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도발한다고 난리치는 어지러운 시국에 우리는 안보테마 관광을 가기로 하고
아침 6시에 출발하여
철원군 문화해설사와 미팅하기로 한것이
철원군 고석정 주차장에서 9시였다.
고석정에 도착하여 철의삼각전적지 관광사업소에 들려
군사보호지역 방문신고를 한 후
가이드를 기다리는 시간에
전시관에 들려
관심이 있는 품목에 셔터를 누른다.
북한 돈 종류를 세어 보고 있는데
출발해야 하니 빨리 버스로 가잰다.
버스를 출발하여 첫 일정은 제2땅굴 인데
가는 도중 가이드는 철원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
철원은 아주 오랜 몇만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흘러 분지 평원을 이룬 곳으로
지금도 화산 폭발 용암의 흔적을 많이 볼수 있으며
철원을 흐르는 한탄강은 용암의 약한 부분을 파내며 흘러 골짜기가 깊다 한다.
그리고 행정구역은 강원도에 속하지만
강원도와 달리 산악지형이 아닌 평야지대이면서
경기도 행정권에 가까우며 한반도 지형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1950년 6.25전쟁 전에는 북한군이 장악하고 있던 38선 이북 땅으로
이곳에서 주둔하던 북한군 탱크가
제일 먼저 남침하여 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로 들어 갔다고 한다.
제2땅굴은 1973년11월20일 새벽 경계 근무중인 초병이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청취한 것이 계기가 되어 끈질긴 굴착작업 끝에
1975년3월24일 발견되었다
총 연장 길이가 3.5Km에 달하며
지하 50~160m의 견고한 화강암층을 아치형으로 뚫어
남쪽 군사분계선을 지나 1.1Km 지점까지 파내려 왔으며
유사시 시간당 16,000여명의 북한의 무장병력이
우리 군대 후방으로 기습 남침하여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하려고 하였던 북한의 도발 현장이었다.
이 땅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면..... 섬뜩한 생각이 든다.
이 땅굴을 발견하고 내부를 수색하던 우리 군인 8명이
북한군이 도발현장에서 도망가며 설치해 놓은 부비트랩의 폭파에 의해
안타까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산화한 현장이기도 하다.
제2땅굴을 보고 나오니 모노레일을 우선적으로 타야 되니
평화전망대로 빨리 이동하자고 보챈다.
늦으면 걸어 올라가던지 한참 기다려야 한다나..
우리가 모노레일 타고 평화 전망대로 오르는데
우리 뒤의 차량들이 속속 도착한다.
이 저수지 물은 청정수로서 사람들이 들어 갈 수 없어 물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농사철에 철원 윗 쪽의 평야지대에 물을 지원해 주는 저수지라 한다.
철원의 토양은 철분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
이곳의 청정수와 토양으로 농사 지어서
철원의 '오대쌀'이 비싸고 맛이 있다고 한다
이 전망대에서 보니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비무장지대가 한눈에 들어 온다.
남쪽은 논으로 되어 있는 넓은 평야지대인데
북쪽 평야지대는 좁아보이며 쌀농사를 짓지 않아 보였다.
이유인즉슨 논 농사가 않되는 땅으로 옥수수 농사를 짓는다 한다.
6.25전쟁이 끝나가던 무렵 남과 북은
여기의 철원 평야를 두고 밀렸다 밀고 올라가는
엄청난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서
철원 평야를 우리 군에게 빼앗긴 김일성은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보이는 저 북쪽 고지에서 3일을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후삼국시절 궁예의 태봉국 왕궁이 자리잡았던 궁터가 비무장지대 안으로 보인다.
평화전망대에서 관람을 마치고
모노레일을 타고 다시 내려오니 상점으로 인도한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꼭 면세점에 들리 듯이 이 또한 마찬가지 라는 생각이 든다.
상점에서 나와 월정리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기전 전시되어 있는 탱크 앞에서 포즈를 취해 본다.
월정리역 앞에 있는 두루미관이다.
이 두루미관은 원래는 현 평화전망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이곳이 전망대 였다고 하며
바로 비무장지대 에 근접해 있었다.
이 철원 평야지역은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에 있으며
기계농으로 추수 후 많은 곡식이 흘려지므로
많은 종류의 철새들이 모여 든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 철새들이 군무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세계에서 몇마리 안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종류의 두루미들을 볼 수 있다 한다.
오랜 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를 않아 야생 동물들도
이 곳에 많은 종류들이 서식하고 있음을 전시하고 있다.
두루미관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월정리 기차역으로 이동한다.
월정리 역사 옆에 있는 동상으로서
월정리 마을의 유래가 되는 효녀상이다.
이 글을 읽고 보니 심청이와 비교 되는데
심청이는 죽었다가 살았는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지금은 녹슬은 기차만 있다.
이 길을 통과해야 원산,함흥, 청진을 거처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모스크바 유럽까지 갈 수 있는데...
남과 북으로 갈리어 기찻길로는 여기가 끝이다.
여기서 북으로 몇 Km만 연결되면 유럽까지도 기차로 갈 수 있는데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언제 쯤 통일이 되어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가 아닌
기차를 타고 내리는 역으로....
월정리 역사를 나와 버스로 백마고지 전적지로 이동을 한다.
백마고지는 395m의 야산으로서 6.25전쟁 전에는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던 무명고지였는데
전쟁시 철의 삼각지 좌견부를 지켜내는 중요 지형지물로 유명해진 곳이다.
백마고지 명칭의 유래는 전쟁 중 포격으로 수목이 다 없어지고 난 후
형상이 누워 있는 백마처럼 보여 백마고지라고 했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중 가장 치열하게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던
1952년 10월 6일 부터 이 곳에서 우리국군 제9보병사단과 중공군 제38군 3개 사단이
10일간 12번의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우리 제9보병사단이 승리한 곳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만여명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우리 군은 3,400여명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는 세계 전투사 중 유래가 없을 만큼
처절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을
10일간 주야로 반복한 끝에 우리 군이 차지한 곳이다.
사진 뒤로 보이는 탑은 22.5m로 세워졌는데
이유는 2+2+5로 당시 백마고지에서 승리한 9사단을 의미한다고 한다.
백마고지는 지금도 분단된 휴전 상태에 있어
적을 방어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강력한 교두보이며
철의삼각지를 잇는 한축의 중요한 고지로서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철원의 인구는 일제 해방전 서울 인구에 못지 않은 20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방 후 북한이 이 곳 철원 일대를 관할하기 위해
이 곳에 노동당사를 러시아 풍으로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튼튼하게 세운 공법의 건물로서 등록문화제 22호로 지정 되었는데
이 건물 뒤가 수 많은 양민 학살이 자행된 장소라 하니 씁씁한 생각이 든다.
늦은 점심을 마치고
전적지 마지막 방문지는 승리 전망대이다
이 곳은 내가 군 생활 시절 행군을 많이 하던 지역으로서
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낯설지가 않았다.
아침에 가이드와 처음 만났던 장소로 다시 돌아와
한탄리버 스파호텔로 들어가
뒤쪽 로비에서 한탄강을 바라다 본다.
한탄리버스파호텔을 나와 고석정 방향으로 걷다 보면 임꺽정 동상이 나온다.
이 고석정에서 임꺽정(임거정)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임거정은 고속정 건너편에 석성을 쌓고
조공을 받치러 가는 물건들을 탈취하여 서민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조정에서 임거정을 잡으로 오면
임거정은 꺽지라는 물고기로 변하여 한탄강 물속으로 숨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임거정을 임꺽정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에 위치한 철원 팔경의 하나로서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은 기암절벽을 이루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이 곳에서 한탄강을 따라 배를 타고 유람할 수 있으며
자그마한 배는 10여명의 사람을 태우고
강 주변의 신기한 바위들을 구경하며 유람할 수 있다고 한다.
고석정에 정자는 신라시대 진평왕, 후삼국 시대 궁예, 고려시대 충숙왕이 놀던
유서 깊은 곳으로 알려 있으며
이 정자의 건너편은 조선 명종 때 임꺽정이 석성을 쌓고 은거하며
의적활동을 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고석정은 한국전쟁 당시에 불타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정자는 1971년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공군 출신으로서
전투기에 대하여 설명하는 중....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데
호텔보다 몇 배 비싸다고 하는데...???
보기엔 좀 썰렁한 면도 있지만
강 전체가 폭포로 연결되어 있어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라고 불리운다고 한다.
넓이는 80m, 높이는 3m라고 하는데
보기에는 낮게 보인다.