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예약해 놓았던 북유럽에 가려다
취소하고
발칸발도 여행으로 바꾸어 떠나는 여행으로
첫 번째 여행국은 루마니아(Romania)로 인천공항에서
카타르(Qatar) 도하(Doha) 국제공항를 경유하여
루마니아 오토페니(Otopeni)에 있는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까지
가기 위해 준비하고 나선다
인천공항에서 경유 공항인
카타르(Qatar) 도하(Doha) 국제공항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탑승한다
카타르 도하 공항까지는 4386mie로 항공거리는 7059Km이다
비행기에서 지루함과 졸림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비행기 창 밖으로
카타르 도하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지 10시간 40분 정도 소요되어
카타르 도하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카타르 국제공항은
예전에는 공항 활주로에서 트랩을 내려와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터미널를 지나 환승터미널로 이동해 왔는데
지금은 셔틀버스에서 내리니
도착터미널과 환승터미널이 같은 곳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카타르 도하 국제공항에서 환승하여
루마니아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으로 가기 위하여
1시간 정도 대기하다가 비행기에 오른다
카타르 도하(Doha) 국제공항에서
루마니아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까지
비행거리는 3092Km라고 한다
비행기는 이라크, 터키 영공, 흑해를 지나
루마니아 영공으로 진입하여 서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비행기 창 밖으로 루마니아 땅이 선명하게 보인다
냇가가 보이고 농촌 마을이 보인다
산은 보이지 않고
넓은 곡창지대와 평원의 숲이 눈에 들어 온다
비행기는 착륙 준비를 하며
날개의 슬롯트 플랩(Slotted flap)이 아래로 젖혀지고 있다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이 있는
오토페니(Otopeni) 지역의 모습이다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은
부쿠레슈티(Bucuresti)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공항으로
원래 오토페니 국제공항(Otopeni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불렸으나
2004년에 루마니아의 비행기 개척자이자
세계 최초로 제트기를 발명한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교수를
기념하기 위해서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의 제1 관문 공항이며
동유럽의 최대의 공항 중 하나라고 한다
카타르 도하(Doha) 국제공항에서 출발한지
약 5시간 정도 지나
루마니아 헨리 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하고 공항 밖으로 나온다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약 18시간 지나서 이다
오토테니 지역의 헨리 코안더 공항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Bucuresti) 시내의
어느 골목길 앞에 내려 준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한국 음식점이 나온다
루마니아 도착 후 먼저 점심 식사부터 하고 관광을 할 예정인데
루마니아까지 와서 첫 식사가 한국식이라
좀 그렇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마니아 수도인 부쿠레슈티(Bucuresti)는
영어식으로는 부카레스트(Bucharest)라고 한다고 한다
부쿠레슈티(Bucuresti) 인구는 180만여 명이 거주하는 곳으로
루마니아(Romania) 국가의 수도이다
정교회가 보여 찍었는데 찍고보니
앞에 걸린 플래카드 때문에
와인 & 음식 축제가 열리는 장소처럼 찍혀졌다
혁명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삼각형 조형물이 보이는데
높이 25m 탑으로
1989년 12월 혁명 당시에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라고 한다
혁명광장은 1989년 12월 이전에는 '공화국 광장'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989년 12월 당시 무려 25년간 독재 정치를 펼쳐 악명이 높았던
차우세스쿠는 이 광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시민들이 독재자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렬한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에 맞선 군인들은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 장면이 당시 연설을 중계하던 TV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었다고 한다
시민들의 시위는 격렬해져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가 되었고
시위대를 진압하던 군대마저 시민들의 편이 되어 갔다고 한다
위기에 몰린 차우세스쿠는 부인과 함께 헬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조종사의 배신으로 탈출 후 불과 3일 만에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을 당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혁명광장'으로 불리우고 있다고 한다
구식 건물 위로 신식 건물이 올라가 있는 건물이 보인다
그 동안 보지 못하였던 특이한 건물한 광경이었다
카롤 1세(CarolⅠ:1839~1914년) 기마상이다
1848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하에 있을 때에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에서
루마니아 민족주의가 발생하여 카르파티아인들을 몰아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1857년까지 번갈아 루마니아 공국을 지배하였는데
1858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연합공국을 세우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에 알렉산데르 쿠차(Alexander Cuza:1859-1866년 재위)가 선거에서 이겨
두 공국을 합한 연합공국의 대공이 되어
1862년까지 연합공국은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쿠차는 내부 반발을 억누르고 대공의 권한을 강화하다가
1866년 반대 세력에 납치되어 강제퇴위를 당했다고 한다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연합공국의 대공 자리는
독일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Hohenzollern-Sigmaringen) 왕가의
카를1세 대공(Karl I:1866-1914년 재위)이 넘겨 받았는데
그는 러시아와 투르크 간 전쟁(1877-78년)에 참전해주는 대가로
1878년 러시아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대신에 베사라비아는 러시아에 넘겨줘야 했다고 한다
1881년 카를 1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연합공국이 아닌 통합된 루마니아의
스스로 국왕 자리에 올라 1914년까지 루마니아를 통치한
초대 국왕이 되었다고 한다
혁명광장 길 건너 편에 있는
18세기에 세워진 '크레출레스쿠 정교회(Biserica Kretzulescu)'가 있다
대법관이었던 이오르다케 크레출레스쿠와 그의 아내가 세웠다고 해서
크레출레스쿠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루마니아 화가인 게로게 타타레스쿠가 그린
선과 악을 재판하는 신의 모습 등이 그려져 있어 유명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회는 혁명 때
구 공산당 본부와 연결된 지하 통로가 발견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당시 교회에서 혁명을 진압하는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며 제압하였다고 한다
혁명광장에서 차우세스쿠 궁전으로 향한다
부쿠레스티(Bucuresti) 시내를 지나치며 보이는 모습이
오래된 구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차우세스쿠 궁전의 모습이 보인다
루마니아의 25년간 초대 대통령으로 악명 높은 독재자로 군림했던
니콜라에 차우세스쿠(Nicolae Ceauşescu:1918~1989년)가 명령하여
세워지기 시작한 건물이다
차우세스쿠 궁전은
현재 의회건물로 사용하고 건물로서
지상 12층 지하4층, 1,100개의 방, 로비 길이 100m, 노동자 2만 명에
건축가 700여 명 동원, 100만㎡의 대리석, 3,500톤의 크리스털, 70만 톤의 쇠와 동,
90만㎥의 나무, 20만㎡의 양탄자 등으로 꾸몄다고 한다
차우세스쿠가 공산당 청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1984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20년 넘게 걸린 2005년에 완공되어
그는 이 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1989년 12월 25일 처형 당하였다고 한다
차우세스쿠 궁전은
공사 관계와 주변의 교통 정체로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차우세스쿠 궁전 주변만 돌다가
부카레스트(Bucharest)에서 시나이아(Sinaia)로 향한다
시나이아(Sinaia)는
부카레스트(Bucharest)에서 북쪽으로 약 125Km 정도 거리에 있는
조그만 시골 마을이다
부쿠레슈티(Bucuresti)는
루마니아 평야 중부 도나우 강 북부의 작은 지류를 흐르는
아르제슈 강(Arges River)과 딤보비차 강(Dimbovita River) 양안에 있는 도시로서
인구 180여만 명이 거주하는 루마니아(Romania)의 수도(首都)이다
부쿠레슈티(Bucuresti)는
고고학적 발굴 결과 선사시대 취락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었지만
부쿠레슈티(Bucuresti)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왈라키아 공국을 통치한 블라드 3세(VladⅢ:1431~1476년) 때인
1459년 문서의 기록에서 처음 발견된다고 한다
투르크인들은 왈라키아 공국을 항상 위협하여 왔는데
당시에 왈라키아 공국의 수도 였던 티르고비슈테(Targoviste)에서
남동쪽으로 69Km 떨어진
부쿠레슈티(Bucuresti)에 요새를 건설하면서라고 한다
16세기에 왈라키아(Walachia)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면서
부쿠레슈티(Bucuresti)는
왈라키아 공국의 주요 경제 중심지로서 급성장 하였고
1659년 수도(首都)가 되었다고 한다
인터컨티넨탈 부카레스트(InterContinental Bucharest) 호텔이다
5성급 호텔이라고 한다
부카레스트 개선문(Arcul de Triumf)이다
헤라스트라우 공원(Herastrau Park)가 있고
키셀레프(Kiseleff)의 5거리 로타리에 위치하고 있는 개선문이다
1922년 제1차 대전의 승전 기념으로 1930년 세워졌는데
1878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인 터키와의 전쟁에서
터키의 패배로 인하여 루마니아 독립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는
개선문이라고 한다
부카레스트 외곽에 있는 휴게소이다
시나이아(Sinaia)로 본격적으로 1시간 넘게 달려 가기 전에
들린 휴게소이다
부쿠레슈티 아우렐 블라이쿠 국제공항(Bucuresti Aurel Vlaicu int'l Airport)이다
오전에 오토페니(Otopeni)에 있는 헨리코안더(Henri Coanda) 국제공항에서
부쿠레슈티 시내로 들어갈 때 지나친 공항으로
부쿠레슈티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공항이다
아우렐 블라이쿠 국제공항 주변에 마트가 몰려 있는 지역이다
부카레스트에서 한참을 달려 오는 동안
산들은 보이지 않고 지평선만 보이는 평원 지역만 보인다
농촌지역의 도로를 달리며 보는
도로 변에 있는 농가 주택들 모습이다
양철로 된 지붕들이다
멀리 도시가 보인다
플로이에쉬티(Ploieşti)라는 도시이다
플로이에쉬티(Ploieşti) 시는
인구 252,00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으며
미하일 비테아줄(Mihai Viteazul )시대에 설립되어
19세기에는 석유채굴 및 가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크게 발전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철도의 요충지이고 석유 정유시설뿐만 아니라
석유·화학공업이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플로이에쉬티(Ploieşti)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이다
농촌 마을이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이전까지만 해도
농촌 인구는 루마니아 전체인구의 3/4에 해당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온 수 많은 전쟁이나 이민족들의 침입
과거에 존재하였던 농노제
공산주의에 의해 시행되었던 토지몰수 등은
루마니아 농촌을 파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하며
농민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당시의 많은 농촌마을들이 폐촌(sate selişti)이 되어갔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중에서 몇몇 마을들은
농민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발전하고 있다고 한다
루마니아(Romania)의 중부를 가르지르는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 부근에 다다르니
산맥으로 진입하기 전 휴게소가 보인다
버스는 그냥 지나쳐 간다
산악지대로 진입하며 보는
산골 마을 주택이다
우리가 탄 버스는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들어가고 있다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은 3개 부분으로 나뉜다고 한다
여기에 있는 산맥은 외(外)카르파티아 산맥으로
외(外)카르파티아 산맥은 오스트리아 빈 부근에서 시작하여
모라비아를 거친 다음 폴란드와 슬로바키아 국경을 따라가다가
우크라이나 서부를 지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북쪽에서 급격히 굽어지면서 끝난다고 한다
부쿠레슈티(Bucuresti)에서 출발한지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어 시나이아(Sinaia)에 도착한다
시나이아(Sinaia)는 인구 약 16,000여 명이 거주하는
작은 산악 마을로
시내에 프라호브 강이 흐르고 있으며
부체지 산(Bucegi Natural Park)의 도시 동쪽에
해발고도 767m와 860m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 밤을 보낼 '팔레스 시나이아 호텔(Hotel Palace Sinaia)'이다
시나이아(Sinaia)라는 이름은
17세기에 시나이아 수도원이 지어진 이후에 붙여졌다고 하며
시나이아 수도원은 성서에 나오는 시나이 산을 본따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한 시나이아(Sinaia)에는
카롤 1세(CarolⅠ) 국왕의 여름 궁전인 펠레슈 성이 있으며,
휴양지로도 유명하여 많이 알려진 곳이다
시나이아(Sinaia)는
루마니아 중앙에 뻗어 있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자연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에
‘카르파티아의 진주’라고 불리우기도 한다고 한다
'팔레스 시나이아 호텔(Hotel Palace Sinaia)'은
1911년 루마니아의 유명한 건축가 페트레 안토네스쿠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호텔에 짐을 나두고
'팔레스 시나이아 호텔(Hotel Palace Sinaia)' 주변을 둘러 나왔다
'팔레스 시나이아 호텔(Hotel Palace Sinaia)'은
디미트리 지카 공원(Dimitrie Ghica Park)을 배경으로
1911년11월26일에서 1912년7월15일까지 9개월만에 건설되어
당시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디미트리 지카 공원(Dimitrie Ghica Park)을 걷다보니
팔레스 시나이아 호텔(Hotel Palace Sinaia) 카지노(Casino)가 나온다
시나이아 카지노(Casino-Sinaia)는
팔레스 시나이아 호텔(Hotel Palace Sinaia)에서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시나이아 카지노(Casino-Sinaia)는
시나이아 호텔과 "리글러" 카지노를 전멸시킨 파괴적인 화재 이후
시민 병원위원회가 만들어져
고급 호텔, 스포츠 홀 및 새로운 카지노 건설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시나이아 협회를 설립하였다고 한다
시나이아 카지노는 페트레 안토네스쿠의 건축 프로젝트 이후 건설되었으며
철거된 치카 빌라를 대체하여 1913년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카지노의 첫 주주는
몬테 카를로 카지노의 주요 주주이기도 한 마르 케이 남작 이었다고 한다
카지노의 개막의 발표 브로셔는
"시나이아를 가장 유명한 서양 리조트 중 하나로 만듭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호텔 주변을 한바퀴 돌아
산책을 끝내고 호텔로 들어가다가 로비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팔레스 시나이아 호텔(Hotel Palace Sinaia)'이다
날이 밝아 브란(Bran)으로 향한다
브란은 시나이아에서 부체지 자연 공원 뒤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쪽으로 돌아서 약 5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시나이아 마을 뒤로 '부체지 자연 공원(Bucegi Natural Park)'인
바위 산들이 보인다
'부체지 자연 공원(Bucegi Natural Park)'의 최고봉인
바풀 카푸이 모라울루이(Varful Capui Morarului:2501m) 암봉이 보인다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의 북단으로 빠져 나오니
넓은 평원지역이 펼쳐진다
브라소브(Brasov)의 서남쪽 외곽 지역인
라스노브(Rasnov) 지역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토하누 노우(Tohanu Nou)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다
브란(Bran)은 시나이아(Sinaia)에서 약 50Km 정도 거리로서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 북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좌회전하여 라스노브(Rasnov)까지 가서
거기에서 남서쪽 좌회전하여 간다
또한 브라소브(Brasov)에서 브란(Bran)까지는 약 32Km 정도 거리로서
남서쪽으로 라스노브(Rasnov)를 지나서 간다
우리는 버스로 직접 브란(Bran)으로 직접가고 있지만
부쿠레슈티(Bucuresti)에서 기차로 1시간 반정도 타고 브라소브(Brasov)로 가서
브라소브(Brasov)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이동하여 브란으로 간다고 한다
브란(Bran)에 도착하였다
브란(Bran)은
브라소브(Brasov) 주에 속하는 작은 마을로
브란(Bran)에는
인구 약 5,500여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브란(Bran)이 역사에 나타난 시기는
13세기 초 튜턴 기사단이 디트리히이슈타인(Dietrichstein)라는
나무로된 요새를 건설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1242년 몽골에 의해서 요새가 폐허가 된 이후로는
1377년 헝가리의 지기스문트 왕이
현재의 브란성(Castelul Bran) 부근에 석재로 된 요새를 건설할 것을 명령 함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고 한다
브란성(Castelul Bran)이 보인다
브란을 찾는 관광객들은 브란성(Castelul Bran)을 보기 위해서이다
브란성(Castelul Bran)이 유명해진 이유는
영국인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가 쓴 괴기소설 '드라큘라(Dracula)'에서
드라큘라가 사는 성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매표소를 통과하여
브란성으로 오르는 언덕길을 오른다
브란성으로 오르다 보는 성 주변의 마을이다
브란성(Castelul Bran)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브란성(Castelul Bran)은
드라귤라(Dracula)가 사는 성으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면
으시시한 기운이 넘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란성(Castelul Bran)은
브라소브(Brasov)로 이어지는 무역의 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1377년 브라소브 상인들에 의해 세워진 성이라고 한다
이 성은 세관 역할 및 요새 역할을 하던 성으로
여러번의 증축이 이루어졌는데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지어졌다고 한다
1920년에 브라소브 의회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왕비에게 헌정된 후
성은 새롭게 개조하여 왕가의 여름 궁전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브란성(Castelul Bran) 안으로 들어오니
으시시할 것만 같았던 느낌이
성 내부가 평온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어
그러한 느낌은 사라져 있었다
1920년 브란성을 헌정받은 마리 왕비(Maria de Edinburg:1875~1938년)는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에든버러 공작 알프레드의 딸로서
루마니아 왕국 페르디난트 1세(Ferdinand I:재위1914~1927년)의 왕비였다
1938년 마리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일레아나(Ileana:1909~1991년) 공주가 브란성을 물려 받았으나
1948년 공산 정부가 들어서며 왕족은 국외로 추방되고
브란성은 국가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1989년 12월 루마니아 민주화 이후에
브란성은 국유화된 관광지로 개방되었다고 하며
그 후 사유재산 반환조치가 시행됨에 따라
2006년 5월 미국에 살고 있는 일레아나 공주의 아들인
도미니크 폰 합스부르크에게 반환되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방하여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브란성(Castelul Bran) 창문을 통해 밖을 쳐다보니 한적한 마을이 보인다
보이는 도로는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으로 들어가는 도로이며
계속해서 가면 산맥을 넘어 남쪽의
토르고비슈테(Targoviste) 또는 피테슈티(Pitesti)로 가는 도로이다
블라드 3세(VladⅢ:1431~1476년)의 초상이다
영국인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1847~1912년)의 소설에서
드라큘라(Draculea)의 주인공으로 묘사된 인물이다
블라드 3세(VladⅢ)는
드라큘라(Draculea)라는 별명을 가진 블라드 체페슈(Vlad Tepes:VladⅢ)는
루마니아 영웅으로
터키의 지배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워서
국민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훌륭한 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재위 기간에 적과 범죄자들에게
기괴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처형한 왕이기도 하다고 한다
블라드 3세(VladⅢ)의 처형 방법을 설명하여 놓은 것이다
쇠꼬챙이를 이용한 잔인한 처형 방법을 적의 포로들에게 사용하였는데
블라드 3세(VladⅢ)가 왕자였을때
터키군에 의해 볼모로 잡혀가 살았었다고 한다
그때 터키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
터키군 처형에 더 지독한 처형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블라드 3세(VladⅢ)는
블라드 체페슈(Vlad Tepes)라고 하는데
루마니아 첫 독립 국가인 왈라키아 공국(Duchy of Walachia)의
블라드 2세의 둘째 아들로 형과 아버지가 죽은 후 왈라키아 공작이 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과 싸우는 동방 정교회 최후의 보루였으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메드 2세(MehmedⅡ)에게 패하여
1476년 전쟁터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블라드 3세(VladⅢ)는 블라드 체페슈(Vlad Tepes)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체페슈(Tepes)는 '꼬챙이'라는 뜻으로 성이 아니라 별명이라고 하며
당대에는 '드라큘라(Draculea)라고 불렀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드라큘라'라는 별명을 매우 좋아하여
'블라드 드라큘라(Vlad Draculea)'라는 서명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블라드 3세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다스리고 적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꼬챙이에 사람을 꿰는 등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드라큘라가 흡혈귀의 대명사로 오인되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
비밀의 창이다
밖의 동정을 살펴보는 감시하는 창으로서
나무를 돌려서 막고 열어 밖을 쳐다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사람은 통과할 수 없는 구조였다
블라드 3세(VladⅢ)는
브란성(Castelul Bran)에 기거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며
방문하여 잠시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
그가 성에 살았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그런데 '드라큘라 성(Castelul Draculea)'으로 알려진 것은 아이러니(Irony)하다
영국인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1847~1912년)가
'드라큘라(Dracula)'라는 소설의 배경을 '블라드 3세'가 살았던 성으로 하지 않고
관련이 없는 브란성(Castelul Bran)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브램 스토커(Bram Stoker)가
여기 브란성(Castelul Bran)을 '드라큘라(Draculea)' 소설의 배경으로 함으로서
진짜 '드라큘라 성(Castelul Dracula)'으로 믿고
년중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 오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브란성(Castelul Bran) 가운데 광장에 우물이 보인다
동전 등을 던지고 소원을 빌기도 한다고 한다
작은 대포도 설치되어 포신이 밖을 향하고 있다
장식용으로 보이는 언제적 대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60mm 박격포 사이즈 크기의 무기였다
의자가 살벌하다의자에 앉히고 손과 발,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 장치가 있다
브란성(Castelul Bran)이
'드라큘라 성(Castelul Draculea)'으로 유명해 지면서 4층 한 방을
드라큘라와 작가인 브램 스토커 이야기로 게시하여 놓았다
우물이 있는
브란성 내부 가운데에 있는 광장으로 내려온다
브란성(Castelul Bran)은
5층 건물로서 지층과 1~4층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예전 1920년에 마리 왕비에게 헌정되었을때 이후 성의 꾸며짐은
1층은 홀과 마리 왕비의 침실 등이 있고
2층에는 페르디난드트 왕의 침실, 식당, 회랑 등이 있으며
3층은 음악실과 도서실 등과
4층 니콜라스 왕자의 침실과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지층에는 채플, 안뜰, 샘, 경비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브란성(Castelul Bran)을 한바퀴 돌아보고
Ground Floor를 통해 밖으로 나온다
밖으로 나와서 생각하니 한가지 아쉬운 점이 남았다
브란성(Castelul Bran)을 사진으로 보면
숲으로 둘러쌓인 매우 아름다운 성으로 보이는데
브란성 전경을 배경으로 해서 인증샷 할 곳을 찾아도 보이질 않아
너무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뒤돌아보며
브란성이 잘 보이는 곳이 있을지를 찾으며
매표소가 있는 출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브란성 전경을 찍을 수 있는 곳을 찾는데
건물에 가리고
나무에 가리고
성의 상단부만 겨우 보일뿐 적당한 곳이 안보였다
매표소 밖으로 나오니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기념품 가게를 기읏거리며
브란성 배경샷을 못한 아쉬운 마음을 안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러 주차장으로 가면서도
브란성의 외관을 제대로 찍지 못한 아쉬움에 자꾸 뒤돌아 보며
성 위쪽만이라도 보여
그나마 멀리서 찍은 사진이다
브란(Bran) 마을을 빠져 나오는데
공동 묘지가 눈에 들어 온다
블라드 3세(BladⅢ)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면
1431년11월10일 트란실바니아에서 루마니아의 원류인
왈라키아 공국(Duchy of Walachia)의 공국의 영주 블라디 2세(BladⅡ)와
몰다비아 공녀 크네지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해 아버지 블라드 2세는 신성로마 제국 용의 기사단의 단원이 되었는데
이 때문에 '드라쿨(Dracule:용 또는 악마)'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아들 블라드 3세는 드라쿨에 a를 더 붙여 '용의 아들'이라는 뜻의
'드라큘라(Draculea)'라고 불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1436년 아버지 블라드 2세는 왕권을 찬탈해간 이복동생 알렉산드루 알루아를
공격하여 왕권을 되찾고 헝가리 왕국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과 싸운 바르나 전투에서 대패한 후 강화조약을 맺게되었다
강화조약을 맺으러 나간 장소에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체포되어
아들 형제 블라드 3세와 라두를 인질로 남겨두고 아버지 '블라드 2세'만 석방되고
이후 블라디 3세 형제는
오스만 제국 에그리고즈에서 16년간 인질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블라드 2세는 바르나 전투의 책임을 왈라키아 출신의 헝가리 귀족
야노슈 후냐디에게 돌렸는데 이 일이 빌미가 되어
1447년 아버지 블라드 2세와 형 미르체아가
후냐디 지지자들에게 생매장을 당해 죽었다고 한다
이후 야노슈 후냐디는 블라디 3세의 육촌인 다네스티 가문의
블라디슬라프 2세(VladislavⅡ)를 지지하여 그를 왈라키아 공작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블라디 3세는 왈라키아의 지배권을 노린 오스만 제국의 도움으로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왕권을 빼앗아 왈라키아 공작이 되었으나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야노슈 후냐디의 헝가리군에 의해
패배하여 몰라비아 공국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1451년 블라디슬라프 2세는 야노슈 후냐디를 배신하고 친 오스만 정책을 펴고 있어
이에 격분한 야노슈 후냐디는 블라드 3세를 왈라키아 공으로 추대하였다
1456년 야노슈 후냐디가 사망하면서 블라디 3세는 완전한 권력을 잡았다고 한다
1459년 블라드 3세는 오스만 제국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그들의 공납요구를 거부하고
공납을 요구하러 온 사절단들을 꼬챙이에 끼워 죽이는 것으로 시작된
여러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
1462년 그러나 친 오스만 노선을 추구하는 막내동생 라두가 오스만 제국과 손잡고
블라드 3세를 추방시켰는데 그는 트란실바니아로 무사히 도망하였으나
야노슈 후냐디의 아들 마차시 왕에 의해 성에 유패 당하여
1473년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로마 가톨릭 개종하고
마차시 왕의 여동생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1476년 블라드 3세는 정적 바사라브를 물리치고 3번째 권력을 차지하였으나
이내 오스만 제국의 침공으로 부크레슈티 근처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고 한다
블라드 3세(VladⅢ)는
드라큘라(Draculea) 소설에 영감을 제공한 인물로서
흡혈귀, 잔혹한 꼬챙이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루마니아인에게 국민적인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시절에
잘못 전해진 드라큘라(Draculea) 소설에 항의하여
각종 관련 작품들의 출판과 상영이 금지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에 속하는
'부체지 자연 공원(Bucegi Natural Park)'의
'바풀 카푸이 모라울루이(Varful Capui Morarului:2501m) 암봉' 위에구름이 걸쳐 있는 모습이 보인다
브란(Bran)에서 브란성(Castelul Bran)을 관광하고
다시 시나이아(Sinaia)로 돌아왔다
시나이아(Sinaia)에 도착하자
언덕 길로 오른다
버스에서 내려
푸르니카(Furnica)라는 현지식 점심식당으로 간다
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식당 주인은 옆에 앉아 클래식 기타 연주를 해준다
은은하게 연주해 주는데
아는 곡이라는 '로망스(Romance)'라는 곡뿐이었다
식당 주인은 젊은 시절 클래식 연주가로 활동하였다고 이야기 한다
식당을 나와 식당 입구에서 서성대며
찍은 식당 배경 사진이다
숲속에 아담하고 분위기 있는 식당이었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을 향해 나무 숲길 따라 내려 간다
숲길을 내려가다 보니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숲들과 잘 조화되어 있어
더욱 운치있게 보인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으로 가는 길은
숲속의 아름답고 분위기 있게 보이는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으로 들어가는 입구(매표소)이다
입구를 통과하여
펠레슈성(Castelul Peles)으로 가는 길이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은
카롤 1세(CarolⅠ:1839년~1914년)가 여름 궁전으로 지은 곳으로
1875년에 공사가 시작하여 8년이 지난
1883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건축은 독일 건축가 벨헬름 도데레(Wilhelm Doderer)와
체코의 건축가 카렐 리만이 맡아서 하였다고 하며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의 각 양식이 혼합된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하였다고 한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성 안뜰은 장미 정원을 비롯해 분수대가 있는데
정원에 펠레슈 시냇물이 흘르기에
펠레슈 성(Castelul Peles)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펠레슈성(Castelul Peles)은
자체 발전소를 갖추고 있어
유럽 최초로 전기에 의해 조명을 켜고
중앙난방을 처음 사용한 성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와 숲으로 둘러싸인모습도 장관을 이루며
주변경관과 모든 것이 잘 조화가 이루어져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느껴진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손꼽히는 곳이라 그런지
성에서 내려 오면서도
계속 뒤돌아 보면서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한다
펠레슈성(Castelul Peles)에서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으로 내려 가는 길이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이 보인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 주변에 있는 마을 주택이다
주택 구조가
유럽풍과 아랍풍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고
유럽풍과 인도풍이 혼재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시나이아(Sinaia) 도시 이름이
이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수도원은 이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고 한다
왈라키아 공국(Walachia Principality)의 귀족이었던 칸타구지노(Mihai Cantacuzino)가
1690년 이곳 부체지 산(Mt. Bucegi)을 방문하였다가 여름 별장을 건축하며
1695년 세웠다는 현재 시나이아 수도원 안쪽에 있는 작은 성당이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의 이름은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세가 기도 중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시내산(Mt. Sinaia) 지명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작은 성당은 구교회 건축물로서
성당 안쪽으로 들어서니
프레스코화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작은 성당의 지성소이다
지성소는 신성한 곳으로
안쪽으로는
선택된자 외에는 일반인은 들어갈 수가 없는
신성한 곳이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의 대성당으로
1864년 카롤 1세(CarolⅠ)가 세웠다고 한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 대성당의
내부 전경이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의
관리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보인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을 나오기 전에 인증샷을 한다
루마니아에서 마지막 인증샷이다
시나이아 수도원(Sinaia Monastery)을 마지막으로
루마니아 관광을 마치고
이제 불가리아(Bulgaria)로 가기 위하여
루마니아 남쪽의 국경을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카르파티아 산맥(Carpathian Mountains)을 벗어 나기 시작하니
서서히 광활하고 끝없는 평원지역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불가리아(Bulgaria)로 넘어 가는 길은
시나이아(Sinaia)에서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Bucuresti)를 거쳐
도나우강변에 있는 루마니아의 국경도시 지우르지우(Giurgiu)에서
도나우강(Donau River)을 건너
불가리아 국경도시 루세(Ruse) 넘어 갈 예정이다
시나이아(Sinaia)에서 부쿠레슈티(Bucuresti)까지 거리는
125Km 정도되는데
끝 없는 평원지대가 펼쳐진다
루마니아는 산유국이라고
평원지역에 유전이 종종 눈에 보일 것이니 찾아 보라고 한다
절구방아 펌프 같은 작은 유전은 보였으나
순식간에 지나치기에 사진으로 담지는 못하였다
루마니아(Romania)의 농가 주택 모습이다
카르파티아 산맥에 있는 주택 모습은
알프스풍을 닮은 모습이었고
평원지대에 있는 주택 모습은 지붕이 낮으막하니
철판으로 된 지붕들이 많이 보였다
시나이아(Sinaia)에서 남쪽으로 약 1시간 반 가까이 약 125Km 달려와
부쿠레스티(Bucuresti)를 지나치고 있다
루마니아(Romania) 국토 면적은 238,391㎢로
우리 대한민국 남북한을 합친 면적 223,348㎢ 보다
약간 큰 국토 면적을 가지고 있다
유럽 남동부 발칸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국가로서
동쪽은 흑해, 동북쪽은 몰도바, 북쪽은 우크라이나, 서쪽은 헝가리,
남서쪽은 세르비아, 남쪽은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국가이다
루마니아(Romania) 인구는 1940만여 명으로
민족은 루마니아인 90%, 헝가리인 7%, 로마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종교는 동방정교 87%, 개신교 8%, 로마가톨릭를 믿고 있다고 한다
루마니아(Romania) 국토 길이는
남북으로 약 480Km이며 동서로는 약 680Km라고 한다
국토는 1/3은 산악 지형이고 1/3은 산림 지형이며
나머지는 언덕과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루마니아(Romania)의 기후는 온화하고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한다
루마니아(Romania) 천혜의 자연자원을 풍부히 보유하고 있는 국가라고 한다
농업에 알맞은 비옥한 토양, 가축 사육에 알맞은 목초지,
다양한 목재, 원유, 금과 은을 포함한 광물자원, 수력 발전이 가능한 수 많은 강,
항구와 관광 휴양지가 늘어서 있는 흑해 해안선 등
많은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라고 한다
국가 GDP는 23억9440만 달러로 세계 47위
1인당 GDP는 10,434달러로 세계 66위 규모이다
<대한민국 국가GDP: 162억0489만 달러(세계 12위), 1인당GDP: 32,774 달러(세계27위) 2019년>
루마니아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문화적 특징이
로마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것은 루마니아(Romania)인들의 스스로가 고대 로마(Roma)인과
다키아(Dacia)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AD 105년 고대 로마인은 트라야누스(Trajanus) 황제 때
남부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를 정복하였고
당시 다키아(Dacia)인들은 도나우 평원의 북부 산악지대와
트란실바니아 분지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271년 아우렐리아누스(Aurelianus) 황제 통치기에 로마인들이 철수할 무렵
로마(Roma)의 정착민들과 다키아(Dacia)인들 사이에 결혼하는
이민족간의 혼혈이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새로운 민족이 생성되었다고 한다
루마니아 언어의 라틴적 뿌리와
대부분 루마니아인들이 믿는 동방정교회가 이러한 두 문화의
혼합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그러나 루마니아(Romania) 역사는
5세기 훈족의 도래로부터
14세기 왈라키아 공국과 몰다비아 공국이 등장할 때까지
역사 문헌에서 사실상 사라졌다고 한다
이 시기 동안 루마니아인들은 민족의 대이동에 의해 침략 당고
도나우 평원을 건너 온 오스만 제국에 침입을 끊임없이 당하면서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쫒겨났으며
카르파티마 산맥으로 들어가 명맥을 찾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국경검문소가 보인다
부쿠레슈티(Bucuresti)에서 약 75Km를 약 1시간 가까이 달려와
불가리아(Bulgaria) 국가로 넘어가는 도나우 강변의
루마니아(Romania)의 국경도시 지우르지우(Giurgiu)의 검문소에 도착한다
지우르지우(Giurgiu) 도시에는 7만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루마니아 지우르지우(Giurgiu)에서 불가리아 루세(Ruse)로 건너가는
도나우강(Donau River)의 다리는
우정의 다리(Giurgiu-Ruse Friendship Bridge)로
1954년 개통되어 2013년 6월 14일까지 도나우강에서 공존하는
루마니아 불가리아와의 유일한 다리였다고 한다
루마니아에서 불가리아로 넘어가는 도나우강의
지우르지우-루세 우정의 다리(Giurgiu-Ruse Friendship Bridge)를 건너는데
해는 서쪽 하늘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