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을 여행하려고
지난 7월달에 신청해 놓고 오랜 기다림 끝에 간다
연휴기간에 대만여행은
비행기 탑승권을 구하기 어려워 가기 힘든 여행지로서
지난해 구정에는 3개월전에 신청해 놓고
탑승권을 못 구해 포기했던 여행이다
인천공항에 아침 6시50분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마치고
09:20에 이륙하는 비행기를 탑승하는 게이트에 선다
이번 여행은 2박3일로 계획하여 떠나는 여행으로
여행기간이 짧은 만큼 밤 늦게까지 일정이 빡빡하게 짜여진 여행이다
시차는 우리나라보다 1시간이 늦으며
인천공항에서 대만 타이베이(Taipei)까지 거리는1463Km,
비행기에 올라 기내식을 마치고
타이완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고 조금 있으려니
서서히 내려 기수를 낮추기 시작한다
2시간 45분을 날아
대만 타오위안(桃園:Taoyuan)시에 있는
타오위안 국제공항(Taoyuan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한다
타오위안 공항은 타이베이(Taipei)시와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1979년 개항한 이 공항의 옛이름은 장개석총통 이름에서 비롯 된
중정국제공항(中正國際機場)이었으나
천수이벤이 집권한 이후인 2006년9월6일에
타오위안국제공항(桃園國際機場)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번 대만여행 일정에서
첫날은 지우펀(九份:Jiufen), 야류해상공원(Yehliu:野柳海上公園)을 보고
오각선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101전망대와 스린야시장(士林夜市場)
둘째날은 기차를 타고 화련(花蓮)시로 이동하여
태로각(太魯閣:Taroco)협곡을 일주와
치싱탄(七星潭)해변을 보고
세째날은 중국 본토에서 장개석총통이 이 섬으로 피신하여 올 때
모든 보물급 70만여점을 가지고 온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장개석총통을 기념하는 중정기념관을 보고
돌아오는 일정이다
영어로는 타오위안(Taoyuan)
중국어로는 타오위엔(桃園)이라 하는데 같은 지명인
타오위안(桃園: Taoyuan)시는
대만(臺灣)의 수도인 타이베이(Taipei)시와 21Km 거리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20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2014년 12월 현(縣)에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공항 주변으로는 공업지역 형성되어 있어
동남아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타이완 섬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비옥한 충적평야가 포함되어 있어
쌀, 고구마, 차, 감귤류가 많이 재배되기도 한다고 한다
공항에서 나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타오위안(Taoyuan) 시내에 있는
모나크 프라자 호텔(Monarch Plaza Hotel:尊爵天際大飯店)로
오늘의 점심 메뉴인 우육면(牛肉麵)을 먹으러 간다
우육면을 먹으면서
타이완에서 유명하여 권해 줄 술을 부탁하니
단수이해변 음식타운에서 '꽃보다 할배'들이 마셨던
금문고량주(金門高梁酒) 58˚ 짜리를 권하여 준다
타이완(臺灣:Taiwan)은
중국 본토에서 161Km 떨어진 섬나라로서
면적은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1/3보다 조금 큰 36,193㎢이며
인구는 약 2,342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수도는 타이베이(臺北:Taipei)이다
인구분포는
한족 98%과 원주민인 오스트로네아어족 2%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족 98% 중 84%는 명,청시기부터 이주해 온 대만인(내성인:內省人)이고
14%는 1949년을 전후해 이주해 온 대륙인(외성인:外省人)이다
종교는 불교 35%, 도교 33%, 기타 종교를 믿고 있다
기후는 아열대성 기후로 연 평균 기온이 23.6℃로
1년내내 따뜻한 편이나
비가 많이 내리고 태풍이 많이 지나는 길목에 있는 나라이다
지우펀(九份:Jiufen)으로 향하며 타이베이(臺北:Taipei)시를 지나던 중
원산대반점(園山大飯店:Grand Hotel)이 보인다
최근에 이 호텔도 '꽃보다 할배'에서 소개되었던 호텔로서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즐겨 묵었던 호텔로
배용준이란 방도 있다고 한다
또한 SBS드라마 "온에어" 촬영지로서 우리에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호텔은 2007년 101전망대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랜드마크로 유명하였었다고 한다
이 호텔의 역사는 일제점령기 시대에 일본신사가 있던 곳을
장개석총통의 부인 송미령여사가
1952년 영빈관으로 새로 건물을 건축하였는데
이후 국가에 헌납하여 자금성 지붕을 본 딴 웅장한 모습의 호텔로 바뀌었다고 한다
송산공항(松山空港) 뒤로 101전망대 빌딩이 희뿌연 안개 속으로 보인다
타오위안(桃園:Taoyuan) 공항보다 작아 보이는
쑹산공항(松山機場:Songshan Airport)은
우리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면 갈 수 있는 공항으로서
타이베이(臺北:Taipei) 시내에 위치하고 있어
타이베이를 중심으로 하는 관광에는 편리한 공항이라 할 수 있다
타이완(臺北,Taiwan)의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the Republic of China,ROC)이다
그러나 올림픽이나 국제기구에 참가할 때는
중화타이베이(中華臺北,Chinese Taipei)라고 한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中國,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를 중시하는 나라들은
타이완(Taiwan) 또는 타이완 정부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국가로서 인정이 아니라
지방정부 급의 위상으로 부른다고 한다
우리 대한민국과는
1992년 이전까지는 사이가 좋은 정식 수교 국가였으나
1992년 8월24일 한국과 중국(中國,중화인민공화국)이 국교를 수립하면서
한국과 중화민국(臺灣,Taiwan)은 수교가 단절되었다
1993년 7월 이후에 비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유지하고 있지만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에는 물자를 아껴가며 우리 한국을 지원하며
친구나라로서 우정이 돈독했던 나라 관계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오래된 친구를 버렸다'는 감정 폭발로
반한 감정이 극에 달했던 시절도 있었으며
현재도 그리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버스가 달려가고 있는데
좌측 창밖 산쪽을 보라고 하며 "저 마을이 어떤 곳인지 아는냐"고 묻는다
그냥 마을로 보이는데 '공동묘지'라고 한다
줌(Zoom)으로 당겨 본다
일반 집들과 다름이 없어 보이나
처마 부분에 간판을 세운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조금 다르다
이 곳의 장례 풍습은
죽은 영령들도 집에서 편히 거하도록 하는 사상이 있어
묘지를 집으로 지어 준다고 한다
건물에 선거벽보가 보인다
1월16일이 대만 총통을 뽑는 선거일이라고 한다
민진당, 국민당, 친민당 3개 정당 맞붙는데
민진당의 여성후보가 현 집권당인 국민당을 누르고
대만 최초로 여성으로서 총통에 선출될 것 같다고 한다
대만 여행 첫번째 여행 때에 가보지 못한 여행지로서
2번째 여행에서 스펀(十分)을 찾는다
스펀(十分)은
신베이시(新北市) 핑시구(平溪區)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다
스펀(十分)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리니
하늘 높이 떠오르고 있는 천등(天燈)이 보인다
스펀(十分)은
천등(天燈)을 날리는 곳으로 유명해진 관광지이다
이곳에서 천등(天燈)의 유래는
한 마을에 도적이 침범하면 신속하게 주위 마을에 알려주기 위하여
천등(天燈)을 날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옛날 우리나라의 봉화대 역할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스편(十分) 마을 중심가로 접어드니
빨간색 천등에 소원을 적고 있는 여행자들이 많이 보인다
천등(天燈)은 색상마다 의미가 있다고 한다
빨간색은 달콤함을 의미하여 연인들이 추천하고 있으며
노랑색은 성취와 성공을 의미하는 수험생들과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있고
파랑색은 희망과 꿈을 의미하여 청년들에게 많이 추천한다고 한다
그러나 천등(天燈)은 사면으로 되어 있어
혼합된 천등(天燈)을 선택도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스펀(十分) 마을 한가운데 철길이 보인다
1918년 일본 치하 시대 때에 일본 광업회사가
석탄을 채굴하여 운반하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스펀역(十分驛)은
한 때는 이 곳을 지나는 핑시선(平溪線)의 역 중에 가장 큰 역이었으나
1992년 탄광업이 몰락하면서
현재는 관광열차가 지나는 노선으로 새롭게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스펀(十分)에서 천등(天燈)을 날리는 것은 철길에서 날리는데
정월 대보름 때에는 굉장히 수없이 많은 천등을 동시에 날려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우리도 이 곳에서 소원을 적어 천등을 날렸는데
'딸, 아들아 빨리 시집 장가 가서 우리 좀 해방시켜 주라'고 써서 날린다
그런데 천등을 이처럼 수없이 날리면
산불 화재나 환경 오염이 우려되었는데
전혀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천등(天燈)이 500m 정도 하늘로 올라가면 거의 다 타고 떨어지는데
불씨가 땅에 떨어지더라도
이 지역은 비가 많이오고 습도가 높아 불이 붙지를 않는다고 하며
떨어진 천등의 기초대는
이것을 수거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수거해 온 것을
가게에 다시 팔아서 재사용한다고 한다
지우펀(九份,Jiufen) 입구에 도착하니
우리가 타고 왔던 버스에서 내리라고 한다
이 곳에서 내려서 다른 버스로 바꾸어 타고 올라 가야 한다고 한다
평일에는 모든 차량이 올라 갈 수 있으나
휴일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매우 정체되어 혼잡함으로
이 곳에 개인 차량이나 관광버스는 주차해 두고
대중교통으로 바꿔타고 올라야 한다고 한다
지우펀 마을에 오르는 길은
마주오는 차들이 겨우 차가 비껴 갈 정도로 비좁은
꼬불꼬불한 산 길이다
버스에서 10 여분 쯤 흔들리며 서 있었을까?
산 능선으로 마을이 보인다
저 마을이 지우펀(九份,Jiufen)이다
지우펀(九份,Jiufen)이란 지명의 유래는
과거 이 외진 산골 마을에는 아홉 집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 이웃간에 우애가 좋아서
먹을 것이나 생필품이 생기면
서로 균등하게 아홉 등분하여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을 지우펀(九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청나라 시대에 금광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많아지며 유명해졌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지우펀의 상가 골목 입구에 도착하니
대만도 신년 연휴기간이라 그런지
인산인해를 이룬다
좁은 골목에
들어가는 사람, 나오는 사람들로 얶히고 설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부산하였다
우렁이 구이로 보이는데
우렁이가 거무스럽지가 않고 소라처럼 하얗다
지우펀에 도착하면 땅콩아이스크림이 유명하니
꼭 땅콩아이스크림을 사 먹어보라고 하여
땅콩아이스크림 가게를 발견하고 그 앞에 서서 구매를 한다
1개에 NT$40로서 우리 돈으로 약 1,600원 정도..
구수하면서도 달콤 시원 맛있다
땅콩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데
찹쌀반죽 피에 땅콩엿을 대패로 갈아서 나온 부스러기를 올리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둘둘 말아
비닐에 싸서 준다
** 참고 : NT$ = New Taiwan Doller **
어묵 가게이다
엄청난 양을 삶고 있다
골목길을 200m 정도 걸었을까?
너무 많은 인파에 질려서
걷던 발길을 되돌려 밖으로 나오려는데
나오는 것도 밀리고 밀려 서서히 밖으로 나온다
지우펀에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인산인해로 인해
아메이차로우(阿妹茶樓)라는 찻집에 찾아가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 집은 홍등들도 멋있고
여유를 찾으며 찻집 누각에서 차 한잔 마시면서
언덕 아래로 내려다 보는 먼 바닷가...
지난 1차 여행 때 아메이차로우(阿妹茶樓)가 있는
홍등 골목을 가보지 못한 아쉬움에
이번 2차 여행에서는 지우펀(九份)에 도착하자
복잡한 시장 골목을 택하지 않고
아래쪽 마을 골목길을 택하여 들어 간다
아메이차로우(阿妹茶樓) 홍등 골목을 향하여 걷는 중에
언덕 아래로 바다가 눈에 들어 온다
아메이차로우(阿妹茶樓) 홍등(紅燈)골목 입구에 도착하니
방송국에서 나왔는지
촬영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많은 관중이 모여 있었다
개그 프로그램인지 어린이 프로그램인지 모르겠으나
한명씩 나와 떠들며 모션을 짓기도 하면 옆에서 소리를 질러주기도 하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서
구경하던 것을 멈추고 가는 길을 간다
아메이차로우(阿妹茶樓)가 있는 홍등(紅燈) 골목 계단길이다
위쪽으로 쭉 올라갈 예정인데
위쪽으로 올라가면 복잡한 시장 골목과 마주하게 되는 길이다
홍등(紅燈) 골목 계단 길을 오르며 한 컷을 한다
아메이차로우(阿妹茶樓)라는 간판이 보인다
지우펀(九份)의 청운전(靑雲殿)이 멀리 웅장하게 보인다
농업의 수호신을 모시는 사원이라고 한다
지우펀 관광을 마치고
우리 관광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는데도
줄을 한 참을 서서 버스를 몇 대 보내고 탑승 순서가 된다
지우펀이 관광 명소로 더욱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8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비정성시(非情城市)'가 그랑프리 수상을 받았는데
이 마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것이 알려지면서 관광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리에게도 관광 명소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있는데
2008년 김하늘, 박용하, 송윤아, 이범수 등이 출연한
'온에어'라는 SBS드라마 촬영지가 되면서 관광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야류(野柳:Yehliu)해상공원이 거의 다 온 것 같다
태평양 바다가 보이고
바닷가로는 타유룬(大武崙:Ta-wu-lun) 부두와
페이수이완(翡翠灣,Feicuiwan) 해수욕장이 보인다
야류(野柳:Yehliu)해상공원에 도착한다
주차장 옆으로 노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으나
어두워지기 전에
야류해상공원을 보기 위해 그냥 지나쳐 간다
야류(野柳)라는 지명의 유래는
예전엔 이 곳의 사람들은 쌀이 부족한 상태로
바다에 의존하며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 시대에 쌀을 공급하는 내륙 지방으로부터 쌀 상인들이 오면
이 곳 사람들은 쌀 상인들 몰래 가마니에 대나무로 만든 색대를 꽂아
흘러 내리는 쌀을 뒤 따라가며 주었다고 한다
상인들이 줄어든 쌀 가마니를 바라 보며
"또 예인(Yeh:야만인)들에게 리우(liu:당하다)했네"라고 하는데서
야류(野柳:Jehliu)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부지런히 걸어 먼저 야류해상공원 전망대부터 오른다
전망대에 오르니
말미잘, 버섯모양 등으로 생긴 기암괴석들이 눈에들어 온다
야류(野柳:Yehliu)해상공원은 3개 구역으로 나누는데
제2구역은 위 사진으로 건너다 보이는 곳으로
여왕머리바위(일명 클레오파트라 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 곳이고
제1구역은 전망대에서 바로 앞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하트바위(일명 사랑바위)와 버섯바위와 바닷가로는 촛대바위 등이 있는 곳이다
제3구역은 바닷가 옆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기암괴석과 자연경관을 구경하는 코스로 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빠르게 내려와 하트바위 앞에 선다
이 곳은 사진 포인트라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인증샷부터 한다
하트바위는 사랑바위라고도 하기에
부부, 연인들이 포즈를 많이 잡는 곳이라 한다
제1구역 하트바위에서 인증샷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여왕머리바위가 있는 제2구역으로 향한다
어두워지고 있어 중요 포인트부터 담아 두자는 생각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다
사진에 빨간 선이 보이는데 접근을 금지하는 선이라 한다
미끄럽고 파도가 심해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한다
여왕머리바위 있는 곳으로 왔더니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줄을 서서 대기하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한사람 한사람들이 한번씩만 찍고 가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번씩 사진을 찍는지...
여왕머리바위는 클레오파트바위라고도 불리는데
풍화작용 때문에 멀지 않은 세월에 무너지고 없어져
다시는 못 볼 수 있다고 한다
줄을 서 기다리다 결국은 어두워져 잘 나온 인증샷 사진이 하나 없어 아쉽다
]
여왕머리바위를 마지막으로 어두운 길을 걸어
주차장으로 나와
저녁 식사를 하러 타이베이(Taipei) 시내로 향한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 앞에 도착하였는데
아주 괴기스러운 커다란 이상한 조형물 아래로 이끌고 들어간다
이 곳이 오각선반(伍角船板) 레스토랑이다
이 건물을 건축한 사람은 이 레스토랑의 여자 사장인데 예술가라고 한다
이 건축물 모티브는
여기 여사장이 타이완 섬 남쪽에 있는 도시 타이난(台南)의 해변을 걷다가
백사장으로 떠 밀려온 배의 갑판(船板)을 발견하고
이를 이용해 이 건축물을 지었으며
갑판 위에 5각(伍角)짜리 동전이 놓여져 있었던 것을 감안해
이 건축물에 오각선반(伍角船板)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기둥 사이를 돌아 안으로 들어서니 2층으로서
아래층에는 연못이 있는데
나룻배가 떠 있고 연못 안에는 하얀 잉어들이 돌아다니고
연못가 주변에 있는 식탁에서 분위기 있게 식사하는 모습이 보인다
내부도 온통 동굴 속처럼 꾸며져
원시시대의 이상한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주어
이상 야릇한 기분이 든다
우리의 식사가 예약된 좌석은 맨 꼭대기인 4층으로 계단을 지그재그 올라 와서 보니
1층부터 4층 천정까지 뚫려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식탁은 4각으로 한쪽에 3명씩 앉는 의자로 12명이 먹을 수 있는 식탁인데
이 레스토랑은 한 번에 800명 까지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식사를 하고 나와 다시 바라다 보니
건축물 위에 모습은
두 여인이 머리결을 휘날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타이베이(Taipei)의 야경을 보기 위해
오각선반 레스토랑에서 타이베이 101빌딩 전망대로 향한다
타이완의 랜드마크로서
508m 높이인 타이베이 101빌딩은
2007년 7월 아랍 에미레이트의 두바이에
141층 부르즈 할리파(818m)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의 빌딩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1위 아랍 에미레이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
2위 중국 상하이의 '상하이 타워'
3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알베이트 타워'
4위 미국 뉴욕의 '제1 세계무역센터'
다음으로 5위인 '타이베이 101빌딩'이라고 한다
한 때는 1위였으며 지금도 랭킹 5위이니
타이완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 101빌딩의 전망대는
89층에 있는데
88층과 89층만 개방하여 관람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89층 전망대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는 5층에 있어
건물 밖에서 1층으로 들어서면 명품관 있는데
이 것들을 보면서 에스컬레이터로 5층까지 오르게 되어 있다
5층에 올라서니 전망대로 오르는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어
표를 구입하러 간 사이 5층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을
관람하는 시간을 갖는다
위 사진은 동고서저(東高西低) 지형인 타이완 섬에서
타이베이 101빌딩이 있는 곳 표시하고 있다
희귀한 옥 산호다
만든 것인지 원래 이렇게 된 자연산 인지는 모르겠다
88층엔 더 큰 산호 전시장이 있다고 한다
가격이 엄청나다
작품에 보는 눈이 없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는데
계산을 해 보니
진짜 억! 소리가 난다
산호 제품으로 보고 무심코 지나치려 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자세히 보니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하단은 사람들이 줄지어 오르려는 모습들과
상단은 탑도 있고 사람들과 동물들이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적인 색채가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89층 전망대에 오른다
5층에서 89층까지 37초만에 올라와 문이 열린다
속도가 시속 60.48Km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라고 한다
전망대에서 타이베이(Taipei) 시내 야경을 보니
시내가 그리 화려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길거리에서 높게만 보이던
10층, 20층 등의 일반 건물들이 낮으막하게 보인다
타이베이 101빌딩은
2003년 11월14일 지상 101층, 지하 5층 규모로 건립되었다
설계자는 대만의 리쯔웨이라는 건축가로서
중국에서는 행운을 불러다 준다는 8(八)자를 이용한
8층 단위로 8개의 꽃잎을 쌓아 놓아
하늘로 솟아 오르는 대나무 마디를 형상화하여 건축하였다고 한다
89층 전망대에서 88층으로 내려가다 보니
커다란 골든볼이 건물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것은 진동완충장치 댐퍼로서
태풍과 지진이 많은 타이완에서
시속 216Km의 태풍과 수천년 만에 한번 발생할 수 있는
강력한 지진에도 견디도록 설계된 것이라고 한다
저녁 9시 45분이 넘어 가고 있어
타이베이 101빌딩을 나와
스린(士林)야시장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바쁘게 재촉한다
스린야시장(士林夜市場)은
타이베이 101빌딩에서 북쪽으로 지룽강을 건너
원산대반점(圓山大飯店)을 지나서 위치하고 있는데
지하철을 탔을 때는 젠탄(劍潭,Jiantan)역에서 내려야 하며
스린(士林,Shilin)역에서 내리게 되면 많이 걸어야 한다고 한다
타이완에는 야시장이 발달하여 수 없이 많이 있다고 한다
2010년도에 요리전문가, 관광객, 현지인 50만명이 참여하여
대만에 있는 야시장을 평가 한적이 있다고 한다
지룽시(基隆市)에 있는미아오커우(廟口,Miaokou)야시장에 이어
스린야시장(士林夜市場)이 2위에 선정되었으며
가장 매력적인 야시장으로는
카오슝(高雄,Kaohsiung) 시에 있는 리우허(六合,Liuhe)야시장과 함께
선정되었다고 한다고 한다
스린시장은 타이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야시장으로
주로 먹거리 위주로 없는 것이 없이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여러가지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즐비하여
국내외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드는 시장이라 한다
시장 탐방은 입구에서 시장안으로 들어가 직진하다가
사원처럼 보이는 건물(사림자성궁,士林慈誠宮)이 보이면 우회전하여
막다른 길이 나오면 또 우회전하여 시장길을 걷다가
차도가 나오면 우회전하여 조금만 걸으면 처음의 위치가 나온다고 한다
사림자성궁(士林慈誠宮)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밤 10시25분이 다 되어가고 있다
먹거리 시장으로서 우리나라 광장시장하고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서울의 광장시장은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에 많은 좌판들이 늘어서 있어
그 곳에 앉아 먹거리를 즐기는 사람들이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기 스린시장에서는 먹거리를 파는 가게는 많이 있으나
좌판에 앉아 즐기는 모습이 별로 보이지가 않는다
스린시장을 한바퀴 돌아 나와
스린시장 입구 앞에서 차도 건너편으로 건너가
스린시장에 간 주요 목적인
'꽃보다 할배'에서 소개되었던 빙수 가게로 들어간다
메뉴판을 보니 빙수 종류도 여러가지가 있어
주문하기가 난해하였으나
'꽃보다 할배'들이 먹었다고 생각되는
망고빙수를 주문한다
1접시에 NT$ 190으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7,400원 정도 한다
대만 2번째 여행에서 용산사(龍山寺)에 들린다
용산사(龍山寺)는
타이베이(臺北)에 있는 사원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유명한 전형적인 타이완(臺灣)의 사원이라고 한다
용산사 안으로 들어서니
이곳에 방문하는 많은 신도들이 과일과 음식물을
굉장히 기다란 탁자에 쭉 쌓아두고 가서
공양을 드리는 모습이 보인다
용산사(龍山寺)는
도교, 불교, 토속신의 각 종교의 색채가 어우러져 있는 사찰로서
처음 지어진 것은 1738년으로서
청(靑)나라 시대 푸젠성(福建省) 이주민들에 의해 지어진 사찰로서
자연재해와 화재 등으로 여러번 소실되어
현재의 건물은 1957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불교, 도교, 토속신을 모신 사원인 관계로
한바퀴 돌아보며 사당 안을 보니
지나치는 곳마다
모시고 상들이 다 다른 종교의 상들이 보었다
용산사(龍山寺)의 구조는
네모난 뜰을 중심으로 건물이 3번 반복되는
3진 사합원(三进 四合院)의 궁전식 건물 사원으로서
타이완의 전통 사원 건축 방식으로
지붕에는 용, 봉황, 기린 등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어제 밤 12시가 다 되어 타오위안(桃園,Taoyuan)시에 있는
모나크프라자호텔(尊爵大飯店,Monarch Plaza Hotel)로 와서
첫날 밤을 보내고 새벽 6시에 기상하여
오늘 일정의 여행을 준비한다
오늘의 일정은 화롄현(花蓮縣)에 위치한
타이루거협곡(太魯閣峽谷,Taroko Canyon)을
타이베이(臺北, Taipei)역에서 기차를 타고 갔다가 오는 것이다
타오위안(桃園)시 모나크프라자호텔에서 07:30에 출발하여
30분 만에 타이베이역에 도착하여
9시 기차를 예약한 우리는 시간이 많이 남는 관계로
역사(驛舍)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시간을 잠시 보내다가
아침 일찍 쌀쌀함에 역사 안으로 들어간다
역사(驛舍)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나오며 6층까지 천정이 뚫려 있고
많은 사무실들이 있는 것 같아
기차 역사로선 특색이 있어 보인다
타이베이역(台北)에서 화련현(花蓮縣)에 있는 신성(태로각)역으로
9시에 출발하는 기차표다
기차표가 조그마하니 앙증맞다는 생각이 든다
타이베이 역을 출발한 기차가 지하철로 한참을 가다가
지룽(基隆)시에 가까와 지면서 지상철로 바뀌며 창밖으로 풍경이 나타난다
타이베이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차에 탑승하여 통로까지 가득
입석객들로 시끄럽게 붐비더니
지우펀(九份)에 가는지 스펀(十分)으로 가는지
루이팡(瑞芳)역에서 많은 탑승객들이 내리며 한산해 진다
우리가 탄 기차는 우리나라 기차편으로 치면
비들기호 처럼 서서히 가나
기차표는 좌석표와 입석표로 분리되어 있어
좌석표를 구입하였기에 붐비는 가운데서도 편히 갈 수 있었다
타이완은 동고서저(東高西低) 섬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3,000m급 산들이 있는 높은 산맥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타이베이(臺北)에서 화롄(花蓮)으로 가려면
기차로 3시간 정도 걸리는데
기찻길은 동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섬 동쪽 해안길을 끼고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2015년 IMF에서 발표에 따르면
타이완 GDP가 세계 22위이며
1인당 국민소득은 22,464달러 라고 한다
참고로 우리 대한민국 GDP는 세계 11위고
1인당 국민 소득은 28,338달러 로서
예전에 타이완은 우리보다 잘 살던 나라로서
우리나라를 도와 주기도 했던 나라였는데
이제는 우리가 앞서 나가는 국가가 되었다
타이완(Taiwan)의 역사는
1590년 포르투칼 선단이 타이완 섬 북부지역에 잠시 거주하면서
아름다운 섬(Ilha Formosa)라고 서방에 소개하기 전까지
선사시대부터 말레이, 인도네시아계 종족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선사유적지 500여 곳의 많은 출토물 발견 외에는
역사 기록이 없다고 한다
1624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가
현재의 타이난(臺南) 지역에 안평(安平)이라는 거주지와
지란디아(Zeelandia) 요새를 짓고
중국 본토 푸젠성(福建省)의 한족들을 데려와 토지를 개간하기 시작한다
1626년 스페인이 타이완 북부 지역을 점령하여 식민지 정부를 세우려 하자
네덜란드는 스페인을 몰아내고
1642년부터 동인도 회사를 통해 타이완을 관할하기 시작하였다
1644년에 중국 대륙에 만주족이 명나라에 침입하자
혼란에 휩쌓인 많은 한족들이 타이완 섬으로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662년 명나라 재건을 도모하던 정성공(鄭成功)이 아들 정경(鄭經)과 함께
네덜란드 세력을 추출하고 한족정권을 수립하고 청나라에 대항하였다
또한 타이완에서 유교 교육을 실시하고
중국식 법제를 실시하는 등으로 관습과 문화를 이식하여
정성공은 타이완을 개척한 인물로 개산성왕(開山聖王)이라는
칭호도 받았다고 한다
1682년 12살의 어린 아들이 그의 뒤를 승계하자
1683년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타이완을 점령하여 통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무역업자라고 하는데
사실은 해적질과 약탈을 일삼았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는 일본인으로서 정성공은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683년 이후 청나라 통치 시기
제국주의 서방 열강들이 타이완을 계속 침탈하자
청나라는 이를 지키고자 심보정 및 정일창 등을 계속 군대를 파견하였고
1822년에는 청나라 22번째 성(省)으로 편입하여
최초의 성장(省長)으로 유명전(劉銘傳)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여
시모노세끼 조약에서 일본에 타이완을 할당하게 된다
1895년 이후 5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통치시대에 들어가
일본은 식량 공급기지 및 일본제품 소비기지로 만들고
1922년부터는 동화정책을 실시하나
1945년 8월에 일본은 연합국에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하여 타이완에서 떠나고
10월17일 중국 국민당 정부가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 영토에 복귀시킨다
1945년10월17일 타이완을 회복한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본토에서 공산당과 내전으로 인하여
타이완에 우수한 관료나 정예병력을 보낼 수 없는 가운데
푸젠성 주석이었던 천이(陳儀)를 행정장관겸 경비 총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는 여기에 거주하던 내성인(內省人)보다는
본토에서 같이 온 외성인(外省人)을 더 발탁하며
차별하는 강압 통치를 하다가
1947년에는 수만 명을 죽이고 행방불명 시키는 2.28사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49년 5월 거세지는 중국 공산당 공격에 밀린
장개석 총통은 30만 군대를 데리고 본토에서 타이완 섬으로 건너와
계엄령을 선포하고 타이완에 진주시킨다
10월에는 광동성, 푸젠성 등지에서도 패하자
12월부터는 완전히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완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침 9시에 타이베이(臺北)역을 출발한 기차는
낮 12시 4분에 신쳉(新城,Xincheng=太魯閣,Taroko)역에 도착한다
역 앞에는 주차장으로
버스들이 많이 주차되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타이루거 협곡을 관광하기 위해
기차에서 내리는 여행객들을 태우려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들이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주차장을 지나 차도 건너에 있는 식당으로 향한다
식사를 마치고 타이루거 협곡 관광버스를 타러 가는데
과일 노점의 아가씨가 우리 한국 말을 너무 유창하게 잘하여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앞으로 선다
스자(釋迦,석가두)를 맛보고 가라고 한다
스자(釋迦,석가두)라고 과일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석가모니 머리와 비슷하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석가두를 주문하고 대기하는데
대추 1개를 주면서 먹어보라고 하여 맛보니 달다
석가두 1개를 깍가서 주는데 NT$40 (약1600원) 라고 한다
맛은 매우 달콤하며 입에서 씹는 맛은 없고 살살 녹는다
타이루거(太魯閣,Taroko) 협곡을 유람할 버스다
타이완에서는 버스나 영업용 모든 차량 뒤에는
운전자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버스는 타이루거 협곡(太魯閣峽谷,Taroko Canyon)으로
서서히 접어들기 시작한다
타이루거 협곡(太魯閣峽谷,Taroko Canyon)은
국립공원으로서
2000m가 넘는 산들 사이에 리우시(立霧溪)를 따라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깍아 지르는 단층 절벽이 이어지는 대협곡이다
깍아지르는 절벽에 뚫고 깍아 만든 길을 가다보니
바위에 송송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비가 많이 산다고 하여
태로각 협곡 제2경으로 알려진 연자구(燕子口)라 한다
타이루거 협곡(太魯閣峽谷,Taroko Canyon)에서
관광코스로 개발된 구간은
리우시(立霧溪)의 끝인 해변에서 부터 시작하여
절벽 길로 이어진 협곡으로 들어가 약 20Km정도 거리에 위치한
텐샹(天祥)까지 관광코스로 개발되어 있다고 한다
이 타이루거 협곡에 개발된 도로는
중부헝관궁루(中部橫貫公路) 8번 도로로서
3000m가 넘는 산들이 있는 산맥을 넘어
서쪽 해안도시인 타이중(臺中)시로 이어지는데
타이루거협곡 구간 공사를 완공하는데 3년 10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협곡의 사면은 깍아지르는 절벽이며 지반이 약해
낙석사고로 통행이 금지되기도 하고
통행차량 수를 조절하여 수십분씩 대기 하기도 하며
또한 악천후에는 폐쇄되기도 한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걷는 구간이다
터널에 협곡으로 중간중간 커다란 구멍이 뚫린 도로로서
이 곳을 주취둥(九曲洞)이라고 하는데
이 터널은 사람을 동원하여 곡괭이와 정으로 모두 파 완공하였고 한다
주취둥(九曲洞)은 거대한 바위절벽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맞대어 있는 듯 깍아지르며 서 있었다
그 곳의 구불구불 터널을 뚫고 길을 낸 산책로에는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주취둥(九曲洞) 터널을 지나 차들로 붐비는 길을 조금 걷다 보면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넓은 공간이 나온다
그 곳에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 보라'며 '무엇이 보이냐?'고 한다
어라! 주위가 바위절벽이고 가운데 공간의 하늘이
타이완 섬 형상으로 보인다
다시 버스에 올라
교행하는 차들이 서로 비켜 가기 어려울 정도의 좁은 절벽 길에서
조심스럽게 서서히 움직이는 버스에 몸을 맡긴다
자모정(子母亭)과 자모교(子母橋)가 차창 밖으로 보인다
장개석(蔣介石) 총통이 어머니를 생각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여러가기 설도 있는데
아들이 일을 하러 떠나서 오지를 않자
이 곳에서 기다리던 어머니가 기다리다 지쳐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타이루거(太魯閣,Taroko)협곡의 관광포인트 마지막 부근인
텐샹(天祥)까지 도착하면
태로각정영주점(太魯閣晶英酒店)이 있다
여기에서 잠시 쉬면서 휴계소에 들어가 망고쥬스를 주문하여 마시고
회차하는 버스에 오른다
*** 망고쥬스 NT$ 150 (약6,000원) ***
텐샹(天祥)에서 회차하여 타이루거 협곡을 한참을 빠져 나오던 중
사찰과 함께 폭포가 보이는 길거리 주차장에 정차한다
장춘사(長春祠)를 조망하는 곳이다
장춘사(長春祠)는
높게 솟아오른 절벽 아래 지어진 사당으로서
여기 타이루거 협곡의 절벽 사이에 준공된
중부헝관궁루(中部橫貫公路) 8번 도로인 이 길을 건설하다가
숨져간 212명의 영령들을 모신 사당이라 한다
장춘사(長春祠)를 조망하는 곳에서
장춘사를 향해 철다리를 건너가 계단을 내려가면 암반 터널이 나온다
장춘사로 가는 길목의 암반 터널 안에는
타이루거(太魯閣) 협곡에 서 도로를 공사하다 숨져간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놓고 명복을 비는 제단이 있다
장춘사(長春祠)로 가는 터널로서
장춘사까지는 걸어가지 못하게 금하고 있어
갈 수 있는 구간은 여기까지라서
장춘사로 가는 터널 길을 사진으로 담았다
장춘사 터널 길에서 나와
타이루거(太魯閣) 협곡을 바라다 본다
장춘사 아래로
장춘폭포에 영령들을 위로하 듯 물이 세차게 쏟아지는 것 같다
장춘사로 들어가는 바위를 뚫어 만든 길이 보인다
장춘사를 세우기 위해 저 또한 힘들었을텐데라는 생각이 들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 영령들을 위로해 주기를 바라며
타이루거 협곡을 벗어나 다음 행선지로 향한다
화롄시(花蓮市)는
인구가 약 2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경관이 뛰어난 도시로서
아름다운 바닷가와 타이루거 협곡(太魯閣峽谷) 등이 있어
타이완 동부의 최대 도시이자 관광 요충지라고 한다
화련시는 대리석과 비취 등의 산지로 유명한데
특히 옥(玉)제품은 세계적으로 품질이 최고 우수하다고
자부심이 대단한 곳이라 한다
대리석 공장으로 왔는데
신정연휴라 문이 닫혀 있어 차를 한바퀴 돌아 나와
옆에 위치한 옥(玉) 판매점으로 이동하여 정차한다
대리석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라
건물을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행되었던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건축하여
볼거리를 더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자 직원이 나와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타이완 동부지역에서 생산되는 옥들을 설명하며
타이완이 우수한 옥(玉) 생산지로는 세계 제일 임을 설명하고 있다
옥(玉)에 대하여 크게 관심이 없어 대충 보고 밖으로 나온다
안에서는 사진 촬영도 금지하고 있어
더욱 빠르게 밖으로 나온 것 같다
치싱탄 해변으로 가던 중
빈랑(檳榔,Bing lang,삥랑)을 파는 가게가 보인다
빈랑은 환각증세가 있는 마약의 일종으로 분류되는데
타이완에서는 농가소득 차원에서
빈랑을 파는 것을 합법적으로 허가하여 주었다고 한다
빈랑을 타이완의 껌이라고 하며
운전기사나 육체노동자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또한 지방도를 다니다 보면 빈랑을 파는 가게에서
속 옷만 입은 아가씨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들을 빈랑서시(檳榔西施)라고 부른다고 한다
치싱탄(七星潭) 해변에 도착하니 땅거미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치싱탄(七星潭) 해변은
화롄(花蓮) 시내의 북쪽해안에 있는 해변으로서
회색빛 자갈이 태평양 바다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변으로 알려져 있다
치싱탄은 청(淸)나라 시절부터 불리던 이름으로
일곱개의 작은 연못 또는 북두칠성이 잘 보이는 곳이라는 설 등으로
치싱탄(七星潭)이라 불리운다고 한다
태평양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잔잔한 것 같으면서도 세차다
파도가 해변에 자갈을 스치며 내는 소리가
땅거미에 어두워져 가는 밤바다를 깨우는듯 요란하다
치싱탄(七星潭) 해변이다
지난 여행 때는 어둑어둑 해질 때에 왔었는데
이번에는 한낮에 오니
가슴이 뻥 뚫리는 기운이 감돈다
치싱탄(七星潭) 해변에 서니
바람이 세차게 불고 파도가 거세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빈랑(檳榔)을 파는 또 다른 가게 앞을 지난다
저러한 조명불 빛을 반짝이는 것은
전부 빈랑(檳榔)을 파는 가게라는 표시라고 한다
화련시에 있는 저녁식당이다
안으로 들어서니 식당 안 벽면에
우리 모임이랑 같은 이름을 가진 모임이
1년전 오늘과 같은 날 왔다갔다는 표식이 크게 적혀 있다
우리도 왔다갔음을 표시하여 둔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타이베이 역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위하여 화롄역으로 나오니
시계는 저녁 7시가 다되어 가고 있음을 알린다
기차는 저녁 7시15분에 도착시간으로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저 멀리 붉은 전조등이 보이며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다
화롄역을 출발한지 3시간이 지나
기차는 타이베이역에 도착한다
이 곳에서 버스를 타고 타오위안(桃圓,Taoyuan)시에 있는 숙소
모나크 플라자 호텔(Monarch Plaza Hotel)로 이동하여
오늘의 일정을 마친다
오늘이 타이완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부터 짐을 모두 싼 캐리어를 끌고 관광버스에 오른다
일정은 타이베이(Taipei)로 이동하여
국립 고궁 박물관과 중정기념관을 들려
점심식사 후 기념품점에 들렸다가
17:10 비행기로 인천공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타이완 국립고궁박물관에 도착한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런던의 대영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비교함에 뒤지지 않는
70만점에 달하는 소장품을 간직한 세계 4대 박물관 중의 하나라고 한다
이 많은 소장품은
1949년 장개석 총통의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의 공산당 정부와 내전에서 패하여
중국 본토에서 쫒겨 타이완으로 이주해 올 때
왕궁에 소장되어 있던 보물들을 전부 가지고 나와 여기에 전시하면서
세계적인 박물관이 되었다고 한다
주로 중국 명. 청대 황제의 수집품을 중심으로
중국의 찬란했던 역사를 자랑으로 중국 문물을 보유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인기있는 소장품은 항상 전시되고 있지만
옥, 도자기, 회화, 청동의 전시품은
3개월에 한번씩 교체되어 전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박물관 안에서는 촬영 금지구역으로 되어 있어
2016년에 방문하였을 때는 눈으로만 감상하여야 하니
설명이 안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번 2019년 두번째 방문 때에는 사진을 찍을 수가 있어
몇가지를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꼭 보아야 하는
대표적인 보물 중의 하나로 꼽히는 옥배추 조각품인 취옥백채(翠玉白菜)이다
여치와 메뚜기가 숨겨진 조각품으로
배추는 재물을 상징하고 여치와 메뚜기는 황실 자손의 번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취옥백채(翠玉白菜)는
청(淸)나라 광서제(光緖帝:1871~1908년) 때
서비(瑞妃)가 혼수예물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취옥백채(翠玉白菜)의 가치는
2400만의 대만 국민이 3개월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의 가격이라고 합니다
본래 옥(玉)은 완전히 흰색이거나 완전히 푸른색이어야
최상급이라고 한다
취옥백채(翠玉白菜)의 원재료 옥(玉)은 좋은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옥이 흰색과 청색을 어중간히 띄고 있었으며
갈라지고 불순물이 끼어 있어 하품에 불과하였는데
장인의 손길을 거쳐 갈라진 틈을 이용하여 잎사귀를 만들고
불순물을 이용하여 곤충을 만들어
최상 최고의 보물로 탄생하였다고 한다
동파육이라 하는 육형석(肉形石)이다
진짜 고기 덩어리처럼 보이는데 자연석 옥이라고 한다
황하강의 상류의 용문을 뛰어 넘는 물고기는 용이되어 승천한다고 한다
뛰어 넘은 물고기는 잉어 뿐이었는데
고행을 마친 잉어가 승천하는 모습을 나타낸 옥화병(玉花甁)으로
등용문(登龍門)을 나타내는 옥화병이라고 한다
옥(玉)으로 제작된 벽옥병풍(碧玉屛風)이다
옥으로 가공한 48개의 무늬 조각을 이어 만든 병풍으로서
청(淸)나라 말에 서태후(西太后)가
이 병풍 뒤에 앉아 수렴청정하였다고 하며
중일전쟁(中日戰爭) 당시 왕진웨이(汪精赠)가 선물로 일본 왕에게 주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반환 받았다고 한다
모공정(毛公鼎)이라는 세발 솥이다
여기에 적힌 금문(金文)은
현존하는 금문 중 가장 많은 글자가 적혀져 있는 것으로
모공정(毛公鼎)은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기 전
주(周)나라(기원 11세기~BC771) 후기시대의
주나라 왕이 모공(毛公)에게 이른 이야기를 청동 솥에
497자에 달하는 글자로 기록하였는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진 솥이라고 한다
모공정(毛公鼎)은
청나라 말기에 산시성(陝西省)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여러 소장가를 거치면서 해외로 유출될 것을 우려한 중화민국 정부가 매입하여
공산정부에 밀려 대만으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청자무문수선분(靑瓷無紋水仙盆)이라고 하는 그릇이다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인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것으로
티끌 하나보이지 않고 맑은 청아한 빛을 띠고 있다
청(淸)나라 건륭제(乾隆帝:재위1735~1796) 시대 때에 만들어진
양채. 화법랑(洋彩. 畵琺瑯)이라고 한다
예술과 문학의 애호가 였던 건륭제(乾隆帝)는
역대 문물을 수집하게 하는 등 궁중에서도 법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법랑이 화사하면서 특이하여 사진으로 담았다
조상아투화인물투구(雕象牙透花人物套球)라고도 하며
상아투화인물동심구(象牙透花人物動心球)라고 하는 또 하나의 보물이다
청(淸)나라 시대 장인이 3대에 걸쳐
상아(象牙)로 만든 용(龍) 무늬 조각의 공 안에 공이 또 공 안에 공이
17개나 순서적으로 반복하여 들어 있는 조각품으로
현대의 기술로도 만들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을 나와
버스를 타고 중정기념당으로 향한다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에 도착하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은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이었던 장개석(蔣介石,장제스) 총통이 1975년 4월 사망하자
그의 대한 업적과 그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부인이었던 송미령(宋美齡,쑨메이링)여사가 주도하여
공사금액 전액을 국가지원이 아닌
타이완 국민과 해외 각지의 화교들의 기부금으로만
1976년10월3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80년3월31일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또한 공사 중에 기부금이 예상했던 금액보다 몇 배가 많이 들어와
중정기념당의 관리 유지비를 공사 잔액 기부금으로 운영하고
국민에게 보답하는 차원에서 현재까지도
입장료 및 행사 대여료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내부로 들어서자 근위병 교대식을 시작하고 있었다
먼저 교대식 행사부터 보고 관람하고자
장개석 총통의 동상 있는 위층(5층높이)으로 내부 계단을 뛰어 올라 간다
근위병 교대식은 어느 나라나 있지만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특색이 있어 볼 만한 구경거리라는 생각이다
근위병들은 정식 군인들이라고 한다
근위병 교대식은 약 10분 정도 진행되는데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지루한 감도 적지 않았다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원래 이름은 중정(中正)이고 호가 개석(介石)이다
장개석(蔣介石,장제스) 총통은
1887년10월31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시(寧波市) 펑화현(奉化縣)에서
소금상인 장지총(蔣肇聰)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1975년4월5일 89세의 일기로 사망하는데
6세~16세까지 한학(漢學)을 공부하여 중국의 전통학문에 상당한 수준이 되었고
1901년 14세에 당시 관행인 어머니가 정해준 5살 연상인 처녀 마오푸메이(毛福梅)와
결혼하여 아들 장징궈(蔣經國)과 딸 장젠화(蔣建華)을 낳고
1921년 마오푸메이(毛福梅)와 이혼을 한다
1921년 19살 어린 천제루(陳潔如)와 결혼하였으나
1927년 이혼하고
쑨원(孫文)의 처재인 송미령(宋美齡,쑹메이링)여사와 3번째 결혼을 한다
1904년 펑화현(奉化縣)의 봉록학당으로 진학하여 영어와 산술, 이화학 등 배우고
1905년 닝보시(寧波市)의 전금공학(箭金公學)으로 전학하여
고청렴(高淸廉)이라는 스승을 만나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대해서와
쑨원(孫文)의 혁명운동에 대하여 듣고 쑨원을 존경하며 뜻을 품고
군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을 한다
1906년 4월 바오딩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수업을 받고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며
중국에 봉건 청나라를 반대하며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고자
유학생 위주의 중국동맹회에 가입하였다
1909년 5월 일본육군사관학교 21기로 졸업을 하였으며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일본 제국군으로서 복무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군을 이끄는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 쑨원(孫文)의 신임받게 된다
1923년 쑨원(孫文)과 송경령(宋慶齡,쑹칭링)부부를 기관총 암살 공격에서 구하여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어
쑨원(孫文)은 혁명을 실천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설립을 하는데 장개석은 초대교장이 되었다
1925년3월12일 쑨원(孫文)이 죽자 국민당의 권력을 두고
국민당에서 자기보다 서열이 높았던 좌파인 왕정위(汪精衛,왕징웨이)와 싸움에서
황푸학교 출신들의 도움을 받아 우파로서 권력을 잡는다
1925년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총사령관이 되어 군벌 통합을 위해 북벌에 나서는데
우한에서 국민당 좌파 정부를 세운 왕정위(汪精衛,왕징웨이)와 대립한다
1927년 공산당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 공산주의자 학살(4.23사건)로 좌파를 제압한다
1928년 6월 베이징을 탈환하며 중국을 통일시키며 국민정부를 출범시킨다
1930년부터 공산당 지배지역에 대대적 토벌작전을 펼쳤으나
섬멸이 힘들어 곤경에 처하고
1934년 유교적 도덕을 주입하기 위하여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정권 내부에서부터 부패가 심하여 실패로 돌아간다
1936년 12월 장쉐량(張學良)이 공산당과 싸우고 있는
시안(西安)에 위로차 방문하였다가
온천욕 중 장쉐량에 의해 구금되는 사건이 터진다
이유는 "일본이 중국 대륙을 삼키려 하는데 공산당과 싸울때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장개석은 장쉐량에 설득되어
1937년 공산당을 승인하고 '국공합작'을 결성하여 항일전쟁에 들어간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반발하여 연합군이 개입하는
1941년까지 단독적으로 일본과 전쟁을 치루다가 전쟁이 끝나는
1945년도에는 4대 강국의 하나로 승전국이 되는 영예를 얻게된다
1943년 11월 미국의 루즈벨트, 영국의 처칠과의 이집트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거론하여
'한국 민중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라는
선언문의 결의를 얻어 냈다고 한다
이 회담에서 미국 유학을 했던 부인 송미령(宋美齡,쑹메이링)여사의
통역의 효과도 아주 컷다고 하며
이때부터 송미령 여사도 세계로부터 주목받아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장개석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건의한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金九)의 대한민국 독립 제안과
윤봉길 의거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장개석 총통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면서도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를 꾸준히 지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는 장개석은 쑨원(孫文)의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했는데
1919년 8월 쑨원(孫文)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고 밝힘에 따라
장개석 역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개석은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이 나면서
다시 모택동(毛澤東,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과
국공 내전이 반발하여 패전하자
중국 본토에서 쫒겨
1949년 타이완 섬으로 약 200만명의 군인과 민간인을 데리고 건너가
'중화민국 정부'를 본토로부터 철수 이주시킨다
대만에 자리잡은 장개석은 '중국은 하나'라는 구호 아래
본토인 중국대륙 탈환의 소망을 가지고
대만의 제1대에서 제5대 총통까지 연임하다가 1975년 4월 사망한다
이후 첫째 아들 장경국(蔣經國,장징궈)가 총통자리를 이어 받았다
현대의 대만 사람들은 '장개석 총통의 공과에 대해서 양분'이 된다고 한다
항일투쟁에 대하여는 영웅적인 치적이 많지만
중국의 분단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많은 억압과 탄압, 독재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은 장경국(蔣經國,장징궈)은
1975년 장개석 사망후 1977년까지 총통권한대행으로 있다가
1978년부터 1988년 83세로 사망할 때까지 총통으로 지냈는데
현재까지도 타이완 국민에게 사랑받는 총통이라고 한다
그는 청렴결백하여 사후에도 재산이 하나도 없는 국민만 위하는 총통이었다고 한다
장징궈 총통의 일화가 있는데
총통 일행이 차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길거리에서 앉아 계란을 팔고 있는 어린이가 있어 차를 세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징궈 총통이 계란을 팔고 있는 어린이에게 다가가
"왜 학교에 안가고 이 곳에서 계란을 팔고 있나"고 묻자
어린이는 "할머니가 매일 이 곳에서 저희를 위해 계란을 파시는데
오늘은 아프셔서 제가 대신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총통은 수행하던 일행 전원에게 차에서 내리게하여
계란을 나누어 먹게하여 다 팔아주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그 곳에 정자까지 지어주고
이 어린이 가족만 그 곳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어
현재도 계란장사를 잘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선물 받은 캐딜락 방탄차라고 한다
그러나 이 차는 잘 타지를 않았다고 한다
차량 넘버가 '0888'인데
8자는 중국인들 행운을 가져다 주는 숫자로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8이 4개가 아니고 3개인 이유는
4(四)는 죽을사(死)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 차는 송미령여사와 함께 즐겨 탔다고 하는 캐딜락이다
송미령(宋美齡,쑹메이링)여사를 만나게 된 계기는
쑨원(孫文)의 총애를 받는 장개석이 쑨원의 집을 자주 드나 다닐때
송미령은 쑨원의 처재로서 형부인 쑨원의 업무를 도와주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장개석은 2번째 결혼한 유부남 상태이었으나
송미령과 눈이 맞아
1925년 쑨원이 사망하고 쑨원의 부인이자
언니인 송경령(宋慶齡,쑹칭링)의 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1927년 장개석 40세, 송미령 30세에
장개석은 신앙이 없었으나 기독교 입교와 2번째 부인과는 이혼하고 결혼을 하였다
결혼조건은 아기를 안갖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송미령(宋美齡,쑹메이링)여사는
저장성(浙江省)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며 대기업가였던 송가수(宋嘉樹)의
3딸 중 막내로 1899년 3월23일 태어 났다
당시 송가(宋家) 3자매는 미국 유학을 재원으로서
첫째 송애령(宋靄齡,쑹아이링)은 북부지방의 대기업가인 공상희(孔祥熙)와 결혼하여
남북재벌세력의 연합을 이루어 일본과 대항하는 군자금에 크게 도왔으며
둘째 송경령(宋慶齡,쑹칭링)은 중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쑨원(孫文)과 결혼하여
공산정권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부주석 직위도 받는다
세째 송미령(宋美齡,쑹메이링)은 군인이었던 장개석(蔣介石)과 결혼하여
중국대륙에서 '중화민국'에서 총통 부인이 되어 내전에 패한 후
정부가 타이완으로 옮겨서 와서도 총통의 부인으로서
미국에 협상하여 전투기 100대를 지원 받아 냄으로서 그 공로로
군총사령관(위사진 군복입은 여인)이 되었으며
1975년 장개석 총통이 사망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03년 106세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송가(宋家) 3자매에 대하여는 1997년 홍콩영화 장만옥, 양자경 주연의
'송가황조(宋家皇朝)'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중국사람들은 송씨 자매를 두고
첫째 송애령(宋靄齡,쑹아이링)은 재산을 사랑하였고
둘째 송경령(宋慶齡,쑹칭링)은 중국을 사랑하였으며
막내 송미령(宋美齡,쑹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하였다고 말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장개석 총통의 집무실 모형이다
책상 앞에도 서랍과 의자가 놓여져 있다
이 곳에 오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상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1966년2월15일 대만을 방문한 박정희대통령이 장개석총통과 회담하는 장면이다
이 시기 대만에서는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이 전개되고 있을때 였다
이무렵 중국에서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북한에서는 '천리마운동(千里馬運動)'이 전개되고 있었다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은
도로와 하천을 정비하고 집을 재래식에서 현대식으로 바꾸고
직업의 귀천이 없음을 계몽하는 운동이었다
대만 방문 중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박정희대통령은 한국에 돌아와서
'신생활운동'을 모티브로 하여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나간다
결과는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이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을 거두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으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가며 근근이 살아가던 국가였으며
북한보다도 못 살고 경제후진국 150위권 이하였던 나라에서
이제는 원조를 해주는 경제대국 세계 11위로 도약하는 토대가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성공을 거둠에 따라
현재는 많은 세계 개발도상국들이 우리의 경제발전을 보고
'새마을운동'을 배우고자 연수를 받으러 오기도 하고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을 해외에 파견하기도 하는 국가가 되었다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공원의 모형이다
중정기념당의 건립 부지의 총면적 25만㎡ 크기로 조성된 공원으로
이름은 중정(中正)이고 호가 개석(介石)인
장개석(蔣介石,장제스)총통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중정기념당 공원 안에는
타이완 국립극장과 음악당이 있는데
사용료가 무료라고 한다 ???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내부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장개석 총통이 89세를 살았으므로 89개의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계단 위의 누각의 높이는 70m로 명(明)나라 건축양식으로 건축하였다고 하며
아치문으로 들어가면 위쪽에 사진의 근위병 교대식을 했던 장소로
장개석 총통의 동상이 있는데
동상의 높이는 6.3m이고, 무게는 25t 이라고 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진다
그래도 이 곳에서 인증샷하는 여행객들이 많다
점심식사 후 타이완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기 전
기념품 가게에 들어 간다
우리는 선물용으로 대만에서 유명한 과자 펑리수(鳳梨酥) 고급형 2개를
우리 돈으로 구입한다
펑리수는 파인애플 잼이 들어 있는 과자로서
일반형(14,000원)과 고급형(20,000원)이 있다
기념품 가게에서 나와
공항으로 향하며 지나는 타이베이 시내는 비가 계속해서 내린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여행이 끝나 갈 때 쏟아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타이베이(臺北) 시내를 벗어나 신베이(新北) 시내로 들어오자
비가 언제 내렸냐는 듯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신베이(新北) 시를 지나
타오위안(桃園) 시내로 진입한다
타오위안(桃園) 시에 있는
타오위안 국제공항(Taoyuan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하여
2박3일의 타이완(Taiwan) 여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