여 조금씩 진행하기 때문에

이 처럼 진행하면 앞으로도 완공이 200년도 더 걸린다고 한다  

현재는 스페인 정부에서 가우디 사망 1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2026년까지 완공하도록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려도 많다고 한다

치밀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완성도를 확보할 수 있는 인원은 극소수로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는 우려라고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공사는

처음에는 석조를 이용하여 공사를 시작했지만

1950년대에 근처에 돌이 바닥이 나자

철거된 석조 건축물 자재를 재이용하다가

현재는 인조석과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나와

여행 첫 점심식사로 지중해 해변가에 있는 식당으로

빠에야 요리를 먹으러 간다  

 

빠에야(Paella) 요리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방과 지중해를 맞대고 아래쪽으로 경계를 이루는

발레시아(Valencia) 지방에서 즐겨 먹던

스페인 전통 요리로써 

각종 해산물과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쌀과 함께 넣고

소스로  볶아서 먹는 볶음밥 요리이다

'빠에야'는  발레시아에서

둥근 형태에 양쪽에 손잡이 있는 푸라이판을 지칭하는 말로서 

빠에야 요리를 먹을때 생쌀을 씹는 느낌도 있었지만

해물과 홍합을 넣어 볶은 요리로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많은 보트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중해변에 있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보트 선착장'이라고 한다

 

보트 선착장 주변을 둘러보고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데

스페인에서 여행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기본 스페인어 몇마디를 가르쳐 준다

올라(안녕하세요)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바뇨(화장실)                

살리다(나가는 출구)     

부에노스 디아스(아침인사)

 

잠시 해안가 그늘에서 쉬다가

다시 버스에 올라 구엘 공원으로 향한다 

 

구엘공원(Parc Guell)

가우디의 후원자이자 파트너였던 에우세베 구엘(Eusebi Güell) 백작

도심에서 벗어나 부유층을 위한 전원주택 단지를 만들고자 

1900년 가우디에게 총 60채의 전원주택 건축을 의뢰하였지만

1914년 경제적 차질이 생겨 3채만 분양되고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당시 가우디는 3Km의 길과 중앙 광장, 경비실과 관리실만 공사 후 중단되었는데

1918년 에우세비 구엘이 사망하고

1926년 구엘 가족들이 이 곳을 바르셀로나 시에 기증하면서

구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내려 안 쪽으로 들어서자 돌기둥이 보인다

가우디는 자연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하여

길을 내면서도 능선을 최대한 회손치 않으며 구불구불 공사하였으며

공사중에 나온 돌을 모아

돌기둥을 쌓아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곳을 공사중 입주하겠다는 사람들이 없자

1906년 가우디가 모델하우스로 쓰이던 건물을 구입하여

1926년까지 20년을 살던 집으로

현재는 '가우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가우디 생전에 사용하던 개인용품 및 가구, 그림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2013년부터 유료 입장이라고 한다 

 

전원주택 단지에서 공원으로 조성된 후

구엘 공원은 자연과 사람이 어울어 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가우디의 상상력과 열정이 서려 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라고 한다 

 

구엘공원 중앙 광장에 서니

구엘공원 경비실과 관리실 건물 사이로

바르셀로나 시내와 지중해가 지푸르게 바라다 보인다

 

중앙광장에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광장 베란다 겸 만들어 놓은 의자는

 다색의 작은 타일조각을 붙인 모자이크 양식으로서

카탈루냐 스타일인 '트렌카디스(Trencadis)'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의자의 길이는 단일 의자로서 세계에서 가장 길다고 한다(???) 

 

구엘공원의 광장은 고대 그리스의 원형경기장을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하며

길이 83M, 폭 43M의 타원형으로 공간으로서

빗물이 스며들어 광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안구멍을 통하여

 지하 저수 물탱크로 흘러 들어 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광장을 받치고 있으며 배수관 역할을 하는 기둥을 보기 위하여

밑으로 내려 가는 도중에 길을 받치고 있는

돌기둥에 돌을 쌓아 만든 조형물이 보인다

 

그러나 조형물보다는 돌기둥을 어떻게 세웠나하는 궁금증이 더하였다

큰 돌들을 쌓아 견고하게 한 것도 아니고

조그만 돌조각들을 붙여 아치형으로 쌓았는데

오랜 세월동안 떨어지거나 무너지지도 않고 견디며 이상이 없다는 것이

궁금증을 유발하였다 

 

광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광장에 모여 스며든 빗물이 이 86개 기둥안 있는 배관을 타고

지하 저수 물탱크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다

기둥의 크기는 지름 1.2M, 높이 6M로 세워져 받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사원에서 영감을 받아 도리아스식 기둥을 모방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곳은 전원주택 단지로 조성할 당시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장을 보러 시내까지 나갈 필요가 없이

시장이 들어설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구엘 공원의 마스코트 도마뱀 분수이다

다색의 작은 타일조각을 붙인 모자이크 양식으로 만들어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이 것을 모델로 하여 인증샷을 한다

 

관리실과 경비실 건물이 있는 곳을 향해

계단을 내려 가다 뒤를 돌아 보니

광장이 있는 지붕쪽 난간이 기둥과 어우러져 웅장하게 보인다

그리스 신전을 모티브하여 건축되었다고 한다  

 

당시 가우디에 의해 건축된 왼쪽은 관리실과 오른쪽은 경비실 건물로

동화 속 풍경에 나올듯 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다

안에 들어가 관람이 가능하며

안에는 기념품을 파는 샵이 있었다

 

구엘공원에서 일정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가는 중에

비누 방울 놀이를 하는 유아 가족들의 모습이 행복하게 보인다

비누 방울이 엄청 크다 

 

구엘 공원을 나와

몬세라트(Montserrat)산을 향하여 간다

 

몬세라트(Montserrat) 산은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거리에 있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회색바위 산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한지 약 40분쯤 지나자

멀리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몬세라트 산'은 해발고도 1236m 절벽의 높이 솟은 바위산으로서

'톱으로 자른 산'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몬세라트 산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오르는 방법은

케이블카와 산악열차인 크레마예라(Cremallera)를 타고 오를 수 있는데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산 위로 베네딕트 수도원이 보이고 케이블카가 내려오고 있다

몬세라트 산에는 등산로도 조성되어 있어

걸어서도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는 몬세라트 산에 오르면서 보니

바위 절벽 사이로 수도원으로 보이는 건축물들이 몇 개 보였다

저렇게 보이는 절벽의 성당에도

산행길 또는 푸니쿨라로 갈 수 있도록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고도가 높아 지면서

산넘어로 멀리 바르셀로나 쪽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위산 위 정상에 십자가가 보이니

케이블카 종착지에 도착한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몬세라트 산 기암괴석 아래로 베네딕트 수도원이 보인다

 

몬세라트(Montserrat) 산에 베네딕트 수도원이 세워진 시기는 11세기라고 한다

이 수도원은 성모 마리아 신앙의 성지로서

카탈루냐 사람들의 신앙심에 종교적 터전으로 이어져 왔으며

지금은 세계 최고의 4대 성지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1811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많음 부분이 파손되고

많은 수도사들도 죽음을 맞이한 장소라고 한다

19세기 중반에 재건에 들어가서

20세기 초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베네딕트 수도원 성당 앞 광장에는 작은 원이 그려져 있는데

그 안에서 소망의 기도를 드리면 이루워진다고 하니

그 원 안으로 들어가 기도들 드리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베네딕트 수도원 성당에서는

주일에는 13세기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소년 합창단이며

세계 3대 소년 합창단 안에 꼽히는

 에스콜라니아(Escolania) 소년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을 들으면서

미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한다

 

제단 뒷편 2층으로 검은 성모상을 보러 가는 길목에는 '소년의 조각상'이 있다

이 조각상에는 사연이 있다고 한다

죽어가는 큰 병을 앓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는데

이 소년에게는 에스콜라니아 성가대에 서 보는 소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원을 알게 된 수도원에서 단 하루지만 성가대원으로 허락하여

그토록 원하던 에스콜라니아 성가대복을 입고 성가대와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몇 일이 지나 소년이 죽자

소년의 아버지는 에스콜라니아 성가대복을 입은 아들 소원이

영원히 이루어지길 원하는 마음으로

성가대복을 입은 아들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이 수도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몬세라트 베네딕트 수도원 성당을 더욱 유명하게 하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검은 성모상 '라모레네타(La Moreneta)' 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검은 성모상은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카탈루냐의 수호 성인이라고 한다

공을 잡은 오른손이 유리관 밖으로 나와 있는데

이 공을 만지며 기도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아 길게 줄을 서야 한다

 

'검은 성모상'에 얽힌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 누가(Luke:루카)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베드로에 의해 50년에 이 곳 몬세라트로 옮겨 왔다고 한다

로마인이나 아랍인들에게 파괴될 것을 우려해 동굴 안에 숨겨 놓았는데

880년 어느날 하늘에서 노래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목동들에게 비쳐 그들이 그 빛을 따라가니

동굴 안에 있던 검은 성모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목동들이 놀라 당시 근처의 만레사 주교에게 알려  옮기려 하였으나

꿈적도 하지 않아

이 곳에 작은 성당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 한 것에 의하면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베네딕트 수도원 성당에서 나와 몬세라트 역으로 간다

산으로 올라올 때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왔지만

내려갈 때는 산악열차인 크레마예라(Cremallera)를 타고 내려가기 위해서이다

 

크레마예라(Cremallera)를 타고

기암괴석 사이로 건설된 철로를 따라 꾸불꾸불 내려가며 보는

크레마예라(Cremallera) 종착역이  있는

몬세라트의 모니스트롤(Monistrol de Montserrat) 지역이다

 

산악열차인 크레마예라(Cremallera)가

기암괴석의 절벽사이를 꾸불꾸불 내려 가는 모습이다

위에서 잔석이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그물망도 쳐놓은 것이 보인다

 

크레마예라(Cremallera)를 타고 몬세라트 산을 거의 내려와 뒤돌아 보니

저 바위산을 이 기차가 어떻게 내려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몬세라트의 모니스트롤(Monistrol de Montserrat) 지역에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려

다시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몬세라트에서 약 50분 정도를 바르셀로나로 달려와

먼저 몬주익(Montjuic) 언덕으로 간다

"몬주익"의 뜻은

"몬"은 산이라는 뜻이고 "주익"은 유대인을 의미하여

"유대인의 산"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유대인의 묘지'가 있던 곳이라 한다

 

몬주익(Montjuic) 언덕은 지중해 바다가 보이는

바르셀로나에서 바닷가에 위치한 해발 213m의 야트막한 언덕이다

 

몬주익(Montjuic) 언덕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메인 스타디움 앞에

우리 글로 새겨진 기념탑이 있다

"역사와 예술의 나라, 스페인 찬란한 고도 바르셀로나

이곳에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 경기도

그 힘찬 빛이 같이 어리어 있나니

아 이 뜨거운 우정 만방에 영원하여라"라고 쓰여 있는데

아마도 경기도와 자매결연 맺은 도시인 것 같다

 

그 옆에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에

마라톤 우승자였던 우리나라 황영조 선수의 조각상이 새겨 있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던 메인 스타디움은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밖에서만 바라다보고

다시 차에 올라 콜럼버스 탑이 있는 광장으로 향한다  

 

몬주익(Montjuic) 언덕에서 내려와

조세프 카르네르 거리(Passig Josep Carner)를 지나

드라사네스 광장(Place de les Drassanes)의 원형 교차로를 지나며 보는

콜럼버스 탑이다

 

콜럼버스 탑(Mirador de Colom) 옆에는

현재는 연합 정부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는

아두아나 궁(Palacio de la Aduana)이 있다

 

콜럼버스 탑(Mirador de Colom)

1888년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세계 엑스포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여 세워 졌으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와 첫 발을 디딘 곳에

약 60m의 높이로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콜럼버스 동상의 오른 손은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을 가르키고 있으며

왼손은 아메리카 토산물인 파이프를 들고 있다

 

포트 벨(Port Vell)이 있는 항구 청사가 보인다

청사 앞 광장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돌아온 항구로서

당시 이사벨 여왕이 돌아오는 콜럼버스를 마중하러 나왔던 장소로  

이곳에는 현재 콜럼버스의 탑이 세워져 있다

 

람블라스 거리(Ramblas Street)이다

콤럼버스 탑에서 카탈루냐 광장까지 약 1.2Km를 가로수 길로 이어진 길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이라고 한다

이 거리에는 예술가들도 많이 몰려 있어 관광하는데 즐거움을 주며

가우디가 학생 때 디자인한 가로등도 볼 수 있고

그의 작품인 구엘 저택도 이 거리에 있다 

 

람블라스 거리(Ramblas Street)에서 보는

콜럼버스 탑(Mirador de Colom)이다

 

벨 항(Port Vell)에 있는

바르셀로나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 Barcelona)이다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숙소로 가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바오밥 나무가 보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첫 날의 숙소는

바르셀로나 시내 중심가에서 동북쪽으로 약 1시간 정도 거리의

몬토메로(Montomelo) 부근에 있는 홀리데이 호텔이었다

 

호텔에서 TV를 보는데

바르셀로나를 지역으로 하는 카탈루냐 지방은 스페인에서 독립하여

자치 국가를 이루려고 독립 찬반투표를 진행하려고 한다고 한다

노란과 빨간 줄 깃발에 별이 그려져 있으면

독립을 원하는 정당이며

노란과 빨간 줄만 있는 깃발은 스페인에서

독립을 반대하는 정당이라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 호텔 창밖을 보니

주위에 자동차 경주장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서킷(Circuite de Barcelona-Cataluya) 부근에 있는

홀리데이 익스프레스 호텔이었다

 

오늘은 사라고사를 들렸다가 마드리드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바르셀로나에서 사라고사까지는 약 4시간

사라고사에서 마드리드까지는 약 3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사라고사(Zaragoza)로 가는 길에

어제 보았던 몬세라트(Montserrat) 산이 보인다

 

출발하여 1시간 정도 지나

조르바(Jorba) 부근을 지나치는데

산 위에 파괴된 고성으로 보이는 곳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몬마네우(Montmaneu) 부근을 지나는데

평지에는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나무들만 있고 집들은 보이질 않고

산 능선 뾰촉하게 보이는 곳에 집들이 모여있어 성처럼 보인다

 

베르고스(Vergós) 부근을 지나가는데 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올리브 나무 밭으로 보이는 평원이다

그 동안 유럽 여행 중에 논으로 보이는 곳을 본 기억은 없는것 같다 

 

바르셀로나에서 2시간 정도 달려 온 끝에

레리다(Lleida) 부근의 휴계소에 도착하여 쉬어 간다

사라고사까지는 중간 지점으로 약 2시간 정도 더 달려가야 한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며 바르셀로나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바르셀로나(Barcelona)

스페인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로서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며 

시내에서 160Km 지점의 피레네 산맥 프랑스 남부 접경 지역까지 이어지는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중심도시라고 한다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인구는

약 160만명 정도 거주하는 도시라고 한다

 

바르셀로나(Barcelona)라는 도시의 명칭은

고대 페니키아어인 '바르케노(Barkeno)'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BC 3세기경 하니발 바르카의 아버지로서 스페인을 정복한 

카르타고의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 가문의 성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Barcelona)

스페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노클(Monocle)이라는 라이프스타일 잡지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14위에 선정 되었다고 하며

세계에서 국제 방문객을 20번째로 많이 받는 도시라고 한다

 

바르셀로나(Barcelona) 언어는 스페인어 뿐만 아니라

카탈루냐어(Catalá)를 사용하고 있으며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지역은 카탈루냐 지방뿐만 아니라

발렌시아 지방, 발레아레스 제도, 안도라, 프란하데아라곤, 이탈리아의 알게로, 

프랑스의 카타루냐델노르트, 무르시아의 카르체 등

전 세계에서 약 900만명 정도가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바르셀로나(Barcelona)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통치 시대에는 파벤티아(Faventia)라는 식민 도시로서

로마 제국은 기원 전 15년 경 몬 타베르(Mons Taber) 언덕을 중심으로

군사 기지의 형태로 재개발된 도시였다고 한다

5세기 초 서고트 왕국에 정복된 이후 몇 년간 히스파니아 수도 역할을 하였으며

8세기 초 아랍 세력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801년 프랑크 왕국에 의해 히스파니아 국경으로 통합되었다

9세기 말부터 프랑크 왕국에서 독립을 진행하고 있을 때

10세기 말 아랍 세력인 우마이야 왕조에게 일시적인 점령이 되기도 하였지만

프랑크 왕국의 지원 없이 격퇴하는데 성공하여

프랑크 왕국에서 정식으로 독립하여

11세기에는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 군주제를 확립하였다

이 것이 현재의 카탈루냐 지방의 원류가 되었다

 

12세기에 바르셀로나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한 세력으로 편입되어

다수의 해외 영토를 확대하여 나감으로

바르셀로나에서 아테네까지 이르는 지중해를 지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479년 카탈루냐를 통치하는 아라곤 연합왕국과

카스티야 연합왕국이 새로운 통일 왕국인 에스파냐 왕국으로 통합되어

수도가 마드리드로 옮겨가고

신대륙 식민화에 따른 지중해 무역의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바르셀로나는 경제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바르셀로나는 1640~1652년 펠리페 4세에 대항하여

카탈란 봉기를 일으켰으며

카타루냐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산업이 도입되어 성장되던 중

스페인 내전으로 대대적으로 파괴되었지만

현재는 스페인에서 제 2의 도시로 발전하였다

 

레리다(Lleida) 휴계소에서 출발한지 2시간 정도 지나

사라고사(Zaragoza)에 도착을 한다

 

사라고사(Zaragoza)

인구가 66만명 정도 거주하고 있는 도시로서

아라곤 지방의 주도로서 스페인에서 5번째 대도시이며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자연스럽게 물류, 교통중심지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사라고사(Zaragoza)는

원래 살두바라고 하는 켈트족 거주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쎄싸라우구스따라고 하는 로마인들의 거주지로부터

'사라고사'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리자 알폰소 1세 거리(Calle de AlfonsoⅠ)로 간다

이 거리는 많은 상점들이 몰려 있는 거리로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였다

알폰소 1세는

아라곤의 왕이자 나바라의 왕(1104~34 재위)으로
별칭이 전쟁왕 알폰소(Alfonso el Batallador)라고 한다

 

필라르 성모 대성당(Basilica de nuesta Senora del Pilar)으로 간다

사라고사(Saragoza)의 필라르 성모 대성당은

바로크 양식의 성당으로

화려한 종탑 11개가 있는 지붕으로 유명하며

산티아고(Santiago)에 있는

콤보스텔라 대성당(Catedral de Compostela)과 함께

국가 유적으로 선언된 대표적인 성당이다

 

필라르 성모 대성당(Basilica de nuesta Senora del Pilar)은

성모 마리아 발현 기적을 기념하여 세운 성당으로

성모 마리아로부터 받은 기둥을 보관하기 위하여 세운 성당으로서

1681년 소 프란시스코 에레나(엘 모소)에 설계 건축되어

1718년 완공되었다

 

필라르(Pilar)는 스페인어로는 "기둥"이라는 뜻이라 한다

AD 40년 1월 2일 이 지역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러 온 야고보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기둥"을 전했다는것에서 유래된 성당이다

야고보는 스페인어로 '산티아고(Santiago)'로서 순례길의 주인공으로

스페인의 수호신이라 한다

 

필라르 성모 대성당(Basilica de nuesta Senora del Pilar)의 돔에는

고야(Francisco Goya)가 그린 프코스코화가 있어 눈길을 끈다 

 

고야(Francisco Goya)가 젊은 종교화가 시절

프레스코화로 천장에 그렸다는

'레지나 마르티룸(Regina Martyrum: 순교자의 여왕)이 보인다

 

필라르 성모 대성당(Basilica de nuesta Senora del Pilar)의

내부를 둘러볼때

꼭 보아야 할 3가지가 있다

고야(Francisco Goya)가 천장에 그린 프레스코화와

 

두번째는 성당 안에 전시된 폭탄으로

스페인 내전 때에 폭탄이 4발이 떨어졌다고 한다

1발은 에브론 강가로 떨어졌고 또 1발은 필라르 광장으로 떨어졌으며

2발은 성당 지붕을 뚫고 성당 내부로 떨어졌는데

다행히 모두 불발탄이 되어

성당이 온전한 그 모습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어 질 수 있었다고 한다

성당 안 깃발 아래 전시된 폭탄 2발이 당시에 떨어졌던

불발탄이라고 한다

 

세번째는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여 야고보에게 주었다는 기둥으로

성당 중앙제단 뒤로 가면

벽난로처럼 생긴 아치 안 벽면에

타원 금조각품 안쪽의 조그만 구멍에 보이는 것이

성모 마리아가 야고보에게 주었다는 기둥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방문객들은 이 곳에 입마추며 기도하는 사람도 있고

손을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필라르 대성당 옆에는

사라고사(Zaragoza) 시청이 보인다

 

필라르 광장의 시청 옆으로는

라 세오 성당(Catedral del Salvador)의 종탑이 우뚝 서 있어

광장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었다   

 

라 세오 성당(Catedral del Salvador)의 종탑이 있는

앞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데

고야(Francisco Goya)의 동상이 서 있는 곳이었다 

 

필라르 광장의 한켠에는 고야 동상 서 있다 그 곳에서 인증샷을 한다

고야(Francisco Goya:1746~1828)는

인상파 시초를 보인 스페인 근세의 천재 화가로서

젊은 시절엔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아 화사한 귀족적 화풍을 가진 궁정 화가였지만,

병으로 후천적 청각장애를 얻으면서부터 외부인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집인 '귀머거리 집'에 틀어박혀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린 그림은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집에 있던 하얀 벽위에 그렸는데

검은색 바탕, 기괴할정도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형상과 얼굴,

우울한 주제의식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생활로부터 고야는 인간의 광기와 어두운 면이 드러난

그림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고야(Francisco Goya)의 동상이 있는 곳에서 본 필라르 광장이다

필라르 대성당이 웅장하게 서 있고

사라고사(Zaragoza)는 고야의 고향답게

고야에 관한 간판들이 많이 보인다 

 

사라고사에서 필라르 대성당과 주변의 관광을 마치고

마드리드로 출발하기 전에

필라르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잠시 쉬며 여행의 재충전을 한다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하며

필라르 대성당 옆 광장에 놓여진 분수 조각품이다

물받이가 없는 분수로서 노상으로 그냥 물을 쏟아내고 있는데

광장 분위기와 너무 어울리는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향하여 버스는 달려 간다

사라고사에서 마드리드까지는 약 3시간 30분 걸릴 예정이다

 

스페인 국가의 공식 명칭은 '스페인 왕국(Kingdom of Spain)'이다

국토 면적은 505,991㎢로

우리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223,348㎢) 보다 2배가 넘는 크기로서

산지가 30%, 평야가 70% 인 국가이다

 

스페인의 인구는 약 4600만 명이며

민족 구성으로는 집시를 제외하고

다양한 인종집단으로 교류되어 인종적인 순수성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갈리시아족, 바스크족, 카스티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로는 국민 94%가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으며

소수 종교로는 개신교가 가장 많으며

여호와 증인,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 모르몬교 등이

20세기 중반이후에 교세가 급격히 늘고 있다고 한다

 

정부 형태로는

국왕이 있는 국가로서 입헌군주제로서

국왕은 국가의 수반으로서 모든 외교 관계에서 스페인을 대표하며

새 법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의회를 소집하거나 해산권이 있고

총리 및 각료들 임명 및 해임권이 있으며

 군 통수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의회 형태는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로 이루어진 형태로서

하원이 상원보다 강력한 입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원의원은 4년마다 각 주에서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하며

상원의원은 4년마다 각 지방과 섬에서 4명씩 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국방에는 국왕이 총사령관으로 육, 해, 공군을 지휘하며

모든 성인남성은 병역의무를 갖는 징집제이며

복무기간은 15~18개월이라고 한다

 

공용어는 스페인어 이나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도 널리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로는 2019년 기준

국가 GDP는 1조3978억 달러(세계13위),

1인당 GDP는 3만1060 달러(세계31위)라고 한다

<대한민국: 국가GDP 1조6295억 달러(세계12위), 1인당 GDP 32,046달러(세계28위) 2019년>

 

그러나 스페인 국민들은

살아가는데 평안함 삶에 의미두지 

GDP에는 그리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한다

 

마드리드(Madrid) 시내로 버스가 진입하니

엄청난 차들이 밀려있는 저녁 러시아워(Rush hour) 시간이었다

 

마드리드에서 오늘 관광 일정은 없고

마드리드 역 부근에 있는 한인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마드리드 외곽으로 핀토(Pinto) 부근에 있는 숙소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마드리드(Madrid)

스페인의 수도로서 인구 약 316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문화 예술과 산업의 중심지이다

 

마드리드(Madrid)는

해발 600m가 넘는 고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도시라고 하며

'물이 좋다'란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마드리드(Madrid)는 다른 유럽의 수도처럼 큰 하천을 끼고 있거나

자연자원도 없고 성지 순례의 목적지도 아닌

수도로서 역할에 걸맞지 않은 위치에 있고

수도로 정해지기 전 톨레도(Toledo)를 방어하기 위한 조그만 요새로

수도로서 부적합 것이 많았던 곳이

수도로 정해진 것은

16세기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와 반왕권적 세력이 없던

그 후손들의 중앙집권적 통치의 결과라고 한다

펠리페 2세가 왕궁을 마드리드로 옮긴지 거의 1세대가 지난

1607년 펠리페 3세가 마드리드(Madrid)를 공식적으로 수도로 정한 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식당으로 걸어 가던 중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민망한

Mondo Fantastic라고 광고하고 있는

섹스샵(Sex Shop)이 있어 살짝 카메라에 담았다 

 

마드리드(Madrid)로 인구 유입은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지키며

1939년 이후 자동차, 항공기, 전기전자 제품 등

각종  소비재  공업지대가 형성되고 성장함에 기인한다고 한다  

 

마드리드인들의 전통적인 별명은 '가토스(Gatos:고양이)'라고 한다

원래는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잘 기오르던 용맹한 군대를 가르켜 지어졌으나

현대에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지역 주민의 생활 태도를 지칭한다고 한다   

 

마드리드(Madrid)에서 남쪽으로 외곽 약 30분 거리에 있는

핀토(Pinto)의 홀리데이 호텔(Holiday Inn)이다

어제 저녁 버스기사가 호텔을 찾지 못하고 헤메고 있어

내가 답답한 마음에 지도 앱을 켜고

기사 운전석 뒤에 앉아서

좌회전(Turn Left), 우회전(Turn right), 직진(Go Straight)하며

호텔로 인도하여 왔다

여행하다 보니 별일도 다있는 날이었다

 

오늘은 여기에서  남쪽으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톨레도(Toledo)에 갔다가

다시 마드리드(Madrid) 시내 관광 계획이 있어

동트기 직전 새벽부터 톨레도로 향한다

 

톨레도(Toledo)는 마드리드(Madrid)에서 남쪽으로

약 67Km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톨레도(Toledo)

인구는 약 85,000명 정도 거주하는 도시로서

가톨릭, 아랍, 유대 문화가 융합되어 있는 도시라고 한다

 

톨레도(Toledo)에 도착하자

대로에서 보이는 시가지에서 돌아서 뒷편으로

언덕길을 올라 시가지가 한눈에 다 보이는 계곡 위의 전망 포인트로 간다

톨레도 대성당과 웅장한 건물 알카사르(Alcazar)와 성벽이 보인다  

 

톨레도(Toledo)는 타호강(Rio Tajo)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어

옛부터 작지만 천연의 요새로 이루어진 도시라고 한다

타호강 건너 언덕 위 '알카사르(Alcazar)'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알카사르(Alcazar)'는

기원전 로마시대에 성 수비대까지 있었던 로마인들의 관아였으며

톨레툼(Toletum)이라불리는 성벽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아랍 점령시대에도 군사적 요새였다고 한다

11세기에 알폰소 6세(Alfonso Ⅵ)가 재건축을 하였는데

유명한 엘 시드(El Cid)장군이 이 요새의 첫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많은 왕들이 거처로 삼아 왕성(王城)으로 변모해 갔는데

사실상 왕성으로 변모시킨 사람은

1519년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로스 5세(Carlos V)였다고 한다

1561년 펠리페 2세(Felipe II)가 수도를 마드리드(Madrid)로 옮기면서

알카사르는 왕실 가족의 비정규적인 숙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후 몇차례 수난을 겪게 되는데

1710년 계승전쟁(Guerra de Sucesion) 때에 화재로 수난을 받았고

1810년 나폴레온 군대가 떠나갈 때에 불을 지르며 폐허가 되었으나

1867년 새로이 보수공사를 하여 재모습을 찾았다고 한다

1936년 스페인 내란 때에 무수한 폭탄 공격으로 다시 폐허가 되었으나

다행히 도면이 있어 재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톨레도(Toledo) 주변을 한바퀴 돌아

대로 쪽의 주차장으로 가던 중

'산 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에서 잠시 버스에서 내린다

 

'산 마르틴 다리(Puente de San Martin)'에는

'남편을 구한 지혜로운 아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14세기 말 무렵 '톨레도 대성당'을 짓기 위하여 자재를 들여 올 다리를

'페드로 테노리오(Pedro Tenorio) 주교'의 명을 받아

공사를 맡게 된 '톨레도의 다이달로스'라는 별명을 지닌

유명한 건축기사 '곤살레스'는

다리 설계 중 막중한 하중 계산을 잘못하는 설계 실수를 한 것을

다리 공사가 거의 완공되어 가던 시점에 발견하여

완공 후 톨레도 대성당 공사에 쓰일 무거운 자재를 나르던 중에

다리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며

그 동안의 자신의 명예가 날아가며 처형을 당할 수 있다는

고민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고민에 빠져 집에 돌아온 곤살레스가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드러누워 있는

남편 모습이 평소와 다름에 말 못할 고민이 있음을 눈치채고

부인 '아젤리아'는

남편 옆으로 가 살포시 앉아서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아 자기 가슴에 갖다대며

말없이 남편을 한참을 바라 보았다고 한다

곤살레스는 그때 "아젤리아! 내가 죽으면 당신하고 아이들은 어떻게 되지?"

"아 왜 내가 그런 실수를 해가지고.."하며 자책을 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부인 아젤리아는 밤에 잠을 못이루고 침실과 부엌을 오가며

근심과 함께 깊은 생각을 빠져 있을때

부엌 창문이 흔들리는 세찬 바람이 불어와 밖으로 나가보니

먹구름이 몰려오며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이로인하여 이틀간 공사가 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아젤리아는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고 모두가 잠든 

다음날 밤에 몰래 기름통을 들고 나가 다리 공사의 거푸집에 불을 붙이고 돌아와

다리가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다리가 무너진 모습을 본 '페드로 테노리오 주교'는

완공이 안된 공사 중인 다리라 세찬 폭풍우에 무너진 것으로 알고

아쉬움은 있지만

다리 공사를 원점에서 다시 하도록 지시하여

70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튼튼한 다리로 남아 있도록 공사가 되었다고 한다  

 

대로 쪽의 주차장에서 내려

톨레도 성 안으로 들어가자 성 내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톨레도(Toledo)는 언덕길이 많고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지도 없이는

돌아다니기 쉽지가 않은 곳이다 

 

1986년 도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역사를 간직한 유물과 건축물들이 많은

이 좁은 골목길에서

아슬아슬 백미러가 벽에 달듯말듯하게

승용차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으며

차를 비켜주기도 쉽지가 않았다

 

톨레도(Toledo)

로마인들이 이베리아 반도의 전략적 거점으로 삼아 성채 도시로 건설하였는데

BC 193년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풀비우스 노빌리오르에게 정복된 후

 '톨레툼(Toletum)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의 주요 식민지이자 카르펜티아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한다

6세기에는 '서고트 왕국'의 왕궁 소재지였다고 한다

당시 공의회가 여러 차례 개최되었는데

589년 제3차 공의회는 레카레드 왕이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선언한

중요한 공의회였다고 한다 

 

  712~1085년까지는 이슬람의 무어인들의 점령기간이었는데

'모자라브(Mozarabe:아랍 화환) 공동체'의 본거지로서 '툴라이툴라(Tulaitula)'라는

지명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모자라브 공동체: 아랍어를 사용하는 그리스도교의 집단)  

 

1085년 알폰소 6세에게 점령 당한 후 무어인들이 물러가고

카스티야 왕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중심지로서

로마 교황청에서 톨레도를 스페인 교회의 중심지로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 아랍, 유대 문화가 하나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도시였다고 한다

1492년 가톨릭 왕조(이사벨라 여왕+페르난도 왕)에 의해

그라나다(Granada)에 있는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 함락되어 톨레도에 편입된 후

유대인과 무어인에게 알함브라 칙령을 내려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단 4개월 내에 떠날 것을 명령하여 추방하였다고 한다

1560년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Madrid)로 옮겨간 후

 톨레도(Toledo)의 중요성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집에 유대인 마크가보인다

톨레도(Toledo)의 유대인 지구(Jewish Quarter)로서

옛 유대인들이 살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492년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들의 국외 추방령이 내려지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몇 곳만 남아 있다고 한다 

 

'산토 토메 교회(Iglesia de Santo Tome)'

이슬람 사원이었던 것을

1085년 알폰소 6세가 이슬람의 무어인을 몰아낸 이후 

가톨릭 교회로 고쳐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4세기 초 망가진 상태에 있던 것을

오르가스 백작으로 불리는 오르가스(Orgaz)의 영주였던

곤살로 루이스(Gonzalo Ruiz)가

톨레도(Toledo)를 담당하여 재건하며

산토 토메 교회(Iglesia de Santo Tome)도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고 한다   

 

산토 토메 교회(Iglesia de Santo Tome) 예배실 안에는

엘 그레코(El Greco)가 1586~1588년에 걸쳐 그린

'오르가스(Orgaz) 백작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걸작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오르가스 백작으로 불리는 곤살로 루이스(Gonzalo Ruiz)는

1323년 사망하였는데

그의 대한 장례식에 대한 전설을 그림으로 담아 낸 것이다

장례식 날 하늘에서

성 스테반(San Esteban:좌측)과 성 어거스틴(San Augustin;우측)이 내려와

친히 오르가스 백작의 시신을 매장하였으며

이때 "하나님과 성인을 잘 섬기는 이는 이처럼 포상을 받느니라"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그림에서 시신 옆 햇불을 들고 있는 미소년은 엘 그레코의 아들이고

성 스테판 일직상 위의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엘 그레코 자화상이라고 한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머리 위로는 영(靈)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금발의 천사가 오르가스 백작의 영을 천상의 세계로 밀어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엘 그레코는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천상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오르가스(Orgaz) 백작은

자신의 유산으로 산토 토메 교회의 가난하고 힘든 성도들과 신부단들이 빚진 돈을

매년 갚을 수 있도록 유언장에 명시해 놓음으로

죽은 후 자신의 재산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산토 토메 교회는 작지만

재정적 어려움이 없이 운영될 수 있었다고 하며

시간이 흐른 뒤 장례식에 얽힌 전설을 그리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르가스(Orgaz) 백작의 죽음'의 그림은

신앙심이 투철했던 한 귀족을 기리기 위하여 그려 졌지만

그림을 둘러싸고는 '엘 그레코'와 '성당측'하고는

씁슬한 소송전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1200두카도(Ducado: 옛 스페인 금화단위로 450,000Maravedi: 화폐단위)에

엘 그레코와 성당측 계약을 맺고 그림을 시작하였는데

그림이 완성되어 가자 재정낭에 있던 성당측에서 그림 가격이 너무 과도하다고

가격을 낮추어 줄 것을 요구하며 분쟁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감정을 의뢰한 결과

1200두카도가 아닌 더 오른 1600두카도로 감정가가 높이 나오자

성당측에서는 최초 금액인 1200두카도로 하자고 꼬리를 낮추었으나

많은 채무 빚을 지고 있던 '엘 그레코'에게 채무자들은

1600두카도로 소송을 걸도록 유도하였다고 한다

이에 소송전이 길어지자 기다릴 수가 없었던 채무자들은

1200두카도를 받아들이며 끝이 났다고 한다  

 

톨레도 대성당으로 간다

톨레도 대성당(Catedral de Toledo)

스페인 가톨릭의 중심지로 수석 대교구 성당이라고 한다

 

톨레도 대성당(Catedral de Toledo)

무어인 시절에는 이슬람 사원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1086년 알폰소 6세(Alfonso Ⅵ)가 톨레도(Toledo)를 수복하고서

이슬람 사원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 증축하였다고 한다

 

톨레도 대성당(Catedral de Toledo)은

1212년 무어인과의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Batalla de las Navas Tolosa)의

대승전을 기념하기 위하여

알폰소 8세와 히메네스 데 라다 대주교가 톨레도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하여

1221년 기초공사가 시작되었으며

1226년 성당 건축의 초석응 놓는 공식행사가 열렸으며

1227년 페르란도 3세때 마르틴 선생(Maestro Martin)이라는 건축가에 의해

프랑스식 성당 건축 양식으로 시작하여 1493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톨레도 대성당(Catedral de Toledo) 내부 크기는

길이 120m, 넓이 60m, 가장 높은 천정이 33m이며

5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의 둥근 천정은 톨레도 대성당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다리꼴 대신에 삼각과 사각의 형태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석조 골격은

1493년 멘도사 추기경(Cardenal Mendoza) 때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백 성모상(白聖母像:Virgen Blanca)'이다

14세기 초 프랑스에서 대리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대제단(Capilla Mayor)의 제단병풍(Retable Mayor)'이다

1498~1504년에 공사 완공한 것으로 

시스네로 추기경(Cardenal Cisnero)이 원래의 대제단이

성당 규모에 비해 너무 작다고 판단하여

확장 공사를 명하여 거대한 제단병풍(祭壇屛風)이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대제단 왼쪽편 위치하고 있는

성물실(Sacristia)의 천정화(天井畵)이다

이 천정화는

17세기 나폴리 출신 화가 루카 지오르다노(Luca Giordano)에 의해

그려진 그림으로 내용은

일데폰소 성인(San ildefonso)에게 제의(祭衣)를 내리는 모습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라 한다

 

성물실 정면 제단에 자리잡고 있는

1579년에 그린 것으로 엘 그레코(El Greco)의 초기 작품 중에서

대작으로 꼽히는

"엘 엑스폴리오(El Expolio)"라는 그림이다  

고난 중에도 평온하고 엄숙함을 간직한 붉은 성의를 입은 예수님의 표정과

주변의 사악하게 성난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디에고 데 아스토르가 추기경(Cardenal Diego de Astorga)이

나르시소 토메(Narciso Tome)라는 건축가에 위임하여

1721~1732년 완공한 '트란스파렌테(El Transparente)'라는 작품이다

당시 대제단의 성체현시대(聖體顯示臺) 뒤쪽에 성배(聖杯) 등을

보관하는 작은 예배실이 있는데 좁고 어두워서

넓히고 조명을 주기 위해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의 진면목은

맞은편 돔(Dome)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오목하게 파인 공간에서 받아

주변의 대리석 기둥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조각품들이 움직이듯

   밝혀질 때는 환상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톨레도 대성당(Catedral Toledo) 정면에는 '3개의 출입구'가 있다

가운데의 큰 문은 '용서의 문(Puerta del Perdon)'으로

이 문을 통과하면 면죄(免罪)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오른쪽 문은 '심판의 문(Puerta del Juicio)'으로

최후의 심판을 상징하고자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왼쪽 문은 '지옥의 문(Puerta del Infierno)'라고 하기도 하고 

또는 종려나무의 문(Puerta del Palmas)'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톨레도(Toledo)의 구시가지를 돌아보고 주차장 쪽으로 나오면서

성벽 위에서 신시가지를 바라보니

도시가 평온한 도시로 보인다

 

버스를 타고 이동 중 차창 밖으로

'알폰소 6세 문(Puerta de Alfonso Ⅵ)'이 보인다

한 때는 톨레도(Toledo)의 정문 역할을 했다고 추정하는데

문에 설치되어 있는 방어 구조물이나

마크보라(Macbora:공동묘지)와 가까이 있다는 가설이 근거라고 한다 

 

'비사그라 문(Puerta de Bisagra)'이다

비사그라 문은 톨레도 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가장 통행이 빈번한 곳이라 한다

 북쪽의 광활한 평원지대가 마드리드(Madrid)로 연결되기 때문이라 한다

이슬람 시대에 이 평원지대의 땅이 붉은 색을 띠고 있어

아랍 사람들은 이 평원지대 사그라(Sagra:붉그레한)라고 하였는데

아랍어에서 비롯된 문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비사그라 문은 16세기 카를로스 5세가 톨레도 보수공사를 명하며 미화사업으로

도시 입구에 출입문을 만들기로 결정하여 만들어 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1968년 "이마엘 알 사피르(Imael Al-Zafir:1032~1044)"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람은 아랍 왕조를 열었던 사람으로

만약 비사그라 문이 이 비석과 관련이 있다면

그 기원이 11세기 아랍 시대 중반까지 거스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톨레도(Toledo) 구시가지 3면을 돌아 유유히 흘러 나가는

 타호강(Rio Tajo)이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으로

스페인 동부 알바라신 산맥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치는 동안 1,007㎞를 흘러 흘러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톨레도에서 점심 식사를 위해 들린 라쿠바나(La Cubana) 레스토랑이다

타호강(Rio Tajo)의 알칸타라 다리(Puente Alcantara) 앞에 있는

현지식 식당이다

 

식사를 하고 나와 잠시 산책 겸 

알칸타라 다리(Puente Alcantara)로 간다

구시가지 쪽은 성벽으로 요새화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알칸타라 다리(Puente Alcantara)'는

톨레도(Toledo)에서는 가장 기원이 오래된 다리라고 한다

알칸타라(Al-Qantara)라는 말은 아랍어로 "교량"을 뜻하기 때문에

아랍 정복기 때에 만들어 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지만

로마시대 건축양식에 따른 재료들을 사용하여 건설되었음을 근거로 하여

로마시대 때 만들어진 건축물이라 한다

 

알칸타라 다리(Puente Alcantara)에는 원래 마주 보는

두 개의 탑이 있었는데

1721년 하나는 마차 등이 수월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헐었고

그자리에 아치문을 설치하여 현존되고 있다

 

톨레도(Toledo)에서 다시 마드리드(Madrid)로 향한다

아랍인들이 이 곳의 땅들이 붉그래하다고

사그라(Sagra:붉그레한)라고 하였다는 평원지대이다

 

톨레도(Toledo)에서 다시 마드리드(Madrid)로

1시간 반을 달려 가는 동안

산들은 보이질 않고 약간의 언덕만 있는 평원지대만 보인다

 

'마드리드(Madrid)'에 도착하여

첫 일정으로 프라도 미술관으로 향한다

 

마드리드 시내 남쪽에 위치하는

'아토차 역(Estación de Atocha)'이다

이 역에서는 근교와 안달루시아 등 주로 남부지방 도시를 연결하는

열차 발차역이라 한다

1851년에 문을 연 마드리드 최초의 역이라 하며

규모가 상당히 커서 출발지에 따라 3개의 구역으로 나뉜다고 한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앞에 세워져 있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 동상이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손꼽는 

스페인의 자랑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이다

카를로스 3세(CarlosⅢ)의 지시로

1785년 건축가 후안 비야누에바(Juan de Villanueva)가 시작하여

'자연과학 박물관'으로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나폴레옹과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전후 페르난도 7세(Fernando Ⅶ)의 부인

마리아 이사벨 데 브라간사 여왕(Queen Maria isabel de Braganza)이

스페인 왕가의 그림과 조각상을 소장하는 미술관으로 사용할 것을

요청하여 미술관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1819년 11월 일반인에게 공개될 당시

약 311개의 그림과 약 1510여 개의 다양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미술관 안에서는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현재의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안에는

약 7,600개의 회화작품과

1,000여 개의 조각품

4,800여 개의 판화

8,200여 개의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외의 다양한 예술 장식품들과 역사적인 기록을 남긴 서류들도

전시되고 있다

 

'산 헤로니모 성당(Iglesia de San Jeronimo)'이다

프라도 미술관(Museo del Prado)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성당으로

16세기 르네상스 영향을 받아 고딕 양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1808년 나폴레옹과 전쟁 때 거의 파괴되었으나

이후 프라도 미술관 확장공사 때에 같이 재건되었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보는 것이라 뒷 모습만 찍었다

'시벨레스 광장(Plaza de Cibeles)'

 광장 분수대 중앙에 사자 두 마리가 이끄는 수레 위에

시벨레스(Cibeles) 여신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시벨레스 여신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농경의 신이자

제우스의 어머니라고 하며 

이 시벨레스 여신은 '풍요'의 상징으로서

시선이 '태양의 문 광장'을 향하게 조각하여 놓았다고 한다 

1772년 프란시스코 구티에레스(Francisco Gutierrez)와

로베르토 미첼(Roberto Michel)이 만든 조각상이라고 한다

 

'그란비아 거리(Calle Gran Via)'는

마드리드 구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한 거리로서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축물들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거리이다

특히 이 거리의 전화국 건물은 81m의 높이로

1952년 마드리드 빌딩이 지어지기 까지는

마드리드 시내에서 최고 높은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란비아 거리가 끝나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으로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가장 중요한 광장 중의 하나라고 한다

광장 중앙에

마드리드에서 생을 마감한 세계적인 문호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를

사후 300주년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서 있다

 

탑 중앙에

1616년 사망한 돈키호테 소설의 저자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석상이 보이고

앞에는 소설 속의 돈키호테와 산쵸 판사의 청도상이 보인다

탑 꼭대기로는 흥미로운 조각 작품으로

여러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지구를 이고 독서에 열중하는 모습인데

전 세계 사람들이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애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탑 뒤로 보인는 건물은

1940년대 후반에 오타멘디(Otamendi) 형제에 의해 건축된

'스페인 빌딩'이다

마드리드 빌딩이 세워지까지는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고 한다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석상 앞에 있는

소설 속에 주인공 노새를 탄 돈키호테(Don Quijote)와

산쵸 판사(Sancho Panza) 청동상이다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석상은

1920년대의 조각가 코울라우트 발레라(Coullaut Valera)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한다

 

'마드리드 왕궁(Palacio Real de Madrid)'이다

1931년까지 알폰소 13세(Alfonso XIII)가 머물렀던 왕궁으로

현재는 왕실의 공식 행사 때만 이용한다고 한다

원래는 이슬람시대 아랍 요새가 있었던 자리였으나

스페인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시절부터 왕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카를로스 2세(Carlos Ⅱ) 사후 스페인 왕위를 두고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치열한 왕위 계승전쟁(1700~1714년)을 하여

프랑스의 루이 14세(Louis XIV)의 손자 펠리페 5세(Felipe Ⅴ)가

오스트리아의 카를로스(Carlos) 대공을 물리치고

스페인 내의 프랑스 왕가 시조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어

스페인을 다스리는 마드리드 왕궁의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1734년 성탄절 밤에 마드리드 왕궁은 화재로 소실되자

왕위에 있던 펠리페 5세(Felipe Ⅴ)는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베르사유 궁전(Versailles)에 대한 향수가 있어

1735년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쥬바라(Filippo Juvarra)에게

최고의 왕궁을 건설하도록 명하여

1738년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필리포 쥬바라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고

지오반니 바티스타 사게티(Giovanni Battista Sacchetti)가

1764년 현재의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 2800개의 방으로 완공하였다고 한다

이 왕궁에 처음으로 입궁한 왕은 카를로스 3세(Carlos Ⅲ)라고 한다

 

마드리드 궁전에서 '솔 광장(Puerta del sol)'으로 걸어서 간다

솔 광장은 '태양의 문 광장(Plaza de la Puerta del Sol)'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은 중세 시대에 여기에 있었던

아랍 성벽의 태양의 문(Puerta del Sol)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솔 광장(Puerta del Sol)은

1861년 후안 바우티스타 페이로네트(Juan Bautista Peyronet)가

설계하여 만들었으며

광장 중앙에는 파스쿠알 메나(Pascual Mena)가 만든

카를로스 3세(Carlos Ⅲ)의 동상이 서 있고

한 쪽 구석에는 마드리드를 상징하는 곰이 마드로뇨 나무에 코를 대고 있는

동상이 보인다

 

시계탑이 있는 '솔 광장(Puerta del sol)' 중앙의 바닥에는

스페인 각지로 이어지는 9개의 도로가 시작되는 표시로"0 Km" 라고 적여 있다

 

솔 광장(Puerta del sol)과 마드리드 왕궁(Palacio Real de Madrid) 중간쯤에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이 있다

이 광장은 아라발 광장(Plaza de Arrabal)으로 알려졌던 곳으로

광장 주위로 낡은 집들이 불규칙하게 둘러싸고 있었는데

펠리페 3세(Felipe Ⅲ) 때 의회는

고메스 데 모라(Gomez de Mora)에게 이 광장을 의뢰하여

1620년 이시드로(Isidro:마드리드 수호성인) 성인축제 때 개관되었다고 한다

투우경기나 종교재판이 열리는 마드리드 중앙광장으로 역할을 하다가

1631,1672, 1790년에 3번의 화재로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가 

 

1854년 환 데 비야누에바(Juan de Villanueva)에 의해

9개의 아치문을 갖춘 124m×94m에 이르는 넓은 광장이 되었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는 이탈리아 조각가 환 데 볼로니아(Juan de Bolonia) 작품으로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이라고 이름을 부여한 왕

펠리페 3세(Felipe Ⅲ)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서 나오니 길 건너편으로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Miguel)'이 있다

1835년부터 마드리드 시민들의 식탁을 책임지던 시장이었다고 한다

이 건축물은 당시에 유행했던 철구조물로 지어진 건축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로서

지금도 시장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이 시장안으로 들어가 과일가게에 들렸는데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

눈으로 쳐다보고 가르키면

점원이 들어 계산을 해주는 식이다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Miguel)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한국식당에 저녁을 먹으로 갔는데 벽에 걸려있는

SS501의 멤버 가수 김현중이 싸인 그림이다 

 

어제 저녁 식사 후 마드리드에서

핀토(Pinto)의 홀리데이 호텔(Holiday Inn)로 다시 돌아와 밤을 보내고

아침이 밝아 왔다

오늘의 일정은

콘수에그라(Consuegra)를 거쳐 또 코르도바(Cordoba)를 거쳐

그라나다(Granada)까지 가는 일정으로

매우 빠빡한 일정이 계획된 하루로

 

마드리드서 남쪽으로 약 2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콘수에그라(Consuegra)를 향하여 출발한다

 

라만차(La Mancha) 평원의 

콘수에그라(Consuegra)의 언덕에 있는 풍차마을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소설의 무대가 지역으로

그 풍차 마을을 보기 위하여 그 곳으로 향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씩 검은 황소 간판이 도로변에 보인다

 투우에 나라이다 보니 세워둔 상징물이겠거니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닌 '오스보르네’라는 회사에서 생산하는 와인 '셰리주'를

1956년부터 1988년까지 홍보했던 광고물이라고 한다 

1988년 자연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법적으로 철거처분을 받았음에도

회사는 로고만 지운 채 그냥 서 있게 하였는데

그렇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스페인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버스는 라만차(La Mancha) 평원의

콘수에그라(Consuegra)에 있는 언덕으로 오르고 있

 

'콘수에그라(Consuegra)'는

인구 8,000 여 명 정도 거주하는 작은 소도시라고 한다 

 

언덕 위에서 보는 라만차(La Mancha) 평원은

한쪽은 끝는 평원만 보이고

한쪽은 낮으마한 산들이 보인다

 

이 풍차 마을이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풍자 소설

'돈키호테(Don Quixote)'의 주 배경이었다고 한다

'돈키호테'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고 저돌적이고 맹목적으로 덤비는

약간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는 의미를 생각나게 하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돈키호테(Don Quixote) 소설 내용은

라만차(La Mancha)의 50세 정도의 시골 구석에서 살던

알론소 키하노(Alonso Quijano)는

신부가 준 기사도 이야기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정신이 이상하여 져서

낡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스스로 자신을 '돈키호테'라는 기사로 임명하고

근처에 사는 농부인 '산초 판사(Sancho Panza)'를 부하로 삼아

앙상한 말 '로시난테(Rosinante)를 타고

비리를 처단하기 위해 길을 떠나서 수 많은 모험에 부딪치는 풍자화 소설로

그는 자신의 숙소를 성으로 삼고

풍차를 거인으로, 죄수들을 폭정에 희생자라 생각하면서

자신이 그것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사사건건 수 많은 모험에 도전했다가 패배의 좌절을 겪은 것을

보다 못한 마을의 신부와 이발사가 그를 소달구지에 가두어

마을로 데리고 오는 중에도 마법에 걸렸다고 믿는 전편과

 

후편은 '돈키호테'와 그의 부하 '산쵸판사'에 대하여

공작부부가 우롱하는 것이 주를 이루고 있고

'사자의 모험' 과 '몬테시노스 동굴의 모험' '마법선의 모험' 등이 나오며

마지막으로 '은빛 달의 기사'와 결투에서 패배하며

기사로서 자격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병상에 누운채 꿈에서 깨어나

평범한 시골농부 알론소 키하노로 돌아가 죽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돈키호테는 죽어가며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싸워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웠으며

이룰 수없는 사랑을 하고

잡을 수 없는 저 별을 잡으려 했다"라는 말이

마음 속에 여운으로 남는다 

 

콘수에그라(Consuegra)에서 코르도바(Cordoba)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약 3시간 40분 정도 소요될 예정이다

 

돈키호테(Don Quixote) 소설에서 인물평을 보면

돈키호테(Don Quixote)는

이상주의자이며 환상을 중시하며 공상의 세계에서 사는 인물로

부하인 산초 판사(Sancho Panza)는

현실주의자이며 사실을 중시하며 먹을 것에 관심이 많은

물질적인 세계에 사는 인물로 묘사하였는데  

 

돈키호테 이 작품에 나오는 광기는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가 살던 당시

 16~17세기의 스페인에 대한 흥망성쇠가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세르반테스가 살았던 시대의 스페인에서는

'성직자나 병사가 없는 한 명도 없는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톨릭에 의한 세계 제패 야망을 가지고 신대륙 찾기 경쟁에서

이사벨 여왕 때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을 시작으로 해서

펠리페 2세 때에 이르러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대제국'을 건설하였지만

 1588년 스페인의 최정예 무적 함대인 '아르마다'가 영국 함대에 의해 괴멸되면서

스페인의 국력은 급격히 쇠락하기 시작하였으며

세계 정복이라는 화려한 꿈을 상실하여 

스페인은 세계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시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조국 스페인에 대한 실의 빠져 있던 50대 중반의 세르반테스가

세비야에 있는 왕실 감옥 안에서

스페인과 자신의 운명을 회상하면서 집필을 시작하여 탄생한 것이

'돈키호테' 소설이라고 한다 

 

콘수에그라(Consuegra)에서 출발한지

1시간 반 정도 지나서야

처음으로 산다운 산  바위산이 보인다

 

영국의 대문호 세익스피어(1564~1616.4.23)와

스페인의 소설가 세르반테스(1547~1616.4.23)가 죽은 날이

같은 년월일이라서 이를 기리기 위한

4월23일을 '책의 날'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의 생애'를 살펴보면

1547년 마드리드 근교의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태어나

외과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각지를 전전하며 살아서

정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였지만

1569년 펠리페 2세의 왕비 추모 시집에 3편이 뽑힐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고 한다

1570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군대에 들어가

이듬해 유명한 '레판토 전투'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하였으나

  총에 맞아 왼쪽 팔을 평생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공로가 인정되어 왕의 동생이자 제독이던 '돈 후안'으로부터

훈장을 받고 귀국 중에 터키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알제리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11년만에 풀려나 고국에 돌아왔으나

공적을 무시 당하고 관직도 받지 못하자 소설가가 되었다고 한다 

1584년 18세 연하와 결혼하여 그녀의 결혼지참금으로 조금 생활이 나아졌지만

1585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함으로 펜을 버리고

에스파냐 '무적함대' 식량 징발 담당, 세금 수금원으로 일하면서

안달루시아 들판을  여기저기 돌아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주교의 영토에서 지나치게 징발하여 교회로 파문 당하기도 하였으며

공금을 맡겨두었던 은행가가 도망을 하여 투옥되는 고생을 한다

감옥에서 다시 집필을 시작하여 58세인

1605년 '돈키호테'를 출판과 동시에 대단한 유명세를 얻으며

1616년에 사망할 때까지 12편의 단편 소설집 '모범소설집'

'라만차의 현명한 기사 돈키호테 2부' 등의 소설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주위에 몰려 있는 사람도 안보이고

마을도 안보이는데

시골 길에 엄청 많은 차들이 주차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올리브 나무들의 숲이 끝이 안보이도록 많이 보인다

 

콘수에그라(Consuegra)에서 출발한지

2시간 40분 정도 지나

르라노스 델 소틸로(Llanos del Sotilo) 부근의 휴계소에서

버스는 정차하여 휴식시간을 갖는다

 

이제 코르도바(Cordoba)가 멀지 않았다

'코르도바(Cordoba)'

기원전 로마 식민지 시대부터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지로서 로마시대 때부터 문화가 번성했던 곳으로서  

현재는 안달루시아의 지방 주도로서

약 33만명 정도가 거주하는 도시라고 한다

 

마드리드(Madrid)에서 콘수에그라(Consuegra)까지 약 2시간 반 소요,

콘수에그라(Consuegra)에서 코르도바(Cordoba)까지 약 3시간 40분 소요되어

총 6시간 넘게 달려와 코르도바(Cordoba)에 도착을 한 것이다

 

코르도바(Cordoba)에 도착하자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하여 중국 식당부터 간다

 

코르도바에서 도보관광 시작을 하기 위하여

알모도바르 성문(Puerta de Almodovar) 앞으로 간다

 

알모도바르 성문(Puerta de Almodovar) 성문 입구 옆에는

세네카 동상(Statue of Seneca)이 서 있었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BC4~AD65)

로마 네로 황제(재위:54~68년) 때 황제의 스승이며 집정관으로서

근위대장이던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르스와 함께

로마의 실질적 통치자였다고 한다

네로(Nero:37~68년) 황제 때에  정치적으로 간섭하였던 

네로의 어머니였던 아그리피나(Agrippina)가 피살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62년에 권력을 함께했던 부르스가 죽자

세네카도 권력을 유지할 수가 없어 은퇴를 허락 받아

남은 해 동안 철학책 몇 권을 썼다고 한다

65년에 세네카의 적들은 세네카가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 피살에

가담했다고 고발하여

자살을 명령받고 침착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세네카가 저서는

'신성한 클라우디우스의 바보 만들기''자연의 의문들'

'마르키아에게 보낸 위로문' 도덕에 관한 서한' 등이 있는데

후에 스토아 철학의 절충적 견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알모도바르 성문(Puerta de Almodovar)으로 들어가며

옆을 보니 성벽 앞으로 물 길이 있다

 

알모도바르 성문(Puerta de Almodovar) 안으로 들어서니

하얀집 벽의 골목길인 유대인 마을(La Juderia)이다

유대인 마을이 코르도바(Cordoba)에 형성되게 된 이유는

예전 알 안달루시아 왕국은 자유롭게 개방돤 나라여서

기원 후 73년 팔레스타인의 고향에서 쫒겨나

여러나라를 떠돌던 유대인들이 정착하기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부지런한 노력으로 지식인 계급으로 살고 있을 때

 

가톨릭교가 전파되어

612년 반유대인 칙령이 내려지며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추방 당하기 시작했고

700년 경에는 극심한 박해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이슬람의 코르도바(Cordoba) 왕국이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을 인정하면서 유대인들이 몰려들어

유대인들은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레콩키스타(Reconquista) 후

1492년 유대인들은 코르도바를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중세 유대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코르도바에서 출생하여 이집트에서 사망한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1135~1204년) 동상이다

이슬람의 박해를 피해

코르도바에서 모로코 페스를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또 이집트로 가서

이슬람 술탄 살라딘과 그의 아들 알 아프달의 궁정의로 활동하며

종교, 철학, 의학에 걸쳐 많은 업적을 남긴 분이라고 한다

 

'아랍인의 집'이라며 안으로 들어간다

 

이슬람식 집 기둥과

마당 한가운데는 화초를 키우는 작은 물 웅덩이를 만들어

조경으로 꾸며 놓고 있었다

 

9세기 때에 최초로 백내장 수술을 성공하였다는

널리 안과의사로 명망이 있었던

모하메드 알카페위(Mohamed Al-Gafequi) 흉상이다

 

711 이베리아 반도에 침공한 이슬람교도들은

점령한 토지를 알 안달루스(Al-Andalus:게르만과 반달족이 건너온 땅)라고 불렀으며

 756년 아브드 알라흐만 1세 때

수도를 코르도바로 정한 후 알 안달루스 왕국은 발전을 거듭하여 갔다고 한다 

 

10세기에 코르도바 인구는 약 50만명으로 늘어

이스람 왕국  중심지로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과 더불어

유럽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이슬람 사원이 700여 개, 병원이 50여 개, 대학이 7개,

도서관이 70여 개가 넘는 학문의 도시이기도 했다고 한다 

 

메스키타(Mezquita) 사원으로 가는 길목에

하얀 벽면에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꽃의 거리(Calleja de las Flores)를 지난다

 

꽃의 거리(Calleja de las Flores)를 찍어 놓은 카드 사진이다

꽃으로 집을 꾸며 놓은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

우리도 집을 꾸밀 때 참고로 해보아야 하는 마음에서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골목길을 빠져나오니

메스키타(Mezquita)의 알 미나르(Al-Minar)라고 불리는 

종탑(Torre Campanario)이 보인다

 

메스키타(Mezquita)는

이슬람교와 가톨릭교가 혼재하고 있는 사원이다

 

알 미나르(Al-Minar) 종탑이 있는

오렌지 정원(Patio de Los Naranjos)이다

예전 이슬람교도들이 여기에 있었던 연못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예배당에 들어 갔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메스키타(Mezquita)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자리잡고 있던 우마이야 왕조가

 750년에 아바스 왕조에서 멸망한 후

 에스파냐로 들어가 756년 코르도바에 수도를 정하고

후기 우마이야 왕조를 다시 일으켜 에스파냐에 이슬람 왕조를 열은

아브드 알라흐만 1세(Abd Al-RahmanⅠ)가

바그다드에 있는 이슬람 사원에 뒤지지 않는 규모로 세우기 위하여

785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사진은 이 사원에는 현재 850개 말굽 모양의 아치 기둥이 남아 있고

150여 개의 기둥은 가톨릭 성당을 지으면서 사라졌다고 하는데

원래 말굽 모양의 아치 기둥은 1000여 개가 넘었을거라고 한다

메스키타(Mezquita)가 있는 이 장소는

원래 이슬람이 정복 전에는 서고트인들이 빈센트 성인을 기리기 위한

가톨릭 교회가 있었던 곳으로

처음에는 이슬람교도들이 임시로 사용하다가

이슬람 왕권이 강성해 지면서

새로운 시대의 상징물로서 여기에 있던 가톨릭 교회를 헐어내고  

이슬람 사원인 메스키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확장 공사를  거쳐

987년에 25,000여 명의 신자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완공하였다고 한다

 

메스키타(Mezquita) 이슬람 사원은

스페인에 남은 유일한 이슬람 사원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큰 이슬람 사원들 중 하나라고 하며

서 사라센 문화유산 중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고 한다

 

메스키타(Mezquita)는

1236년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 페르난도 3세(Fernando Ⅲ)에 의해

코르도바가 함락 당하면서

'산타 마리아 마드레 데 디오스(Santa Maria Madre de Dios)'라는

가톨릭 대성당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미르합(Mirhab)에는

생명의 나무를 상징하는 장식이 새겨져 있다

미르합(Mirhab)은 사원에서

마호메트의 존재를 성스럽게 상징하는 여백의 공간이라고 한다 

 

가톨릭 대성당으로 바뀌면서

처음에는 제대와 성가대석이

한쪽에 '비야 비시오사 채플'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 사원이었던 메스키타의 중앙부를 개조하여

현재의 가톨릭 성당이 자리잡게 된 것은

알론소 만리케(Alonso Manrique:1476~1538년) 대주교가 부임하면서

대성당 건축가 에르난 루이스(Hernan Ruiz)에게

가톨릭 성당 건물이

메스키타(Mezquita)의 중앙에 있던 기도실 부위에 위치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 달라고 작업을 맡기면서 였다고 한다

 

위의 기둥에 표식은 재건할 때 기둥이 위치할 자리를 표시하여 놓은 것이라 한다

이 검토 작업은 압데라만 2세(Abderahm Ⅱ:822~852)와

10세기 말 알만소르(Almanzor)에 의해 만들어진

메스키타(Mezquita)에서 가장 위대한 부분을 해체시키고

거대한 르네상스 성당을 만들어 덮는 일이었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가톨릭 성당의 '대 제대'이다

알론소 만리케 대주교는 메스키타의 대성당 사제단의 동의없이

작업을 진행시켰으나

대성당 사제단은 누구도 결정에 반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코르도바 사제회에서 황제의 허가 없이는

아무도 메스키타를 파괴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며 대성당 사제회에 통보했으나

공사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로인해 코르도바 대법관이

"이 사원은 너무나도 가치있는 유적으로 다시는 재현할 수 없으므로 공사를 중단하라

그리고 이 사원을 파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부를 몰수한다"라는

 판결을 하게 됨으로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알론소 만리케 대주교는 대 법관을 파문하도록 만들었고

황제는 대주교의 의견에 동의하여 주게 됨으로서 공사는 다시 재개되었다고 한다

이 후 세비야에서 포르투갈의 공주 이사벨과 결혼식을 마치고

코르도바를 방문한 카를로스 5세(Carlos Ⅴ) 황제는 메스키타를 보고

알론소 만리케 대주교에게 "이렇게 위대한 것인 줄 알았더라면

당신들이 파괴하도록 허락하지 않았을거요

왜냐하면 어디에도 없는 것을 부수고, 어디에나 있는 것을 지었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메스키타 가톨릭 성당의 성가대석이다

성가대석 의자 위의 천정은 원통형으로 르네상스 적인 특징이라 하며

의자는 마호가니(Mahogany)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며

페드로 두케 코르네호(Pedro Duque Cornejo)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라고 한다

 

이슬람 사원 안에 가톨릭 성당이 존재하고 있는

이슬람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혼재하고 있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한  건축물인 메스키타(Mezquita)를 보고

사원 밖으로 나와 골목길에 휴식을 취한다 

 

메스키타(Mezquita)의 담장이 성벽처럼 보이는 골목길에서

과달키비르 강(Rio Guadalquivir) 방향으로 걸어 간다 

 

과달키비르 강(Rio Guadalquivir) 가로 나오는 길목에

성 라파엘 탑(Triunfo de San Rafael)이 있다

성 라파엘(San Rafael)은 코르도바 수호 천사로서

성 라파엘 탑(Triunfo de San Rafael)은

1781년 세워진 것으로

메스키타 사원 안에 가톨릭 성당이 건립된 기념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로마인 다리(Puente Romano)와 연결되어 있던

다리의 문(Puerta de Puente) 이다

 

과달키비르 강(Rio Guadalquivir)의 '로마인 다리(Puente Romano)'이다

로마시대 때 만들어진 다리로

길이는 223m이며 16개 아치 교각으로 만들어진 다리다

남쪽 다리 건너 편에 칼라오라 탑(Torre de la Calahorra)이 보인다

이슬람 왕조 때 로마교를 지키기 위해 세운 망루겸 검문소로서

현재는 안다루시아 박물관으로 전망대로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로 인한 격변 속에

11세기초 코르도바의 내전이 발생하여 이슬람의 칼리프 통치구역이 되자

이슬람 교도의 군소 왕국들은 코르도바를 두고 힘을 겨루었지만

1236년 카스티아의 왕 페르난도 3세에게 정복되어

코르도바(Cordoba)는 가톨릭 국가의 스페인에 합병되면서부터

현재까지 이슬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고 한다

 

코르도바(Cordoba)에서 그라나다(Granada)를 향해 출발한지

약 40분 정도 지났을까?  산등성이에 마을이 보인다

에스페호(Espejo)라는 마을이다

코르도바에서 그라나다까지는 약 3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이다 

 

가는 길에 보니 가도 가도 온통 올리브 나무만 보인다

터키 여행하면서도 엄청난 올리브 나무 밭을 보았는데

그러나 스페인이 올리브 생산 세계 1위 국가라고 한다

 

그라나다로 가면서 낮은 구릉성 산들만 보다가

루쿠에(Luque) 부근을 지나면서 모처럼 바위산이 보인다

 

앞에 앞에 붉은색 차가 저속 주행을 하며

계속 차들을 뒤로 달고 가는데

뒤 따라 가는 차들이 맞은 편에 오는 차가 없어도

추월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30분을 넘게 서서히 뒤따르고만 있다

붉은 색 뒤에 따르는 차는 브레이크 등이 켜졌다 커졌다 하면서도

뒤 따르고만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저렇게 얼쩡대면 바로 추월하여 갔을텐데

스페인의 국민들의 여유는 대단하다는 느낌이다   

 

올리브 나무 밭이다

몇 시간을 달려도 올리브 나무 밭이다

 

저 산이 보이면 그라나다(Granada)에 거의 도착한 것이라고 하며

저 산을 지나면 그라나다가 보인다고 한다

 

그라나다(Granada) 외곽에서 보는

시내 방면이다

 

코르도바(Cordoba)에서 약 3시간만에 그라나다(Granada)에 도착하자

외곽에 위치한

오늘 밤의 숙소인 톨레온 호텔(Torreon Hotel)로 간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 주변에 있는 수퍼마켓에서 간단하게 회식할 먹거리를 구하여

호텔 주차장에서 웃음꽃 만발하게 즐기는 시간을 갖는다

여행 회식 중 이 날 비로소 고급 와인이 어떤 맛인지 아는 것들 같았다

첫날에 비싼 와인을 맛보게 하였더니

텃텁하다고 맛이 없다고 하여

그 다음 날에는 단맛나는 일명 포도주 같은 싼 와인을 사다 주었더니

단맛은 있는데 뭔가 부족한 것 같다고 하여

이번에는 비싼 것과 싼 것을 사다 맛보게 하였더니

모두들 비싼 쪽을 선택하며 와인 맛을 구별해 내고 있었다 

 

그라나다(Granada)에서 날이 밝아 왔다

창문 밖으로 그라나다 외곽의 시내가 보인다

'그라나다(Granada)'는

'석류'라는 의미에서 도시명이 유래하였으며

약 235,000여 명이 거주하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로서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산맥 북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헤닐 강(Rio Genil)이 흐르는 해발 689m에 있는 도시이다

 

그라나다(Granada)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알함브라 궁전(Palacio de Alhambra)으로 아침 일찍부터 간다

너무 유명하여

늦으면 인원수 제한으로 입장하기 곤란하며 관광객들로 붐비어

차분하게 관광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도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 매표소를 통과하여

먼저 아세키아 중정(Patio de la Acequia)으로 향하는데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가로수로 늘어서 있다

 

걷는 중 좌측으로 알함브라 궁전의 많은 성탑들이 보이는데

성탑들마다 이름이 있는데

라 카렐라의 탑, 소녀의 탑, 붙잡힌 공주들의문, 재판관의 탑 등으로

이름이 각각 있다고 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의 정원이다

헤네랄리페는 나스르 왕조(Nasrid Dynasty:1238~1492년) 시대의 여름별장으로

무하마드 3세(Muhammad Ⅲ:1302~1309년) 시대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의 정원에서 내려다 보는

알함브라 궁전이다

 

매표소에서 나스르 왕조의 여름별장인 헤네랄리페(Generalife)까지는

10여 분을 걸어 가야되는 길로서

정원을 걷다보면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자연히 쉬었다가게 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의 '아세키아 중정(Patio de la Acequia)'이다

전체 길이 약 50m 수로에 좌우에 많은 분수를 설치하였으며

분수의 쏟아지는 물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눈을 녹인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에서 바라보는

알함브라 궁전(Palacio de Alhambra)의 일부분인

나스르 궁전(Palacio de Nazarines)과 알카사바(Alcazaba)이다

 

헤네랄리페(Generalife)에서 바라보는

알바이신(Albaicin) 지구이다

 

헤네랄리페(Generalife)의 '술탄의 중정(Patio de la Sultana)'에는

쓰러져 가는 고목이 줄로 묶어져 있었다

멋도 없는데 그냥 치우지~~

 

알함브라(Alhambra)는

그라나다(Granada)에 있는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를 지칭한다

이슬람의 나스르 왕조(Nasrid Dynasty:1237~1492년)의

초대왕 무함마드 1세(Muhammad Ⅰ)인 알 갈리브(Al Ghaliv)가

1238년에 그라나다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 740m 언덕 위에 알함브라 궁전 건설을 추진한 후

  역대 왕들이 증축과 보수를 거쳐

1358년 7대 왕이었던 유수프 1세(Yusuf Ⅰ) 때에

코마레스 궁(Palacio de Comares)을 지으면서 완공하였다고 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를 한바퀴 돌아

 알함브라 성곽 안에 있는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 Ⅴ)을 향하여 간다

 

알함브라 성곽 안으로 들어와 걷는데

정원수를 이쁘게 다듬어 놓았다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 Ⅴ)이 보이기 시작한다

헤네랄리페(Generalife)에서 걸어온지

약 15분 정도 소요되었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Ⅴ)

옆에서 보는

산타 마리아 성당(Santa Maria de la Alhambra)이다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Ⅴ)은

1526년 카를로스 5세가 스페인 제국의 상징이 될 건축물을 건설하기로 결심하여

당시의 최신식 기법인 르네상스 양식을 채택하여

야심차게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자금난으로 공사가 중단되어 18세기가 되어서야 지붕을 얹었다고 한다

화려한 이슬람 양식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카를로스 5세 궁전과 16세기 가톨릭의 산타 마리아 성당이

부조화를 이루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알카사바(Alcazaba)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알카사바(Alcazaba)'는

9세기에 지은 로마 시대 성채를 나스르 왕조를 연

그라나다 왕국의 무하마드 1세(MuhammadⅠ:1237~1273년)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하였다고 하며

알함브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알카사바(Alcazaba)는

알함브라의 제일 전망대로서

이슬람 시대에 가톨릭 군의 공격을 막기 위한 군사 요새로

24개의 탑과 군인들의 숙소, 창고 터널 목욕탕까지 갖춘 견고한 성채라고 한다

 

 알카사바(Alcazaba)의 성채 벽 아치 홈에는

당시에 무기로 사용했었을것 같은 

동글동글한 폭탄 모양의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알카사바(Alcazaba)의 벨라탑(Torre de Vela)에서 내려다 보는

그라나다(Granada) 시내에 있는

'그라나다 대성당(Catedral de Granada)'이다

그라나다에서 최대의 가톨릭 건축물로

원래 이슬람 사원인 메스키타(Mezquita)가 있던 자리에 지은 성당으로

1523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고딕 양식으로 짓다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공하였으며

이사벨 여왕(IsabelⅠ)은 이슬람 양식을 좋아하여

내부에 이슬람 양식인 무데하르 양식도 적용하였다고 한다 

 

알바이신(Albaicin) 지구이다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왕조가 축출된 후 이슬람교도들의 거주지로서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건축물과

무어인 특유의 건축물이 잘 섞여 있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흰 벽의 집들과 조밀한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고 하며

1984년 알람브라, 헤네랄리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고 한다

 

알카사바(Alcazaba)의 벨라탑(Torre de Vela)이다

이슬람 시대로부터 레콩키스타(Reconquista:국토회복운동) 이 후에

탑 위에는 종을 설치하였는데

그라나다(Granada)의 수해와 화재를  알리고

중요한 종교의식 등을 행할 때에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알카사바에서 나와 나스르 궁전으로 이동한다

 

'나스르 궁전(Palacios de Nazaries)'은

알함브라(Alhambra)의 꽃이라 하며

이슬람 건축물의 결정체라 할 만큼 아름다운 건물로

알함브라 궁전의 하일라이트라고 한다

수차례 증 개축을 반복하여 100년에 걸쳐 완공한 복합형 궁전이라고 한다

먼저 나사르 궁전의 메수아르의 방(Sala del Mexuar)으로 간다

 

나스르 궁전의 왕의 집무실로 사용하던

메수아르의 방(Sala del Mexuar) 벽면의 아라베스크(Arabesque) 문양이다

문양에서 금색은 황금을, 쳥색은 물(오아시스)을, 녹색은 풍요를

백색은 순결을, 흑색은 밤을 의미한다고 한다

 

메수아르의 방을 지나면 분수가 한가운데 있는

'황금의 방 정원(Patio de Cuarto Dorado)'이 나오는데

황금의 방에서는 재판을 하던 방으로 여기를 통과하여 들어 갔다고 하며

옆에는 법무관의 방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를 지나 문으로 들어가면 

나스르 궁전의 코마레스 궁(Palacio de Comares)으로 이어진다

 

코마레스 궁(Palacio de Comares)의

'아라야네스의 중정(Patio de Arrayanes)'으로 나온다 

이 곳에는 5개의 저택과 몇 개의 관리실들이 있었는데

왕후들의 거처와 후궁들의 거처가 있었다고 한다 

 

코마레스 궁의 '아라야네스의 중정(Patio de Arrayanes)'의 모습이다

커다란 직사각형 연못이 있고 양 옆에는 아라야네스를 심어 놓았다

앞에는1, 2층으로 각각 7개의 아치를 지탱하고 있는 가느다란 각주가 보인다

저 아치 뒤로는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o de CarlosⅤ)이

건설되며 변형이 되었다고 한다

 

아라베스크 문양의 사진은 

나스르 궁전(Palacio de Nazaries)의 외국 사절을 맞이하던

공식 행사장인 '대사들의 방(Salon de Embajadores)'의 천정이다

이 방은 왕궁에서 가장 넓은 방으로

한 변이 11m인 정사각형의 방이라고 한다

 

'대사들의 방(Salon de Embajadores)'의 방은

말굽 모양의 아치 문양과 연속적인 반원 무늬

코란 글자 하나하나를 예술 작품처럼 새겨 놓아

나스르 궁전(Palacio de Nazaries)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곳이라고 한다

 

대사들의 방(Salon de Embajadores)을 지나

왕궁 관람에서 백미로 꼽히는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로 나간다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는

왕의 정치 집무실이자 사적인 주거 공간으로

여기는 왕 이외의 어떤 남자들도 출입이 금지되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중정은 124개의 가느다란 대리석 기둥으로 에워 싸고 있으며

아치로 연결하고 있는 기둥 위의 문양은 정교하고 섬세함이 묻어나며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 가운데 있는 분수는 

12마리 사자가 받치고 있고

사자의 입에서도 물이 뿜어져 나오는데

이것은 이슬람교에서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만큼 아랍 왕들이 신과 함께한다는 신성한 공간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에서 옆으로 이어지는

아벤세라헤스의 방(Sala de Abencerrajes)과

두 자매의 방(Sala de dos Hermanas)의

각각 둥근 천장에는

무수한 종유석 모양이 있는 '모카라베(Mocarabe) 기법으로 장식하였다 

 

사자의 중정(Patio de los Leones)과 이어지는 곳에는

역대 왕들의 침실로 사용되었던 왕의 방(Sala de los Reyes)이 있는데

천장에는 10명의 왕을 묘사하는 장식이 되어 있다

 

왕의 방(Sala de los Reyes)에서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라나다에서

화려했던 이슬람 왕조가 축출된 후 가톨릭교도에 밀리어

이슬람교도들이 몰려사는 거주지가 되었다는 

알바이신(Albaicin) 지구를 바라보며

나스르 궁전(Palacio de Nazaries) 밖으로 나온다

 

이슬람의 그라나다 왕국은

지금의 말라가, 알메리아를 영역으로

나스르 왕조(Nasrid Dynasty:1237~1492년)의 초대 왕 

무하마드 1세(MuhammadⅠ)가 왕국을 세우고

1246년 가톨릭의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 페르난도 3세(FernandoⅢ)에게

봉신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대가로 승인을 받아 다스렸지만

이 맹세는 자주 깨져 카스티야와 전쟁을 자주하였으며

땅을 소유한 강력한 귀족 계급은 왕의 통제를 잘 따르지 않아

그라나다 왕국의 내정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한다

1469년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 1세(IsabelⅠ)와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FernandoⅡ)가 결혼하면서 두 왕국이 합치면서

이베리아 반도에 이슬람이 침공해 들어온지 800년의

이슬람 제국의 마지막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을 공격함으로서

1492년 새해 첫날 밤 무하마드 11세(Muhammad Ⅺ) 보압딜(Boabdil)이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궁전을 받치고 항복하였는데

보압딜은 이 알함브라 궁전을 떠나가며

"영토를 빼앗기는 것보다 이 궁전을 떠나는 것이 슬프구나"하고

눈물흘리며 모로코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 관광을 마치고 출구로 한참을 걸어 나오는데

무궤도 열차가 관광객들을 태우고 있다

 나스르 궁전(Palacio de Nazaries)에서 출구까지 걸어서 약 10분 정도 소요 된다

 

이슬람 왕조가 멸망하고

이 곳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여 주겠다는 페르난도 5세(FernandoⅤ)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 병사들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잔혹하게 살육하였다고 한다

이 교도를 소탕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땅을 세운다는

종교적 명분을 내세워 피의 살육을 저질렀는데

그렇다고 무슬림들이 순순히 무릎을 꿇지 않고 이 교도의 지배를 받느니

처참한 역사를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피를 곳곳에 뿌리고  하얀 벽면을 붉게 피로 물들이고

죽음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하늘이 맑다

알함브라(Alhambra)에서 그라나다(Granada) 시내를 통과하여

20여분 거리에 있는

산타페(Santa Fe)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산타페(Santa Fe)에 도착하여

그라나다 문(Puerta de Granada)이 보이는

은둔자의 길(Calle Ermita)에서 버스에서 내린다

 

그라나다 문(Puerta de Granada)을 통과하면

산타페의 왕의 길(Calle Real de Santa Fe)을 걷게 된다

이 거리가 산타페의 구시가지라고 한다

 

산타페의 스페인 광장(Plaza Espana)의

'성모 마리아 성당(Parroquia de la Encarncion de Santa Fe)'이다

이 성당은

1492년 4월 콤럼버스와 이사벨 여왕이 인도 탐험 지원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였던 역사를 간직한 교회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 성당을 지나 100m 정도 걷다가

우측 골목길로 들어가면

엘 페스카이토(El Pescaito)레스토랑이 있다

 

스페인식 점심 식단으로 빵하고 같이 먹으면 된다

 

산타페(Santa Fe)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미하스(Mijas)로 향한다

 

미하스(Mijas)는 말라가(Malaga)에서 약 50분 정도 거리의 산에 있는 도시로

오늘 내내 맑은 날씨였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산을  넘으니 언제 비가 왔느냐는 식으로

맑은 하늘이 펼쳐진다

 

산타페(Santa Fe)에서 미하스(Mijas)까지는

버스로 약 2시간 정도 소요

 

알모기아(Almogia) 부근에서 미하스(Mijas)까지는 한참 남았다

지중해 쪽으로 산 길 고속도로를 내려 갔다가

라모레라(La Morera)까지 가서 산 길로 오르면 미하스(Mijas)이다  

 

미하스 시청이 있는 곳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하얀 벽에 오색 글씨로 미하스(Mijas)라고 쓰여져 있다

여기가 포도 존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인증샷들을 하고 간다

 

시청 앞에서 비르겐 데 라 페나 공장(Plaza Virgen de la Pena)을 지나

바위 성모 은둔지 성당(Ermita de la Virgen de la Pena)으로 가며 보는

푸엔히롤라(Fuengirola) 쪽의 지중해 바다이다 

 

미하스(Mijas)의 수호 성녀 페나(Pena)가 모셔져 있는

앙증맞게 작은 성당으로 바위를 뚫어서 만들었다는 

'바위 성모 은둔지 성당(Ermita de la Virgen de la Pena)'이다

이 성당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 성당이 자리한 성벽에 수백년 넘게 성모 마리아 상이 숨겨져 있다가

16세기에 발견되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비둘기 한 마리가 종탑에 앉아 있다가

성모 마리아로 변신한 것을 어느 산책하던 이가 보고

성당을 건설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바위 성모 은둔지 성당을 둘러보고

마을을 구경하기 위하여 골목길을 오르니

골목길의 모든 건물들의 벽이 온통 하얀색으로 칠하여져 있다

 

미하스의 작은 투우 경기장 옆에 있는 광장으로

이 곳에는 레스토랑과 카페, 바(Bar) 등이 몰려 있는 작은 광장이다 

 

미하스의 골목길인 말라가 거리(Calle Malaga)의

작은 기념품 샵이다 

 

미하스의 말라가 거리(Calle Malaga)에 있는

아담한 성 세바스찬 성당(Ermita San Sebastian)이다

 

성 세바스찬(San Sebastian)은

세바스띠아노, 세바스티아노,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데

본명은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로

로마시대 때에 프랑스 남부지방인 나르본(Narbonne)에서 태어났다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는

기독교 박해가 극에 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284~311년) 황제의

재위(284~305년) 시대 근위병으로 들어가

몰래 구속된 그리스도인들을 돕다가 발각되어

기둥에 묶여 여러발의 화살을 맞아 사형 당하였으나

시신을 수습하려고 찾아간 성 카스툴루스의 미망인 이레네(Irene)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고 데려다 극진히 간호하여 살렸지만

다시 황제에게 가서 황제의 잔악상을 고발하자

황제는 화가나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도록 하여 순교하였다고 한다

 

성 세바스찬(San Sebastian)은

군인, 운동선수, 궁술가의 수호성인이자

전염병의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680년경 로마에 페스트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때

로마시민들이 그의 유해를 모시고 장엄한 행렬을 하자

페스트가 멈추었다고 하며

1599년 리스본에 전염병이 돌았을때도 성세바스찬의 보호를 기원하는

예식을 행하므로서 멈추게 됨으로서

더욱 전염병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미하스의 말라가 거리(calle Malaga)를 걷다보면

온통 하얀 건물만 보이다 보니

마음이 하얀 마음으로 들떠지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골목길을 걷다가

미하스 건강 센터(Consultorio Mijas Pueblo) 옆으로 나있는

계단을 내려오면

 

미하스의 시청사(Mijas Town Hall)가 있는 길거리로 나온다

시청사 옆에는 당나귀 택시 정류장이 있어

여기에서 당나귀가 끄는 마차를 타고 미하스(Mijas) 시내를 둘러볼 수도 있다

 

미하스 시청사와 길 건너 마주하고 있는 상가 건물이다

미하스 시내 일부를 돌고 내려와

바위 성모 마리아 광장(Plaza Virgen de la Pena)의 벤치에서

말라가(Malaga)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휴식을 취한다 

 

말라가(Malaga)로 이동하면서 바라 보는

산 위의 하얀 마을 미하스(Mijas)이다

 

미하스(Mijas)에서 약 40분을 달려 말라가(Malaga)에 도착하여

지중해변에 위치한 오늘의 숙소인

라스 팔메라스(Las Palmeras)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호텔 밖으로 나온다 

 

말라가(Malaga)는

인구가 약 57만여 명이 거주하는 도시로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세비아(Sevilla)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년)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한다

또한 스페인에서 바르셀로나에 이어 두번째로 큰 항구 도시라고 한다

 

기원전인 BC 12세기에 페니키아인이 세운 이 곳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기원전 로마와 서고트족에게 정복 당하기도 하였으며

711년 이슬람의 무어인들에 정복 당하여

안달루시아 지방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코르도바에 있던 칼리프(Caliph)의 통치권이 붕괴되면서

말라가 왕국이 세워지면서

 이 곳을 '지상낙원'이라 이름 붙인 아미르(Amir)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스페인의 그리스도인들이 레콩키스타(Reconquista:국토 회복 운동)으로

수차례 이 곳을 공격하였으나 실패를 하다가

1487년 8월에 이슬람을 몰아내고 정복하면서 스페인의 국토로 회복하게 되었다

이후 1810~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점령 당하기도 하였다 

 

코스타델솔(Costa del Sol:태양의 해안)의 일부인 말라가(Malaga)는

기후가 따뜻하고 화창하여  

관광객들이 몰리는 휴양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도시라고 한다

 

말라가 해변에서 놀다가

어두워지자 호텔 옆에 위치한 길거리 노천 카페에서

담소로 지중해안의 분위기를 느껴본다 

 

말라가(Malaga)의 라스 팔메라스(Las Palmeras) 호텔에서

아침에 보는 지중해안의 항구 풍경이다

 

오늘의 일정은 타리파(Tarifa)로 이동하여

스페인(Spain)에서 모로코(Morocco)로 건너가는 일정으로

타리파 항구를 향하여 출발을 한다

 

타리파(Tarifa)로 이동하면서

코스타델솔(Costa del Sol:태양의 해안)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추천하는 해안 도시

푸에르토 바누스(Puerto Banus)를 보고 가자고 하여

먼저 보트항으로 갔는데 엄청 비싸게 보이는 많은 큰 보트들이 정박해 있었다

여기에 있는 보트의 선주들은 스페인 사람들 보다는

 북유럽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사람들인 대부호들이 선주라고 한다

 

코스타델솔(Costa del Sol:태양의 해안)은

스페인(Spain)의 남부인 지중해와 접하고 있는 해안지대로서

말라가(Malaga)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모트릴(Motrill)에서

서쪽에 있는 타리파(Tarifa)까지 300Km 구간을 말한다  

 

푸에르토 바누스(Puerto Banus)의

비치 광장(Plaza Beach)이 있는 해변이다

 

푸에르토 바누스(Puerto Banus)는

자선 사업가 호세바누스(Puerto Jose Banus)의 투자로

설계 개발된 계획 도시로

1970년 5월 준공식 당시 플레이보이 창시자 휴 헤프너,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 등 많은 인사가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후 푸에르토 바누스(Puerto Banus)는

세계에서 매년 500만 명이 넘는 휴양객들이 찾아오는

세계적인 휴양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푸에르토 바누스(Puerto Banus)의 해안을 둘러보고

바닷가 쪽으로 베나보라 앙상블(Conjunto Benabola)이라는 도로 끝단에 있는

라 보카나 레스토랑(Restaurante La Bocana)의 길거리 식탁에 앉아 

커피 한잔을 시켜 먹고

 

타리파(Tarifa)를 향해 출발한다

 

스페인을 여행하며 느끼는 것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고

주민들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있음이 느껴졌었다 

 

우리 남북 합친 한반도의 국토보다 2.5배 정도 큰 땅에

우리 남한 인구보다 적게 살기 때문인지

우리나라처럼 큰 도시가 도시로 연결되는 도시가 없는 것 같아

한적함과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스페인의 북부 지방은 평원지대라 하면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지방은 산악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산 능선으로 풍력 발전기들이 늘어서 있다

 

지브롤터 해협이 보이면서

타리파(Tarifa) 항구가 멀리 보이기 시작하며

타리파를 향하여 산을 내려 간다

 

타리파(Tarifa) 항은 유럽 대륙의 최남단이며

지중해와 대서양 바다가 경계를 이루는 지브롤터 해협에 위치하고 있다 

 

푸에르토 바누스(Puerto Banus)에서 출발한지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어 타리파(Tarifa)에 도착한다

 

타리파(Tarifa) 항 부근에 근접하자

구스만 성(Castillo de Guzman)과 그 앞에 산초 4세(SanchoⅣ) 동상이 보인다

산초 4세(SanchoⅣ:1257~1295년)는

카스티야-레온의 왕 알폰소 10세(AlfonsoⅩ)의

둘째 아들로서 용감하면서도 야심이 많고 무자비 하였지만

유능한 정치가이면서도 교양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알폰소 10세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이슬람 세력 모로코와 그라나다가 카스티야에 쳐들어왔을 때에

 그의 형 장남이었던 페르난도가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었던 산초는 침략자들을 물리치는데 크게 공헌을 하여

프랑스 왕의 조카들이기도 한 그의 형 페르난도의 아들들을 무시하고

 알폰소 10세의 상속자를 자처하자

1278년 알폰소 10세는 산초의 주장을 승인하였지만

1281년에는 프랑스의 압력을 받아 애매한 태도를 취하였다고 한다

 이에 산초는 알폰소 10세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업고

스스로를 섭정으로 선포하였으며

 산초를 지지하는 도시와 귀족들이 알폰소10세에게 맞서 봉기하게 하여

알폰소10세는 세비아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 후 알폰소 10세가 죽자 산초는 세비야를 차지했으며

산초 4세(SanchoⅣ:재위1284~1295년)로 즉위하였다고 하며

1290년 모로코 페스의 왕이 안달루시아를 침입하자 크게 물리쳤다고 한다

 

타리파 항구에 도착한다

타리파 항은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는

제일 짧은 관문으로

아프리카 대륙으로 건너가는 관광객들이 몰리는 항구라고 한다

그러나 생각보다 아담한 규모의 항구였으며

관광객들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는 한산한 항구였다

 

타리파(Tarifa)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18,000명 정도라고 한다

타리파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까이 있어

이슬람의 지배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받은 곳이라 한다

구스만 성(Castillo de Guzman)도 이슬람 시대 때인

960년에 지어진 성이라 하며

타리파의 건축물들도 아프리카 모로코에 있는듯한

양식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모로코로 가는 배에 오르기 전에 인증샷이다

 

타리파(Tarifa)항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있는 나라

모로코(Morocco) 탕헤르(Tanger)까지 왕복하는 탑승권을 구입하여

짐 검사를 마친 후 세관을 통과하여 

 

모로코 탕헤르(Tanger)로 출항하는 배로 향한다

그런데 배에 올라 잠시 대기하니 탑승객들이 의외로 많이 탑승한다 

 

배 안에서 한줄로 서서 모로코 입국수속을 받으니

줄을 늦게 서면

모로코 탕헤르 항에 도착할 때까지 1시간 정도 줄을 서서 대기하며

입국심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배에 탑승과 동시에 줄을 서 대기하다가 

다른 사람들 보다 일찍  모로코 입국 심사를 마친 후 갑판으로 나간다

 

스페인 타리파에서 모로코 탕헤르까지 거리는

약 15Km로 아프리카 대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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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의 국가 모로코(Morocco)에서

2박 3일을 보낸 후

다시 모로코 탕헤르(Tanger)에서 스페인 타리파(Tarifa)로 건너 간다

 

우리가 건너고 있는 지브롤터(Gibraltar) 해협은

거리가 15Km 구간으로 짧지만

대서양과 지중해 연결하는 관문 구간으로서

지중해 안에 많은 모든 국가들의 배가 대서양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여기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야 하는 중요한 해협이다

 

우리가 타고 가는 배를 앞지르고 있는 쾌속선이 지나가는데 

고기잡이 어선이 작아 보인다 

 

배 안에서 잠시 잡담을 하는 사이에

벌써 배는 타리파 항(Puerto de Tarifa)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타리파(Taririfa)에 도착하여 버스에 올라 론다(Ronda)로 출발하는데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타리파(Tarifa)의 도시가

아직도 아프리카 모로코를 여행하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론다(Ronda)로 가는 길은

지난 29일 말라가(Malaga)에서 타리파(Tarifa)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다가 타라힐라(Taraguilla) 부근에서 북쪽의론다산맥을 넘어

산맥 뒤쪽에 위치한 론다(Ronda)로 가야 한다 

 

알헤시라스(Algeciras)를 지나는데

멀리 지브롤터(Gibraltar) 정상부가 구름에 가리워서 보인다

'지브롤터(Gibraltar)'는 영국령으로서 

최정상 록건(Rock Gun)의 높이는 해발 426m이며

거주하는 인구는 32,000여 명이라고 한다

1704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에

영국-네덜란드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조지 루크 경이 지브롤터를 점령하여

1713년 스페인은 위트레흐트(Utrecht) 조약에 의해

지브롤터를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하였다고 한다 

 

말라가(Malaga) 쪽으로 달리다가

타라힐라(Taraguilla) 부근에서 북쪽의 론다산맥 방향으로 돌려 달려간다

 

론다 산맥으로 들어 가던 중에 로스 엔젤레스(Los Angeles) 지명의

시골 마을이 나온다 

스페인 명으로는 로스 안게레스(Los Angeles)로

타라힐라(Taraguilla) 부근에서 론다 방향으로 틀어 달리면서

한참만에 나오는 첫 마을이다 

 

로스 안헤레스(Los Angeles)를 지나자마자 산 언덕으로 하얀 마을이 보인다

히메나(Jimena)라는 마을이다

 

론다 산맥을 꼬불꼬불 올라서 높은 지형의 산길을 달리는데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경치의 아름다움으로 매혹시키는 길이다

 

달리가던 중에 교행하기 힘든

가우신(Gaucin)의 좁은 길에서 급히 버스는 정차한다

뒷일이 급하시다는 여성분이 있어서...

 

버스는 다시 출발하여 뒤를 돌아보니

잠시 정차하였던 가우신(Gaucin) 마을이 보인다

아름답게는 보이나

산등선 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주변에 농토와 산업단지도 안보이는데 무엇으로 생활을 할까?라는

의구심을 가지며

멋스러운 관경을 보며 간다 

 

심한 경사지에 있는 알가토신(Algatocin)이라는

하얀 마을이 보인다

 

론다 산맥을 지나며 자연속에 형성된

안달루시아의 전통적인 하얀 마을들을 보며

그 매력에 빠져드는 것을 느껴졌다  

 

베나다리드(Benadalid) 마을이다

마을 위쪽으로 우리가 지나가야 할 길이 보인다

 

론다 산맥의 미로 같은 길을 꼬불꼬불 지나며

숨겨져 있던 하얀 마을들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먼 산을 바라보니 산 속 깊이 들어와 달리고 있었다

 

민둥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민둥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돌아서 내려가면은 

론다(Ronda)가 나온다고 한다

 

론다산맥을 넘어오니

완만한 구릉지대가 펼쳐진다

 

론다(Ronda)는

헤밍웨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라

많은 기대감을 품고서 론다로 가고 있었다

 

타리파(Tarifa)를 출발한지 2시간 40분 정도 소요되어 

론다(Ronda)에 도착하여

원형 분수가 있는 론다 버스터미널 광장 앞에서 하차한 후

먼저 론다 전망대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론다(Ronda)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말라가 주에 속하여

말라가(Malaga)에서 113Km 떨어져 있는 도시로

인구는 약 34,000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도시라고 한다

 

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 건물의 뒷편에서 보는

전망대(Mirador de Ronda)의 모습이다

지대가 높아 어느 곳이나 전망대지만

저 곳은 정자를 지어 놓아 사람들이 전망대로 모이는 곳이다

 

론다(Ronda)는

타호 협곡(El Tajo Canyon) 절벽 100m 위인

해발 780m 높이에 있는 도시이다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를  밑에서 보기 위하여

 누에보 다리를 건너 구시가로 들어가

사진의 보이는 절벽 옆 소로(小路) 길로 내려갈 예정이다

 

타호 협곡(El Tajo Canyon)의 높이 90m의

 누에보 다리(Puente Nuevo)이다

 

누에보 다리를 본 후 점심부터 먹으러

에스파냐 광장(Plaza Espana)에서 길거리 식당이 몰려있는

누에보 골목(Calle Nuevo)으로 간다 

 

식사 후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를 건너가며 보는

절벽 위의 론다(Ronda) 구시가지이다

 

타호 협곡(Tajo Canyon)으로 내려가며 보는 절벽 위의

론다 파라도르(Parador de Ronda) 건물과 전망대(Mirador de Ronda)이다

 

론다(Ronda)에 온 이유는

이 한장의 사진을 담기위해서라고 말해도 틀림이 없는

론다 관광의 하이라이트이다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는

1761년에 90m 높이로 타호 협곡(Tajo Canyon)에 세워진

아치형 구조물의 다리이다

 

타호 협곡(Tajo Canyon)에서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를 향해

론다(Ronda)에 왔었음을 확인하는 인증샷으로 남긴다

 

타호 협곡(Tajo Canyon)에서도

아랫 마을을 보니 절벽 밑으로 아득히 낮은 곳으로 보인다

 

론다(Ronda) 평원이다

포도와 곡물 등의 농산물 교역 중심지라고 하며

밀가루, 가죽, 브랜디 초콜릿이 생산되는 곳이라고 한다

 

타호 협곡으로 내려가기 위하여 누에보 다리를 건너 걸어왔던 길을

다시 나가는 테노리오 골목길(Calle Tenorio)이다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옆에 있는

산타 도밍고 수도원(Convento de Santa Domingo)의 벽에

모자이크 화로 그려진 론다(Donda)의 풍경이다

 

산타 도밍고 수도원(Convento de Santa Domingo) 지나

누에보 다리(Puente Nuevo)가 보인다

 

산타 도밍고 수도원 옆의 비탈진 골목길을 내려가다 보면

이슬람 시대 때 만들었다는

타호 협곡을 건너가는 비에호 다리(Puente Viejo)가 나온다 

 

비에호 다리(Puente Viejo) 아래로는

로마시대 때 만들어진

마차들이 건너 다니던 산 미구엘 다리(Puente San Miguel)가 보인다 

 

산타 도밍고 비탈길(Calle Cuesta de Santa Domingo)에서 보는

이슬람 시대 만들어진 비에호 다리(Puente Viejo) 건너

예수 그리스도 성당(Iglesia de Nuestro Padre Jesus Nazareno)이

하얀색 건물들 사이로 보인다

 

산타 도밍고 비탈길(Calle Cuesta de Santa Domingo)의

펠리페 5세 문(Arco de FelipeⅤ)이다

펠리페 5세(FelipeⅤ:1683~1746년:재위1700~1746년)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창시자로

1700년 후사가 없는 스페인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 카를로스 2세가

전재산(스페인, 스페인령 아메리카, 스페인령 네덜란드, 이탈리아 일부)을

펠리페는 왕위를 물려받으며 정치적 중요한 인물이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루이14세가 프랑스의 왕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시키면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이 영향으로 1713년 위트레흐트(Utrecht) 조약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탈리아의 영토를 내주고

스페인 왕위와 스페인령 아메리카만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산타 도밍고 비탈길(Calle Cuesta de Santa Domingo)에 있는

언제적 인물인지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살바티엘라 후작 궁(Palacio del Marques de Salvatierra)이라 한다

 

산타 도밍고 비탈길(Calle Cuesta de Santa Domingo)에 있는

모로 왕의 집(La Casa del Rey Moro)이라 한다

모로(Moro)라 함은 이슬람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이슬람의 무어인(Moors)의 집이 아니었나 생각이든다

안으로 들어가면 동굴을 파 계단을 만들어 놓아

타호 협곡(Tajo Canyon) 아래로 내려 가는 길이 있다고 하며 

정원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고 한다

입장료는 5유로라고 한다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를 다시 건너가며 보는

타호 협곡(Tajo Canyon)이다

 

론다 구시가지에서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를 건너오면

스페인 광장(Plaza Espana)이 나온다

 

이제 론다(Ronda)의 관광을 마치고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버스터미널로 되돌아 간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이라고 하는

론다 투우장(Real Maestranza de Caballeria de Ronda) 입구이다

1785년 호세마르틴 데 알데우엘라(Jose Martin de Aldehuela)가

설계하여 건설한 바로크 양식의 투우장으로

거대한 돔에 136개의 석주로 이어진

5,000여 명을 수요할 수 있는 규모의 투우장이라고 한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경기가 투우로서

말을 타고 창으로 찌르던 전통 투우 방식에서

빨간 천을 흔들어 소를 흥분시켜 투우 방삭을 창시한 곳이

여기 론다 투우장이라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누에보 다리로 걸어 올 때는 빨리 지나치며

뒷 모습이라 보지 못했던

론다 은혜의 성모 마리아 성당(Iglesia de Nuesta Senora de Mercel Ronda)이다

하얀 건축물에 금장을 두룬듯이 지어진 것이 특이 하였다

 

론다 버스터미널 광장에서 버스에 올라

세비아(Sevilla)로 향한다 

 

론다(Ronda)의 역사는

원래  고대 이베리아 인이 거주했던 장소라고 하며

로마시대에는 아키니포로 알려졌고

8~15세기에는 이슬람의 무어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고 한다

1485년 5월20일 가톨릭의 페르난도 왕 이사벨라 여왕이

스페인 국토로 회복하였다고 한다

 

론다(Ronda)에서 세비아(Sevilla)로 가는 길은

산악지형을 한참을 달리다가

 

평원지대를 한참을 달려간다

 

세비아(Sevilla)에 거의 도착 해 가며 지나치는 우트레라(Utrera) 도시를

 외곽 도로로 우회하여 지나쳐 간다 

 

론다(Ronda)에서 출발한지 약 2시간이 경과되어

 세비아(Sevilla)에 도착한다

 

세비아(Sevilla)에 도착하자 급하게

플라멩코(Flamenco) 공연장으로 서둘러 간다

공연시작 시간이 다 되어 간다고 한다

 

공연장에 입장하자 바로 플라멩코 공연이 시작한다

 

플리멩코(Flamenco)는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집시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그리스도교인들이

섞이면서 14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민속음악과 무용이라 하며

집시들은 19세기부터 카페에서 직업적으로 춤추기 시작 하였는데

이 때부터 플라멩코라는 말이

그들의 음악과 춤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플리멩코(Flamenco)를 출 때

남성들의 발놀림은 발끝과 뒤꿈치로 탁탁 소리를  내는 것을 포함하여 

복잡하게 펼쳐지는데

여성들의 춤은 발놀림보다는 손과 전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춤을 춘다고 한다 

 

전통적인 플리멩코(Flamenco)에서 본질적인 것은

연회자가 음악이나 춤의 자유분방한 정서에 휩싸이는 '두엔데(Duende)'로서

가끔 복잡하게 손뼉치기, 손가락 튕기기, 추임새를 수반한다고 한다

 

플리멩코(Flamenco)의 본질은

보통 기타연주, 즉흥춤을 수반하는 칸테(Cante:노래)로서

즉 기타연주, 춤, 노래로 3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리멩코(Flamenco)는 세가지 범주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 심오하거나 장중한 플라멩코는 짙은 비장감을 동반하여

죽음, 번뇌, 절망, 종교 등을 다루고

둘째, 중간조의 플라멩코는 덜 심오하나 감동적으로

음악에 동양적 색조를 가미하는 경우가 많으며

세째, 경한 플라멩코는 사랑, 시골, 즐거움을 소재로 한다고 한다

이 것은 독특한 리듬과 화음 구조로 구별된다고 한다 

 

플리멩코(Flamenco) 공연은 1시간 30분을 넘게 하는데

얼마나 열정적이고 강렬한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추면서 노래하였던지

여행 끝나고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들의 표정과 춤추는 모습들이 선하게 아른거리는 충격으로 남았다

 

플라멩코를 관람한 후 세비야 중심가에서

1시간 정도 북쪽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 부르구일로스(Bruguillos)로 이동하여

부레바르 호텔(Hotel Bulevar)에서 다음날 아침을 맞이한다

 

오늘의 일정은 세비아(Sevilla)를 관광하고

포르투갈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에

아침 동트기 전부터 서둘러 세비야 시내로 향한다

 

부르구일로스(Bruguillos)에서 세비야(Sevilla) 시내로 가는

버스에서 보는 일출이다

 

날이 밝아 오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세비야 근교를 지나며 보이는 풍경이 평온하게 느껴지는 아침이다

 

세비야(Sevilla) 시내로 접어든다

세비야(Sevilla)는

안달루시아(Andalucia) 지방 주도로

과달키비르 강(Rio Guadalquivir) 어귀에 있는 내륙 항구 도시로서

인구가 69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라고 한다

 

세비야의 첫번째 방문지는 과달키비르 강변에 있는

'황금의 탑(Torre del Oro)'이다

13세기 이슬람교도들이 세운 정이십각형의 탑 건축물로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였다고 한다

예전에 탑 상부가 황금색으로 꾸며져 있어

황금의 탑이라 불렸다고 하며

강 건너 편에는 은탑이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 입구 앞으로 왔다

입구가 광장이 아닌 일반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광장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 하는데

웅장하게 높은 탑이

들어가는 문과 뭐라 표현하기 힘든 조화를 이루며 서 있었다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꼭 가서 보아야 할 곳 중에 하나라고 한다 

 

세비야 스페인 광장(Sevilla Plaza de Espana)은

1893년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공주가

산 텔모 궁전(Palacio de San Telmo) 정원의 반을 시에 기증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루이사 공원이 만들어 졌는데

그 안에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으로 손꼽히는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이 자리잡고 있다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은

1929년에 개최된 세계 박람회인 '이베로 아메리칸 박람회'를 위해

아니발 곤살레스(Anibal Gonzalez)가

대규모의 건물과 공원을 설계하여 조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본부 건물로 지어진 건물은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고

건물 반원형 양끝쪽의 탑은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탑(La Giralda)을 본 따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아래층의 반원을 따라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된 벽화들은

스페인의 각 도시들의 깃발 문양과

역사적인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에서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 정원으로 가는 쪽에는

세비야의 스페인 광장을 설계하고 조성

아니발 곤살레스(Anibal Gonzalez Alarez Ossorio)의 동상이 있다

 

세비아의 스페인 광장(Sevilla Plaza de Espana)은

레예스 자논(Reyes Zanon) 교수에 의하면

"반 원형으로 마치 거대한 극장이 서인도를 향해 두팔을 뻗고 있는 모습을

양끝에 거대한 두 탑으로 매듭지은 것"이라고 표현 하였다고 한다   

 

탑과 탑 사이의 지름이 200m로서

반원형 사이에는 4개의 다리가 있는데

중세의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왕국이었던

카스티야(Castilla), 레온(Leon), 아라곤(Aragon), 나바라(Navarra)의

4개의 왕국을 상징한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에서 나와 알카사르 공원을 거쳐

산타크루즈 지구를 둘러보며세비야 대성당으로 걸어 간다 

 

알카사르(Alcazar) 공원에 세워져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기념탑(Christopher Columbus Monument)이다

1492년 8월 이사벨 여왕의 격려를 받으며

산타 마리아 범선과 함께 3척으로

인도로 가는 뱃길을 개발하기 희망차게 서쪽을 향하여 항해를 시작하여

69일만에 도달한 곳이 죽을 때까지 인도인줄 알았던 콜럼버스가

신대륙인 아메리카 발견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을 기념하는 탑이다 

 

12세기 이슬람교도가 지은 성채였다는 

알카사르(Real Alcazar)의 성벽에 구멍이 관으로 되어 있다

물을 공급하는 수로관이라고 한다

옆 골목은 산타 크루즈(Santa Cruz) 지구로

세비아 대성당으로 가는 골목길이다

 

세비아 대성당으로 가는 산타크루즈 지구는

좁은 골목길로 이어져 있어

여행자들은 "두팔을 벌리면 안을 수 있다"는 표현을 한다고 한다 

 

산타 크루즈 옛 지구(Barrio de Santa Cruz)인

베네라블레스 광장(Plaza Venerables)에 있는 성직자 병원이다

세기의 바람둥이 돈 후안(Don Juan)의

약혼녀 도나 이네스(Dona Ines)가 돈 후안이

천하의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수녀가 되어 일한 곳이라 한다 

 

산타 크루즈 지구 골목길 내에 기념품 가게가 있다

가게 입구 한쪽에 여러가지 부채들이 걸려 있는데

부채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옛날 세비야 여자들은 항상 부채를 들고 다녔다고 한다

연회장이나 카페에서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부치고 있으면 어떤 남자를 선택할까 고민 중이고

딱 접고 부채를 오른쪽 볼에 대고 남자를 바라보면 당신을 선택했다는 표시이고

왼쪽 볼에 대면 관심이 없으니 가라는 표시라고 한다

두 남자가 동시에 구애를 해 왔을때

부채를 머리 위에 대면 고민 중이니 결정 날 때까지 가지 말라는 표시라고 하며

여자 갑자기 접고 부채로 손바닥을 치면 남편이 나타났으니

모른척하고 가라는 표시라고 한다  

 

알리안사 광장(Plaza de la Alianza)에서 호아킨 거리(Calle Joaquin)는

과거 유대인 살던 산타 크루즈(Santa Cruz) 지구에서 

세비아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거리이다 

 

세비아 대성당을 향하여

호아킨 거리(Calle Joaquin)를 거닐며 보는

좌측 성벽 안이 이슬람 시대의 알카사르(Real Alcazar:왕궁)이다

 

골목길을 빠져 나오자

세비아 대성당(Catedral de Sevilla)의

히랄다 탑(La Giralda)가 높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히랄다 탑(La Giralda)은 세비야의 랜드마크로서

1186년에 이슬람 모스크의 70m 첨탑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1248년 페르난도 3세가 세비야를 카스티야 왕국에 편입 시키면서

1402년에 모스크를 없애고 대성당으로 바꾸면서

16세기에 70m 첨탑 상부의 종루 부분에 모형물을 덧대어 98m의 높이로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하였다고 한다

탑 꼭대기에는 청동 여신상으로 장식하였는데

바람이 불면 빙글빙글 돈다고 한다  

 

세비야 대성당으로 들어가려고 줄을 서 대기하며 보는 것으로

마차들이 줄지어 있어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비야 대성당(Cathedral de Sevilla)은

코트디부아르 수도 야무수크르에 새로 지은 대성당과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성당으로

폭 116m, 너비 76m 규모라고 한다

 

대성당 안으로 입장하자

먼저 히랄다 탑(La Giralda)으로 오른다

오르는 길은 계단이 아니라 경사진 길로 만들어 놓아

편하게 오를 수 있었다

 

히랄다 탑(La Giralda) 정상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과달키비르 강(Rio Guadalquivir) 방향으로서 투우경기장이 보인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산타크루즈 성당(Iglesia de Santa Cruz)의 돔 첨탑이 보인다

 

남쪽으로 바라보니 조금 전에 머룰렀던

세비야 스페인 광장(Sevilla Plaza de Espana)이

알카사르(Real Alcazar) 넘어로 눈에 들어온다 

 

종루를 보니

종을 줄을 잡아 당겨 치는 것이 아니라

모터를 가동시켜 종을 치도록

자동화 장치로 바꾸어 설비하여 놓았다

종 28개가 매시간 아름다운 화음으로 울린다고 한다

 

98m의 히랄다 탑(La Giralda) 정상부에

오르내리는 길을 계단으로 만들었다면 고생을 꽤 하였을텐데

내려올 때도 계단이 없어 아주 편안하였다

 

중앙 제대 쪽으로 이동하다 보니

벽에 많은 성화들이 걸려 있다

 

세비야 대성당은

회교 사원이었던 자리에 모스크를 부수고 

1401년부터 1506년까지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회교사원-대성당'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직사각형의 층은 다섯개 공간과 버팀목에서 열리는

2개의 기도실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건물은 중앙의 십자가 부분, 중앙의 아치 쐐기돌과

십자구조 부분의 늑골 궁륭 부분을 제외하고

고딕형 기둥과 아치형 천장으로 매우 간단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세비아 대성당의 대제대는

고딕 양식의 불꽃을 형상화한 제단화로 유명하다고 하며

높이 27m, 폭 18m 크기로

1482년부터 1525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36부분으로 나뉘어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 죽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1000개 이상의 조각을 가지고

후기 고딕양식의 다색 목재 양식으로 만들어져

가톨릭에서 가장 큰 제대 장식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세비아 대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은

7000여 개의 파이프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성당 남쪽의 산 크리스토발 문(Puerta de San Cristobal) 근처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의 묘가 있는데

4대 스페인 왕국인

카스티야, 레온, 나바라, 아라곤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관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성물실로 들어가니

황금과 보석으로 제작된 성물들이

굉장히 호사스러우면서도 화려하게 전시되고 있었다

 

1530년 디에고 데 볼메디아노(Diego de Volmediano가

황금으로 제작한 십자가이다

 

성모 천상모후관 옆에 있는

어린아이 머리에 맞을 정도의 크기로 제작된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이다  

 

황금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성모 천상모후관'으로

1904년 마누엘 데 라 토레(Manuel de la Torre)의 

작품이라고 한다

 

성모자 조각상으로

17세기에 익명의  필리핀 사람이 제작한 작품이라 한다

 

 1658년에 제작한 알폰소 마르티네스(Alfonso Martinez)의

 "성모 마리아의 축일(The Immaculate Conception)"이라는 작품으로

머리에 후광과

세상의 악을 발 아래 누루고 있는 모습을

섬세하고도 세밀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걸작이다

 

성배실에 있는 세비야의 화가

수르바란(Francisco Zurbaran:1598~1664년)의 작품이라 한다

 

성가대석 뒤 쪽의 벽이다

 

 세비아 대성당의 '잉태의 문'을 통해 성당 밖으로 나온다

세비아 대성당의 문은

팔로스의 문, 종들의 문, 탄생의 문, 왕의 문, 례당의 문,

잉태의 문, 라가르토(악어)의 문, 왕자들의 문으로

총 여덟 개의 문이 있다

 

세비야 대성당을 마지막으로

세비아(Sevilla) 관광을 모두 마치고

 

포르투갈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이사벨 2세 다리(Puente de IsabelⅡ)가 있는 강변의

발란코 시장(Mercado Lonja del Barranco) 앞으로 한참을 걸어

버스에 오른다

 

이번 여행의 일정 중 세비야(Sevilla)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에서 모든 일정을 마치고

포르투갈( Portugal)로 출발을 한다 

 

포르투갈(Portugal)로 넘어 가야 하는 길은

세비야(Sevilla)에서 북서쪽으로 3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국경도시 바다호스(Badajoz)를 거쳐

포르투갈 엘바스(Elvas)로 넘어 갈 예정이다 

 

9월 24일에 바르셀로나(Barcelona)로 스페인에 입국하여

사라고사(Zaragoza)를 지나 마드리드(Madrid)에서 톨레도(Toledo)에 갔다가

다시 마드리드(Madrid)에서

콘수에그라(Consuegra)를 지나 코르도바(Cordoba)로 

 

코르도바(Cordoba)에서 그라나다(Granada)를 거쳐

산타페(Santa Fe)를 지나 미하스(Mijas)를 보고 말라가(Malaga)로

다시 푸에르토 바누스(Puerto Banus)를 거쳐 타리파(Tarifa)로

 

타리파(Tarifa)에서 29일 날에 모로코(Morocco) 국가로 건너가

2박3일 간의 여행을 마치고

10월 1일 아침 다시 타리파(Tarifa)로 건너와 론다(Ronda)를 거쳐

세비야(Sevilla)를 마지막으로

스페인에 입국한지 9일만에 출국 길인 포르투갈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 남부 지역을 두루 다니며

가톨릭 문화와 무슬림 문화가 혼재된 건축물들을 보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 대륙에서 제일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서유럽을 지칭하는데 있어서

왜 빼고 이야기하는지 대충 이해가 되었다

 

창 밖을 바라보며 스페인에 대하여

많은 생각이 잠겨 있을 때에

버스는 바다호스(Badajos) 도시에 거의 접근하고 있었다

 

바다호스(Badajos)는

스페인에서 가장 큰 주(州)의  중심도시이며

포르투갈과 국경을 접한 도시로서

인구는 도시에만 약 15만명 정도 거주하고 있으며

주의 전체 인구는 68만5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 팍스아우구스타로 시작했다가

무어 왕국 때에 바타리아우스로 번성하였는데

1229년 레온의 알폰소 9세 때에 바다호스로 해방되었다고 하며

1952년 스페인 정부에서 '바다호스 계획'이라는 개발 사업으로

산업화를 촉진하며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한다

 

포르투갈(Portugal)로 국경을 넘기 전에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버스 기사가 또 길을 잘 못들어 헤멘다

포르투갈로 가는 길은 좌측인데

우측으로 5분 정도 달리다가 잘못된 길을 인지헀는지

 버스를 돌려서 포르투갈로 향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국경에는 출입국 관리소가 없어

버스는 일반도로 달리듯이 포르투갈 국경으로 진입하여 들어간다

 

세비아(Sevilla)에서 출발한지

3시간 40분 정도 지나

스페인의 바다호스(Badajos)에서 국경을 통과하여 

포르투갈의 엘바스(Elvas)로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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